전문성 없는 조직의 비극
전통적인 한국 조직 문화는 수동적인 인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직원을 관리가 필요한 수동적인 존재로 본다. 따라서 직원의 업무는 상사의 지시로 시작해 상사에 대한 보고로 끝난다. 지시받은 일을 오랫동안 수행하면서 경험과 연륜이 쌓이면 직급이 올라가고, 업무 책임 역시 그에 비례하여 커진다. 조직 전체로 보면 의사 결정 권한이 직급에 따라 배분되고, 명령 체계 최상위에 있는 사람이 결정권을 거의 독점하게 된다.
관리자들은 업무를 지시할 뿐 위임(empowerment)하지 않기 때문에 부하의 실수를 줄이기 위한 과정 관리에 많은 노력을 쏟게 된다. 이로 인해 부하 직원의 업무를 관리하는 것 외에 관리자 자신의 고유 업무를 개발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은 네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관리자 역할에 걸맞은 전문성이 키워지지 않고, 부서 전체의 업무 부담이 늘어나며, 의사 결정이 늦어지고, 실무자의 동기가 저하된다.
실무자의 동기가 저하되는 주된 이유는 ‘내 일’이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조직의 업무가 개인이 아닌 부서에 주어지고, 부서에서 만들어낸 결과물은 부서장의 공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다. 이는 한국 대기업의 팀장 KPI(Key Performance Indicator·핵심 성과 지표)가 대부분 부하 직원들 성과의 합으로 구성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실무를 누가 했든 관리자가 ‘챙겨서’ 결과를 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업들은 책임 의식이 강한 인재를 뽑으려 하지만, 실무자들이 책임 의식을 발휘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업무에 대한 책임이 없는 상태에서 직원의 성과는 부서장 평가로 판가름 난다. 직원은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상사 의견에 반대하지 못해 개선과 혁신의 기회를 놓치기도 한다. 관리자가 싫어하는 직원에게 불이익을 줘 실무자의 경력이 망가지는 경우도 생긴다. 전문성도 없는 일을 상사가 시키니까 마지못해 떠맡는 경우도 있다.
조직의 방향을 결정하고 자원을 할당하는 권한이 철저하게 직급에 비례하기 때문에 직원들은 관리직이 되고 싶어 한다. 어려운 프로젝트를 많이 하고 전문성을 높이기보다는 실패 확률이 낮은 업무를 깔끔하게 수행해서 ‘관리 능력’으로 인정받으려 하는 것이다. 승진에 가까운 고참 직원들일수록 그렇다. 너도나도 관리직에 목을 매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조직에 오래 남지 않는다. 그래서 종종 중요한 프로젝트에 전문가가 배정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결국 용역을 맡기게 되고, 전문성이 조직 안에 쌓이지 못한다.
조직 내 관계는 상사와 부하의 상하 관계 위주로 형성된다. 실무자 수준에서 직장 생활의 많은 부분은 상사와의 관계에 달려 있다. 업무 부여와 평가, 연봉 인상, 승진 대상 추천 등 대부분을 상사가 결정한다. 실무자들은 업무와 관련한 문제가 아니라 상사와의 관계로 인해 퇴사하는 경우가 많다. 상명하복, 서열주의, 눈치 보기, 조직 침묵, 낮은 생산성, 몰입도 저하, 갑질과 전횡 등의 문제가 없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 문화와 관계 문화
조직 문화는 일 문화와 관계 문화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일 문화 측면은 2010년 전후 스마트 워크 붐이 일어 시차 출퇴근, 유연 근무제, 자율 좌석제, 복장 자율화 등 각종 제도가 도입되면서 상당히 달라진 것이 사실이다. 또한 주 52시간 근무를 규정한 노동법 개정으로 많은 변화가 이어질 전망이다. 그러나 일 문화가 달라진다고 저절로 관계 문화가 좋아지지는 않는다.
