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정신 건강 취약성은 청소년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10~30대 연령층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다. 사고나 질병 때문이 아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청소년이 가장 많다. 2019년 한 해 동안 자살로 생을 마감한 10대 청소년은 298명으로 전년 대비 2.7퍼센트 증가했다. 학급의 수로 따지면 10개 이상의 학급이 사라지는 셈이다. 정신과 진료를 받는 청소년의 수도 2016년 22만 587명에서 2020년 27만 1557명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20년 질병관리청에서 진행한 ‘청소년 건강 행태 조사’에서 최근 12개월 동안 2주 내내 일상생활을 중단할 정도로 우울감을 느낀 적이 있다고 응답한 청소년이 25.2퍼센트다. 네 명 중 한 명이 우울감을 경험할 정도로 심각한 현실이다.[4]
Fail이 된 F코드
한국의 경우 국민 네 명 중 한 명이 정신 질환을 경험하지만, 여전히 정신 건강 서비스 이용률은 낮은 것이 현실이다. 앞서 서술했듯 정신 질환을 경험했지만 정신 건강 전문가와 상담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22.2퍼센트에 불과하다. 각국의 정신 건강 서비스 이용률이 2016년 기준으로 캐나다 46.5퍼센트, 미국 43.1퍼센트, 벨기에 39.5퍼센트, 뉴질랜드 38.9퍼센트, 스페인 35.5퍼센트, 호주 34.9퍼센트, 남아공 25.2퍼센트인 것과 비교했을 때 낮은 수준이다.[5]
정신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를 찾지 못하는 것은 정신 질환에 대한 올바른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의 정신 질환 실태 조사에 따르면, 조현병이 있어도 정신 건강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 이유로 조사 대상의 82.4퍼센트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꼽았다. ‘저절로 좋아질 것’이라는 응답이 58.8퍼센트, ‘어떻게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지 몰랐다’는 응답이 23.5퍼센트로 뒤를 이었다.[6] 이는 기본적으로 정신 질환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중적 인지도가 낮음을 보여 준다. 정신 질환을 제대로 이해할 기회가 없기에 정신적 어려움을 정신 질환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정신 질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거나, 어떻게 서비스를 이용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정신적 어려움을 독특한 성격이나 특수한 상황 정도로 인식하고,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며 기다리게 된다.
혹은 기도나 굿 등의 종교적 힘을 빌리기도 한다. 치료라는 명목의 종교적 행위로 인해 정신 질환자는 더 심각한 고통에 빠지기도 한다. 실제로 정신병을 앓는 40대 여성이 무속인, 통칭 ‘법사’에 의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법사는 귀신을 내쫓아 주겠다며 배 위에 올라가 양발로 가슴과 배 부위를 수차례 밟았고, 피해자인 여성은 명치 충격에 의한 쇼크로 사망에 이르렀다.[7]
정신적 어려움이 있어도 정신과를 찾지 못하는 이유에는 정보 부족뿐 아니라 다양한 원인이 개입한다. 정신 질환에 대해 뿌리 깊은 편견도 큰 영향을 끼친다. 아프면 병원을 찾는 것이 당연하지만, 여전히 ‘내과 진료를 받았다’와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라는 명제 사이에는 인식의 차이가 크다. 신체적으로 아플 때는 당연히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신 질환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 정신 질환으로 병원을 찾는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가족에게도 숨겨야 하는 비밀로 생각한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것을 ‘정신 질환자’라는 사회적 낙인을 부여받는 것과 같다고 인식하는 이들이 많다.
세계보건기구가 정한 국제 질병 분류 기호상 정신과 질환 코드는 ‘F’다. 많은 사람들이 진료 기록에 F코드가 있으면, 정신 질환이 드러나 취업, 진학, 결혼, 보험 가입 등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진료 기록은 의료법, 건강보험법, 개인정보보호법 등에 의해 엄격하게 보호되며, 법에서 정한 특수 상황이나 본인의 동의 없이 제3자가 열람하거나 처리하는 것은 불법으로 처벌 대상이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인식은 부족한 상황이다. 정부는 2012년 ‘정신건강증진 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 정신과 진료 기록에 대한 두려움으로 치료를 기피하지 않도록, F코드 대신 보건일반상담의 ‘Z코드’를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일련의 노력에 비해 여전히 정신과 치료의 문턱은 높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정신 질환자가 되는 것이고, 이는 우리 사회에서 미친 사람, 위험한 사람, 예비 범죄자로 인식되는 것과 같다.
