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박사하기
5화

대학원의 미래, 미래의 대학원

무거운 꼬리표, 융복합


이우창 모두 제가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더 진지한 태도로 많은 내용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논의할 기회가 이제껏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되네요. 어쨌든 드디어 마지막 주제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앞서 대학원과 학계의 현재에 관한 의견을 공유해 주셨다면, 이번에는 먼저 각자가 대학원과 학계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는지, 혹은 어떤 미래를 만들어 가고 싶은지 자유롭게 이야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거시적인 이야기도 좋고요, 아니면 융복합, 4차 산업 혁명, 무엇이든 AI처럼 현재 학계의 변화를 주도하는 구체적인 키워드나 흐름에 관한 코멘트도 좋습니다. 그 뒤에 각자 연구자로서 스스로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는지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오늘의 긴 대화를 마칠까 합니다.

조승희 저도 여기 계신 다른 분들과 인문·사회 학술장의 여러 현실적인 문제를 토론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이 대화를 마무리하기 전에, 제가 소속돼 있는 대학원을 비롯해 많은 연구 커뮤니티의 현실을 수식하는 개념인 융합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방금 이우창 선생님도 언급해 주신 몇 가지 핫한 키워드 중 하나기도 하네요. 융합은 많은 학과가 살아남는 좋은 도구일 수 있지만, 학생들에겐 좀 무거운 꼬리표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융합을 크게 두 가지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연구 프로젝트 수행을 위해 서로 다른 두 분야가 힘을 합치는 융합 연구, 즉 협업 방법으로서 융합이에요. 융합은 2008년 이명박 정부 당시 ‘국가융합기술발전 기본계획(09’~13’)’이 시행되면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죠. 연구 과정에서 내 전공 분야의 지식만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워 다른 분야의 전문성이 필요할 때, 국가의 융합 연구 지원은 가뭄에 단비 같겠죠. 하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 당시 융합 연구가 과열된 분위기에선 예산을 위해 없는 결핍까지 찾아내 일회성 융합 연구를 억지로 진행하는 경우를 많이 보기도 해서 아쉬웠습니다. 물론 오랫동안 과학기술, 인문학, 예술 간의 융합 연구를 지속하는 경우도 있고, 그런 연구에 대한 수요도 늘어나는 추세인 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요.

이것과 다르게 융합의 또 한 가지 개념은 저처럼 다학제 전공인, 즉 ‘융합인’을 육성하는 환경으로서 융합이에요. 제가 다니는 대학원도 정부에서 한참 융합을 강조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생긴 학과였습니다. 그 뒤로 카이스트에도 뭔가 이름이 긴 학과들이 많이 생기기도 했었어요. 융합인을 육성하는 학과를 만드는 일은 융합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보다 훨씬 의미가 무겁다고 생각해요. 융합 학과를 나온 학생은 평생 융합인으로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거든요. 융합인은 경제학, 역사학, 정치학과 같은 전통적인 전공을 가진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입장을 가지게 됩니다. 어디 나와서 나는 역사학을 하는 사람이다, 나는 인류학을 하는 사람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과학기술정책을 전공해서 이 학과가 무엇인지, 무엇에 특화된 곳인지 설명해야 하는 사람은 입장이 다릅니다. 돌고 도는 키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학과 이름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습니다.

융합 외에도 녹색, 창조 경제, 4차 산업혁명, 최근엔 인공지능 등, 대개 정권이 바뀌면서 한 번씩 핵심 키워드가 될 만한 말을 물갈이하는 느낌이 있어요. 정부에서 한번 키워드가 발표되면 예산은 그쪽으로 거의 다 몰리게 되고, 한국의 거의 모든 정책의 앞부분 이름은 그걸로 바뀌고. 연구실과 학과, 전공 이름에도 그 키워드가 쏙쏙 들어갈 때가 많습니다. 학과가 생존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좋은 방편이라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키워드가 빠르게 변화하는 일은, 역시나 대학원생에겐 평생 따라다니는 자격증 이름이 바뀌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죠. 그런 신생 학과를 만드는 교수님들은 대개는 들으면 딱 알만한 전공 출신이신 분이 많지만, 그 전공을 졸업해서 나온 학생은 자기 전공이 무엇인지 길게 소개해야 합니다. 신생 학과, 신생 학문이라고 해서 이 세상에 없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기존에 있는 학문으로 트레이닝을 받거나, 기존에 있는 학계의 일원이 되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아무튼 학계와 대학원에선 일종의 생존 전략으로 신생 학문 만들기를 해왔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신생 학과를 졸업하고, 신생 학문 분야를 전공으로 삼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이 배출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쏟아져 나올 거고요. 이런 상황에서, 비단 저와 같은 융합인 뿐만 아니라 모든 전공의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할 줄 아는 사람인지 잘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것 같아요. 정리하자면 융합 연구는 그 시대에 맞게 빠르고 유연하게 하되, 융합인 육성은 느리고 신중하게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수영 저도 융복합 학문에 대한 이야기를 보태 볼게요. 제가 카이스트에 입학했을 때가 이명박 정부가 막 출범한 2008년이었는데, 당시에 우후죽순처럼 융복합 연구 지원 사업이 생겨났던 기억이 있어요. 당시 융복합 연구 상황을 좀 들어 보면, 연구와 펀딩을 여러 파트로 쪼개서 각자 연구를 진행하고 마지막에 결과물만 합쳤다고 하더라고요. 모든 사업이 그렇게 진행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에요. 그래도 그 이후에 카이스트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지인이 뭔가 나쁜 결과물이 나왔을 때 학생들끼리 “융합됐다”는 표현을 썼다고 하신 걸 보면, 제대로 융복합 연구가 이루어진 사례가 별로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마냥 탓하기는 어려운 것이, 융복합 연구를 제대로 진행하기가 정말 쉽지는 않은 것 같거든요. 학문 간에 연구 방법론은 말할 것도 없고, 언어부터가 다르잖아요. 그래서 다른 학문을 하는 사람들끼리 공동 작업을 하려면 서로의 언어를 익히는 과정부터 해서 굉장히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것이 잘만 된다면 문제를 굉장히 다층적이고 새로운 관점에서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그런데 이게 뚝딱 되는 것도 아니고 공동 의제가 없으면 딱히 동력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탑다운 방식으로 진행한다 해서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올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죠. 대학 입장에서도 제대로 된 결과물을 만드는 것보다는 펀딩을 더 많이 끌어오는 게 목적이었던 것 같고요.

