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 부호의 작동은 일반적으로 도미노와 같이 일련의 선형적 단계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뇌는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 세계와 이어져 상호 연결된 매우 복잡한 신경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네트워크를 그 뇌를 가진 동물의 행동과 연결하지 않고 단순한 감각과 신경 세포의 집합에 초점을 두게 되면 모든 뇌 활동의 요점을 놓치게 된다.
입력에 수동적으로 반응하고 데이터를 처리하는 컴퓨터라는 관점에서 뇌를 보게 되면, 우리는 뇌가 신체의 일부로서 바깥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구조와 기능을 형성한 진화적 과거가 있는 활성 기관이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 뇌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헝가리의 신경 과학자 뇨르지 부자키(György Buzsáki)의 최근 저서인 〈뇌의 모든 것 (The Brain from Inside Out)〉에 드러나 있다. 부자키에 따르면, 뇌는 단순히 자극을 수동적으로 흡수하고 이를 신경 부호를 통해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선택지를 시험하기 위한 가능성들을 적극적으로 탐색한다. 19세기의 과학자들을 따른 그의 결론은, 뇌는 정보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한다는 것이다.
컴퓨터, 부호화, 배선도(wiring diagrams) 등의 신경 과학적 은유는 필연적으로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과학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사고하는 방식의 중심에서 다뤄진 은유법의 본질이다. 하지만 은유는 풍부하기도 하고, 통찰력과 발견을 허용하기도 한다. 은유를 바탕으로 한 이해가 은유의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이 올 것이다. 하지만 뇌를 컴퓨터와 유사한 기관으로 보는 은유법의 경우에는 그러한 순간이 도래했다는 합의가 아직 없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우리가 은유의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다만 명확하지 않은 것은 이 은유를 무엇으로 대체 할 것인가다.
과학자들은 종종 그들의 관점이 은유를 통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 깨달을 때 열광하고, 그 은유가 그들의 연구를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거나 새로운 실험을 고안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은유를 생각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과거에 뇌와 관련해 사용된 은유들 대부분은 새로운 종류의 기술과 관련이 있었다. 이것은 뇌와 이의 기능에 대한 새롭고 통찰력 있는 은유가 수력, 전화 통신, 혹은 컴퓨터에 견줄 만한 미래의 기술 혁신에 달려있음을 의미한다. 현재 그러한 혁신의 징후는 없다. 블록체인, 양자 우위(혹은 양자에 관련된 그 어떤 것), 나노 기술과 같은 새로운 분야들의 유행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분야들이 기술이나 뇌 기능에 대한 우리의 관점에 혁신적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가장 단순한 두뇌조차도 그 복잡성의 규모는 현재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기계도 작고 하찮은 것으로 만든다. 앞으로 수십 년, 수세기 동안 특이점은 과학이 아닌 공상 과학의 소재가 될 것이다.
우리의 은유법이 설명력을 잃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징후가 있다. 단순한 구조에서 인간 의식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신경계의 작동과 관련한 많은 부분이 구성 요소에 대한 분석이 아닌, 시스템이 기능하는 과정에서 예측할 수 있는 창발적 특성(emergent properties, 조직적으로는 나타나지만 개별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특성)에 의해서만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1981년 영국의 심리학자 리처드 그레고리(Richard Gregory)는 뇌기능을 설명하는 방법으로 창발(emergence)에 의존하는 것이 이론적 체계의 문제점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창발의 등장은 결국 더 일반적인 (혹은 최소한 다른) 개념 구조가 필요하다는 신호일 것이다. 창발의 출현을 없애는 것이 좋은 이론의 역할이다(그렇게 해서 창발에 기인한 설명은 허위가 된다).”
창발에 대한 의존은 창발에도 약한 것과 강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상어에 반응하는 작은 물고기 떼의 움직임과 같은 약한 창발은 행동을 지배하는 규칙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경우, 언뜻 신비해 보이는 집단행동은 옆 동료의 움직임과 같은 요소나 포식자의 접근과 같은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개별 행동에 기인한다.
약한 창발은 가장 단순한 신경계의 활동도 설명할 수 없다. 뇌의 작동을 염두에 두지도 않는다. 결국 우리는 개별 구성 요소들의 활동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강한 창발로 되돌아가게 된다. 당신과, 당신이 읽고 있는 이 페이지는 모두 원자로 구성되어 있지만 읽고 이해하는 당신의 능력은 단순히 원자의 상호 작용이 아니라 신경 세포와 그 발화 패턴 등 상위 체계를 이루는 신체의 원자들을 통해 나오는 특징에서 비롯된다.
