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일부 언론의 보도 행태다. 그 400여 개의 미디어 중 30퍼센트는 허버드의 성전환 전의 이름을 인용했다. 높아진 대중들의 관심에 따라 집요해진 미디어는 허버드의 과거와 사생활을 마구잡이로 파헤치며 사건을 가십성으로 보도했다. 특히 허버드와 IOC의 결정을 비난하기 위한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즐비했다. 그 과정에서 허버드가 IOC 규정에 따라 자격을 갖추었다는 점은 축소되고 ‘불공정한 이점’이라는 키워드 그리고 ‘공정 대 포용’이라는 프레임이 강화됐다. 이에 NZOC와 호주 성 소수자 단체들은 트랜스젠더를 존중해달라는 요청과 함께 보도 가이드라인을 기자들에게 제공했다. 많은 매체가 허버드를 존중하고 중립적으로 다루고자 노력했지만 이 가이드라인을 따르지 않은 언론사가 태반이었다. 결과적으로 옹호와 비판이 난립하는 각축전이 되며 논의의 본질은 크게 흐려졌다. 다음은 허버드를 다룬 세계 주요 언론들의 보도다.
영국의 타블로이드지 《데일리메일(DailyMail)》은 허버드의 성전환 전 이름 사용과 함께 그의 과거를 파헤친 대표적인 언론이다.
[2] 《데일리메일》은 2021년 7월 이를 독점 기사로 냈는데, 허버드가 남학생이던 시절 학교에서 수줍어하는 학생이었고 팀의 주장까지 맡았었으며, 동료들은 ‘개빈’이 늘 남자팀 내에서 불편해했다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기사에는 그의 부모님 사진과 남학생이던 당시의 사진이 실렸으며 경기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생활이나 학교 시절의 이야기가 담겼다.
반면 영국의 공영 방송사 BBC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였다. BBC는 BBC 스포츠 트위터 페이지에 혐오를 조장하는 사람들을 관계 기관에 고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와 동시에 허버드의 경기를 생중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3] 게다가 자신들의 소셜 미디어가 모든 사람에게 안전하길 바란다며 인종, 성별, 종교 등을 이유로 혐오 발언을 한 댓글이 있다면 BBC에 전달해 달라는 당부를 전했다. 게시물에는 “혐오는 이기지 못한다(Hate won’t win)”라는 캠페인 마크가 달렸다. 허버드를 단순히 옹호하는 게 아닌, 가장 적극적으로 보호한 언론사 중 하나다.
BBC는 올림픽이 끝나고 도쿄 올림픽을 장식한 3대 쟁점을 소개했는데 여기에 허버드가 포함됐다. 함께 다뤄진 것은 미국 유명 체조 선수인 시몬 바일스(Simone Biles)의 경기 포기를 통한 선수들의 정신 건강 이슈, 벨라루스의 육상 선수 크리스티나 치마노우스카야(Крысціна Ціманоўская)의 망명 사태로 각자 굵직한 이슈들이다. BBC는 허버드의 올림픽 출전으로 또 하나의 벽이 무너졌다고 평가했다.
미국의 오랜 뉴스 통신사 AP통신의 한 논평 역시 허버드가 역사를 만들었다며 축하를 보냈다.
[4] 특히 허버드를 트랜스젠더 운동선수의 선구자로 표현했다. 그의 올림픽 도전은 1차 시기 실패와 함께 길게 가지 못했지만 이 일로 IOC가 트랜스젠더 선수의 자격을 위한 새로운 ‘프레임워크(framework)’를 발표할 것임을 강조하며 허버드가 해당 논의의 마중물이 됐다는 논평이었다. 이와 더불어 기존 IOC가 2015년 제시한 트랜스젠더 선수의 경기 참여 관련 권고안에 따라 허버드는 해당 기준을 충족했으며 올림픽 참여가 문제 되지 않음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영국의 방송인이자 저널리스트인 피어스 모건(Piers Morgan)은 허버드의 올림픽 참가를 각종 매체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비난한 인물 중 하나다. 그는 허버드의 참가를 “여성 스포츠의 참극”이라고 표현했다.