조승희 선생님께서 융합 연구와 융합 전공을 잘 구분해 주셨는데, 융합 전공에 대한 얘기를 좀 더 해볼게요. 예전에 학부 다닐 때를 돌이켜 보면 복수 전공을 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거든요. 그런데 최근 이야기를 들어 보면 복수 전공을 하는 학부생분들이 굉장히 많은 것 같아요. 물론 하나의 전공만 가지고는 취업이 어려울 것 같다는 문제의식과 함께, 경제학, 통계학, 데이터 과학 등으로 쏠림 현상이 있는 것 같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이대로라면 다종의 것을 번역하는 데 익숙한 후배들이 훨씬 더 많이 배출될 것 같은데요. 이런 흐름을 그냥 내버려 두지 말고, 대학 내에서 지식의 수요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유심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문제는 이 학문과 저 학문이 같이 풀어야 한다, 학생들이 이 학문과 저 학문을 자주 엮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고 관련해서는 어떻게 지도해야 한다는 식의 지식들이 대학에 누적되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를 들어 지리학의 GIS 분과는 최근 컴퓨터 과학에서 발전된 기법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크거든요. 그래서 관련 지식을 얻고 싶은 학생들은 통계학과 등 다른 분야의 수업을 듣는데, 해당 수업은 지리학의 문제의식에 기반을 두거나 공간 모델링에 최적화된 것이 아닌 경우가 많죠. 결국 학생들 입장에서는 원하는 지식 습득에 있어 시행착오를 많이 거치게 되는데요. 학과의 장기 비전이 학생들의 수요와 부합한다면, 강의나 세미나가 해당 흐름에 빨리 발맞춰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학제 학문을 하더라도 어쨌든 베이스캠프를 가지게 된다는 차원에서, 저는 융합 학문의 발전이 대체로 전통적으로 강한 학문이 더 강해지는 효과를 낳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여러 학문을 오가는 번역가들이 점차 쌓여 가면서, 학계가 의제 중심으로 여러 사람들을 모으기 좀 더 수월한 환경이 되지 않을까 라는 희망도 있네요.

전준하 연구 주제를 막론하고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가 연구 배경이나 서론에 곧잘 등장하고, 학문 분야를 막론하고 인공지능이나 메타버스 같이 유행하는 개념을 연구 대상 또는 주제로 삼아 너도나도 융복합 연구를 한다고 외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죠. 제가 보기에 이런 현상들은 학계의 대응 전략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도 있겠죠.

저는 앞서 다른 선생님들께서도 공감해 주셨던 학계가 계속 가속 중이라는 현상과 느낌에 주목합니다. 더 나아가 여기서 가속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무엇을 위한 것인지, 불가피한 것인지, 지속 가능한지와 같은 질문을 던져 보고 싶습니다. 과연 연구자들이 더 많은 논문을 더 빠르게 쓰는 것이 더 많은 지식을 더 빠르게 쌓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모여 이런 대화를 나눌 시간에 각자 연구를 하는 게 더 생산적이고 효율적이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모순이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가속되다가 어디엔가 부딪혀 멈춰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다른 관점과 학문 분야에서 일어나는 같거나 비슷한 현상이 학계가 한계에 가까워졌다는 신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무시한 채 내달린다면 연구자 개개인은 더 자주, 더 큰 불안을 느끼겠죠. 대학원과 학술장 역시 안팎으로 그 의미와 효용에 대해 더 자주, 더 큰 의심을 마주하게 될 겁니다. 적지 않은 신진 연구자들이 떨어져 나가도록 학계는 속도를 내어 달리고 있는데 막상 학계가 어디로 가는지는 보이지 않는다면 말이에요.

사실 대학과 학계의 위기가 오래된 담론인 만큼 앞으로도 위태롭게 버티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앞서 언급해 주신 융합이라는 기치 아래 새롭게 만든 학과나 전공, 연구 분야는 분명 유효한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융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와 같은 물음이 없다면 근본적인 해법이 되기보다 어쩔 수 없이 찾은 연명 치료가 될 뿐이겠죠. 실제로 앞서 이야기했던 ‘인문사회과학기술융합학회’와 같이 말뿐인 융합인 경우도 적지 않고요. 학문 분야로서의 AI 윤리와 같이 시대적 요구에 맞는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기 위해 기존의 개별 학문 분과에서 축적된 지식을 조합하는 노력이 융합의 핵심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죠.

