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짊어진 사람들
8화

북저널리즘 인사이드 ; 인내하는 사람들

우크라이나 일대의 긴장감이 고조되던 때를 기억한다. 누구도 러시아가 쉽게 현상 변경을 시도하리라 생각지 못했다. 뉴스로 전해지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얼굴은 밝았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바꾼 세계의 풍경은 참혹했다. 그 최전선에는 우크라이나 국민이 있다. 러시아의 미사일이 가장 먼저 부순 것은 세계 경제도, 천연가스도, 곡물도 아닌 우크라이나 곳곳의 건물 지붕이었다. 군사·안보 분야의 현대화조차 민간인의 피해를 막지 못했다. 내전 일색의 중동에서 몇십 년간 숱한 민간인의 사망을 목도하면서도 자국의 이해관계를 넘어 전쟁을 바라보지 못했던 대가는 뼈아팠다.

침공 초만 해도 세계는 전쟁의 참상을 다뤘다. 그 문제가 ‘나’와 ‘우리나라’의 문제로 도래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키이우에 쏟아지는 미사일에 세계는 경악했고 지도자들은 확전을 우려했으며 온·오프라인에선 수많은 사람이 반전 시위와 함께 연대 의사를 표시했다. 전쟁의 경과에 따라 이합집산을 반복하던 세계는 이제 인플레이션을 얘기한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여론전에 실패했지만 인지전(Cognitive Warfare)에선 일부 성공을 거둔 모양새다. 전쟁은 어느덧 거시 환경의 하나로 표현되고 있다. 전쟁의 참상은 잊혔다. 세계는 어쩌면 거대한 트라우마를 겪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르키우의 자원봉사자 안드레이의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를 기억한다. 잔인한 폭격과 군대의 영웅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이 보도되던 침공 초기, 누구도 자원봉사자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군대과 정부, 국제 기구가 돌보지 못한 곳에는 숨은 영웅들이 있었다. 화상 회의로 만난 안드레이는 전쟁을 겪은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했다. 그 침착함이 비단 그의 성정이 아니라, 전쟁을 이겨내고 봉사를 이어나가는 데 필요한 태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밝은 모습으로 인터뷰에 응해준 리페어투게더의 테탸나에게서도, 꼭 아이들처럼 순수해 보였던 드미트로와 아르촘에게서도, 알 수 없는 담담함과 초연함이 느껴졌다. 서면으로 이야기를 나눈 나스차와 올레나는 투사이자 프로다. 서면이었지만 강인한 의지와 확신이 전해졌다. 이들은 자신보다 더 위험에 놓인 사람들을 끌어안고 전쟁의 무게를 몸과 마음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책의 제목은 《전쟁을 짊어진 사람들》이 됐다.

인도주의와 애국심은 이들을 설명하는 단어가 아니다. 이들은 인내하는 자다. 인터뷰를 진행하며, 전쟁이 인재(人災)라면 이를 이겨낼 수 있는 것 역시 인간일 것이라는 희망이 솟았다. 흔히 국제 정치 이론에서 주요 행위자라 말하는 ‘정책 결정자(decision maker)’나 여론을 말하는 게 아니다. 구조적 사고를 벗어나 현실로 눈을 돌리면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이 전쟁을 인내하며 희생하는 이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은 이들의 얼굴을 하지 않았지만 이들을 세상에 소개해야 했다. 모두가 지쳐도 지칠 수 없는 사람들, 세계가 시선과 지원을 거두어도 자신이 발 딛고 선 땅의 미래를 그리는 사람들. 이들의 이야기가 전쟁을 잊은 한국에 작은 경종을 울리길 희망한다. 우크라이나에 작은 보탬이 될 기회가 주어짐에 감사하다. 아울러 자기 일처럼 이 전쟁을 기록하고 인터뷰이의 이야기를 옮겨 준 정소은 번역가에게 마음 깊이 고마움을 전한다.

이현구・정원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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