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1년 영국 농민 반란 ©Pictorial Press Ltd/Alamy
그러나 재난의 가장 두드러진 결과는 즉각적이거나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을 때가 많다. 2008년 금융 위기는 2011년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로 이어졌다. 이런 움직임은 주택 담보 대출과 학자금 대출, 영리 목적의 대학 교육, 의료 보험 제도 같은 경제적 불평등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을 새롭고 정밀하게 조사하도록 이끌었다. 또한 민주당이 미국을 더욱 공정하고 평등하게 만들 수 있는 진보적인 정책을 내도록 한 엘리자베스 워런(Elizabeth Warren)과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의 지명도를 높이는 결과도 나타났다. 전 세계의 ‘점령하라(Occupy)’ 운동과 ‘자매 시위’들이 촉발한 사회적 대화들은 지배 세력에 대한 보다 비판적이고 세밀한 조사와 함께 경제 정의에 대한 더 강한 요구도 불러일으켰다. 공공 영역의 변화는 개인의 내면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세상의 변화는 개인의 자아 감각, 우선순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의 범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이제 겨우 코로나라는 재난의 초기 단계에 있다. 아직도 낯선 정적만 흐른다. 독일군과 영국군이 하루 동안 전투를 중단하고 총을 내려놓은 채 자유롭게 어울렸던 1914년 크리스마스 휴전과 흡사하다. 전쟁이 잠시 멈춘 것이다. 우리가 모으고 쓰는 행위는 지구에 대한 일종의 전쟁이었다. 코로나 발생 이후 탄소 배출량은 급감했다. 보도에 따르면 로스앤젤레스, 베이징, 뉴델리 상공의 공기는 기적적으로 깨끗해졌다. 미국 전역의 공원이 시행한 방문객 출입 금지 조치는 야생 동물들에게 유익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2018~2019년 미국 연방 정부가 일시적으로 폐쇄(government shutdown)됐을 당시 샌프란시스코 북쪽의 포인트 라이스 국립 해안(Point Reyes National Seashore)의 빈 해변은 코끼리물범(elephant seal)들이 차지했다. 코끼리물범들은 아직도 짝짓기와 출산을 할 때마다 그 해변을 이용하고 있다.
고통과 공존하는 희망
다른 비유도 있다. 애벌레는 번데기에 들어가면 스스로 녹아 액체가 된다. 애벌레였다가 나비가 되려고 하는 순간의 상태는 애벌레도, 나비도 아닌 일종의 ‘살아 있는 수프’다. 이 ‘살아 있는 수프’ 안에는 애벌레가 날개 달린 성체로 변태할 수 있도록 촉진시키는 성충 세포가 있다. 우리 중에서 가장 선견지명이 뛰어나고 포용적인 누군가가 성충 세포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 지금 우리는 수프 속에 있다. 재난의 결과는 미리 정해지지 않는다. 얼음처럼 단단하게 결속돼 있던 것들이 유동적으로 변하면서, 최선과 최악의 결과가 모두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우리는 멈춰 있는 동시에 엄청난 변화의 상태에 놓여 있다.
지금 시기는 주로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예상치 못했던 세상을 내다보는 이들에게는 깊이 있는 시간이다. 사람의 감정은 선과 악, 행복과 슬픔으로 쉽게 나눠진다. 마찬가지로, 얕고 깊은 감정으로도 나눌 수 있다. 행복 추구는 내면의 삶과 주변의 고통으로부터의 도피로 여겨진다. 불행은 실패로 간주된다. 하지만 슬픔과 애도, 비통함처럼 공감과 연대에서 생겨난 감정들은 고통뿐 아니라 의미도 담고 있다. 슬프고 겁에 질린 감정은 마음을 쓰고 있고 정신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표시다. 2020년이 갑자기 어떤 과정과 연유로 우리 모두를 늪과 같은 새로운 곳으로 데려왔는지 이해하려 한다면 수십 년의 연구와 분석, 토론과 고찰의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7년 전 패트리스 쿨러스(Patrisse Cullors)는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BLM)’ 운동의 사명 선언문에서 “집단의 변화와 혁신을 달성하려는 모두의 힘을 쌓기 위해 집단행동의 희망과 영감을 제공하자”며 “슬픔과 분노에 뿌리를 두었지만, 미래와 꿈을 향한다”고 적었다. 이 문장은 아름답다. 희망적이라서가 아니다. BLM을 시작하고 변화를 촉발했기 때문도 아니다. 희망이 어려움, 고통과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깊은 슬픔과 솟구치는 분노가 희망과 양립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복잡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모든 일이 다 괜찮을 것이라는 낙관론이 아니다.
희망은 앞으로 닥칠 불확실성 속에서도 명확한 시각을 제공한다. 함께할 가치가 있는 갈등이 있고, 그중 일부는 이길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희망의 가장 위험한 면 중 하나는 재난이 닥치기 전에는 모든 것이 괜찮았고,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는 실수에 빠지는 것이다. 판데믹 이전의 평범한 삶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절망과 배척의 시기였고, 환경과 기후의 재앙이자 불평등의 근원이었다. 비상사태가 끝난 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지금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하는지 찾고, 결정할 수는 있다. 우리 중에 여러 사람이 이미 그럴 준비를 하고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