학계와 대학원에 요구되는 바는 큰 틀에서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 있습니다.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더 많은 연구자가 더 많은 학회와 학술지에 더 많은 논문을 싣기 위해 노력해요. 하지만 그 노력이 효과를 보고 있는지는 의문인 상황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학과 함께 학계나 대학원의 일자리는 줄 것이 뻔히 보이죠. 이런 상황에서는 많은 연구자들이 목표로 하는 교수가 돼도 문제, 안 돼도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답이 없는 비관론이나 염세주의로 빠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평가는 별개로 이뤄져야 하겠지만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융복합 담론은 학계와 대학원도 충분히 변화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바깥으로는 생존 문제, 안에서는 새로운 분야와 지식에 대한 갈망이 있어 생겨난 변화라고 보여요. 이제껏 우리가 지적한 문제들도 마찬가지예요. 유무형적 자원과 권력, 다양한 역할과 책임까지 모든 게 전임 교수에게 집중된 작금의 학술장 제도가 학계와 대학원의 생존을 위협하고 심지어 그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마저도 방해한다는 것을 곧 모두가 깨닫게 되지 않을까요? 부디 그렇게 변화가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김보경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정부 의존도가 높은 한국 고등 교육의 현실에서 현 정권이 취하는 기조, 인문학적 지식에 대한 사회적 수요나 신뢰가 낮아지는 상황 등을 고려했을 때 제가 속한 인문·사회계의 전망이 밝아 보이지는 않아요. 대학원도 마찬가지로 특히 인문·사회계의 경우, 기회비용을 고려한다면 점점 수요도 적어질 것이라는 판단이 합리적으로 느껴지고요.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연구자가 되었던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제가 기대한 최소한의 체계나 공정성조차 찾아보기 어렵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앞서 계속 나왔던 이야기이지만, 학계의 문제 해결 능력이 낮은 것뿐만 아니라 어떤 것을 문제 혹은 위기라고 느끼는 것에 대해서도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것은 아닌지 씁쓸합니다.

좀 전에 조승희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융합이니 하는 이름을 붙여가며 학과를 개편, 신설한다거나 예산을 쏟는 일이 인문·사회계가 나아갈 하나의 길로써 제시되고 있는데요. 이것이 물론 그 자체로는 돈벌이가 되지 않는 기초 학문의 입장에서는 생존 전략일 수 있다고도 생각해요. 시대의 변화나 문제의 성격에 따라 학제 개편이나 학제 간 접근이 분명 필요한 경우도 있겠고요. 그런데 이러한 길이 기초 학문이 처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처럼 여겨지거나 지원이 집중되는 건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대의 변화에 유연하게 변화하지 못하는 인문학계 특유의 고지식함은 벗어나야 할 태도겠지만, 각 학문 나름의 고유한 특성이나 축적된 지식에 대한 이해에 기반을 두지 않고 급급하게 신생 학문을 좇아가는 일은 위기에 처한 기초 학문을 살리기보다는 오히려 숨통을 조이는 결과를 불러오지는 않을지 우려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학계를 이대로 둬도 괜찮다는 입장은 결코 아닙니다. 저희 좌담에서도 누차 이야기했지만, 인문·사회계가 비교적 특수하게 처한 어려움뿐만 아니라 여러 구조적 문제들이 산적합니다. 아마 저희 좌담에서 다뤄지지 못한 문제들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요. 제가 바라는 건, 이곳에서 누군가가 한 명의 훌륭한 연구자가 되기를 꿈꾸는 일과 학계의 문제에 대한 공동의 책임감을 갖고 공동의 행동을 하는 일을 양자택일의 선택지로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특히 신진 연구자이자 여성 연구자로서 학계나 대학원의 문제를 소리 높여 이야기하거나 행동에 나서는 일이 더욱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고, 때로는 마치 그런 일에 동원되기만 할 뿐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하고 싶은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환경을 함께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서로 더 많이 연결되고 촘촘해졌으면 좋겠어요. 대학원 진학을 장려하는 일도 조심스러운 마당에, 대학원을 이탈하려는 사람들이라도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전망을 모두가 만들어 가야 할 책임을 느낄 필요가 있지 않나 싶어요.

 

세대교체를 앞둔 학계


유현미 아마 향후 5년이 연구자들의 세대교체나 대학의 구조 조정 방향에 있어 중요한 시기가 될 터인데요. 이미 누적된 학계의 문제들이나, 앞으로 새 정부가 추진할 고등 교육 정책이라고 할 것들이 긍정적인 전망을 그리기는 어렵게 하는 것 같습니다. 대학원에 오는 사람들이나 인문·사회계열 학문을 직업으로 삼겠다고 하는 사람이 점차 줄어들기도 하고, 그들의 힘이 빠지는 일들이 계속 생기겠죠. 미래를 전망하기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집중할 수 있는 일, 도모할 수 있는 일에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고, 오래 지속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 나갈 수 있으면 합니다. 그게 미래가 되겠죠. 지역 대학의 문제나 지역에서 연구자로 살아가는 것, 여성 연구자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많아져 스스로의 미래를 단정하기보다는 다르게 만들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향하는 학계의 미래상은 시민 사회나 사회 운동과의 접속점을 더 늘려 나가야 한다는 거고요, 공적인 것에 대한 논의와 실천을 촉진하고 축적할 수 있는 장소로 학계의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융합, 뉴노멀, 4차 산업혁명과 같이 미래의 대세를 진단하는 소위 첨단 담론들이 우리가 이 세계에서 이미 하고 있는 노동들, 필수적인 것들을 시대에 뒤처진 것,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 효과도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좀 추상적이고 휴머니즘적 결론이지만, 학계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곳이 되었으면 합니다. 고통 경쟁이나 능력 경쟁만 하지 말고, 생태계로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각자의 역할과 존재의 의미를 서로가 인정해 줬으면 합니다. 스스로에 대해서나 남에 대해서나 협력하는 동료로서의 상을 가져 나갔으면 합니다. 학계의 탁월성은 협력하고 때로는 경합하는 다양한 지적 공동체들 사이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이송희 현시점에서의 인문·사회학계 상황을 본다면,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답변을 하지 않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원이 없고 일자리가 없는 곳에 좋은 인재가 모여든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입니다. 그 결과 지금은 후속 세대의 재생산 자체가 어려워진 상황인 것 같아요. 애초에 안정적인 경제 기반을 갖춘 사회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공계로 진학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대학 수험생에게서부터도 심심찮게 들려올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적 열망과 사명감을 가지고 분투하는 연구자가 많이 존재하고, 또 우리의 언어와 역사, 그리고 사회 현상에 대한 탐구가 꼭 필요하다고 믿는 분들은 앞으로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 사회과학계는 과거의 문법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고 연구자의 진로를 다각화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긴 대학원 시절과 시간 강사 기간을 거쳐 전임 교수로 임용되는 진로는 더 이상 연구자의 보편적인 커리어 설계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외의 다른 경로들을 마련하고 제시하지 못하는 한 후속 세대에게 연구자로서의 진로를 택하고 유지하라고 요청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오늘 좌담회에서 여러 의견들이 나왔지만, 연구자의 사회적 역할과 성과 평가 방식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것이 시작일 듯합니다.