밀레니얼 이후 세대는 수직적인 문화를 불편해한다. 최근 젊은 직장인 사이에서는 ‘퇴사’가 인기 키워드가 되었다. 온라인 서점에서 퇴사로 검색하면 수백 권의 책이 줄줄이 추천되고, 각종 ‘퇴사 학교’가 성업 중이다. 퇴사 학교가 역설적으로 진로, 창업, 직무 교육 기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신청자는 주로 근무하던 조직에서 비전을 발견하지 못했거나, 고압적인 상사에게 시달렸거나, 근엄하고 꽉 막힌 기업 문화를 박차고 나온 청년들이다.
밀레니얼과 Z세대 청년들을 붙잡기 위해 보수적인 대기업들도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일례로 우리나라 제조업을 대표하는 기업이라 할 수 있는 현대·기아차가 ‘수평적 조직 문화’를 선언하고 2019년 9월부터 직급 체계를 통합하고, 절대 평가를 도입하며, 승진 연차를 폐지하는 등 혁신을 시도하고 있다.
청년들이 수평 문화를 선호하는 것은 수직 문화에 대한 반발 때문인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 수직적 조직 문화를 폐기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꼰대’ 담론이 확산하면서 정점에 이르렀다. 꼰대는 꽉 막히고, 억압적이며, 권위적인 관리자와 선배를 지칭하는 말이다. 지금 꼰대로 손가락질 받는 1970년대생 관리자들도 약 15년 전에는 답답한 조직 문화 속에서 신음하던 청년이었다. 이들은 선배들이 물려준 조직 문화를 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의식적으로 체화하면서 수직적인 문화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렇게 수직적인 문화는 조직 안에서 세대 간 소통을 막고 오해와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그러나 수직적인 문화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속성과 문제점 때문이다. 수직적인 문화는 권위주의적이다. 권위는 조직 안의 자원을 배분하고 의사 결정을 하는 힘이다. 수직적인 문화에서는 이런 힘이 소수의 손에 집중된다. 사업에 투자하고, 사람을 뽑고, 조직을 개편하고, 보상을 결정하는 등 중요한 사안이 몇몇 사람에 의해 결정된다. 또한, 일부 구성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런 힘을 쟁취하려고 한다. 막강한 힘을 손에 쥐면 조직의 원칙과 규정 위에 군림하는 경우도 생기고, 사내 정치와 같이 조직에 해를 입히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권력에만 눈이 먼 관리자들이 조직 상층부를 채우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민간 기업에서는 고위 경영진이 권한을 남용해도 법을 어기지 않는 한 제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수직적인 조직은 권한을 위로 집중시키는데, 이처럼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의사 결정이나 처신을 잘못하면 회사나 부서 전체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권한이 분산된 조직에서는 구성원 간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 문제가 커지기 전에 해결하거나 대안을 찾을 수 있지만, 수직적 조직에서는 리더의 실수와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불손한 일로 비쳐 직언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 수준의 역량을 갖춘 사람들이 리더라면 수직적 문화가 훨씬 효과적일 수 있겠지만, 관료적인 위계 조직에서 그런 천재적인 경영자가 육성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대표 이사, 사업 부장, 팀장이 업무적으로도 탁월하고 인격도 훌륭하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상당히 큰 문제가 된다. 퇴임 후에 재임 시 채용 비리 등으로 검찰에 기소된 대기업 경영자 이름이 언론에 심심치 않게 오르내리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조직 문화와 성과는 리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소수 개인의 능력, 성향, 기질에 의해 조직 문화가 좌우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수직적인 관계에서는 직급이 곧 인격이고 신분이다. 일부 상사들은 자신보다 직급이 낮은 사람에게 고함을 지르고, 괴롭히고, 무시하고, 비아냥거리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권력에 취해 부하를 괴롭히고 모욕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사이코패스(psychopath)와 비슷하다는 연구가 있다. 사이코패스들은 전두엽 내 감정과 공감 능력을 관장하는 부위의 기능이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는데, 권력에 취해 오래 생활한 사람들도 비슷한 상태라는 것이다.
