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층의 꿈
하늘을 찌르는 마천루와 펜트하우스, 높은 공간에서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마시는 커피 한 잔의 여유, 도로를 가득 채운 차와 북적거리는 사람들에서 멀찍이 떨어져 도시를 내려다보는 모습은 많은 사람이 바라는 중산층의 모습이다. 은마아파트 주민들은 20년 전부터 이 모습에 본인을 대입하며 사업을 추진해 왔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은마의 꿈도 높아졌다. 그러기엔 35층은 너무 낮다.
은마아파트는 49층의 꿈을 꾸고 있다. 심지어 소유자 중 일부는 50층 이상으로 재건축하여 강남의 명실상부 최고급 프리미엄 주거 단지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각 같아서는 롯데타워만큼 높은 100층 아파트로 도약해 은빛 갈기를 휘날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49층으로 짓는 것만 해도 30~40층 수준의 아파트에 비해 훨씬 높은 공사비를 지급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49층’일까?
국내 건축법 시행령 제2조에서는 초고층 건축물을 50층 이상 또는 200미터 이상으로 규정한다. 초고층 건축물은 사용자의 안전을 위해 일반 건축물보다 훨씬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받는다. 30층마다 피난 구역을 설치하는 것은 기본이고, 소방 성능 심의, 건축물 안전 영향 평가, 재난·환경·교통 영향 평가, 심지어는 승강기 설치 기준까지 별도로 지정되어 있다. 지진이나 테러, 해일에 관한 심의까지 도합 30~40개가 넘는 심의와 유관 부서 의견 청취를 끝마치려면 더 오랜 기다림이 불가피하다.
높게 지어 올리려면 ‘종상향’도 필요하다. 국토법은 땅의 용도를 다양하게 분류하고 있는데 그 중 주거 지역은 ‘전용 주거 지역’과 ‘일반 주거 지역’, ‘준주거 지역’으로 나뉜다. 전용 주거 지역은 보통 단독 주택을 위한 구역이다. 흔히 주변에서 보이는 아파트 단지는 대부분 일반 주거 지역에 위치해 있다. 일반 주거 지역은 세 가지 종으로 다시 분류되는데 1종에서 3종으로 높아질수록 건폐율과 용적률, 층수의 상한이 늘어난다. 만약 주거와 상업이 모두 가능한 준주거 지역이 되면 건폐율과 용적률이 늘어나는 폭이 훨씬 크다.
물론 세상에 공짜는 없다. 종상향이 있다면, 그에 걸맞은 공공 기여가 동반돼야 한다. 더 많은 임대 주택 확보, 공원 조성 이후 기부 채납 등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종상향에 따른 이익과 공공 기여에 따른 손해를 계산하는 게 조합에겐 핵심적인 일이다.
법·제도적 규제뿐만 아니라 기술·물리적 문제도 초고층 건축물 건설을 어렵게 만든다. 높이에 따른 무거운 하중을 버티기 위해 더 깊게 기초를 타설해야 하며 마찬가지 이유로 기둥과 내력벽의 두께도 더 두꺼워져야 한다. 고층에서 발생하는 풍압도 상당하다. 이를 견디기 위해 더 두꺼운 창문과 고성능 창틀이 요구된다. 50층이 넘으니 빠른 수직 이동을 위한 초고속 승강기가 필요하고 고층에서 수압을 유지하기 위한 가압 장치도 필요하다. 건축물을 만드는 비용뿐만 아니라 유지·관리하기 위한 비용까지 고려한다면 득보다 실이 더 클 수 있다.