명문화된 ‘정신 질환자’ 꼬리표
실제 정신 질환에 대한 인식 조사 결과를 살펴보면[8] 83.2퍼센트의 사람이 ‘누구나 정신 질환에 걸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신 질환이 있는 사람들도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하는 비율은 65.0퍼센트에 그친다. ‘정신 질환이 있는 사람들은 사회에 기여하기 어렵다’에 동의하는 응답은 40.3퍼센트, ‘정신 질환자 이용 시설이 우리 동네에 들어와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39.0퍼센트로 나타났다. 누구나 정신 질환을 앓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지역 사회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비관적이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정신 질환을 편견 섞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정신 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실질적인 차별과 배제로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법률 중 정신 질환을 사유로 자격 취득과 취업을 제한하는 법률은 27개에 이른다. 특히 산후 조리원 운영, 수상구조사, 수렵 면허, 어린이집 설치, 아이돌보미, 주류제조관리사 관련 법률에서는 자격이나 면허 취득을 무조건적으로 제한하고 있다. 업무와의 직접적인 관련성이나 명확한 근거 기준은 없다. 정신 질환자를 미래의 잠재적 위험대상으로 판단해 취업과 자격 취득을 광범위하게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러한 자격 제한 규정이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권과 직업 선택의 자유, UN 장애인권리협약을 위배한 것으로 판단하고 2018년부터 개선을 권고하고 있다.[9] 정신 질환이 업무상 무능력과 잠재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구체적 근거가 없고, 다른 신체 질환과 마찬가지로 치료 가능하거나 치료 과정에 있는 것이며, 업무 적합성과 위험성 여부는 경중과 치료 경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에도 검증 절차 없이 법률로 배제하는 것이 문제라고 봤다. 하지만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속적인 권고에도 아직까지 법률 개정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법률상의 차별뿐 아니라 사회적 차별도 공공연히 일어난다. 대표적으로 보험 가입의 제한이 그렇다. 상법 제732조(15세 미만자 등에 대한 계약의 금지)는 심신 상실자 또는 심신 박약자의 사망을 보험 사고로 규정한 보험 계약은 무효로 하고 있다. 이를 악용한 일선 보험사에서 정신 질환자를 대상으로 한 보험 가입을 거절하는 일은 일반화된 사안이다.[10]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해당 사안 역시 법률 개정을 권고하고, 개정안 또한 발의됐으나 번번이 폐기됐다.
사회적 차별들에 대해 정신 질환자들은 어떻게 체감하고 있을까? 2020년 보건복지부의 자료에 따르면 정신 질환으로 인해 본인이 차별받고 있다고 느끼는 경우는 50.8퍼센트로 나타났다. 이는 다른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두 배에 달하는 수치다.[11] 정신 질환자는 이러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 부딪히며 정신 질환이 주는 고통보다 더 큰 좌절에 빠지게 된다. 조현병 당사자로서 정신 장애를 연구하고 있는 이관형 씨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조현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숨겨왔다고 했다. 하지만 운전면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현병을 앓고 있다고 적을 수밖에 없었다. 서류를 제출한 후, 그 직원이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에 그는 좌절했다.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눈빛에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을 쏟았다.[12] 정신 장애 인권 단체 ‘파도손’의 이정하 대표는 정신 질환자라는 낙인이 자신의 이름 세 글자보다 더 자신을 대표하는 ‘꼬리표’가 된다고 말했다. 정신 질환자가 되면 자신의 감정과 의견조차도 미친 사람의 것이 되어 버린다.
뇌의 사형선고라는 꼬리표를 달고서
사실 나는 내가 정상이에요 라고 하면 미쳤다고 한다.
당신은 정상의 범주이므로 미치겠네 미치겠네 해도 미치지 않았다.
고로 정상일 필요도 없다.
내면의 소리를 내거나 하면
그 소리의 중요성이나 내용보다
미친 자의 한계를 논하는 것으로 마감되기 마련이다.
화를 낼 만해서 화를 내면…
미쳤기 때문에 나는 화를 내거나 할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다.[13]
정신 질환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은 치료의 접근성도 떨어뜨린다. 정신 질환은 조기에 발견하고 치료할 경우 예후가 좋다. 하지만 실제로 우울증 환자의 3분의 1이 치료를 받으러 오지 않고, 그 중 20퍼센트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정신 질환의 증상이 나타난 시기로부터 치료를 시작할 때까지의 미치료 기간(Duration of untreated psychosis · DUP)은 예후에 있어 중요한 요인이 된다. 우리나라의 초발 정신 질환의 DUP는 54주로, 영국 등 서구 국가가 일반적으로 약 6개월인 것과 비교하면 두 배가 넘는다. 조기 개입을 통해 치료 효과를 높일 수 있는 골든 타임을 놓치게 되면 만성 정신 질환으로 이어져, 높은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게 된다. 실제로 DUP가 길어지면 치료비가 40배 이상 든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14]