갑질에는 전염성이 있다. 직접 당하지 않아도 목격하거나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적 스트레스를 경험할 수 있다. 갑질의 피해자가 나중에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직장 내 무례함(workplace incivility)’을 20여 년 연구한 미국 조지타운대의 크리스틴 포래스(Christine Porath)는 무례한 언행에 시달린 직원의 80퍼센트는 걱정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48퍼센트는 고의로 업무를 대충하며, 66퍼센트는 실적이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최근에는 직장 내 갑질에 대한 사회적 문제의식하에 ‘괴롭힘 방지법(근로기준법 제76조)’이 시행되고 있다. 뿌리 깊은 수직 문화를 고집하는 기업일수록 법적 리스크도 커지는 셈이다.
권위주의의 또 다른 문제는 소외다. 조직 안의 권한이 소수에게 집중되면, 권한이 없는 다수의 직원들은 시키는 일을 지정된 방식으로만 하는 부품 같은 역할로 전락한다. 과거에는 그런 직장이라도 감지덕지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직업 선택의 자유를 중시하는 밀레니얼과 Z세대는 소모적이고 커리어에 도움이 안 되는 업무나 일자리를 견디기 힘들어한다.
자신의 의사를 반영하고 능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수동적인 업무는 직원들을 소진시킨다. 상사들은 ‘요즘 직원들은 책임 의식이 없다’고 비판하지만,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는데 책임 의식이 생길 리 없다. ‘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업무는 양이 많지 않아도 힘들다고 느끼게 되고, 가능하면 안 하려고 한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수직적인 문화 안에서 소외되는 것은 직원만이 아니다. 고객의 소외가 더 큰 문제다. 수직적 문화 속에서 직원들은 고객보다는 상사를 보고 일할 수밖에 없다. 상사가 인사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직원들은 고객에게 불이익이 되더라도 상사의 입장이나 이익을 먼저 고려하는 행동을 할 수 있다. 수직적인 조직은 고객의 이익을 우선한 유연한 대응을 하기보다 고객의 불만을 경영진이 알지 못하도록 최대한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고객을 직접 상대하는 직원들이 권한을 갖고 제때 필요한 결정을 하도록 하는 수평 조직은 고객의 불만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
조직 생산성은 인력 투입에 대한 산출물의 비율이다. 실무자로만 구성된 조직에 관리자를 배치하면 업무를 적절히 배분, 통제, 점검함으로써 비효율을 낮추고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관리에는 많은 비용이 든다. 수직적 조직에서 관리자는 통상 실무자보다 두세 배 많은 월급을 받는다. 일사불란한 지시-수행 체계를 통해 직원 두세 명의 인건비 이상으로 생산성을 높이지 못하면 부서 차원에서는 생산성이 저하되는 셈이다. 수직적 조직의 생산성을 극대화하려면 다수의 비전문적인 단순 노동자를 소수의 관리자들이 지시·통제하는 방식이 되어야 하며, 관리자와 실무 직원의 비율은 최소 10명 이상이 되어야 한다.
최근에는 이런 비율을 유지하는 기업이 극히 드물다. IMF 구제 금융 이후 20년 동안 주기적인 구조 조정으로 조직 규모를 줄여 왔기 때문이다. 특히 은퇴 연령에 가까운 관리자급보다 인원이 많은 실무자를 대폭 줄인다. 그래서 최근 조직에서는 40대가 아직도 팀 안에서 ‘막내’ 역할을 한다는 자조적인 농담이 나오곤 한다.[1] 게다가 인공 지능, RPA(Robotic Process Automation), 빅데이터, 로봇 등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관리만 하는 사람’으로서의 관리자에 대한 수요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억지로 비대한 관리자층과 수직적 문화를 유지하는 것은 조직 생산성을 높이기 어렵게 만든다.