[5] 여성의 몸으로 태어난 여자 선수는 남자의 몸으로 태어난 로렐 허버드에 비해 당연히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만약 허버드가 도쿄 올림픽 금메달을 딴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올림픽의 꿈은 사라지며, 이는 ‘올림픽 모토(The Olympic Motto)’인 “보다 빨리(faster), 보다 높이(higher), 보다 힘차게(stronger)”를 여자 경기에서 남자의 힘으로 쟁취하는 일이라 평했다. 모건은 여러 TV 프로그램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인 만큼, 발언에 대한 주목도 역시 높았다.
세계의 대표적인 스포츠 매체인 ESPN의 입장은 어땠을까? ESPN의 저널리스트 달시 메인(D’Arcy Maine)은 허버드의 경기 순간을 하나하나 자세히 표현하며 응원하는 맘을 숨기지 않았다.
[6] “뉴질랜드 국가대표 역도팀에 허버드가 합류한 이후 몇 주간 논란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경기 당일 허버드를 향한 지지는 모든 논란을 종식 시켰다. 온라인에서 볼 수 있는 독설은 볼 수 없었고, 경기장 안은 박수와 환호로 가득 찼다. 허버드는 그 순간이 자신의 존재보다 의미 있음을 알 것이다”라고 평했다. 공정성과 기록, 메달, 국력의 각축장 같은 올림픽도 결국 경기장 안에서는 선수 개개인에게 의미 깊은 도전의 순간이며 서로를 응원하게 만드는 힘이 있음을 강조하는 논평이었다.
러시아에 거주하는 미국 저널리스트이자 저자인 로버트 브리지스(Robert Bridges)는 러시아의 국제 보도 전문 채널인 러시안타임스(RT)에 “경기는 성 정체성이 아닌 신체가 하는 것”이라며 트랜스 여성 선수가 여성 스포츠를 납치했다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7] 여성 선수들은 경기 중 룰이 갑자기 변경되어 여성이 아닌 생물학적 남성과 겨루게 되었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에 더해, 뉴질랜드 오타고대학교가 허버드를 ‘뉴질랜드 올해의 여성 선수’로 선정하여 시스젠더(cisgender) 여성들에게 모욕을 줬다고 혹평했다.
가장 문제가 심한 곳은 채널 원이다. 채널 원은 러시아 국영 방송으로 러시아에서 두 번째로 인기 있는 방송국이며 IOC와 공식 파트너 사이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 러시아의 언론인 만큼 허버드에 대해 과격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채널 원의 저널리스트 아나톨리 쿠지체프(Anatoly Kuzichev)는 로렐 허버드로 분장하고 그를 패러디하며 “트랜스젠더는 사이코패스이며 정신과 진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 나라의 공영 방송에서 나온 표현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수준의 일차적 혐오 표현이었다.
차별 금지와 공정은 스포츠 정신 안에서 언뜻 같은 연장선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공정의 의미가 남다른 스포츠 세계에서는 이처럼 양극단이 첨예하게 맞불을 놓는 이슈가 된다. 이제껏 두 개의 성 이외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스포츠계의 관행은 스포츠 미디어에도 그대로 전염됐다. 극단적 옹호와 프레이밍에 급급한 문제 제기, 황색 언론의 가십성 보도와 일부 혐오 발언은 선수 개인에 집단의 대표성을 부여해 논의를 변질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숙한 논의는 요원할 뿐이다. 공론화를 위해서라면 언론의 보도는 숙명과도 같지만 미디어가 스포츠를 다루는 방식은 여전히 인물 중심적이고 자극적이다. 가장 큰 문제는 막상 당사자인 선수의 목소리가 조명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옹호와 독려가 만사가 아니라는 점은 허버드의 입장을 통해 알 수 있다.
언론이 폭력이 될 때
스포츠는 팬이 있기에 존재하고 스포츠 선수는 인기를 먹고 산다. 뛰어난 성적, 슈퍼 플레이, 쇼맨십, 방송 활동 등 스포츠 스타가 되기 위한 요소는 다양하며 그렇기에 선수들은 경기 외적으로 다양한 노력을 한다. 팬들과 소통하고 미디어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운동선수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팬이 떠난 종목은 비인기 종목이 되고 세계 대회에서 입지가 불안해지기도 한다. 역도는 꾸준한 팬층이 있지만 비인기 종목이었다. 과연 장미란 선수가 없는 역도 경기에 한국의 미디어는 얼마나 집중할 것인가? 허버드의 존재는 역도라는 비인기 종목을 ‘이번 올림픽에서 꼭 봐야 하는 순간’으로 바꿔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