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미국의 싱크탱크인 랜드(RAND)는 러시아가 도네츠크(Donetsk)와 하르키프(Kharkiv)를 포함하여 우크라이나의 동부 지역을 점령하고 장악하려면 8만 명 이상의 병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수도인 키예프까지 점령하려면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필요할 것이며, 이는 러시아 병력의 상당한 소모로 이어질 것이다. 향후에 일어날 일에 대한 장밋빛 추정에 근거하여 그러한 분쟁에 뛰어든 강대국의 사례는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덜 위험한 방법들도 있음을 알 것이다.
그래서 우크라이나의 싱크탱크인 방위전략센터(Centre for Defence Strategies, CDS)는 현재의 상황이 전통적인 전시체제보다는 “혼합형 침공(hybrid invasion)”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하다고 말한다. CDS에 의하면 이러한 혼합형 침공에는 사이버 공격, 허위정보 유포, 폭발물 위협과 같은 심리전 등이 포함될 것이라고 한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역에서는 학교나 관공서 등을 비롯한 비군사적 목표물을 겨냥한 수백 건의 폭파 협박이 있어 왔다.
만약 그런 행위를 통하여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사기를 떨어트리고 치안병력을 지치게 만들어서 자체적으로 정권의 변화를 초래한다면, 푸틴 대통령에게는 훨씬 더 나은 상황일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더욱 강력한 공세를 대비하는 단계로 돌입할 것이다.
CDS의 보고서는 또한 돈바스 지역에서의 “무장 세력 증가”를 언급하고 있는데, 현재 이 지역의 30퍼센트는 친-러시아 성향의 분리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정부가 이 지역의 러시아어권 소수 집단에 대한 대량학살을 자행하고 있다며 오랫동안 주장해왔는데, 가장 최근에는 지난 12월에도 그렇게 주장했다.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은 돈바스의 나머지 지역들까지 차지하려는 구실로 사용될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의 집권 여당인 통합러시아당(United Russia)의 블라디미리 바실리예프(Vladimir Vasilyev) 원내대표는 지난 1월 26일에 이렇게 말했다. “루한스크와 도네츠크 지역에서 군사적 포격이 증가하고 있고, 사람들은 또 다시 죽어가고 있고 고통 받고 있으며, 그들의 재산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루한스크와 도네츠크 공화국에 대한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필요한 군수품의 공급은 물론이고,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여 그들을 지원해줄 것을 우리나라의 지도부에게 호소하는 바입니다.” 그는 아무런 요청 없이 그러한 호소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포격만으로는 선동하기에 불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위장” 작전이 펼쳐질 수도 있다.
돈바스의 전선은 몇 년 동안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곳을 돌파하려면 러시아의 상당하면서도 명백한 개입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만 키예프로 곧장 진격하는 것보다는 적은 노력이 들 것이며, 외부에서도 좀 더 용인하는 태도를 가질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토니 블링컨(Tony Blinken) 국무장관은 “단 한 명의 러시아 병력이라도 우크라이나를 침범한다면” 제재조치가 촉발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의 동맹국들이 모두 강경노선을 취할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으며, 푸틴 대통령은 처음부터 대규모의 전쟁을 시작하기보다는 소규모의 전쟁을 확대시키는 것이 책임을 모면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러한 매력적인 요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바스의 장악에는 커다란 문제점이 존재한다.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푸틴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에 대해 쓴 글에서 “키예프에게는 돈바스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건 모스크바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돈바스의 장악은 단기적으로는 승리일 수 있고, 폭넓은 혼합형 전쟁의 맥락에서 보자면 우크라이나의 현 정권을 몰락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장기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우크라이나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서방 세계로의 움직임이 더욱 공고해지거나 가속화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푸틴이 독자적으로 혹은 다른 곳과 연계하여 수행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으로는 벨라루스로 이동한 러시아의 병력을 활용하여 벨라루스에 대한 통제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다. 벨라루스의 알렉산더 루카셴코(Alexander Lukashenko) 대통령은 비록 분개하고 있지만, 2020년의 부정선거로 촉발된 광범위한 시위에 대한 탄압은 물론이고 많은 면에 있어서 그가 러시아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벨라루스를 사실상 합병한다고 해서 반드시 제재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계속해서 위협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위치를 확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푸틴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연결하는 비좁은 지역인 수발키 갭(Suwalki Gap)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위협을 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곳은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을 나토의 나머지 국가들과 연결해주는 통로이기도 하다.
관료들의 무례함[4]
군사적 위험성에 더해서 정치적, 경제적 리스크도 존재한다. 전쟁에 대한 가능성으로 인해 이미 증시와 루블화는 폭락하고 있다. 전쟁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새로운 제재를 촉발시켜서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은행에서는 대규모의 인출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재산권이 확실하게 인정되는 서방과 원만하게 지낸다면 러시아의 부유층은 자식들에게 이것저것 넘겨줄 수 있겠지만, 외부와의 단절이 오랫동안 지속된다면 엘리트들에게는 매우 짜증나는 상황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