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을지로
1화

프롤로그; 을지로의 힘

화려한 스카이라인으로 상징되는 도시의 모습은 계획적으로 조성된 근대의 산물, 혹은 권력자의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의 집합체처럼 보인다. 도시는 언제나 땅과 건물을 가진 이들에게는 더 많은 수익을, 도시 정책 담당자들에게는 더 많은 세금을 안길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이 공간에 애정을 조금만 가져 보자. 그동안 보지 못했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도시를 지배하는 사람들이 보여 주는 것만을 보지 않는다. 도시는 구체적인 상징과 기억, 욕망이 담겨 있어 해석의 여지가 다분한 일종의 텍스트다. 시민들은 도시에서의 경험과 습득한 기호 등을 각자의 그물망으로 엮어 의미를 만든다. 도시민들의 숫자만큼 의미 형성 작용이 반복되면서 도시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에서 사람들의 기억이 서린 하나의 ‘장소’로 탈바꿈한다.

서울 한가운데에 위치한 남산을 떠올려 보자. 어떤 사람은 남산을 그저 서울 도심에 있는 하나의 산으로만 여기겠지만, 이곳에서 연인과 함께 사랑의 자물쇠를 채워 본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단순한 산 이상의 추억이 담긴 장소다. 자물쇠를 채운 이들의 기억은 그 무게만큼 쌓여 도심 속 평범한 자연 지형에 ‘연인들이 사랑을 약속하는 장소’라는 또 하나의 정체성을 부여한다. 도시민들이 평범하게 수행하는 일상생활은 물리적인 형태만 존재했던 도시 곳곳에 의미를 각인하며 사람들의 기억과 흔적을 이끌어 낸다. 이 과정에서 무채색의 도시에 거주민의 숫자만큼 다양한 배합으로 색을 입힐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 가지는 힘을 발견한다.

서울 을지로는 지난 반세기 동안 ‘도심 속에 위치한 근대 제조업의 산실’로 불렸다. 한국 전쟁 후 국토를 재건해 권력과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했던 지도자들은 을지로를 단숨에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식 압축적 근대화의 첨병으로 만들었다.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피난민들은 근대화 프로젝트에 기꺼이 참여했고 전후 폐허 속에서 을지로는 순식간에 발전할 수 있었다. 을지로 일대에는 없는 게 없고 못 만드는 게 없다는 시쳇말처럼, 제조업이 호황을 누린 20세기 후반에 한국에서 생산되고 판매되는 최첨단의 과학 기술과 도구는 웬만하면 ‘메이드 인(Made in) 을지로’였다. 밤낮없이 일하며 서울 시민의 삶을 현대적인 모습으로 바꿀 제품들을 짧은 시간 안에 대량으로 제작해 더 많은 자본을 끌어 모으는 것이 당대 을지로에 주어진 사명이었다. 이는 노동자 개인의 목표이면서 서울의 목표이기도 했다.

을지로를 위시한 서울 도심 근대화 프로젝트는 20세기 사회를 지배한 서구식 합리주의, 자본주의와 맞닿아 있다. 사회가 가장 합리적으로 진보하기 위해서 신에게 부여받은 근대적 이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서구의 믿음은 자연 과학 법칙의 절대성을 발현시켰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선과 악, 성(聖)과 속(俗) 등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분류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자본주의와 결합해 자본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행위이며 자본을 지향하지 않는 행위와 사상은 쓸모없다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자연스레 을지로에서도 돈을 벌어다 주는 노동은 고귀하지만 그에 반대되는 것, 즉 먹고 마시고 놀거나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다투기도 하는 평범한 일상은 감성적이거나 비논리적이라는 이유로 논의에서 배제되었다. 이성의 시각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잔여물이나 예외 정도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합리성과 실용성만을 강조하던 산업 구조가 변했고 합리주의는 더 이상 사회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사상이 아니다. 근대적 이성과 과학이 인간을 구원하리라는 확신은 비판에 직면했다. 자연스레 을지로 일대의 자본 집약적 제조 산업도 쇠퇴하면서 을지로는 지는 해가 되었다. 이곳의 일상이란 나이 지긋한 제조업 장인들이 얼마 남지 않은 자리를 묵묵하게 지키는 것뿐이었다. 유일하게 20세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을지로는 나날이 발전하는 서울 속 외딴 섬처럼 보였다.

