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구조가 변화하면 정치적 수요와 공급도 변화한다. 후기 산업 사회에 중산층이 성장하면서 좌파 정당과 우파 정당은 선거에서 최대한 많은 표를 받기 위해 중도로 이동한다. 이에 따라 전통적으로 좌파 정당을 지지했던 노동자들은 주변부에 머무르게 되면서 새로운 우파인 극우 정당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극우 정당이 비록 복지와 재분배 정책에는 무관심하더라도, 지지하던 좌파 정당이 중도로 이동한 데 대한 불만이 좋았던 시절의 국가를 강조하는 극우 정당에 대한 반동적 지지로 이어지는 것이다.[6]
경제적 좌우가 수렴된 것과 달리 해방주의와 권위주의의 간극이 큰 데에는 교육 수준의 차이가 크게 작용한다. 교육은 계급 상승의 통로인 동시에, 사회 변화를 바라는 해방주의적 정치 성향을 갖게 만드는 자유화 효과(liberalizing effect)를 일으킨다. 예를 들어 해방주의 녹색당의 지지자들은 대졸 이상이 중심인 반면 권위주의 극우 정당은 대졸 이상의 비율이 낮다. 또한 교육은 서로 다른 세대가 함께 경험하기 어렵기 때문에 세대 간 균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7]
이렇듯 경제적 좌우에서 사회적 좌우로의 변화는 사회 발전에 따라 시차를 두고 나타난다. 산업 사회에서 갈등의 중심이 경제적인 것이었다면, 후기 산업 사회에서는 사회적인 것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경제적 좌우의 중요성이 줄어들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경제 위기 같은 상황에서 경제는 중요한 선거 이슈다. 경제적 바탕 위에서 사회적 문제로 유권자들의 정치적 관심과 요구가 확장되는 것이다.
극우 정당이 등장할 수 있었던 균열 구조의 국외적 변화 요인은 유럽 통합의 심화이다. 좌우 이념의 대립이 극에 달했던 냉전 시대에 유럽은 소련이라는 공산 세력에 공동 대응해야 했다. 하지만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유럽 연합은 이제 초국가 권위체로서 회원국들의 국내 정치에 점점 더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는 국가라는 울타리를 강조하는 극우 정당이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반(反)유럽 연합을 주장하는 극우 정당이 유럽 회의주의자들(Eurosceptic)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1991년 12월 합의된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유럽 연합이 경제 공동체에서 정치 공동체로 질적인 통합을 해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 공동체(EC)는 유럽 연합(EU)으로 명칭을 바꿨다. 유럽 중앙은행 창설, 단일 통화의 사용, 공동 방위 정책, 유럽 의회의 권한 강화, 노동 조건의 통일, 유럽 시민 규정 등으로 하나의 유럽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되었다.
유럽 연합은 창설 과정에서 국가 중심적 통합과 초국가적 통합을 둘러싼 논란을 겪었다. 2004년에는 유럽 헌법의 실현이 좌절되는 등 진통을 겪었다. 그러나 2009년 리스본 조약에 유럽 헌법의 내용이 상당 부분 반영되면서 유럽 연합은 적법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마스트리히트 조약 이후 지속된 초국가적 통합 과정의 연장선이다.[8]
하지만 정치적 의사 결정이 국가에서 유럽 연합으로 상당 부분 이전된 다층적 거버넌스의 환경 속에서 국가의 자율성은 크게 제한받게 된다. 이에 대해 유럽 회의주의자들은 민주주의의 결핍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다. 유럽 통합에 따른 국가 주권의 퇴보를 지적하며 이러한 결정을 과연 국민이 승인했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러한 유권자들의 불만은 반(反)유럽 연합을 핵심적 정책으로 내세우는 극우 정당을 지지하는 배경이 된다. 거대 정당은 유럽 연합의 통합 정책을 지지하는 반면 극우 정당들은 반대하기 때문이다. 거대 정당은 현재의 정치 구도를 유지하기를 원하는 반면, 주변부의 정당들은 판을 흔들기 위해 유럽 통합을 선거 이슈로 활용하는 측면이 강하다. 유럽 통합은 극우 정당에게 ‘국내 반대 여론의 초석’(touchstone of domestic dissent)인 셈이다.[9]
극우 정당의 정치적 기회
앞에서 살펴본 균열 구조의 변화 요인은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작용한다. 균열 구조의 변화가 어떻게 실제 선거에서 극우 정당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미시적 차원에서 극우 정당의 정치적 기회, 즉 거대 정당과의 정책적 차이, 계기적 사건 등을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서는 2016년 브렉시트를 이끌었던 영국의 극우 정당인 영국 독립당을 사례로 이민 정책, 유로존의 위기, 정체성 폭력 등에 대해 살펴본다. 이들은 상호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극우 정당에 대한 지지 기반을 크게 확장시켰다.