수직 조직에서는 발언권도 서열 순으로 주어진다. 직급에 따른 위계질서가 공고한 조직에서 젊은 직원이 당돌하게 말을 꺼냈다가는 눈 밖에 나기 쉽다. 소통의 장벽이 생기는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는 회의 시간에 팀장만 발언하고, 직원들은 엉뚱한 업무 지시 때문에 불필요한 업무를 하는 낭비를 경험하게 된다. 특히 리더가 강압적이거나 나르시시즘 성향이 있을수록 조직 침묵은 심해진다. 구성원들은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학습된 무기력 때문에, 말대꾸한다고 찍히지 않기 위해, 또는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말을 아끼고 침묵하게 된다.
직원이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의사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문제가 아니다. 회사를 커다란 곤경에 빠뜨리거나, 심지어 망하게 할 수도 있다. 지난 2013년 연비 조작 사건이 탄로 난 미쓰비시자동차의 기업 가치는 하루만에 1조 3500억 원가량 증발했다. 조사에 따르면, 연비 조작은 1991년부터 무려 26년 동안 이뤄져 왔음에도 부서 간 소통 장벽으로 인해 적발되지 못했다.[2]
수직적인 문화는 혁신과 거리가 멀다. 새로운 일을 시도하기보다는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을 못하게 하는데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시와 명령에서 벗어난 행동을 통제하는 분위기 속에서 직원들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매사 눈치를 보다 보면 의견이나 아이디어가 있어도 말하기 어렵다. 모든 사람들이 눈치를 보면 조직 분위기도 자연히 침체된다. 리더들은 침체된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회식 자리를 갖지만, 지시와 통제라는 기본 틀이 바뀌지 않는 한 눈치 보기와 복지부동은 사라지지 않는다.
조직 문화 유형 이론 중 가장 널리 쓰이는 ‘경쟁 가치 모델(Competing Values Model)’은 조직 문화를 관계 지향 문화, 혁신 지향 문화, 위계 지향 문화, 과업 지향 문화 등 네 가지로 나누는데, 여기서도 위계 지향(수직적인 문화)과 혁신 지향은 정반대 지향점으로 해석된다. 강한 위계 지향 문화를 고수하면서 직원들에게 ‘혁신하라’고 외치는 것은 모순이다. 몇 년 전 한 대기업에서 혁신을 강조하기 위해 경영진이 직원들을 모아 놓고 ‘스티브 잡스가 놀랄 만한 디자인’을 가져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혁신을 극기 훈련 정도로 이해하는 조직의 그런 주문을 직원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유능한 젊은 직원들은 지시 일변도의 답답한 조직 분위기를 싫어한다. 어느 정도 일을 배우고 경력이 쌓이면 다른 기업으로 옮기거나 창업을 한다. 그러다 보니 요즘 대기업에는 사원, 대리와 차장, 부장만 있는 조직이 많다. 실무를 해야 할 직원들이 이탈한 것이다. 아직 실무 경험이 부족한 젊은 직원들과 실무를 놓은 지 한참 된 관리자만 가득하니 조직 역량도 하향 평준화된다.
수직적인 문화로 악명을 얻은 기업은 경력자를 채용하기도 힘들다. 최근 구직자들은 온라인에서 기업의 조직 문화와 관련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기업 정보 사이트 잡플래닛이나 직장인 커뮤니티 앱 블라인드 등에는 각 회사의 조직 문화에 대한 생생한 정보가 쌓여 있다. 전현직 직원이 직접 리뷰를 쓰기 때문에 내용이 구체적이다. 조직 문화 ‘블랙 기업’으로 지적되면 여파가 오래 간다. 대부분의 구직자들이 지원이나 면접 전 조직 문화를 확인하기 때문이다.