강한 창발은 최근 일부 신경 과학자들에 의해 ‘형이상학적 비개연성(metaphysical implausibility)’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으로 비판받아왔다. 이는 창발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한 명백한 인과 관계나 설명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와 마찬가지로, 이 비평가들은 복잡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창발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연금술에서 화학으로의 느린 변혁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중요한 역사적 시점에 신경 과학이 놓여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경 과학의 수수께끼에 직면한 우리에게 창발은 종종 유일한 수단이다. 그리고 창발은 그렇게 허술한 개념은 아니다. 딥러닝(deep-learning) 프로그램의 놀라운 속성은 결국 이를 설계한 사람들에 의해 설명될 수 없는, 본질적인 창발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일부 신경 과학자들이 창발의 형이상학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반면,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현대 컴퓨터의 복잡함이나 혹은 인터넷을 통한 컴퓨터 간의 상호 연결성이 극적으로 알려진 특이점(singularity)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으며 이를 즐긴다. 기계가 의식을 갖게 될 것이란 얘기다.
기계가 의식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한 많은 (종종 모든 것에 좋지 않은 결과로 끝을 맺는) 가상의 탐구들이 있고, 그러한 주제는 확실히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하지만 의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무지와 별개로, 그런 일이 실제로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고 가정할 이유는 없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수 있다. 정신은 물질의 산물이라는 작업 가설에 따라 정신을 기기에서 재현해 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지어 가장 단순한 두뇌조차도 그 복잡성의 규모는 현재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기계도 작고 하찮은 것으로 만든다. 앞으로 수십 년, 수세기 동안 특이점은 과학이 아닌 공상 과학의 소재가 될 것이다.
의식의 본질에 대한 견해는 ‘컴퓨터로서의 두뇌’에 대한 은유를 기계적 유추로 바꿔 놓는다. 어떤 연구자들은 인간의 정신을 신경 하드웨어에서 구현되는 일종의 운영 체제로 보고, 특정 계산 상태로서의 정신이 어떤 기기나 다른 뇌에 업로드될 수 있다고 본다. 제시되는 일반적인 방식을 보면, 이러한 관점은 틀렸거나, 너무 순진한 발상이다.
물질주의적 작업 가설에 따르면 인간, 구더기, 다른 모든 생명체에게 뇌와 정신은 동일하다. 신경 세포와 이의 (의식을 포함한) 작동 과정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컴퓨터에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는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의 뇌와 정신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와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지는 완전히 얽혀 있다. 그런 관점에서 웨트웨어(wetware)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신경계의 용도를 변경해 다른 프로그램을 실행하거나 서버에 우리의 정신을 업로드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의 이면에는 데카르트 혹은 그 너머로 회귀하는 비물질적인 견해가 숨어 있다. 이는 우리의 정신이 우리의 뇌 어딘가에 부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다른 머리로 옮기거나 다른 정신으로 대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일련의 신경 세포의 상태를 읽고 이를 새로운 물질, 유기체, 혹은 인공체에 그대로 옮겨 적을 수 있다고 가정할 수 있을 때에나 겨우 과학적 존중을 표할 수 있는 견해다.
실제로 어떻게 작용할지 상상하려면, 현재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 너머의 신경 세포의 기능에 대한 이해와, 역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계산 성능, 그리고 문제의 뇌의 구조를 정확하게 모방하는 시뮬레이션이 필요하다. 이것이 이론적으로라도 가능하려면 우선 생각을 제외하고 단일한 상태를 유지한 상태의 신경계 활동을 완전히 모형화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 우리는 이 첫걸음을 내딛는 것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적어도 먼 미래까지는 정신을 업로드하는 가능성은 공상으로 치부할 수 있을 것이다.
‘뇌는 컴퓨터다’ 같은 은유가 옳고 그른지에 대한 논쟁은 시간 낭비다. 이러한 은유는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그 효과를 둘러싸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음에도, ‘컴퓨터로서의 뇌’의 은유는 현재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2015년 로봇 공학자 로드니 브룩스(Rodney Brooks)는 《사라져야 하는 생각들(This Idea Must Die)》 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집에서 뇌를 컴퓨터에 비유하는 것을 특별히 아주 싫어 하는 것으로 꼽았다. 20여 년 전 역사가 라이언 요한슨(Ryan Johanson)은 브룩스만큼 극적이지는 않지만 비슷한 말을 했다. “‘뇌는 컴퓨터다’ 같은 은유가 옳고 그른지에 대한 끝없는 논쟁은 시간 낭비다. 이러한 은유는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미국의 인공지능 전문가 게리 마커스(Gary Marcus)는 뇌를 컴퓨터에 비유하는 것을 강하게 변호한다. “컴퓨터는 간단히 말하자면 입력을 받고, 이를 코드화하고 정보를 처리하여 입력물을 출력물로 바꾸는 체계적인 구성체이다. 뇌는 우리가 이해하는 한, 정확히 그와 같다. 중요한 질문은 뇌가 정보 처리 장치 자체이냐가 아니라, 뇌가 어떻게 정보를 저장하고 코드화하는지, 그리고 코드화된 정보에 대해 어떤 작업을 수행하느냐다.”
