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톨 사이즈의 모닝커피로 하루를 시작하고, 그 사이에 틈틈이 녹차를 마시며, 점심을 먹고 나서는 가끔씩 카푸치노를 마신 지 몇 년이 흘렀을까.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갑자기 카페인을 끊었다. 특별히 그 필요성을 느껴 끊었다기보다는 집필하고 있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필자가 인터뷰했던 다수의 전문가는 카페인을 끊어 보지 않는 한, 보이지 않게 서서히 스며드는 카페인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이후 다시 카페인을 섭취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기분전환 약물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연구자이며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DSM-5)〉에서 ‘카페인 금단현상(caffeine withdrawal)’ 진단 항목을 책임지고 집필한 롤랜드 그리피스(Roland Griffiths)는 이렇게 말했다. 그 자신도 카페인을 끊은 다음 스스로를 대상으로 일련의 실험들을 진행하기 전까지는 카페인과 자신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카페인을 섭취하는 이유는 그저 의식의 ‘기저선 상태(baseline state)
[1]’에 도달하기 위해서다. 전 세계 인구의 90퍼센트 정도가 주기적으로 카페인을 주입하고 있다. 카페인은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향정신성 약물이며, 일상에서도 흔히 탄산음료의 형태로 아이들에게 제공하는 물질이기도 하다. 카페인을 약물로 생각한다거나, 매일 섭취하더라도 그것을 중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이러한 인식이 너무나도 만연해 있기 때문에, 카페인을 섭취하면 의식의 기저선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의식의 ‘변성 상태(altered state)’가 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이는 우리 모두가 경험하기 때문에 그 영향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1. 이것은 중독이다
과학자들의 상세한 설명을 통해서 예상했던 카페인 금단 증상은 두통, 피로감, 무기력, 집중력 저하, 의욕 감퇴, 신경 과민, 극심한 괴로움, 자신감 상실, 불쾌한 감정 등이다. 그러나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집중력 저하’라는 증상은 작품을 써야 하는 작가에게는 실존적인 위협이나 다름없다. 집중할 수 없는데 어떻게 글을 쓸 수 있겠는가?
나는 글쓰기 일정을 최대한 뒤로 미뤘지만, 결국 암흑기가 찾아왔다. 인터뷰했던 연구자들에 의하면, 금단증상이 실제로 시작되는 건 밤 시간대라고 한다. 사람이 자는 동안 카페인의 일주기 영향(diurnal effect)
[2] 그래프에서 “가장 낮은 지점”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하루 중 처음 마시는 한 잔의 차나 커피가 가장 위력적이며 즐거움을 주는 이유에는 카페인 특유의 도취적이며 자극적인 특성도 있겠지만, 바로 그 한 잔이 밤사이에 시작된 금단증상을 억눌러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카페인의 교묘한 부분이다. 카페인이 인체에 작용하는 약리학적 기전은 우리의 생체리듬과 너무나도 완벽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정확한 시점에 모닝커피 한 잔을 공급해야만 전날 마신 커피가 유발하는 정신적 고통을 막아낼 수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카페인은 바로 그 카페인이 만들어 낸 문제에 대한 최적의 해결책을 자처하고 있다.
나는 커피숍에서 일상적으로 마시던 ½디카페인(half caff) 커피 대신에 민트 차 한 잔을 주문했다. 아침에 카페인을 마시면 의식의 내부에 잔뜩 끼어있던 멘탈 포그(mental fog, 마음의 안개)
[3]가 말끔하게 걷히곤 했지만, 이날 아침에는 그렇지 않았다. 내 마음에 내려앉은 그 안개는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끔찍한 기분이 드는 건 아니었다. 심각한 두통이 찾아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 자신과 현실 사이에 마치 차단막이 내려진 것처럼 하루 종일 약간 몽롱한 상태가 지속됐다. 그것은 일종의 필터가 되어 특정한 파장의 빛과 소리를 흡수했다.
나는 어떤 일을 할 수는 있었지만, 주의가 산만했다. 당시의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마치 뭉툭한 연필이 된 느낌이다. 주변의 상황들이 나를 방해하는데, 그것을 무시하기가 어렵다. 1분 이상 집중할 수 없다.”
이후 며칠 동안 조금씩 기분이 좋아지며 차단막이 올라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온전한 나 자신이 아니었고, 세상도 아직은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이러한 새로운 일상(new normal) 속에서 나는 세상이 약간 무감각하게 느껴졌다. 나 자신도 약간 무감각하게 느껴졌다. 최악의 시간대는 아침이었다. 나는 자는 동안 의식이 흐릿해졌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는 일상적인 활동에서 카페인이 얼마나 필수적이었는지를 깨달았다. 그렇게 다시 제정신을 차리는 시간이 예전보다 훨씬 더 길어졌지만, 완전히 온전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2. 유럽이 커피를 만난 순간
인류가 카페인과 처음 조우한 건 놀랍게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렇지만 이 분자가 세상을 다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커피와 차는 인간의 정신이라는 근본적인 수준에서부터 변화를 일으켰다. 사람의 기분에 변화를 유도했다. 알코올에 의해 흐려진 정신을 날카롭게 가다듬어 주고, 자연의 섭리에 의해 움직이는 신체와 태양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면서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활동을, 그리고 단언컨대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15세기 무렵에는 커피가 아프리카 동부에서 재배되고 아라비아 반도 전역에서 거래됐다. 초기에는 이 새로운 음료가 집중력 보조제로 여겨졌고, 예멘에서는 수피(Sufi)교 사람들이 종교의식을 진행하면서 졸음을 떨쳐내기 위해 사용했다. 차(茶) 역시 불교의 승려들이 오랜 시간 명상을 하면서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데 약간의 도움을 얻기 위해 마시기 시작했다. 불과 한 세기 만에 아랍 전역의 여러 도시에서 커피하우스(coffeehouse)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1570년에는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 한 곳에만 600여 개의 커피하우스가 있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북쪽과 서쪽으로 널리 퍼져있었다.