현수진 사실 당분간은 앞서 논의한 현재의 학계 분위기가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구자 개개인은 정량적 지표를 충족해야 하는 과정에서 연구 시간을 충분히 갖기 어려우며, 이에 학계의 본연적인 역할을 점점 잃어가는 그런 분위기 말이지요. 학계의 역할은 우리 사회에 관한 자료를 만들고 분석하며,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선과 의제, 논리를 개발하는 것입니다. 이에 더해 창의적이고 논리적인 토대 위에서 더 나은 방향의 결론과 합의를 도출해야 하고요. 지금의 우울한 전망은 목적 달성만을 위해 양과 속도라는 지표를 모든 곳에 들이대고, 그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태도와 긴밀히 맞물려 있기에 더욱 어려운 문제가 된 듯합니다.

그럼에도 학계 구성원이 노력한다면 우리가 그리는 학계의 미래를 질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구자 개개인으로서는 내 연구의 문제의식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수시로 돌아보고 자기에게 부끄럽지 않은 연구를 수행하고 다른 사람의 연구를 진지하게 비평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비록 경쟁과 생계유지 때문에 벅차더라도 연구자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을 버리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내 동료들과 함께 내가 속한 공동체에 닥친 문제점을 직시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연대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해결 방법은 그런 연대 위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우리 학계 구성원의 움직임이 가시화됐을 때 오고 싶은 대학원, 건강한 학계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학계의 사회적 역할도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고요.

이우창 저는 세 가지 차원에서 대학원과 학계의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필요, 수요, 그리고 주요한 행위자의 판단이 그것입니다. 필요의 차원에서, 대학원과 학계는 적어도 당분간은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좋든 싫든 한국은 점점 넓은 시야와 전문성을 가진 고학력 인적 자원에 대한 의존도도, 기존의 인력을 계속해서 재교육해야 하는 필요성도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대학원 외에 이 기능을 더욱 잘 수행할 수 있는 기구가 단시간에 출현하겠냐고 묻는다면 쉽게 답이 나오지는 않죠. 학계 혹은 전문 연구자 집단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야마다 상황은 다르지만, 한국은 이미 단순히 과거의 문제 진단과 해결 방식을 반복하거나 서구 모델을 수입해 오는 것만으로는 스스로의 문제를 제대로 대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국가가 됐죠. 즉 한국 사회 및 구성원이 앞으로 마주할 다양한 난제를 제대로 짚어 내고 분석해서 언어화할 역량을 갖춘 전문적인 인문·사회 연구자의 필요성은 계속해서 존재하리라 봅니다.

문제는 그러한 필요성과 직접적인 수요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입니다. 결국 한국 사회에서 고등 교육과 학계에 영향을 끼치는 직접적인 수요는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학력과 학벌 자산의 획득을 통해 안정적인 소득 수단을 확보하려는 학생, 즉 소비자의 수요이며, 다른 하나는 원하는 인재를 싸고 빠르게 공급받고 싶은 기업의 수요입니다. 그리고 양자를 조율하면서 지금까지 대학과 학계의 발전을, 그게 무엇이든 간에, 촉진해 온 정부의 수요가 있죠. 학생과 기업의 수요는 매우 단기적인 것입니다.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거기에 종속되면 학계의 장기적인 발전이 쉽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정부와 엘리트 연구자들의 역할은 한편으로는 그러한 단기적인 수요의 압력을 적절히 제어 혹은 반영하고, 다른 한편으로 학계가 국가와 사회의 장기적인 필요에 맞게 발전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죠. 문제는 다른 분들도 지적했듯 현재 학계의 제도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 장기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또 그러한 전망 내에서 대학원과 인문·사회 연구가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 유효한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취업률과 산학 협력 외에는 대학에 관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는, 몸은 커졌지만 머리가 그에 따라가지 못하는 선진국 한국의 현실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대학원과 학계의 미래는 학계 안팎의 주요 행위자들이 얼마나 긴 시야를 갖고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방금 정부가 국가와 사회의 장기적인 필요성을 파악하고 고려할 수 있느냐가 교육 및 학술 영역의 제도적 환경에 큰 영향을 준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연구자 집단이 스스로의 역할과 목표를 얼마나 긴 호흡으로 이해할 수 있느냐 역시 큰 변수죠. 실제로 연구자 중에서도 ‘졸업생이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는가’가 해당 전공의 존속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등 교육과 학술의 존재 이유를 단기적인 관점에서밖에 보지 못하는 전형적인 사례죠. 이렇게 단기적인 수요의 노예가 돼버리는 안타까운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의 인문·사회 연구자들은 그러한 압력에 종속되지 않을 수 있는 전략을 찾아내야 할 겁니다.

결국 핵심은 우리 사회가 장기적으로 직면할 문제를 규정하고, 그 문제에 답하는 과정에서 각각의 학문 분과가 장기적으로 할 수 있는 역할을 제시해야 한다는 겁니다. 앞서 했던 이야기이니만큼 반복하지 않겠습니다만, 당장의 소득 창출 능력이 높지 않은 분과일수록 당장의 이익에 전전긍긍하는 대신 긴 시야에 입각한 전망을 이야기하는 게 차라리 현실적인 전략이지 않을까 합니다. 특히 정부가 더는 학계를 위한 장기적인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과 같은 때라면 말이에요.