영국은 1973년 유럽 연합의 전신인 유럽 공동체(EC)에 가입했지만, 특유의 유럽 회의주의 정서로 유럽 대륙과 거리를 유지해 왔다. 유럽 공동체에 가입한 지 2년 만에 탈퇴를 묻는 첫 국민 투표를 실시하여 부결되기도 했고, 유럽 연합 회원국이면서도 유로존에 가입하지 않아 파운드화 체제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1997년 집권한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정부는 친유럽 정책으로 유럽 통합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유럽 연합을 초국가적 수준에서 사회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기제로 바라본 것이다. 그러면서 기존의 제한적 이민 정책에서 벗어나 유럽 통합과 국가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경제 이민을 적극적으로 유도하였다.
이에 따라 이민자 순유입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1997년 4만 8000명 수준이던 것이 그다음 해에 14만, 2004년에는 26만 8000명으로 급증했다. 이에 따라 이민을 가장 중요한 당면 문제로 여기는 국민들도 토니 블레어의 임기 동안 크게 늘었다.[10]
일단 유럽 연합의 질서 속에 편입된 이상 정권이 보수당으로 넘어갔어도 그 방향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았다. 이민을 줄이겠다고 공약한 보수당은 2010년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유럽 연합의 ‘자유로운 이동’ 원칙으로 개방된 국경을 통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반면 영국 독립당은 유럽 연합 탈퇴라는 단일 목표를 위해 1993년 창당했다. 이들은 당헌에 유럽 연합 탈퇴를 명시하며 강성 유럽 회의주의 기조를 명확히 하고 있다. 영국 독립당은 영국이 초국가적 정치 연합에 가입함으로써 자치권이 상실되었으며, 따라서 유럽 연합으로부터 탈퇴하는 것만이 국가의 주권을 되찾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11]
영국 독립당의 반유럽 정책이 처음부터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니다. 철의 여인이라 불리는 마가렛 대처의 집권 기간에는 보수당이 권위주의 영역을 선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극우 정당이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블레어 정권이 친유럽 정책을 펼치면서 영국 독립당은 반이민 정책을 내세우며 성장의 기반을 다지게 된다.
영국 독립당은 블레어 집권 시절에 700만 명, 제임스 캐머런 집권 시절에 200만 명의 이민자가 영국으로 유입되었으며, 이로 인해 주거, 학교, 병원, 교통, 전력, 상수도 등과 같은 공공 서비스의 수요 압박이 급증했다고 거대 정당을 비판하면서 이민의 즉각적인 통제를 주장했다.[12]
이와 함께 정치적으로 소외된 노동 계급에 주목했다. 이들은 노동당의 중도화에 실망하여 투표를 하지 않거나 또 다른 극우 정당인 영국 민족당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과거처럼 노조의 보호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유럽 연합의 ‘자유로운 이동’으로 노동 시장까지 개방되자 국가의 보호자적 역할이 절실했던 노동 계급에게 이민 통제를 강하게 주장하는 영국 독립당은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영국 독립당은 거대 정당이 이민 문제에 머뭇거리는 동안 반이민을 분명하게 주장하며 노동자들을 동원했다. 이에 따라 1990년대 저조했던 득표율(1994년 유럽 의회 선거 1퍼센트, 1997년 총선 0.3퍼센트)은 2014년 유럽 의회 선거에서 27.5퍼센트, 2015년 총선에서 12.6퍼센트로 크게 성장한다. 이처럼 영국 독립당의 반이민 정책은 유럽 회의주의 유권자들의 충성도를 강화(deepening)하는 한편 지지 기반을 넓히는(broadening) 데에 크게 기여했다.
