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물고기/ 전 세계 통신 장비 매출/ 화웨이(붉은색)/ 노키아(푸른색)/ 에릭슨(하늘색)/ ZTE(청록색)/ 시스코(민트색)/ 출처: 델오로 그룹
이제 시선은 독일에 쏠리고 있다. 독일은 올가을 이 문제를 결정하겠다고 밝혀 왔기 때문이다. 만약 독일이 미국의 강권과 영국의 사례를 따른다면 유럽 연합(EU)의 다른 국가들도 같은 노선을 걷게 될 것이다. 이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서방의 통신 시스템은 조금은 덜 불안정해질 것이다. 미국은 중국 최고의 기업에게 본때를 보여 주기 위해서 계속해서 패권을 휘두를 것이고, 중국도 분명히 대응을 할 것이다.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은 나라들과 점점 거슬리는 중국을 자극하려는 나라들이 뒤섞이면서, 5G를 네트워크로 완전히 연결되는 미래의 상징으로 여기게 만든 기술 지상주의는 이제 점검의 시기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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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변화는 각국 정부가 전략 산업 부문의 조달에 있어서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국가의 기업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 중심에는 서방이 지금껏 마주하지 않았던 딜레마가 있습니다. 즉, 근본적으로 우리와 반대되는 가치관을 가진 테크놀로지 초강대국에 어떻게 맞서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영국의 신호 정보(signal intelligence) 담당 기관 정보 통신 본부(GCHQ)의 전직 본부장인 로버트 해니건(Robert Hannigan)의 말이다.
독일의 결정은 확정된 것은 아니다. 국가가 32퍼센트의 지분을 가진 독일 내 최대의 이동 통신 사업자 도이치텔레콤(DT)은 이미 화웨이의 장비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DT는 5G 사업을 어렵게 만드는 어떤 움직임에도 강하게 맞서며 로비를 벌이고 있다. 독일 산업계의 이익을 열성적으로 옹호하는 경제부도 DT를 지원하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문제도 일으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국의 보수당과 마찬가지로 메르켈 총리의 소속 정당 기독교민주연합(CDU) 내부에서는 엇갈린 입장이 나오고 있다. 보수파 의원이자 반(反)화웨이 진영을 이끌고 있는 노르베르트 뢰트겐(Norbert Röttgen)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5G 네트워크에 중국이라는 국가와 중국 공산당이 연관되어 있는 것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민주연합과 함께 대연정을 구성하고 있는 사회민주당(SPD)과 야당인 녹색당도 화웨이 사업 허가를 반대하고 있다. “지금 당장 의회에서 표결을 한다면, 화웨이는 패할 겁니다.” 베를린의 싱크탱크 글로벌 공공 정책 연구소(Global Public Policy Institute)의 토르스텐 베너(Thorsten Benner)의 말이다.
최종 결정을 해야 할 메르켈 총리는 지금까지 신중한 태도를 보여 왔다. 그는 국적을 기반으로 기업을 배제하지는 않을 것이며, 특정한 보안 기준을 준수하는 기업이라면 모두 독일에서 장비를 팔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2019년 말 베를린 주재 중국 대사는 독일 정부가 5G 사업 계획에서 화웨이를 배제할 경우 독일 기업들을 상대로 보복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메르켈 총리는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다. 한편 DT는 이미 결정이 난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비록 사용자들은 혜택을 거의 체감하지는 못하겠지만, DT는 화웨이와 에릭슨의 장비를 사용해서 이달 말까지 4000만 명의 독일인들에게 기본적인 5G 서비스를 제공하려 한다. DT는 또 클라우드 컴퓨팅을 비롯한 다른 분야에서도 화웨이와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유럽의 국가들이 미국의 편에 서는 것을 편치 않게 생각하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컨슈머 테크놀로지(consumer technology)의 성장이라는 기회를 붙잡지 못한 상황에서(유럽인들은 미국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한 구글이나 아마존 같은 기업이 유럽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을 계속해서 한탄하고 있다), 유럽의 정치인들은 5G 네트워크나 ‘사물 인터넷(IoT)’처럼 유럽이 품을 수도 있는 다양한 기적들을 지연시킬 경우, 미국과의 격차가 지금보다 더 벌어지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모바일 네트워크 사업자들은 이러한 두려움을 잘 이용한다. 목적은 화웨이와의 관계를 유지하거나, 화웨이 사용 금지에 따른 보상금을 받아 내려는 것이다. 사업자들은 직접적인 비용과 GDP 손실 추정액을 합하면, 화웨이를 배제하는 데 따른 비용이 유럽 대륙 전체에서 수백억 유로에 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규제 당국과 외부의 관찰자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이해 당사자일 수밖에 없는 영국의 다우든 문화부 장관은 영국의 180도 달라진 입장으로 인한 영향이 2~3년의 사업 지연, 20억 파운드(3조 378억 원)가량의 비용이라고 말한다. 리서치 기업인 스트랜드 컨설트(Strand Consult)는 유럽 전체에서 기존의 낡은 4G 장비들을 조만간 교체해야 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화웨이를 배제하는 비용은 그리 대단치 않은 수준이라고 본다. 총비용은 대략 35억 달러(4조 1960억 원)로 추산되는데, 이는 이동 통신 고객 1명당 7달러를 넘지 않는 규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