한국의 융복합의 경우 전형적으로 정부가 제시하는 단기적인 과제에 학계가 휘둘리는 사례가 아닐까 합니다. 현재 융복합 연구의 제도적 방향에 관해서는 다른 분들께서 이미 말씀하신 바가 있으니 저는 원론적인 내용만 하나 짚고 싶습니다. 통상적으로 학계 제도에서 융복합은 과학기술과 인문사회과학의 협력 정도로 이야기되는데요, 저는 이러한 인식이 상당히 비실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얼마 전 많이 읽힌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1]을 예로 들어 보죠. 내용에 동의하고 말고를 떠나, 책의 각주와 참고 문헌을 읽어보면 저자가 매우 광범위한 분야의 자료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구축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정치 철학 및 윤리학 전공자가 사회과학이나 저널리즘을 포함해 본인이 속해 있지 않은 분야의 논의를 섭취해 의제를 제시하고 사회의 논의를 주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책들은 영미권 학술장에서 상당히 흔합니다. 그 배경에는 수많은 연구자와 지식인이 언론 매체 또는 다른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의 작업을 수시로 이해하고 인용할 수 있을 만큼 긴밀하게 이어진 현실이 있습니다. 즉 어느 한 분야의 지식만으로 제대로 풀릴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평소에 두텁게 연결돼 있는 지식인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필요하다면 다른 분야의 최신 논의까지 참조해서 유의미한 분석을 제시하는 실천적인 융복합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융복합을 위한 융복합, 펀딩 심사위원들이 정해주는 융복합이 아닌 거죠.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자연스레 다양한 분야의 논의가 마주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융복합을 이야기할 거라면 그 토대가 되는 연구자-지식인 네트워크를 어떻게 구축할 수 있는지, 그리고 연구자들이 펀딩 과제만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출발할 수 있도록 하는, 환경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문제를 풀기 위해 연구가 있는 것이지 연구를 위해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까요.

 

나의 미래, 연구자의 미래


현수진 저는 우선 박사 학위에 전념하고, 그 후로는 대학에 자리 잡는 길에 도전해 보려고 합니다. 아마 선배들이 그랬듯이 제 개인 연구와 강의나 프로젝트, 학회 활동을 병행하며 취직을 준비하지 않을까요. 저는 사실 대학원에 처음 입학할 때, 석사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교수라는 꿈은 꾸지도 않았습니다.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저는 취직에 비교적 유리한 스카이 출신도 아니고, 여성이고, 학부도 복수 전공을 하긴 했지만 사학과 출신이 아닙니다. 같은 분야에서 공부하는 사람과 결혼도 했고요. 주변에서 같은 업계에 종사하며 둘 다 양질의 일자리를 얻기가 쉽지 않고, 그런 경우라면 여성이 불리하다는 이야기를 꽤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교수는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일단 공부가 좋아서 공부를 시작했고, 관련 분야에서 일을 하면서 연구를 할 수 있는 직종이면 뭐든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렇지만 오히려 박사 과정을 거치며 최근에야 생각이 바뀐 것 같아요. 저는 연구와 교육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은데 그걸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직업은 대학밖에 없는 것 같더라고요. 반쯤 농담으로 갑자기 통일이 돼서 고려 수도였던 개성을 재조명하는 그런 일자리가 생기지 않는 한, 대학 바깥에 제 일자리가 없는 것 같아요. 그런 상황에서 ‘애초에 교수는 안 될 거야’라고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획을 긋기에는 제 인생이 아직 너무 젊고 에너지 넘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일단은 할 수 있는 만큼 해볼 생각입니다. 대학에 남을 수 있든 그렇지 않든, 저는 옛사람들이 남긴 자료를 직접 읽고 분석하고 서사를 만들어 제 글로 써내어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과정이 무척 즐겁습니다. 책 곳곳에, 사료 곳곳에 제 작은 머릿속 세계를 아득히 뛰어넘는 그런 생각들이 가득하고, 그런 생각을 접할 때마다 뉴런이 짜릿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어떤 즐거움도 그 순간의 즐거움에 비교가 안 되더라고요. 현실 때문에 그런 즐거움에 무뎌지거나 포기하지 않는 그런 연구자로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

미래의 신진 연구자들을 위해서 필요한 건 결국 연구자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자존감을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사회적인 차원에서 보장받을 수 있는 구조를 구축하는 것 아닐까요. 연구자로서의 훈련을 받는 석·박사 과정 중, 그리고, 학위를 받고 난 다음의 연구를 안정적으로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환경이란 이번 대담에서 이야기가 나왔듯 제도적 차원에서, 또 사회적 차원에서 다각도로 접근해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연구자의 길을 선택했다는 것만으로 번듯한 자식 노릇 한 번 못하고, 기혼 남성 연구자는 돈을 못 벌어 가정에 늘 죄스러워야 하고, 기혼 여성 연구자는 살림하고 아이를 돌보지 못해 남편과 아이들에게 늘 미안해야 하고, 결혼하지 않은 여성 연구자는 독하다는 말을 듣는, 그런 환경이 기다리고 있는 게 명백한 한 학문 후속 세대의 건강한 재생산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학령 인구가 줄어가는 마당에 교수 일자리를 늘려 달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고 보고요. 국가와 시장에서 재원을 끌어와 신진 연구자들이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학술 수준이 뛰어난 여타 국가들의 후속 세대 양성 방법을 조사하고, 그를 한국의 상황과 비교 분석해 대책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에 더해 대중들이 어떤 종류의 인문학적 지식을 원하는지 조사해 다양한 종류의 콘텐츠를 제작하는 그런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하겠죠.