2009년 그리스의 재정 위기로 시작되어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아일랜드 등으로 확산된 유로존의 금융 위기는 유럽 연합에 대한 영국인들의 찬반 균열을 심화시켰다. 이전에는 유럽 연합 탈퇴와 잔류 의견이 비등한 가운데 잔류 의견이 조금 우세했지만, 금융 위기 이후에는 탈퇴 의견이 크게 앞서면서 격차를 벌려 나갔다.[13]
유로존의 위기는 국가 거버넌스 관점에서 상당한 문제를 야기했다. 통화 정책을 유럽 중앙은행이 관장하는 가운데 회원국이 재정 정책만으로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영국은 유로존 회원국이 아니었지만 유럽 연합 회원국으로서 발생할지 모를 부담에 대해서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유로존의 위기로 2014년 실시된 유럽 의회 선거에서 영국 독립당뿐만 아니라 유럽의 극우 정당들은 역대 가장 높은 득표율을 달성하게 된다. 영국 독립당과 프랑스의 국민 전선이 각각 27.5퍼센트, 24.9퍼센트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고, 오스트리아 자유당 19.7퍼센트, 독일 대안당 7.1퍼센트, 덴마크 국민당(DF) 26.6퍼센트, 핀란드 진정한 핀란드인당(True Finns) 12.9퍼센트 등 지지율이 크게 상승했다.
이러한 결과는 유권자 분포가 사회적 좌우 축을 중심으로 정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경제적 문제 또한 선거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유권자들은 전통적(경제적) 좌우 정당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사회적) 좌우 정당을 선택한다. 오늘날 유권자들의 정치적 요구가 경제 문제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유권자들은 신뢰를 상실한 기성 정치인들에 반발하고, 공인으로서 정치 지도자의 권위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정체성 폭력 또한 극우 정당의 지지 기반을 확장시켰다. 정체성 폭력은 ‘고정 불변의 단일 정체성이 숙명적이고 운명적이라는 환상이 길러 낸 폭력’이다. 종교적 신념, 정치적 지향, 이방인에 대한 혐오 등이 발단이 된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정체성에 갇혀 있을수록 갈등의 가능성은 더 높아지기 때문에 특히 종교의 경우 이러한 갈등에 상당히 취약하다.[14]
2001년 5월, 잉글랜드 북부의 소도시 올덤(Oldham)에서 발생한 남아시아인과 백인 사이의 유혈 충돌이 인근 도시인 번리(Burnely)와 브래드포드(Bradford)로 번지면서 수백 명의 경찰과 시민이 부상을 당하는 소요 사태가 발생했다. 이들 도시는 산업 시대부터 면직물 공업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출신의 무슬림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사태로 영국에는 다문화주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동화(同化)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일었다.[15]
올덤 사태에 이어 2005년 7월 7일 런던에서 발생한 테러는 다문화에 대한 국민적 우려를 더욱 증폭시켰다. 지하철역 3곳, 버스 1곳에서 발생한 테러로 56명이 숨지고, 7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서유럽에서 발생한 최초의 자살 폭탄 테러였다. 특히 피의자가 평범한 파키스탄계 영국인으로 밝혀지면서 이민자의 동화 정책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1주일 동안 5곳의 이슬람 사원이 불타고 100여 건의 보복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민에 대한 부정적 여론도 크게 증가했다.[16]
이러한 사건들은 영국 독립당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었다. 영국 독립당은 여러 차례 영국인의 정체성과 영국다움을 강조하면서 인종주의적 반이민 정책과 차별화했다. 영국 내에서 자체적인 샤리아 법을 따르고 있는 무슬림들은 사회적 통합에 장애가 되며, 특히 많은 수의 이슬람국가(IS) 테러범들이 유럽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경고한다. 영국인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은 자칫 인종이나 종교적 차별로 비판받을 수 있는 사안들에 대해 좋은 방어막을 제공했다. 이처럼 영국 독립당은 인종주의 정당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무슬림에 반감을 가지는 유권자들을 동원하고 있다.[17]
정치적 논란의 중심, 난민 문제
이민 정책, 유로존의 위기, 정체성 폭력 등은 극우 정당이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은 집권 경험이 없는 극우 정당에 정권을 맡기는 것은 주저하고 있다. 그래서 극우 정당들은 유럽 의회 선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도 총선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여 왔다.