공사비는 결국 조합원 혹은 수분양자가 부담해야 할 비용이다. 추가로 확보되는 세대에 따른 일반 분양 수익과 집값, 층수에 따른 공사·유지비, 재건축 초과 이익 환수제까지 고려하여 기적의 사업성을 구현해야 한다. 일각에선 굳이 높은 건물을 고집하지 말고 적당한 높이로 타협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하지만 다수의 조합원은 더 높은 아파트를 주장한다. 이들에게 비싼 공사비와 유지비는 일종의 투자다. 사업 비용이 증가하더라도 재건축이 끝난 뒤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될 수 있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가 될 공산이 크다. 부동산은 장밋빛 미래를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현재 은마아파트는 35층 이하(118.4미터 이하)로 계획돼 있다. 이 높이 계획을 바꾸기 위해선 지금의 정비 계획을 변경해 재심의를 통과해야 한다. 5퍼센트 내외의 변동은 법적으로 경미한 변동으로 인정되어 담당 과장이나 국장 수준의 결재만으로 변경되기도 하지만, 50층을 원하는 은마아파트는 이에 해당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즉, 추진위에게 악몽과도 같던 도시계획위원회의 심의를 다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정비 계획을 크게 변경하면 다시 주민 공람·공고가 진행되고 서울시와 강남구 각각의 유관 부서에 대한 의견 청취가 이뤄진다. 계획의 적법성·합리성 판단이 마무리되면 최종적으로 다시 도계위에서 재심의를 통해 해당 계획이 고시되는 절차다. 은마아파트가 치러야 할 후반전이다.
새로운 복병도 등장한다. 인근 아파트 주민과 근린 생활 시설의 소유자들이다. 높은 건물은 긴 그림자를 만든다. 건축법 제61조에서는 일조 등의 확보를 위해 건축물의 높이 제한을 규정하고 있다. 은마아파트가 높아질수록 아파트 뒤(북측)에 있는 주택과 건축물의 일조량은 줄어든다. 건물이 높아지면 상대적으로 건물이 얇아지기에 장시간 그늘져있진 않겠지만, 그만큼 더 먼 거리까지 영향을 준다. 일조권과 조망권 침해로 주변 주민들까지 참전하면 재건축 사업은 한층 더 난전의 양상을 띨 수밖에 없다.
원래 추진위가 35층으로 계획서를 제출한 것에는 서울시의 영향이 있다. 정비 계획 수립이 한창이던 2010년대는 35~37대까지 3선 역임을 달성한 박원순 서울시장의 시기였다. 국토법에 의거 서울 도시 기본 계획은 5년마다 재정비된다. 박 전 시장은 이에 따라 2014년 도시 기본 계획이자 서울시 최상위 계획인 <서울플랜 2030>을 공개했는데 여기에 이른바 ‘35층 룰’이 있었다. 일반 주거 지역 내 최고 층수를 35층으로 제한하는 게 골자다. 49층을 가정하고 세운 추진위의 정비 계획이 번번이 도계위를 넘지 못하고 내분으로 이어졌던 이유 중 하나다.
49층의 꿈은 오세훈 시장 당선 이후 다시 꿈틀대고 있다. 오 시장이 박 전 시장의 <서울플랜 2030>을 <2040 서울도시기본계획>으로 갱신하면서다. 계획에는 다양한 내용이 담겨있지만, 일반 주거 지역 내 최고 층수 35층 제한을 폐지한 부분이 가장 주목받았다. 대신 연면적과 용적률은 기존처럼 유지해 건물을 높이 올릴수록 얇아지도록 했다. 그렇게 되면 조망을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하는 ‘통경축’이 더 많이 확보된다는 취지다.
흥미로운 건 층수 제한을 35층으로 제한한 박 전 시장의 논리와 35층 룰을 폐기한 오 시장의 논리가 둘 다 ‘스카이라인 다양화’로 같다는 점이다. 박 전 시장은 서울의 사대문 안의 내사산內四山이라 불리는 낙산(동), 인왕산(서), 남산(남), 북악산(북) 중 가장 낮은 125미터의 낙산 고도를 기준으로 서울 경관을 살리고자 했다. 아파트 35층의 높이가 대략 100~120미터에 달해 규제 근거로 35층 룰이 마련됐다. 오 시장은 일괄적인 높이 규제가 이른바 ‘성냥갑 아파트’를 양산한다고 보고 규제를 풀어 건물 높이가 다양한 서울 경관을 만들고자 한다. 두 시장이 생각하는 서울시의 다양한 스카이라인은 머릿속으로 그려봐도 퍽 다르다.