강수영 저는 한동안 지금처럼 일과 학업을 병행할 예정입니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지방 정부에 취업할 제 미래를 상상할 수 없었던 사람으로서, 더 먼 미래를 전망한다는 게 참 어렵지만요. 저는 현재 서울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고, 이제 막 박사 과정 1학기 차인데요. 종종 “직업이 있는데 왜 박사 과정에 입학할 생각을 했느냐”는 질문을 듣습니다. 물론 일과 학업을 동시에 진행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제가 실용 학문을 하고 있기 때문에 둘 사이에 상호 보완적인 측면이 있기도 하고, 가끔은 커리어에 있어 여러 정체성을 갖고 있는 게 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네요. 동시에, 대학원에 입학한 후로부터 연구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딱히 해본 적이 없기도 합니다. 뭔가 제가 일생을 바쳐 풀고 싶은 엄청난 과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도 말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보면 연구라는 행위 자체에 큰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구 과정에서 배운 습관과 시각은 제 삶을 더욱 풍성하게 했고, 문제에 대해 깊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 것도 정말 좋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더 많은 분들이 연구 경험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그것을 직업으로 삼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고, 기존에 열려 있던 문은 점차 좁아지고 있는 상황이죠. 선배들의 상황이나, 짧지만 제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학계에서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고요. 설령 학계에 자리를 잡더라도 일과 생활을 병행하는 어려움이나 학계 내부에 만연한 각종 구조적 차별과 불합리를 비켜 갈 방법이 없습니다. 앞서 현수진 선생님께서 짚어 주신 말씀에 매우 공감하면서, 과연 후배들 중 누가 또 저와 비슷한 길을 가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선뜻 추천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네요.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미래의 신진 연구자들을 위해 필요한 것은 학계의 폭넓은 외연, 활발한 소통, 사회적 명예라고 생각합니다. 외연 확장의 대상은 연구자 개인의 진로가 될 수도 있고, 생산된 지식이 될 수도 있을 텐데요. 사람과 지식이 학교에 고이는 게 아니라 사회에 흐를 수 있도록 판을 짜고 분위기를 만들어 낼 필요가 있습니다. 학생들의 진로에 대해서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교육 프로그램이든 뭐든 결과를 제도화할 필요가 있고요. 학계의 다양한 문제를 발굴해 내고 해결하는 작업은 당연히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앞서 많이 짚어 주신 것처럼 다양한 의사소통 경로를 지속적으로 구축하고 가능한 것부터 바꿔 나가야 하겠죠. 특히 상황이 나쁜 것을 알면서도 입학한 소중한 학생들을 진심으로 학계를 함께 키워 나갈 동료로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언급한 사회적 명예는 예전과는 다른 형식으로 대중과의 연결 지점을 찾아 나간다는 맥락과 동시에, 연구자 사회에서 스스로에 대한 명예 복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제대로 된 인정 체계를 갖추지 못한다면, 어떻게 더 넓은 사회에 인정을 요구할 수 있을까요? 제가 속한 학술장이 보호 구역이 아니라, 제 생활 기반, 기여하고 싶은 일,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조금 더 거대하고 회복력 있는 생태계가 됐으면 합니다.

유현미 박사 논문에 집중한 2년 동안 코로나 팬데믹도 오고, 개인적으로도 이리저리 치여서 힘든 마음가짐으로 지냈는데요. 그래도 팬데믹 시기의 경험을 담아 대학원 동료들과 사회학적 에세이인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2]을 써서 출간했습니다. 쓸 때는 고됐지만 출간 후 여러 독자들의 반응을 받아 보니 앞서 강수영 선생님이 말씀해 주신 사회적 명예라는 것을 조금은 느낄 수 있어 좋았던 경험 같습니다. 그럼에도 학위가 끝나고 나서도 불안한 느낌이나 앞으로의 삶이 예측이 안 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종류가 다른 불안이 또 온다고 할까요.

대학원생으로 오래 지내면서 익히게 된 감각은 프리랜서 노동자로서의 임기응변과 불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1년 단위, 5년 단위의 학술 연구 지원 사업이나 연구 프로젝트를 기준으로 연구자의 시간을 그려 나가다 보면 더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없는 것이라고 억압하거나 하루빨리 정규직 자리를 잡는 것으로 해소하려고 하기보다는,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서 그것에만 사로잡혀 어떤 행동이나 결정을 하지는 말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연구나 일상의 루틴을 함께 잡아 나갈 여러 동료 그룹을 만들고 있고요. 제가 지금 학계나 사회가 요구하는 정형화된 연구를 잘하는 사람인지, 그걸 원하는 사람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떤 사회 문제를 파악하고 탐구하고 바꿔 나가는 것을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이라는 믿음은 있기에, 그것을 할 수 있는 진로를 계속 모색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 사이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배움과 지식을 이끌어 내는 교육자로서의 역할도 계속 하고 싶기에, 교수직 역시 계속 도전할 것입니다. 연구자로서는 계속 겸손한 자세를 가질 테지만, 여성 연구자로서는 계속 직업적 야망을 가지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래의 신진 연구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필요를 스스로 창출하고 충족시킬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선 확보돼야 할 것은 신진 연구자들을 기성 연구자들의 들러리로 소비하고 소모하지 않는 것이고요.