일부 기업들이 직급을 축소하고, 호칭을 없애고, 개방형 사무실을 도입하는 등 수평적인 조직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채용 실패가 거듭되면 최악의 경우 문을 닫아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경기가 좋을 때에도 예외가 없다. 직원들이 직장을 옮기기 좋은 호황기에는 이직률이 더 높아진다. 실제로 일본의 경제 매체 《도쿄 상공 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일본 경제가 한창 호황이었던 2018년 1월에서 8월 사이 일손 부족으로 도산한 기업은 299곳에 달했다.[3]
컨설팅 기업 맥킨지의 시니어 파트너 콜린 프라이스(Colin Price)는 높은 성과를 지속적으로 내는 기업들이 잘하는 네 가지 중 하나로 끊임없이 조직 자체를 변화시킨다는 점을 꼽았다. 변화의 필요성을 감지하고 발빠르게 변화의 칼날을 들이대야 한다는 것이다. 수직적인 조직은 일사불란한 실행은 잘해도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 데는 취약하다. 방식을 바꾸면 기득권을 내놓아야 하는 경우가 많고, 자신이 잘 모르는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기존 조직에서 많은 권한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변화에 저항한다. 문제가 생기면 투명하게 공개하고 머리를 맞대서 해결하기보다는 은폐하기에 급급하다. 사일로(silo·조직 내 부서 간 장벽)와 부서 이기주의 때문이다. 이런 문화는 결국 문제를 키우고, 조직에 치명타를 가하게 된다. 수직적 조직에서는 리더들이 모든 권한을 쥐고 있는데도, 막상 문제가 걷잡을 수 없게 되면 아래에 책임을 전가한다. 문제가 생겼을 때 이렇게 묻는 것이다. “왜 나한테 보고 안 했어?”
새로운 세대가 원하는 회사
세계 인구 4분의 1을 넘어서며 빠르게 영향력을 키우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는 우리 사회에서도 2018년 말 기준 약 149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28.8퍼센트를 차지하며 핵심 경제 인구로 부상했다.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경영의 주요 키워드로 부각되는 가운데 밀레니얼을 사로잡지 못하면 존속할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기업도 많아지고 있다.
밀레니얼 세대를 둘러싼 기업들의 생각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한 가지가 차별화된 소비 트렌드를 주도하는 소비자로서의 밀레니얼이라면, 또 하나의 중요한 측면은 조직 구성원으로서의 밀레니얼이다. 조직의 ‘젊은 피’로서 기존 관행과 방식에 도전하고 실무를 주도할 뿐 아니라, 소비자로서의 밀레니얼을 잘 이해하는 인력이다. 이들은 집단적 가치보다 개인적 가치를 우선시한다. 평생 고용을 보장하지도 않는 기업에서 성공하고 승진하는 데 ‘올인’하기보다는 정서적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직장에서 일과 삶의 균형을 지키면서 직장 생활을 하고 싶어 한다. 동료와 상사가 적당한 무관심을 유지하며 개인적 가치의 다양성을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 소속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정도가 낮고, 조직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이 자기 시간을 통제하는 것을 특히 싫어하는데, 한 기업의 내부 조사에 따르면 주 3~4회 야근을 하는 경우 사원급의 퇴직 확률이 부장급보다 14배 높았다고 한다. 이들은 허드렛일이나 무리한 지시를 거절할 줄 안다. 흔히 해석하듯 ‘헝그리 정신’이 없거나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참고 노력해도 돌아오는 보상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밀레니얼은 만족스러운 직장 생활을 위해서는 자기 결정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계급 위주의 수직적인 조직에서는 위에서 결정한 것에 대해 아래 직급에서 의견을 내는 것이 ‘불손한’ 행동이었지만, 이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시키는 대로 하라고 강요하는 선배와 상사는 꼰대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기피 대상이 된다. 회사가 교육을 시켜 주기를 바라기보다는 업무를 통해 스스로 자기 계발을 하려고 하고, 경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자리에 있기보다는 직무 또는 직장 이동을 통해 커리어를 키우고 싶어 한다. 어렵게 입사한 직장이라도 장기근속을 통해 임원이 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임원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오히려 직장을 통해 전문 분야를 확실하게 키워 하고 싶은 일도 하면서 돈도 버는 미래를 꿈꾼다. 