두 도시 계획은 “서울의 높이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란 질문을 던진다. 박 전 시장은 ‘미래 세대와 서울 시민 전체’라고 답한다. 35층 룰에 이목이 집중됐지만 그의 <서울플랜 2030>은 서울 전체를 지리적·문화적·역사적 관점으로 해석하며 후대로 보존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남기고자 했다. 내사산을 중심으로 역사 자원과 자연 조경을 중시한 이유다. 그는 적절한 도시의 높이와 자연 경관으로 역사적·지리적 특성이 드러나는 도시 공간 구조를 지키는 것이 곧 서울의 경쟁력이라고 판단했다.
반면 오 시장은 서울의 높이가 ‘도시 경쟁력과 시민들의 삶의 질’을 위한 것이라 말한다. 굵직하게 발표하는 랜드마크 계획과 여의도·용산의 도시 계획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2040 서울도시기본계획>은 높은 밀도의 도시 환경과 경제적 효율성, 다양한 주택 공급이 서울에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노후화된 도심을 정비하고 유휴 공간을 개발하여 주거의 질을 향상하고 업무 중심성을 강화하는 것, 기술 혁신 등을 통해 도시 경쟁력을 높이는 게 그의 도시 철학이다. 무엇이 올바른 방향인지 판단하는 것은 시민의 몫이다.
이처럼 은마아파트의 높이는 은마아파트만의 것이 아니다. 서울시의 도시 철학이 녹아든 문제다. 아무리 35층 룰이 폐지됐다고 해도 서울시가 넙죽 49층 계획을 허가해 주는 것은 아니다. 도시 경관과 스카이라인 등 전체적인 그림에 맞지 않으면 허가는 요원하다. 공정한 업무와 합리적 행정을 제1 원칙으로 삼는 행정 기관으로서의 특성도 있기에, 형평성 문제도 불거질 수 있다. 은마아파트는 허가하고 다른 단지는 불허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아파트라도 49층의 꿈을 꾸려면 아파트 소유자들의 재산권과 수익성 문제를 넘어서는 사고가 필요하다.
시공사 간택전
은마아파트 재건축은 이제 시작이다. 새로운 계획으로 재심의를 받든 현재 계획에서 만족하든 지금까지 아직 첫 삽도 뜨지 못했다. 인허가를 마무리 짓고 추진위가 조합이 되면 또 다른 치열한 전투가 기다리고 있다. 민간 진영 내분의 1등 공신, ‘시공사 간택전’이다. 도시 계획이 만인의 정치임이 여기서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시공사 선정엔 생각보다 많은 것이 걸렸다. 어떤 건설사에 시공을 맡기는지에 따라 단지의 이름이 결정된다. 현대건설의 힐스테이트와 디에이치, DL E&C(구 대림산업)의 아크로와 e편한세상, 삼성물산의 래미안, 대우건설의 푸르지오 등등 아파트 브랜드는 건설사를 따른다. 아파트를 분양받을 때 건물을 누가 설계했는지는 대부분 관심 두지 않지만, 아파트 브랜드만큼은 따지고 또 따진다. 시공사 선정은 즉 아파트의 가치와 브랜드를 결정짓는 문제다.
바로 이때, 민간 진영의 또 다른 플레이어인 건설사들의 게임이 시작된다. 조합으로부터 선택받기 위해 치열한 구애의 열전을 펼치는 것이다. 지방의 애매한 사업장 열 개보다 서울 핵심 입지의 한두 개 사업장에 자신의 상표를 거는 것이 훨씬 유의미하게 브랜드 파워를 증명하는 길이다. 고급 아파트를 위한 높은 공사비가 고스란히 매출 실적으로 연결되는 건 덤이다. 그렇기에 건설사들은 다양한 혜택과 파격적인 설계·지원책을 제시하며 타 건설사와 경쟁한다. 최고급 인테리어 무상 제공, 조합원의 이사비·이주비 무이자 지원, 특화 조경, 인피티니 풀 Infinity Pool을 포함한 최고급 커뮤니티 시설, 단지 상업 시설로 백화점 유치 등 열거도 어렵다.