김보경 저는 이제 박사 논문을 준비해야 할 시기라, 먼 미래를 생각하기보다는 박사 논문을 준비하는 동안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고 저 자신과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을 돌보며 지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만약 대학원을 계속 다닐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고 제 의지가 꺾이지 않는다면, 연구 지원 사업에 참여하고 자치회 활동과 강의, 번역, 평론 등을 병행하며 박사 논문을 준비하지 않을까 싶어요. 조금 더 욕심을 내보자면, 이 사회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는 지식을 생산하고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연구자로서의 미래를 생각하다 보면, 저보다 앞선 연구자들을 생각하면서 제 미래를 생각해 보기도 하는데요.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여성 연구자들 생각을 많이 하고 관심을 가져왔어요. 저 선생님은 어떻게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을까, 연구를 하다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대면하는 순간은 없었을까, 한때 자주 보이던 여자 선배들은 왜 잘 보이지 않을까,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 열악한 판에서 왜 서로 경쟁하면서 소진돼야만 할까 등등….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매번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도 있지만, 그래도 저한테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나눌 수 있는 주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무척 소중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없었으면 연구를 계속하겠다는 힘을 금방 잃었을 것 같아요. 앞서 스터디나 세미나를 하며 함께 배움을 나누는 동료들의 중요성이 몇 번 언급됐는데, 저는 이뿐만 아니라 연구자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더 많이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그 이야기가 제도상의 허점을 건드리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학계나 대학원을 좀 더 합리적이고 공생 가능한 공간으로 만드는 데 초석이 되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적어도 누군가에게 길잡이가 되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죠. 좀 감상적인 마무리지만, 앞서 비판이나 개선책에 관해서 이야기가 충분히 나온 듯해서요. 이곳에 조금이라도 더 있겠다는 마음을 갖게 하는 솔직한 이유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송희 저는 운 좋게도 박사 학위 논문을 마치자마자 연구 교수로 임용이 되어 월급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한국어문학 전공에 있다 보니, 감사하게도 한국의 문화적 위상이 커지는 현시대의 혜택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일찌감치 취직하거나 전문직으로 나아간 옛 친구들과 비교하면 경제적 안정성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독립 연구자로서 잘해 나가고 있는 주변의 동료나 선배들을 보며 연구자로서 꾸준히 활동성을 유지하면 어떻게든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래도 저도 박사 학위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입장이다 보니, 앞으로 어떤 연구자가 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자주 던져보는 것 같습니다. 현재로서는 성실하다는 말이 최고의 칭찬으로 느껴집니다. 꾸준히 연구 주제에 매달리고,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고, 발견한 내용을 가공해 선보이는 과정에서 ‘최고’는 못되더라도 ‘최선’은 포기하지 않는 꾸준한 연구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신뢰할 수 있는 동료들에게 힘껏 의지하고 또 의지가 되어 주고 싶기도 합니다. 동료가 없는 연구자는 자기 객관화가 어려워져서 순식간에 자기만의 성에 틀어박혀 녹이 슬어 버리기도 하더라고요. 말해 놓고 보니 나의 최선이 동료들에게도 최선이라고 인정받는 연구자가 되고 싶은 것 같네요.

동료란 확대해서 보자면 학계 전체로까지 확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요. 학계가 그 구성원들의 연구 성과를 공정하게 인정해 준다는 믿음, 그럼으로써 연구의 신뢰성을 보장해 준다는 믿음, 그리고 연구 활동에 매진하는 구성원들을 제도적으로 지지해 준다는 믿음의 정도가 해당 학계의 수준과 영향력을 결정하기도 할 것입니다. 최근 영부인의 학위 논문 표절 여부에 대한 논쟁이 학계에 대한 신뢰성을 크게 훼손시키고 연구자들의 자존감을 해치는 것만 봐도 그렇죠. 앞서 김보경 선생님께서 연구 성과와 학계 공동체를 위한 활동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지 말았으면 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저도 크게 공감합니다. 학계의 제도와 문화는 제가 어떤 동료들과 함께 연구자로서 성장하고 활동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저도 제 연구 프로젝트와 학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활동을 별개로 두지 않고 제가 터럭만큼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찾아서 하는 연구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야 미래의 후배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을 것 같고요. 앞으로 30년 뒤에도 인문학의 위기 타령이 계속되고 있다면 거기에는 지금을 살아간 제 책임도 있지 않겠습니까?

전준하 계속해서 왜 학계를 떠났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사실 정체성을 연구자에서 찾는 사람으로서 완벽히 떠나지 못한 채로 그 주변을 배회할 수밖에 없는 제 상황을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가 이렇게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연구의 의미는 결국 연구자 간 상호작용을 통해 발현되기 때문에 다른 연구자가 있는 곳 근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회사에서도 연구를 할 수 있고, 꼭 어디에 소속돼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학계에 많다면 아예 연을 끊는다는 건 말이 안 되겠죠. 그래서 앞으로 최소 5년 정도는 회사를 다닐 생각이지만 계속해서 학계에 있는 사람들과 교류하며 공부할 겁니다.

사실 대학원 진학 이후 2년 주기로 소속과 하는 일을 계속해서 바꿔 왔고, 그 중에서 제 계획 또는 예상대로 된 건 하나도 없어서 섣불리 미래를 그리기 쉽지 않네요. 하지만 또 그 과정을 통해서 마음가짐을 조금 유연하게 가져도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이건 저뿐만 아니라 저와 비슷한 처지의 연구자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독 학계 안에서는 진로와 관련한 카더라 통신(folk theories)이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큰 영향력을 가지는데요. 물론 그 중에는 정말 부정하기 힘든 것들도 있지만 모든 걸 신경 쓰다 보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만 이어지다 보니 적당히 걸러 듣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 개인 경험에만 빗대서 이야기하기엔 제 학벌과 특이한 전공 배경, 운과 같은 여러 요소 때문에 설득력이 없을 수 있어요. 하지만 시야를 넓혀서 진로를 보다 유연하게 설정하면 분명 자신의 길을 찾게 될 거라 믿어요. 예컨대 저는 알게 모르게 학계를 떠나는 것을 낙오라고 생각했는데요. 좋은 연구를 해서 논문을 많이 또 빠르게 써내면 살아남을 수 있는데 내가 학계 루틴을 따라잡지 못해서 포기하는 건 아닐까, 하는 자기 의심이 있었던 거죠. 사실은 그저 선택의 문제일 뿐인데, 대학원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편향된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 의심을 떨쳐 내고서야 회사에서의 경험을 온전히 쌓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어요.