소셜 미디어로 습득한 수평적 소통 방식에 익숙한 밀레니얼들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을 명확히 말한다. 선배나 상사들이 꽉 막혀 있다고 생각하면 아예 입을 닫아 버리기도 하고, 대외적으로 폭로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밀레니얼의 특성과 그들이 원하는 조직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 내부 갈등을 겪는 기업들이 많다. 최근 한 대기업 프로젝트를 하면서 200명 가까운 구성원을 인터뷰했는데, 상하를 막론하고 70퍼센트 이상이 세대 갈등 문제를 언급했다. 군대 문화와 기수 문화가 철저한 데다 30년 이상 구조 조정도 한 적 없는 ‘철밥통’ 분위기 속에서 복지부동이 심각한 회사였다. 최근 입사자들 중심으로 조직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세대 간 문화 차이를 존중하거나 이해하려는 노력도 없었다. 퇴근만 하면 팀장들은 끼리끼리 모여 후배들을 욕하고, 젊은 직원들은 또 그들끼리 모여 회사 비판에 바빴다. 선배들은 젊은 직원들이 책임감 없고, 배우려 하지 않고, 자기중심적이며, 협동심이 없다고 지적하지만, 밀레니얼 직원들은 기성세대에 대해 언행이 불일치하고, 고압적이며, 무능력하고, 집단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다 보니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업무를 가르쳐 주지 않고, 젊은 직원들은 상사에 대한 다면 평가에서 집중적으로 0점을 주며 맞섰다. 프로젝트 팀의 차장이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바뀌기에는 너무 늦었어요.”
기업의 구성원 차원에서는 물론, 경영 환경에서도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만들어야만 하는 여건이 조성되고 있다. 우선 성장의 방식이 변했다. 과거 한국 기업들은 해외 기업의 기술, 설계, 공정을 빠르게 배우는 방식으로 성장했다. 이런 따라잡기(catch-up) 게임에서는 창의성보다는 시간 단축이 중요했고, 리더의 명령에 맞춰 움직이면 됐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의 경제 발전 단계가 완전히 달라졌다. 인당 국민 소득은 3만 달러를 넘었지만, 대기업 평균 수명은 15년 이하로 짧아졌다. 기업 간 격차도 크게 벌어지고 있다. 한 게임 회사는 신작 하나로 한 해 매출 1조원 이상을 올리지만, 한 해 동안 사업해서 은행 이자도 감당 못하는 기업이 전체의 3분의 1이나 된다. 30대 여성 CEO가 창업한 먹거리 새벽 배송 기업 마켓컬리는 창업 4년 만에 1500억 원 이상의 연매출을 올렸지만, 국내 기업 절반 정도는 기존 사업의 수익원이 사양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전략을 바꾼다고 차별화된 성과가 나는 시대도 아니다. 맥킨지의 연구에 따르면, 최근에는 전략이 성과에 미치는 영향의 정도가 평균 10퍼센트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변화를 만들어 내는 실행력이 필요하다. 기업이 만드는 제품의 본질적인 차별성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 내는 기업들은 성장하지만 외부 변화에 적응만 하는 기업들은 갈수록 어려워진다. 그리고 실행력은 결국 사람과 문화에 달려 있다.
최근 글로벌 기업들은 애자일(agile) 조직을 도입하면서 민첩하게 변화하고 있다. 애자일 조직은 불확실한 미래를 예측하고 장기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빠른 실행, 피드백, 학습을 통해 고객의 요구를 충족하고자 한다. 필요에 따라 협업하는 소수 정예의 팀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직접 결정하고 실행한다. 실리콘밸리 혁신 기업에서 보편화된 애자일 조직은 최근에는 업종과 관계없이 확산되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베인앤컴퍼니(Bain & Company) 연구에 따르면, 애자일을 도입한 기업의 프로젝트 성공률은 그렇지 않은 기업의 4배에 달한다.[4] 미국과 유럽의 IT 기업들은 이미 90퍼센트가 애자일 조직으로 변모했다. 금융, 제약, 제조, 건설 등 다양한 업계로도 확산 중이다.[5]
한국 CA 테크놀로지스와 콜맨 팍스 리서치의 2017년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애자일 우수 기업은 6퍼센트에 불과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 평균인 29퍼센트 대비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애자일 솔루션 개발 전문업체 버전원(VersionOne)이 2018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애자일 도입 과정에서 기업들이 겪는 가장 큰 장애 요인은 조직 문화와 애자일 가치가 서로 상충되는 것(53퍼센트)과 변화에 대한 저항 분위기(46퍼센트) 등으로 나타났다. 애자일 혁신의 핵심은 자발성이 높은 전문가 중심의 수평적인 협업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므로, 수직적 조직을 그대로 두고 애자일을 추진하는 것은 실패를 예약하는 방법인 셈이다.