그렇다면 재건축이 건설사에 오로지 이득이기만 할까? 과도한 경쟁으로 따낸 무리한 조건의 재개발·재건축 시공권은 ‘독이 든 성배’일 수 있다. 도급 계약부터 단지가 준공될 때까지 짧게는 2년에서 길게는 4~5년이 걸린다. 그 시간 동안 대내외적 조건과 국내 경제 상황, 주택 가격, 건설사의 재무 상태는 변한다. 사업 초기에 합의했던 약속과 계약이 반드시 지켜지리란 보장은 없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특수한 사건들은 세계적인 원자재 비용 급등을 유발했고, 조합-시공사 사이의 분쟁으로 귀결되고 있다.
초기 시공 계약 금액을 초과하는 투입 공사비를 받아내기 위해 조합과 갈등을 빚는 일은 빈번하다. 분양이 완판되는 호황기라면 그래도 다행이지만, 미분양이 속출하고 신저가를 갱신하는 불황기라면 갈등은 더 첨예해진다. 못 받은 공사비를 받기 위해 법원에 소를 제기해도 결과를 장담할 순 없다. 승소하여 소송 가액, 즉 소로 얻어내려 한 액수를 전액 인정받아도 조합에 돈이 없다면 미분양 아파트를 떠안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돈만큼 치명적인 것은 언론의 보도다. 조합과의 공사비 갈등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 브랜드 가치가 손상되고 다른 재건축 현장에서 수주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억지스러운 이야기로 보인다면 오산이다. 조합과 건설사는 “서울을 대표하는 최고급 랜드마크 아파트 단지 준공”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한 동맹으로 원팀이 되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연합은 애초에 동상이몽인 경우가 많다. 재건축을 통해 돈 버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시공사는 공사를 수행하며 공정 진행률에 따라 공사비를 받는다. 받은 공사비(매출)에서, 회사가 투입한 인건비와 원자잿값을 제외하면 영업 이익이 남는다. 반면 조합은 최종적으로 완성된 건물을 사용하거나 분양함으로써 이익을 얻는다. 아파트가 완성되어서 시장에서 거래가 될 때 혹은 준공 전에 조합원 입주권이 거래될 때가 이들의 순간이다. 정확히는 시장 가치가 정해질 때 재건축에 따른 이익을 실현하거나 평가받는다고 볼 수 있다. 이익을 취하는 방식과 시점의 차이는 시공사-조합 사이의 가장 큰 갈등 요인이다.
시공사는 계약과 설계 도면에 따라 건물을 준공시킬 의무만 있을 뿐, 준공 이후 발생하는 문제나 이슈에 대해서는 법적인 하자 보수를 제외하곤 책임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5성급 호텔처럼 값비싼 대리석을 아파트 로비에 시공하는 것으로 조합과 건설사가 계약했다고 가정해 보자. 건설사는 대리석이 얼마나 미끄럽고 깨지기 쉬운지 알면서도 일단 계약대로 시공한다. 괜히 미리 문제를 제기하여 상대적으로 저렴한 바닥재로 바꿀 경우, 계약 단가가 낮아져 이익이 감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다른 현장에서 남은 대리석 자재를 소모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즉, 건설사가 비용 절감이나 공사 기간 단축, 준공 이후 예상 문제점을 사전에 인지하더라도 이를 얼마든 모르는 체할 수 있다. 계약한 공사 원가가 줄어들거나 공사 기간이 바뀐다면 현장의 매출이나 이익에 타격이 간다. 무엇보다 건설사는 조합보다 공사 방식이나 공사 현장, 원가 관리에 대한 경험이 많고 전문성이 높으므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재건축이 동상이몽이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조합원과 조합(조합장) 사이에 발생하는 괴리 때문이다. 재건축 조합은 주식회사와 달리 대주주가 존재할 수 없고, 조합원이 한두 채의 아파트로 대부분 균일한 지분을 가지고 있다. 이익도, 비용도 조합원 전원이 균일하게 분담한다. 하지만 비리와 배임, 횡령을 통한 이익은 특정 개인에게 사유화된다. 조합장에 대한 불신이 쉽게 피어날 수 있는 구조다.