저부터 이제껏 사용한 ‘학계에 남는다’, ‘학계를 떠난다’와 같은 표현을 지양하고 학술장을 열린 공간으로 여겨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물론 학계나 학술장이라는 단어에서부터 정해진 경계나 장소를 뜻하고는 있지만, 그 개념 자체부터 실험 대상으로 삼는 연구자가 되려고 합니다. 지금껏 대학원 생활을 통해 그 안의 구분과 위계에 적응한 채로 연구자의 범주를 너무 좁게 설정한 건 아닌가 싶어요. 나름의 방식대로 연구자로 생존하고 성장하고 싶어요.

조승희 저는 학교가 되었든 학교 외의 곳이 되었든, 답답한 부분을 속 시원한 질문으로 긁을 수 있는 환경에 있고 싶어요. 그렇게 할 수 있는 곳이 아직까지는 학교인 것 같아서, 학교에 남고 싶은 게 제 솔직한 심정인 것 같습니다. 제가 대학원에 진학한 이유도 과학과 사회에 대해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지만 그걸 푸는 방법을 몰라서였는데요, 대학원에 와서 비로소 그런 답답함에 대해 놀랍게도 사람들이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었다는 것도 배우게 되었고, 그걸 동료들, 그리고 선생님들과 얘기할 수 있다는 게 대학원에서 가장 행복한 일인 것 같습니다. 미래에 제가 직장에 다닐 때도 이 부분을 똑같이 고려할 것 같아요. 무언가에 대한 의문이 들고, 그를 풀 방법을 찾지 못해 찾아오는 답답함을 참아 가면서 직장에서 오래 일할 자신이 저에게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소용이 있고, 무엇을 도울 수 있는 일인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곳에 있고 싶어요.

그리고 과학기술정책 전공자로서 현실 비판적인 이야기를 여기에 잔뜩 썼지만, 저는 제 미래에 대해서는 별로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다니는 학과에 대해서는 좀 장밋빛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낙관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생각해요. 이건 누군가의 눈치를 봐서 좋게 적은 것이 아니라, 정말 제 솔직한 심정들이었습니다. 전 그만큼 제 전공 분야가 중요하다는 확신이 있어요. 여기서 비판적으로 말한 부분도 물론 진심이었지만, 그건 제 개인적인 상황을 걱정해서라기보다는 저와 제 후배 세대 전체를 생각했을 때 문제점이 많아서 다른 선생님들과 같이 비판의 목소리를 강하게 낸 것이었고요. 과학기술학을 공부하는 현장 연구자로서 저는 꽤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우창 이제 8월 말로 드디어 박사 과정을 마치게 됐습니다. 최종 심사 통과 후 아직 졸업장이 나오지 않은 기간 동안 신진 연구자들이 일자리를 구하는 데 상당한 제약이 있다는 사실을 몸소 느끼고 있습니다. 어차피 앞으로 적어도 수년간 불안정한 시간을 살아 내야 한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만큼, 제가 해야 할 일,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을 해나가는 것 외에 불필요한 고민은 안 하려고 합니다. 생각해 봐야 머리만 복잡하고 답은 없으니까요.

저는 죽을 때까지 지적으로 계속해서 성장하고 싶어서 대학원에 왔습니다. 일단은 처음 박사를 시작할 때 목표로 했던 수준에 어느 정도 도달한 학위 논문을 썼다고 생각해서 당장은 그럭저럭 만족입니다. 막판에는 꽤 긴 시간 동안 무리를 해야 했습니다만, 그 기간을 지나고 나서도 스스로가 여전히 자료를 읽고 분석하고 글 쓰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임을 알게 되는 것도 기쁩니다. 당분간 일자리 문제는 일자리 문제로 남겨 두고, 계속 공부를 하면서 학술지 논문을 포함해 다양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아직 읽지 못한 책, 다뤄 보고 싶은 주제가 많이 남아 있네요. 이제 준비 운동을 마쳤으니 본격적으로 달려가 보고 싶습니다.

이미 아시는 분도 계시지만, 저는 박사 초년 때부터 블로그[3]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공부하고 생각한 내용을 정리하는 블로그인데, 거의 10년 가까이 운영해 보니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정말로 좋은 연구, 중요한 문제 제기, 깊이 있는 분석을 담은 글에 대한 수요는 많지는 않아도 꾸준히 존재한다는 거죠. 스스로가 그런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독자들의 갈증에 부합하는 글을 계속해서 쓰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좋은 동료 집단이 필요합니다. 윗세대 선생님들을 보면 개방돼 있으면서도 진지한 학문적 네트워크를 만드는 문화는 부족했던 것 같아요. 아무리 재능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박사를 받고 취직한 다음 고립되면 몇 년 지나지 않아 지적인 성장이 멈추게 됩니다. 그래서 다양한 필드에서 진짜로 뛰어난 연구를 추구하는 사람들, 자신의 공부를 정말로 좋아하고, 더 잘하고 싶은 욕망이 있고, 지적인 교류를 통해서 자기 연구를 풍성하게 만들고 싶은 사람들로 구성된 동료 집단을 꾸려 오고 있습니다. 좋은 연구자는 좋은 학문적 집단에서 나오기 때문에, 먼저 내 주변을 좋은 학문적 집단으로 만들고 그 덕을 받아 좋은 연구자로 성장할 계획입니다. 우리는 소중하니까, 서로를 소중하게 대해 줘야죠!
[1]
마이클 샌델(함규진 譯), 《공정하다는 착각》, 와이즈베리, 2020.
[2]
유현미 외 9인,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 돌베개, 2020.
[3]
BeGray: Historical, Critical, and Practical (begray.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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