인구 구조의 변화도 조직 구조를 바꾸고 있다. 인구 감소로 갈수록 일할 사람이 부족해지고 있다. 1970년에 100만 7000명, 1980년에 86만 3000명, 1990년에 65만 명이 출생했다. 20년 사이에 세대별 인구의 약 3분의 1이 감소한 것이다. 경제 규모는 커졌는데, 일할 사람은 줄었으니 한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은 훨씬 많아진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차별도 뚜렷해졌다. 비정규직 임금이 동일 직무 정규직의 60퍼센트 수준이라는 통계는 현재의 노동 구조가 기업의 낮은 생산성을 사회적 약자인 비정규직들에게 전가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노동력의 고령화 문제도 있다. 우리나라 노동자 평균 연령은 1999년에 이미 40세를 훌쩍 넘겼다. 은퇴 이후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정년 이후에도 노동 시장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조직 안에서 인력 전체 규모는 감소하고 할 일은 많아지는 가운데 20대에서 60대까지 여러 세대와 외부 파견직, 계약직, 프리랜서 등 다양한 노동 인력이 함께 일하면서도 생산성을 높이려면 기존의 수직적인 구조로는 한계가 있다. 관리자보다 실무자가 훨씬 많아야 하고, 나이, 연차, 계약 형태가 아니라 전문성과 역량에 따라 조직 내 역할을 나누어야 한다. 역할과 능력에 따라 보상이 결정되고, 나이나 성별 등 개인적 차이와 관계없이 수평적으로 소통하며 협업할 수 있어야 한다.
구인난의 또 다른 원인은 고급 인력의 해외 유출이다. 스위스 국제 경영 개발 연구원(IMD)이 발표한 2015년 세계 인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두뇌 유출(brain drain) 지수는 10점 만점에 3.98이다. 10점은 모든 인재가 모국에 남아 있으려 하는 것이고 0점은 모두 해외에서 구직을 하려 한다는 뜻이다. 한국은 조사 대상 61개국 가운데 44위로 하위권이었다. 인재들이 해외에서 공부한 후 국내로 들어오지 않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제 무역 연구원이 이공계 해외 석·박사 대학원생과 국내 고급 과학 기술 인력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안정적인 일자리 부족’ 및 ‘낮은 연봉’ 외에 ‘근무 시간이 너무 길어서’, ‘경직되고 폐쇄적인 분위기’ 등 수직적인 조직 문화 역시 주요 원인으로 꼽혔다.
수평적 조직 문화에 대한 오해
전통적인 위계 조직은 달라진 경영 환경에서는 지속되기 어렵다. 수평적인 조직 문화에 대한 다음과 같은 오해를 해소하는 것에서 변화는 시작될 수 있다.
① 수평적 문화는 모호한 개념이다
우리나라에서 ‘수평적 조직’, ‘수평적 문화’, ‘수평적 리더십’ 등의 표현이 대중적으로 쓰인 것이 10년도 되지 않았다. 축적된 경험치가 부족한 만큼 개념 정의가 미흡한 것은 사실이다. 사례 역시 주로 해외, 특히 실리콘밸리 기업 사례가 인용되고 있다. 심리학자 헤이르트 호프스테더(Geert Hofstede)는 ‘권력 거리(power distance)’로 수평적인 구조와 수직적인 구조를 설명한다. 구성원들의 권력과의 거리가 가까운 조직이 수평적이라는 것이다.