이에 서구에서는 정신 건강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국가 차원의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호주의 경우 ‘마인드매터스(MindMatters)’라는 사업을 통해 청소년 시기부터 정신 건강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서비스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도록 한다. 학교 교과 과정에서 정신 건강에 대한 이해를 다루고, 교사들이 학생들의 정신 건강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교육하며, 지역 사회 정신 건강 서비스와의 협력 체계를 구축한다. 영국은 ‘아이앱트(Improved Access to Psychological Therapies · IAPT)’를 통해 국민 누구나 쉽게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아이앱트는 공공 의료 체계에서 제공하는 무료 상담 서비스로, 정신적 어려움이 있을 때 기본 네 번의 전화 혹은 대면 상담을 제공하며, 이후 치료가 필요한 경우 정신 의료 체계로 연계한다. OECD는 2013년 한국의 정신 건강 체계를 조사한 후 아이앱트 서비스를 권고한 바 있다. OECD는 한국과 같이 자살률이 높고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한 국가에서는 접근성이 높은 보편적인 심리 치료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서구에서 정신 건강 서비스는 치료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포괄적인 서비스를 의미한다. 이미 1970년대 이후 입원 병상을 적극적으로 줄이는 대신, 지역 사회 기반의 정신 건강 서비스를 확대해 왔다. 미국은 주립 병원을 중심으로 1950년대 50만 개의 정신 병원 병상을 1990년대 3만 8000개까지 축소했다.[15] 대신 입원하지 않고도 지역 사회에서 이용할 수 있는 정신 건강 상담, 위기 쉼터, 집중 사례 관리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힘을 쏟았다. 호주의 경우 1993년부터 다섯 차례에 걸친 정신 건강 개혁 정책을 통해 연령에 따라 아동·청소년, 성인, 노인 세 집단으로 구분하고, 지역 구획에 따른 서비스 체계를 구축했다. 공공 의료 중심의 치료 서비스뿐 아니라 지역 사회에서의 주거, 고용, 재활, 사회 활동 참여에 이르는 포괄적인 서비스 체계다. 정신 건강에 접근하는 서구 사회의 태도는 의료적 치료를 넘어 일상 유지를 돕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정신 질환에 대한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처음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것을 꺼리는 사람이 많다 보니 치료의 대안으로 심리 상담을 받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은 민간 기업에서 운영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한 시간에 10만 원에 달하는 큰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기관을 선택할 수 있는 정보도 부족하다. 설령 어렵게 정신과 치료를 결심하더라도 자신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찾는 것 역시 매우 힘들다. 혈액 검사, X-ray, CT와 같은 검사에 의해 진단을 내리는 신체적 질환과 달리 정신과는 의사의 판단과 상담 기술이 더욱 중요하다. 하지만 일반인 입장에서 병원이나 의사를 선택할 때 고려할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을뿐더러 판단도 어렵다. 정보 불균형은 정신 질환에서 더 가중된다. 정신과를 방문하더라도 실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10분도 채 되지 않으며, 약물 처방이 전부인 경우가 많다. 되도록 많은 환자를 받아야 수익이 나는 의료 수가 체계상 심층적인 상담은 한계가 있다.
그나마 자발적으로 외래 치료를 받으면 다행이다. 이미 증상이 심각해졌거나 자타해(자해·타해)의 위험까지 보이면 강제 입원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자유로운 의료 계약에 따르지 않는 강제 입원은 개인의 자유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일종의 구금 행위다. 따라서 서구에서는 강제 입원에 대해 사법 혹은 준사법 기관을 통한 엄격한 절차를 거치도록 하며, 강제 입원자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권리 옹호 체계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가족과 의사에 의한 입원이 가능하다. 현행범으로 잡힌 범죄자에게도 보장되는 자기변호의 권리가 우리나라 정신 질환자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민간 의료가 90퍼센트를 차지하는 한국 의료 체계에서 입원은 곧 병원의 수익과 연결된다. 한 번의 입원은 장기 입원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의 평균 입원 기간은 124.9일로[16], 일주일에서 한 달 정도인 서구권과 비교했을 때 네 배나 길다.
장기 입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병원 치료 이후 지역 사회에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지원 체계가 필요하다. 우리나라도 1995년 정신보건법을 제정하고 시군구마다 정신 건강 복지 센터를 설치했다. 하지만 제 기능을 하기에는 구조적으로 매우 취약하다. 열 명에서 스무 명 남짓의 전문가가 정신 건강, 자살, 중독, 교육, 중증 정신 질환자 관리까지 맡고 있다. 규모에 비해 매우 광범위한 사업을 담당하고 있으며 한 명의 정신 건강 전문가가 지나치게 많은 정신 질환자를 지원해야 하는 상황이다. 현재 한 명의 정신 건강 전문가가 20명에서 60명에 이르는 정신 질환자를 지원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한 달에 한 번의 가정 방문조차 쉽지 않다.
치료 후 정신 질환자의 재활과 회복을 지원하는 기관은 정신 재활 시설이다. 정신 재활 시설은 일상생활 및 취업 지원, 사회 기술 훈련, 주거 제공 등의 기능을 수행한다. 정신 질환자의 회복을 위해 필수적이지만 시설 수는 턱없이 적다. 전국 시군구 중 정신 재활 시설이 단 한 곳도 없는 지역이 45.9퍼센트로, 105개 지역에 이른다.[17] 시설이 편중되어 있는 수도권조차도 상황은 열악하다. 경기도 지역의 경우 발달 장애인을 위한 주간 보호 시설이 150개인 반면, 정신 장애인을 위한 주간 재활 시설은 10개에 불과하다. 한국의 정신 건강 체계는 개인이 알아서 찾아가야 하는 민간 의료 중심의 치료 서비스만이 중심을 이룬다. 서구와 같은 지역 사회 기반의 포괄적인 공공 서비스는 매우 취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