실제로 재건축의 수많은 업무에서 조합장과 대의원들은 건설 회사와 기타 용역 회사와의 유착관계를 통해 횡령이나 배임의 유혹에 쉽게 노출된다. 어차피 해야 할 업무라면 본인 회사에 용역을 달라는 청탁부터, 공사 납품 업체 요청, 중도금 대출 알선, 보존 등기 법무사 선정까지 그 범위는 실로 다양하다. 물론 주요 계약은 대의원회나 조합총회 등을 통해 투표로 결정되며, 대부분의 계약을 경쟁 입찰을 통해 선정하게끔 서울시와 국토부에서 규정하고 있지만, 빈틈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재개발·재건축의 조합 비리가 뉴스와 언론에 보도되는 사이, 사업은 멈추고 조합원은 쪼개진다.
가령 10억 원이 적정 비용인 조경 공사에 대해 15억 원짜리 계약서를 쓰고 실제 공사는 10억 원 수준에 맞게 진행한 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서 발생하는 5억 원의 차익은 조합장 등 해당 계약을 담당한 임원, 그리고 조경업체가 반씩 나눠 갖는다. 일반 조합원들은 건축·조경 전문가가 아니기에 아파트 조경이 10억 원짜리인지 15억 원짜리인지 알 길이 없다. 이미 업체와 누군가의 호주머니로 들어간 초과 공사 비용 5억 원은 5000명의 조합원이 10만 원씩 분담하게 된다. 부당하게 챙길 수 있는 2억 5000만 원의 이익이 공사마다 널린 것이다.
이처럼 누군가에게 무언갈 위임할 때 위임받은 대리인이 자신의 이익을 더 생각하게 되는 ‘본인-대리인 문제(Principal-agent problem)’는 재개발·재건축 현장의 고질병이다. 시공사 선정 이후엔 건설 회사가, 상존하는 조합 업무에 있어서는 담당 임원이 유사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이제 정비 구역 지정이 완료되어 시공사를 정해야 하는 은마아파트가 시공사 간택전을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을지가 관전 포인트다.
은마의 고삐를 조이는 것
은마는 과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시공사 선정 이외에도 은마아파트는 굵직한 전투를 앞두고 있다. 대표적으로 소송과 부동산 PF는 은마의 고삐를 죌 수 있는 핵심 변수다. 이 재건축 전쟁의 새로운 플레이어들이 과연 추진위의 우군이 될까? 은마아파트의 남은 과제를 살펴보자.
먼저 소송전이다. 몇십 년 동안 사업이 추진되며 커진 내부의 파열음은 조합 설립을 앞두고 격화하고 있다. 돈이 모이는 곳에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는 곳엔 갈등이 생기게 마련이니 예견된 잡음이라 하겠다. 돈의 액수가 적다고 갈등이 작은 건 아니지만, 거대한 돈이 오가는 재건축 판에서 사소하게 취급되는 갈등은 없다. 한 가구당 수십억에 달하는 아파트의 운명이 좌우되는 일이기에 재건축 사업이 구체화 될수록 내분은 늘어난다. 조합장과 대의원회를 구성하는 문제부터 시공사 선정, GTX-C의 은마아파트 지하 관통 이슈, 최고 층수와 임대 주택 비율 등 조합원이 다툴 일은 많다. 그럴수록 웃는 것은 법률 시장이다. 19세기 미국의 골드러시에서 금을 직접 캐는 광부보다, 곡괭이를 팔던 상인들이 더 큰 돈을 벌었던 사례가 겹쳐 보인다. 법률 시장은 갈등과 분쟁을 먹고 자란다.
