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캐릭터의 외형에도 차별화 포인트가 드러났다. 니시타니는 웃긴 캐릭터가 개성 있는 캐릭터라고 믿었다. ‘브랑카’의 녹색 피부나 ‘달심’의 늘어나는 신체, ‘가일’의 비행기 형태의 헤어스타일이 대표적이다. ‘춘리’의 과감한 치파오 복장과 스패니시 닌자인 ‘발로그’, 가부키 화장을 한 ‘혼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독특한 요소들은 일반적인 캐릭터에서 볼 수 없는, 차별화 포인트였다. 평범한 디자인은 바로 기각됐다. 니시타니가 웃음을 터트린 콘셉트만 실제 캐릭터로 구현됐다. 황당하지만, 결국 전 세계 유저의 니즈를 적중시켰다.
다음 문제는 쓰기 어려운 공격 기술이었다. 기존의 공격 시스템은 유저가 공격 버튼을 누른 상태에서 커맨드를 입력하고 떼는 식이었는데, 니시타니는 이를 방향 조작을 먼저 한 후 공격 버튼을 누르는 형태로 변경했다. 또한 여섯 개 공격 버튼의 성능에 따라 차이를 두면서 조작에 대한 혼란을 줄였다. 일반 공격과 ‘필살기’로 불린 특수 공격을 연결한 방식도 이때 만들어졌다. 흥미롭게도 이 시스템의 시작은 버그였다. 한 개발자가 일반 공격 도중에 기술이 나가는 버그가 생겼다고 보고했는데 이를 본 니시타니가 “재미있을 것 같으니 그냥 두자”라고 했다. 이 기능이 모든 격투 게임의 필수 요소인 ‘캔슬’이 됐다.
다양한 시도와 우연의 결과물인 〈스트리트 파이터2〉는 1991년 2월 출시됐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슈팅과 액션에 집중돼 있던 아케이드 게임 시장의 판도를 격투 게임으로 바꿔 버렸고 기술 입력과 필살기, 캔슬 공격과 같은 요소는 이후의 격투 게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트리트 파이터2〉는 게임뿐 아니라 각종 미디어와 상품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영화와 각종 팬시, 트레이딩 카드, 만화, 애니메이션으로까지 그 영향력이 닿았다.
그런 〈스트리트 파이터2〉에도 부작용이 없지는 않았다. 〈스트리트 파이터2〉의 성공 이후 격투 게임은 곧 매출이라는 공식이 생겨 게임 매장 대부분을 격투 게임이 채우게 됐고, 아류작도 쏟아졌다. 〈스트리트 파이터2〉 자체에 대한 매너리즘 문제도 컸다. 니시타니는 이후에 〈슈퍼 스트리트 파이터2X〉 같은 캐릭터와 밸런스, 시스템을 개선한 버전을 꾸준히 출시했는데 지금으로 치면 ‘확장팩’ 또는 DLC(다운로드 콘텐츠・DownLoad Contents)에 가까웠다. 화제성은 충분했지만, 판매량은 그렇지 못했다. 여기에 경쟁작들이 속속 자리 잡기 시작하자 〈스트리트 파이터2〉의 인기는 조금씩 시들어갔다. 캡콤은 후속작 〈스트리트 파이터3〉 개발에 들어가지만, 개발 진척은 생각보다 더뎠다. 그사이 젊은 프로듀서를 중심으로 한 〈스트리트 파이터 제로〉 시리즈가 대선전을 거두며 캡콤의 불안함은 일단락된 것으로 보였지만 격투 게임 시장 전체가 침체였기에 〈스트리트 파이터2〉 급 이상의 게임 체인저가 절실했다. 이후 나온 블로킹 기술 등은 새로운 시도였지만, 유저의 열광적인 반응을 부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스트리트 파이터2〉가 남긴 전설은 사라지지 않았다. 2008년 출시된 〈스트리트 파이터4〉가 또 한 번 저력을 보여 줬고 콘솔을 중심으로 한 〈스트리트 파이터5〉가 e스포츠 시장에서 활약을 이어 나가며 지금까지도 많은 유저의 사랑을 받고 있다. 현재 캡콤은 2023년 〈스트리트 파이터6〉 출시를 준비하고 있다.
악마를 죽이다, 〈디아블로〉
1990년대만 해도 RPG는 여러 상호작용과 전략적인 전투, 복잡하고 방대한 세계관과 같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초창기 장르를 이끌었던 〈위저드리〉나 〈던전앤드래곤〉 작품의 영향 때문이었다. 액션 RPG로 불리는 장르도 있었지만, 기본적인 스타일에서 큰 차별성을 드러내진 않았다. 그러던 중 1996년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에서 하나의 게임을 선보인다. ‘핵 앤 슬래시(Hack and Slash)’ RPG 〈디아블로(DIABLO)〉였다. 〈디아블로〉의 등장으로 RPG 게임의 판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개발 초기의 〈디아블로〉는 이전의 평범한 RPG 게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때 〈디아블로〉가 한 선택은 고정관념을 뒤엎는 것이었다. 그렇게 전 세계를 호령한 진짜 악마가 태어났다.
1995년, 게임사 ‘콘도르(Condor)’는 턴 방식의 로그라이크 게임
[2]을 개발하고 있었다. 콘도르는 자금난 해소를 위해 투자와 퍼블리싱을 맡아줄 회사를 찾고 있었다. 그중 〈저스티스 리그 태스크포스 (Justice League Task Force)〉라는 격투 게임을 이식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와 미팅하게 된다. 블리자드는 콘도르의 게임이 성공적으로 개발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 약속했다. 이때 〈워크래프트2(WarcraftⅡ)〉를 개발했던 개발자 중 한 명이 콘도르가 개발 중인 게임에 대해 의견을 전했다. 실시간 전략 게임처럼 턴으로 움직이는 방식에서 벗어나 빠르게 이동하며 싸우는 RPG를 만들어보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콘도르의 대표였던 데이비드 브레빅David Brevik이 펄쩍 뛰었다. 정통 RPG에서 벗어난 노선이 시장에서 통할 리가 없을 것으로 봤다. 그때 당시만 해도 RPG는 전략적인 선택과 높은 자유도가 특징이었다. 턴이 중요한 로그라이크 게임은 더 그랬다. 하지만 블리자드 개발자는 물러서지 않고 〈워크래프트2〉의 성공과 내부에서 개발하고 있던 〈스타크래프트(Starcraft)〉를 예시로 들며 빠른 전개에서도 충분히 RPG의 재미를 낼 수 있다고 강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