② ‘홍보성 멘트’에 불과하다
브랜드 인지도나 안정성을 아직 확보하지 못한 스타트업 기업이 우수 인재를 초빙하려고 할 때 수평적인 문화를 내세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를 믿고 입사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비판하는 직원들도 많다. 요즘은 구직자들이 온라인을 통해 회사의 근무 여건, 내부 사정, 조직 분위기, 리더 성향 등에 대해 아주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포장을 하려고 해도 한계가 있는 셈이다. 수평적 회사라는 멘트로 다른 약점들을 가리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비판해야겠지만, 그것 때문에 수평 문화 자체를 나쁜 것으로 여길 필요는 없다.
③ 조직은 원래 수직적이다
수평적인 문화와 수직적인 문화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완전히 수직적이거나 수평적인 조직은 개념적일 뿐이고, 실제 조직은 중간의 어딘가에 위치한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수평 조직의 극단에 가까운 대표적인 조직은 관리자 직급을 없앤 홀라크라시(holacracy) 구조로 운영되는 자포스(Zappos), 미디엄, 에어비앤비, 우버, 렌딩 클럽(Lending Club) 같은 회사들이다. 수직 조직의 극단은 군대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조직 전체로는 수직적 체계를 유지하면서 특정 조직만 수평 조직으로 운영하는 경우도 있고, 조직의 구조는 위계적 체계를 유지하지만, 일하는 방식과 문화는 수평적이고 유연하며 자발성을 강조하는 회사도 있다. 애플과 아마존이 그런 사례다. 배달의 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 형제들에서 ‘업무는 수직적, 인간관계는 수평적’이라는 가치를 지향하는 것도 비슷한 경우다.
‘조직은 원래 수직적’이라는 시각은 조직을 조직도와 동일한 단어로 보는 것이다. 조직도가 조직의 전부는 아니다. 조직은 구조, 비공식적인 관행, 각종 체계와 프로세스, 사람, 문화 등을 포괄하는 복잡한 유기체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④ 수평적 조직은 체계가 없다
수평적인 문화와 체계의 유무는 별개의 문제다. 경영학에서 체계는 복잡한 업무를 효율적이고 일관성 있게 운영, 관리하는 데 필요한 방법을 말한다. 협력사 관리 체계, 회계 관리 체계, 직원 보상 체계, 업무 평가 체계, 사내 소통 체계, 의사 결정 체계 등이 대표적이다. 수평 조직을 표방하는 스타트업 중 업력이 짧고 창업주들도 경험이 부족한 경우 체계 없이 업무를 추진하거나 지시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수평 조직의 특징이라고는 볼 수 없다.
구글은 직장 경험이 전무한 대학원생 두 명이 창업했지만,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유지하면서 세계적인 기업을 건설했다. 수평적인 조직이면서 체계적으로 운영되는 회사는 얼마든지 많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구성원의 역량과 수준이 높아야 한다. 조직 사상가 프레드릭 라루(Frederic Laloux)가 지적했듯 조직의 수준은 구성원의 의식 발달 수준을 반영한다.[6] 조직이 체계 없이 운영되는 것은 수평적인 구조 때문이라기보다는 구성원들의 수준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⑤ 한국 문화에 맞지 않는다
한국 기업의 뿌리 깊은 위계 문화는 바뀌기 어렵다는 시각이다. 상상하기 어려운 변화라고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수평적 조직 문화의 원형을 만든 실리콘밸리 기업들도 처음부터 모두 수평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이미 실리콘밸리 수준의 수평 문화를 만들고 사업에도 성공한 젊은 기업들이 꽤 많다. 그런 기업의 구성원들도 한국인이다. 변화의 필요성을 체감하고, 추진하면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변화를 간절하게 추구해야 한다. 수평 문화를 정착시켜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미래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