이 시기의 이슬람 세계는 과학이나 기술, 교육 등의 많은 측면에서 유럽보다 더욱 발전돼 있었다. 이러한 정신적 풍요로움이 커피의 유행과 (그리고 알코올의 금지와) 관련이 있는지 그 여부를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독일의 역사학자인 볼프강 쉬벨부시(Wolfgang Schivelbusch)는 이 음료가 “알코올 섭취를 금하고 근대 수학을 탄생시킨 문화권을 위해 맞춤형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1629년에는 아랍과 터키의 스타일을 모방한 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이탈리아의 베니스에서 모습을 보였고, 1650년에는 유대계 이주민이 옥스퍼드에서 영국 최초의 커피하우스를 열었다. 커피하우스 문화는 머지않아 런던에까지 이르러서 급증하기 시작했다. 수십 년 후 런던에는 수천 개의 커피하우스가 존재했는데, 그러한 유행이 정점에 달했을 때에는 런던 시민 200명당 하나의 커피하우스가 있을 정도였다.
영국의 커피하우스를 새로운 유형의 공공장소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는 그 실체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1페니를 지불하긴 했지만, 신문이나 책, 잡지, 대화 등의 형태로 전달되는 정보는 무료였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커피하우스를 ‘페니 대학교(penny university)’라고 부르는 경우도 흔했다. 프랑스의 막시밀리앙 미송(Maximilien Misson)이라는 작가는 런던의 커피하우스들을 방문한 이후에 이렇게 썼다. “그곳에 가면 온갖 종류의 소식을 접할 수 있다. 난방도 잘 되고, 원하는 만큼 오랫동안 앉아 있어도 된다. 이곳에서는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다. 지인들을 만나서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단돈 1페니에 가능하다. 혹시라도 더 많은 비용이 들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런던의 커피하우스들은 손님들의 직업이나 지적인 관심사에 따라서 서로 구분됐는데, 이러한 특성이 결국엔 제도적인 형태로 발전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서 해상 운송에 관심이 있는 상인들과 남성들은 로이즈 커피하우스(Lloyd’s Coffee House)로 모여들었다. 이곳에서는 어떤 선박이 도착하고 출발하는지 파악할 수 있었고, 자신의 화물에 대한 보험 증서를 구입할 수 있었다. 로이즈 커피하우스는 결국 런던 로이즈(Lloyd’s of London)라는 보험 중개 회사로 발전했다. 지식인들과 당시 ‘자연철학자(natural philosopher)’로 불렸던 과학자들은 그리션(Grecian)에 모여들었는데, 이들은 왕립학회(Royal Society)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이작 뉴턴(Isaac Newton)과 에드먼드 핼리(Edmond Halley)가 이곳에서 물리학과 수학에 대하여 토론을 벌였으며, 언젠가는 이곳에서 돌고래를 해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런던의 커피하우스에서 오가는 대화가 정치적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빈번했는데, 특히 1660년 왕정복고 후에는 커피하우스에서 활발하게 이뤄지는 자유로운 발언들이 정부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커피하우스에서 모의가 싹트는 것을 우려했던 찰스 2세는 이런 곳들이 반란을 선동하는 위험한 장소이기 때문에 탄압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1675년에 국왕은 그런 곳에서 흘러나오는 “거짓되고 악의적이며 선정적인 이야기들”이 “왕국의 고요와 평화에 대한 장애물”이라는 근거로 커피하우스 폐쇄 조치를 단행했다. 사람의 의식적인 성질을 변화시키는 다른 수많은 물질들과 마찬가지로, 카페인은 제도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됐다. 그래서 왕권은 카페인 탄압을 단행했는데, 이는 먼 훗날에 전개될 마약과의 전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왕이 커피를 상대로 벌인 전쟁은 겨우 11일 만에 끝났다. 찰스 2세는 카페인의 조류를 되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음을 깨달았다. 당시의 커피하우스는 영국의 문화이자 일상의 일부였고, 런던의 수많은 저명한 인사가 카페인에 중독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왕의 명령을 무시하고는 태평하게 커피를 마시러 갔다. 자신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는 사실이 들통나는 걸 두려워했던 국왕은 조용히 물러났다. 그리고 “군주의 배려와 왕실의 연민을 발휘하여” 애초의 명령을 철회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17세기의 프랑스와 영국의 커피하우스들에서 들끓어 올랐던 이러한 종류의 정치적, 문화적, 지적 소요가 술집에서도 전개됐을 거라고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알코올의 도움을 받았던 중세인들의 신비주의적인 사고는 합리주의와 그에 뒤이은 계몽주의 사고라는 새로운 정신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하여 프랑스의 역사학자인 쥘 미슐레(Jules Michelet)는 이렇게 썼다. “정신을 맑게 해주며 두뇌의 강력한 자양분이 되는 커피는 여타의 증류주와는 다르게 순수성과 명료함을 높여 준다. 커피는 망상의 먹구름과 그것이 가진 음울한 무게감을 걷어낸다. 커피는 진실의 불빛으로 현실의 실체를 비춰준다.”
“현실의 실체”를 명료하게 바라보는 것. 이것이 바로 합리주의자들이 추구하는 목표였다. 현미경, 망원경, 펜과 함께 커피는 그들에게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