하지만 난민 문제가 대두되면서 거대 정당의 입지는 약해지고, 상대적으로 극우 정당의 집권 가능성은 커지고 있다. 최근 퇴진을 예고한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2015년 난민 100만 명을 받아들이는 포용 정책을 추진한 뒤로 13년째 맡고 있는 총리직에서 퇴진할 것을 압박받아 왔다. 스웨덴 역시 같은 해 난민 16만 3000명을 받아들였다. 유럽 연합에서 인구 대비 가장 많은 규모다. 이로 인해 2018년 총선에서 참패한 거대 정당들은 정부조차 구성하지 못하고 있다.
유럽으로 유입되는 난민의 수는 1992년 크로아티아 및 보스니아 내전으로 67만 명, 2001년 코소보 내전으로 42만 명,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45만 명으로 크게 증가한 뒤 2006년 20만 명 이하 수준으로 감소하였다가 2010년 아랍의 봄과 2011년 시리아 내전으로 2013년 30만 명, 2014년 57만 명, 2015년 104만 명으로 또다시 급증하고 있다.[18]
영국 여론 조사 기관 입소스 모리(Ipsos MORI)에서 ‘다음 총선에서 투표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이슈가 무엇인가?’를 조사한 결과 난민 문제라고 응답한 사람은 영국의 경우 2001년 6퍼센트에서 2015년 25퍼센트로 크게 증가했다. 유럽 연합에 대한 긍정적 생각은 2004년 54퍼센트에서 2016년 44퍼센트로 떨어졌다. 이는 유럽의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여서 프랑스는 69퍼센트에서 38퍼센트로, 독일은 58퍼센트에서 50퍼센트로 떨어졌다.[19]
난민 문제는 난민을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일지에 관한 갈등이라는 점에서 사회적 좌우 갈등의 대표적인 문제다. 인권을 강조하며 난민 수용에 찬성하는 사회적 좌파와 사회 질서의 훼손을 우려해 반대하는 사회적 우파와의 갈등 해결은 쉽지 않다.
공동체적 가치와 권위
극우 정당의 성장과 함께 전통적 좌우 정당은 몰락하고 있다. 스웨덴의 2018년 총선에서는 100년 동안 1위 정당이었던 좌파 사회민주당이 역대 가장 낮은 득표율인 28.3퍼센트를 얻었고, 우파 보수당의 득표율은 이보다 더 낮은 19.8퍼센트를 기록했다. 반면 극우 정당인 스웨덴 민주당은 17.7퍼센트를 득표하면서 제3당으로 올라섰다. 프랑스에서는 현재 집권당인 중도 신당과 극우 정당인 국민연합이 2017년 대선 결선을 치렀을 만큼 전통적 좌우 정당이 힘을 잃어버렸다. 최근 여론 조사에서는 국민연합의 지지율이 집권당을 넘어서고 있다. 독일의 여론 조사에도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의 지지율이 집권당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거대 정당의 입지를 흔들고 있다.
전통적 좌우의 몰락은 새로운 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요구가 극에 달했음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유권자가 원하는 새로운 정치는 무엇인가? 경제 문제만은 아니다. 좌파와 우파 정권을 모두 경험한 유권자들이 거대 정당에 대한 신뢰를 거둬들이고 새로운 사회적 좌우 정당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경제 문제를 넘어, 국가의 역할과 지도자의 자질, 그리고 주권자로서 시민의 자발적 참여에 대한 공동체적 가치를 고민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시민들은 정치인, 기업인, 종교인 등 사회 지도자들에 대해 점점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공인으로서의 권위에 걸맞지 않은 행동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직위를 유지하기 어렵다. 시민들은 지도자의 권위는 시민에서 나온다는 주인 의식을 바탕으로 참여에 나서고 있다. 시민 민주주의, 참여 민주주의, 풀뿌리 민주주의, 숙의 민주주의 등 다양한 접근 방법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극좌, 극우 정당이 기성 정당을 비판하며 유권자 동원에 성공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정치 지도자들이 자격을 갖추고 시민들이 시민 의식을 고양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새로운 정치는 요원하다. 극우 정당을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사회적 우파로서, 극좌 정당을 시민의 자발적 참여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적 좌파로서 인식하고 서로의 발전적 역할을 모색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경제적 차원에서 시작한 민주주의를 사회적 차원에서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