심심한 일상에 변화를 불러일으킨 건 비실용적인 행위들이었다. 을지로의 변화는 평범한 사람들, 조금 더 자세하게는 우리 주변 청년들의 시도에서 시작한다. 명맥만을 유지하던 제조업 지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청년들은 ‘노동 대(對) 놀이’라는 이분법으로 정확하게 가르기 어려운 모호한 작업을 시작했다. 이들이 주최하는 전시나 공연은 생산적이지만 딱히 돈이 되는 일은 아니다. 청년들이 여는 음식점도 을지로 인구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제조업 종사자들이 도무지 들를 것 같지 않은 젊은 취향을 겨냥한다. 공간의 정체성도 모호하다. 이들이 추구하는 공간의 명시적인 기능이 카페인지 디자이너 작업실인지 한눈에 구분할 수 없다. 자본주의적 합리성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들의 행동은 비합리적이며 감성적이거나 기이한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일생에서 경제 활동을 가장 왕성하게 해야 하는 청년층이 도통 돈이 될 것 같지 않은 일들을, 어울리지 않는 을지로에서 한다니.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의 비합리적인 행동이 스러져 가던 을지로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근면과 노동, 생산성 등의 수식어로 을지로의 기능적 측면을 부각하던 언론은 이제 전시와 음악, 커피와 와인 등이 속속 등장하는 을지로의 변화를 문화나 예술 같은 단어로 설명하고 있다. 제조업과 공업이 경제 발전의 일선에서 후퇴한 뒤에도 수십 년간 을지로 사람들이 제조업을 고수해 왔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을지로의 변화 속도는 경이롭다. 청년들은 수십 년간 장인들이 철제와 유리, 전자 회로와 씨름하며 두툼히 쌓아 온 세월에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다. 이들은 노동의 기억이 내려앉은 회색의 장소에 다채로운 즐거움을 끌어들여 도시의 의미를 다양하게 바꾸고 있다.

을지로에서 일어나는 탈합리주의적인 흐름을 일상이 사회 변화의 원천이 된다는 ‘일상생활의 사회학(sociology of everyday life)’과 ‘공간적 상상력(spatial imaginary)’이라는 사회학 틀로 바라보려 한다. 근대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사회의 거대한 흐름과 담론에만 주목하던 기존의 사회학적 관점에서 일상생활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비합리성의 영역은 과학적인 논리나 법칙으로 설명하고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의 사소한 일상은 언제나 사회에 존재해 왔을 뿐만 아니라 분명히 사회의 한 부분을 담당해 왔다. 일상생활의 사회학은 이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의 생명력과 민중이 가진 힘에 집중한다. 일상생활의 사회학 관점에서 노동과 놀이를 절묘하게 뒤섞은 청년들이 살아온 이야기와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갈 이야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심심한 도시 공간이던 을지로에서 청년들과 제조업 종사자들이 어우러져 만들어 낸 생동감 넘치는 이미지는 사람들에게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공간적 상상력은 일상의 공간이던 을지로를 다른 관점으로 비틀어 바라보게 하면서 사람들이 공간에 기억과 애정을 가지도록 한다. 상상력이 가미된 을지로는 각자에게 다른 이유로 소중한 하나의 장소가 된다.