법치주의 사회에서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당사자 간의 적정한 합의가 도출되거나, 제삼자의 판정을 받거나. 후자가 우리가 흔히 아는 법원에 의한 판결과 조정이다. 법원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소를 제기하고 법원에 출석하며, 증거 자료를 제출하는 법률 절차가 번거로운 것은 당연지사다. 양 당사자 모두에게 발생하는 법률 비용이 막대할뿐더러 판결까지의 소요 시간도 길다. 그럼에도 본인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혹은 당면한 문제를 공권력과 강제력으로 해결하기 위해 조합원은 기꺼이 법원의 문을 두드린다.
은마아파트에는 추진위 외에 이권 다툼으로 생긴 비상 대책 위원회(비대위)가 둘이나 있다. 은마반상회와 은마소유주협회(은소협)가 그것이다. 이들은 위원장 부정 선거 및 비리 의혹, 입주자 회의 장악 등 그간 추진위의 의혹들을 지적하며 탄생했다. 수천억 원의 사업비 중 조합 업무 추진에 관련된 비용을 0.1퍼센트만 잡아도 수억 원을 가뿐히 넘는다. 일반적으로 정비 사업에 조합 운영비가 전체 사업비의 1퍼센트 내외인 것을 고려한다면, 왜 수많은 재건축·재개발 사업이 조합 내부 갈등과 임원들의 비리로 얼룩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소송전은 조합 내부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행정 기관인 강남구청 및 서울시를 향하기도 한다. 행정 기관이 인허가를 접수하고 절차를 진행하는 과정에 소극적으로 임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추진위 내부에 갈등과 이견이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특정 집단이 주도하는 재건축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 반대편의 공격을 올곧이 받아내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구청장과 서울시장의 생각이 다르다면 더더욱 교착 상태가 길어진다. 이 과정에서 각종 보완 사항을 요구하는 행정 기관과 빠른 처리를 원하는 추진위 사이의 행정 소송이 발생한다.
이렇게 소송이 많다 보니 법무법인 대부분은 항상 정비 사업 전문 변호사들을 준비하고 있다. 심지어 먼저 조합 측에 연락해 대리인을 자처하기도 한다. 한 건의 소송을 잘 해결해 주면, 다른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는 조합이나 아파트 단지에서 연속적으로 수임할 수 있다. 개인 변호사들에게도 재건축·재개발과 같은 정비 사업은 본인의 법률 지식을 발휘하여 스타 변호사로 이름을 떨칠 좋은 기회다. 아무리 서울 변두리의 조그마한 아파트도 수억 원에 달하는 재산이다. 조합원과 비조합원, 조합은 수억 원짜리 재산을 지키기 위해 수백만 원의 착수금을 아쉬워하지 않는다. 더욱이 수백 세대 이상이 모여 사는 아파트는 각 소유자의 재산과 소득이 비슷한 편이라 일단 수임하기 시작하면 옆집, 아랫집, 건너 동까지 한 번에 줄줄이 묶어 소송에 착수할 수 있다. 좋게 보면 법조인들이 반사이익을 누리는 것이고 나쁘게 보면 사법 자원 낭비다.
하지만 소송전의 파고는 지금부터 이야기할 ‘진짜 돈’에 비하면 사소한 수준이다. 천문학적인 공사비만큼 큼직한 것이 또 남았다. 철거·이주 단계에서 지출되는 ‘이주비’다. 재건축을 시작하려면 기존 아파트를 철거해야 하니 주민들은 잠시 다른 곳으로 나가 있어야 하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많은 돈이 오고 간다. 조합원에게는 이사비와 함께 임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한 보증금인 이주비가 지원된다. 이를 위한 대출을 한 세대당 평균 5억 원으로 잡고 조합원 중 절반인 2000세대가 대출을 받는다고 가정해 보자. 전체 대출 규모는 1조 원을 넘어간다.