마커스는 컴퓨터의 구성 요소와 상호 연결을 조사하여 작동 방식을 해독하는 것처럼 뇌를 ‘역설계(reverse engineer)’ 하는 것이 신경 과학의 임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제안은 예전부터 있었다. 1989년 크릭은 이 아이디어의 흥미로움을 인식했지만 뇌의 복잡한 진화의 역사 때문에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에 대해 마치 ‘외계의 기술’을 역설계하는 시도와 같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한 뇌의 구조를 논리적으로 따르면서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하려는 시도는 시작점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에 실패할 운명이라고 말했다. 뇌에는 전체적인 논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컴퓨터의 역설계(Reverse engineering)는 이론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뇌를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사고 실험(thought experiment)으로 종종 사용된다. 이러한 사고 실험은 필연적으로 성공한다. 그래서 우리 머릿속에 있는 그 물렁한 장기를 이해하기 위해 이런 방법을 계속 시도하게 만든다. 하지만 2017년 두 명의 신경 과학자들이 명확하게 설계된 기능, 실제 논리와 실제 구성 요소로 이루어진 실험을 실제 컴퓨터 칩을 이용하여 진행했을 때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두 신경 과학자, 에릭 조나스(Eric Jonas)와 콘래드 폴 코르딩(Konrad Paul Kording)은 평소 뇌를 분석하는 데 사용하던 기술을 동키콩(Donkey Kong)이나 스페이스 인베이더스(Space Invaders)와 같은 비디오 게임을 실행할 수 있는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에 생산된 컴퓨터에 내장된 MOS 6507 프로세서에 적용했다.
먼저 그들은 칩에 들어 있는 3510개의 강화 모드 트랜지스터를 스캔하고, 그 장치를 최신 컴퓨터에서 (10초간의 게임 프로그램 실행을 포함해) 시뮬레이션해 칩의 커넥톰(connectome, 연결망 지도)을 얻었다. 그런 다음, ‘병변(lesions[뇌의 한 영역을 제거함으로써 그 영역의 기능을 유추하는 것과 같이 시뮬레이션에서 트랜지스터를 제거하는 것])’, 가상 트랜지스터의 ‘스파이킹(spiking, 전기 자극)’ 활동 분석과 연결성 조사, 게임 실행 기능으로부터 측정된 다양한 조작이 시스템의 동작에 미치는 영향 관찰 등 모든 범위의 신경 과학적 기법을 적용했다.
이렇게 강력한 분석 무기를 배치하고 칩의 작동 방식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기술 용어로 ‘실측 자료(ground truth)’)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는 칩 내부에서 일어나는 정보 처리의 계층 구조를 알아내는 데 실패했다. 조나스와 코르딩의 표현대로, 그 기법들은 ‘의미 있는 이해’를 만들어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들의 결론은 암울했다. “궁극적으로, 문제는 신경 과학자들이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 그들이 취하고 있는 접근 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란 점이다.”
이 냉정한 결과는 ‘컴퓨터로서의 뇌’의 은유가 가지고 있는 매력, 뇌가 실제로 정보를 처리하고 외부 세계를 표상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진보를 이루기 위해 상당한 이론적 혁신을 일으켜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설령 우리의 뇌가 논리적 선형을 따라 설계되었다 하더라도 (하지만 뇌는 그렇게 설계되지 않았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개념적, 분석적 도구는 뇌를 설명하는 작업에 완전히 불충분 했을 것이다. 이것은 시뮬레이션 작업이 부질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뇌를 모델링(또는 시뮬레이션)함으로써 가설을 시험할 수 있고, 정밀 조작이 가능한 확립된 시스템과 그 모델을 연결함으로써 실제 뇌가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이는 매우 강력한 도구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와 관련한 주장들에는 어느 정도의 주의가 요구된다. 뇌와 인공 시스템 사이의 평행적 유사성을 이끌어 내는 어려움에 관련해서는 사실주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