그간 도시는 도구적이고 기능적인 역할만을 부여받았다. 효율성과 실용성에 입각해 건립된 도시 환경은 제 역할이 끝나면 흔적도 없이 철거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기존의 개발 방식은 노후한 건물과 함께 그곳의 역사와 삶의 흔적까지도 지운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따라 건축물의 외형은 최대한 살리되 그 용도는 실제로 사용할 수 있도록 바꾸는 도시재생 방식이 주목받고 있다. 을지로 역시 개발 방식의 변화로 근대적인 도시 환경을 간직할 수 있었고, 이제 청년들은 이곳에서 과거의 기억과 각자의 새로운 삶을 접목시킨다.

을지로의 가치는 청년들이 먼저 알아보았다. 도시재생지구로 선정되기 이전부터 을지로에 들어온 청년들은 이 일대를 단순한 제조업 지역이나 문화예술로 점철된 거리가 아닌 제조업과 문화예술이 적절하게 결합된 새로운 방향으로 재탄생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서울시의 도시재생사업 ‘다시·세운 프로젝트’도 이들의 방향성을 존중하며 협력한다. 단선적이었던 을지로 공간을 활용하는 경우의 수는 이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도시로서 을지로가 가지는 생명력 역시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

을지로의 변화를 이끈 영광을 청년들에게만 돌리자는 것도, 문화예술이 가진 거룩하고 위대한 힘을 칭송하자는 것도 아니다. 수십 년간 묵묵히 제조 산업에 종사해 온 이 일대의 제조업 종사자, 이른바 장인(匠人)들과 청년들이 함께 만들어 나가는 평범하고도 새로운 일상의 모습에 주목하고 싶었다. 을지로는 오랜 시간 축적해 온 노동의 이미지를 벗어나 기술과 예술, 낡은 것과 새것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방향으로 정체성을 만들어 가고 있다. 청년들이 천편일률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실험해 보는 곳이자 이들과 함께 살아가기를 기꺼이 선택한 제조업 장인들의 삶이 있는 곳이 바로 을지로다.

이탈리아의 작가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는 1972년작인 대표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탐험가 마르코 폴로와 그가 방문한 가상 도시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중국 황제 쿠빌라이 칸의 대화를 통해 있음 직하지만 없는, 말 그대로 상상 속의 도시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묘사한다. 환상 속에 존재하는 55개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으며 각기 다른 시공간의 연속선상에 존재한다. 그러나 마치 현실의 도시를 상상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공간이 지닐 수 있는 형태와 의미를 곱씹어 보게 된다. 칼비노는 도시란, 시민에게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유형의 재화와 더불어 거주민들의 기억과 추억, 언어와 기호, 개인적인 욕망 등 무형의 것들까지도 교환되면서 의미가 만들어지는 공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을지로 역시 마찬가지다. 도시를 바라보는 관점이 점차 달라지고 있는 지금, 서울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을지로에는 수없이 많은 기호와 욕망, 상징과 언어 등 엮어 낼 수 있는 요소가 풍부하게 잠재되어 있다. 이를 발견한 사람들이 각자 만들어 낸 다양한 결과물들은 도시를 이루는 하나의 무늬가 되고, 그 무늬들이 쌓이면서 도시는 의미를 가진다. 누적된 의미는 때로는 지역의 독특한 정체성을 지탱하는 힘이 되고, 때로는 도시가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하는 동력이 된다. 을지로는 계속 변화하고 있다. 앞으로 다른 모습으로 변화할 가능성 역시 무궁무진하다. 지속 가능한 도시를 위해서는 도시의 기억을 지키는 일을 제조업 상공인 협회나 예술가 단체에만 일임해서는 안 된다. 칼비노가 이야기했듯, 도시에는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각자의 의미가 담긴다. 을지로가 투기성 자본, 무수한 프랜차이즈 카페로 점철되는 뻔한 결말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장소로서의 가치를 지녀야 한다.

다시 을지로에 주목하려는 노력은 을지로가 회색빛의 보이지 않는 도시가 아닌, 무한한 활용 가능성과 선명하고 다양한 색을 가진 도시로 나아가는 토대가 되어 줄 것이다.
추천 콘텐츠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