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코로나19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날은 2019년 12월 31일이다.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신종 폐렴 환자 27명이 발생했다는 소식이었다. 이때만 해도 다들 중국 어느 지방의 전염병 정도로만 여겼다. ‘신종’이라는 단어보다 ‘폐렴’이라는 단어에 더 주목했다. 걸릴 일도 없고, 걸려도 약 먹으면 낫는 줄 알았다.
거의 1년이 지났다. 전 세계 코로나 확진자는 6000만 명을 넘어섰다. 사망자도 150만 명에 다다르고 있다. 숫자도 엄청나지만, 그 뒤에 숨은 현실은 더 처절하다. 병상은 모자라고, 시신이 곳곳에 쌓였다. 스포츠 현장 같은 군중의 모임은 사회악이 됐다. 각 나라는 자국민 보호를 위해 국경을 봉쇄했다. 여행사를 비롯한 많은 회사들은 구조 조정을 시작했다. 실직과 해고, 취업난이 잇따랐다. 학교와 상점은 문을 닫았다. 사람들의 지갑이 얇아지고, 각국 정부는 곳간을 열고 돈을 풀어 지원책을 쏟아 내고 있다. 그 대가로 전 세계가 올해 9월까지 역대 최다인 30경 2800조 원이라는 막대한 빚을 지게 됐지만 말이다.
살기 위해, 사람들은 변했다. 얼굴의 반을 가린 마스크는 당연해졌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일상이 됐다. 모임은커녕 지인과 쉽게 대화도 나누지 않는다. 식사는 투명 칸막이를 앞에 두고 이뤄진다. 과거처럼 기침이나 재채기를 허공에 해댔다가는 ‘미개인’ 소리를 듣는다. 전에 없던 일들이 계속 벌어지지만 대부분은 참고 견딘다.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코로나가 없어진 세상을 향한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백신 개발 소식이 들려온다. 빠르면 연말, 늦어도 내년이면 백신 접종이 가능하리라는 전망이 나온다. 백신 생산 물량, 가격, 최우선 접종 대상 같은 구체적인 얘기들도 오간다. 어렴풋하지만, 마스크를 벗어도 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면 코로나 이후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자연스럽게 상처를 회복하고 2019년 11월처럼 살 수 있을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내도 괜찮은 걸까?
“위기 뒤 기회”라는 야구 격언이 있다. “실점 위기를 무사히 넘기면 득점 찬스가 온다”는 뜻이다. 기회를 날린 팀의 실망감, 위기를 극복한 팀의 올라간 사기 등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격언치고는 꽤나 적중률이 높다. 코로나로 위기를 맞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처절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하느냐에 미래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가디언》도 이 점에 주목했다.
〈불가능은 이미 일어났다〉는 코로나로 드러난 보수주의와 정치 지도층의 민낯을 고발하고, 다양성과 사회 복지 시스템이 확장된 코로나 이후의 세상을 얘기한다. 〈여행의 종말〉은 죽어 가던 환경을 되살린 코로나의 역설과 함께, 지속 가능한 관광 산업의 방향을 제시한다. 〈사실인가 감정인가〉는 코로나를 핑계로 무분별하게 ‘가짜 뉴스’를 퍼뜨린 모습들을 지적하며, 이성과 정확한 판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군중의 힘〉은 코로나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던 군중이 다시 힘을 합쳐야 앞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역설한다. 〈코로나 이후의 세계〉는 코로나 위기가 전체주의를 극복하고 시민의식을 회복하는 정치적 진전을 향한 관문이 될 수 있다고 기대한다.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을 두고 ‘코로나 세대’, ‘마스크 세대’라고 부르곤 한다. 타인과의 거리를 중요시하고, 실제 만남보다 화상 연결이 편하며, 맨얼굴보다 마스크가 더 익숙한 세대들이다. 지인의 어린 자녀는 가족 그림에 꼭 마스크를 그려 넣는다고 한다. 세상 물정도 다 익히지 못한 채 코로나를 온몸으로 겪은 이 아이들이 자라난 먼 미래는 분명히 지금과 다를 것이다. 그리고 그 미래는 지금의 어른들이 코로나가 사라지고 난 다음을 어떻게 다시 잘 만들어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코로나는 기회다》가 얘기하는 다가올 앞날에 대한 대비와 통찰력이 필요한 이유다.
정세영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