문제는 이 돈이 대치동이나 일원동 등 그 일대에 전세 보증금으로 사용되어 전셋값 상승의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2012년 송파구 가락시영아파트(현 헬리오시티), 2021년 서초구 반포주공1단지와 같은 대단지 아파트의 철거·이주는 인근 지역의 임대 시세를 크게 흔들어놓았다. 수천억 원의 이주비 대출은 전세 보증금으로 사용됐고, 이 돈은 돌고 돌아 임대인의 새로운 부동산 투자 자금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지자체에서 이주와 철거 단계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이유다.
그렇다면 이 돈은 어떻게 마련될까? 조합은 해당 아파트를 가지고 있는 소유자들의 모임이다. 정비 사업은 조합원이 가진 ‘땅’을 기반으로 새로운 아파트를 짓는 것이다. 즉, 조합원들은 아파트(토지)를 가진 사람들이지, 현금을 가진 기업은 아니다. 강남 아파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여유 자금이 어느 정도는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재건축 사업비 전액을 조합원 출자로 진행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필요한 파트너가 건설사다. 정비 사업에서 시공사의 역할은 아파트를 건설하는 물리적인 일 뿐만이 아니다. 훌륭한 시공 능력만큼 정비 사업에 필요한 다양한 비용을 저렴하게 조달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많은 조합에서 1군 시공사와 사업을 하고자 하는 이유는 누구나 들으면 알 수 있는 브랜드를 통해 재산 가치를 최대화하고 싶은 점도 있지만, 1군 시공사의 신용도와 현금 동원력, 재무 상황을 활용해 이주비 대출을 포함한 다양한 금융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금융 기관을 통해 조달해야 하는 돈을 상세히 뜯어 보면 1조 원에 달하는 이주비에 더해 초기 사업 추진을 위한 설계·부대 용역비, 철거비, 세입자 이주 보상금, 일반 분양 전까지 필요한 건설 비용 등이 포함된다. 흔히 PF 대출이라 부르는 이 대출금은 해당 사업에 참여하는 건설 회사의 신용(연대 보증, 채무 인수, 책임 준공 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신용도 좋은 건설 회사가 보증을 선다면, 조합은 그만큼 대출 이자를 줄임과 동시에 충분한 대출을 받을 수 있다. 반면 신용도 문제로 대출 금리가 0.5퍼센트포인트만 상승하더라도 조합원이 지출해야 하는 이자는 매년 수백억 원씩 상승한다.
부동산 호황기에 재건축 PF를 취급하는 은행과 금융 기관은 가만히 앉아서 돈을 긁어모았다. 높은 금리는 아니었지만, 안정적인 사업성과 낮은 위험성을 근거로 수천억 원에서 수조 원에 이르는 다량의 자금이 부동산으로 흘러 들어갔고 이자와 원금으로 회수됐다. 서울 내 주요 재건축 단지에서 대규모 미분양이 발생할 가능성은 없었고, 대출받은 조합원들이 입주를 포기하거나 시공사가 공사를 멈추는 것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건설사의 사업 담당 임원과 금융기관 PF팀은 수억 원에 달하는 성과급을 받았으며, 돈을 빌려주고 싶은 은행들은 건설사와 조합 앞에 번호표를 뽑고 줄을 설 정도였다.
하지만 영원히 오를 것 같았던 부동산 가격은 점차 거래가 줄어들더니 천장에 부딪혔다. 2021년 말과 2022년 초반, 산 정상에 올랐던 가격은 마침내 주저앉았다. 거래는 사라졌고 대구·울산으로 대표되는 지방 시장을 중심으로 미분양이 속출했다. 위기를 감지한 여의도 증권 업계는 거의 모든 부동산 대출과 금융 주선을 중단했고 은행은 시장에 풀린 부동산 대출을 회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파트 가격 하락은 분양 시장에 대한 냉각으로 번졌고, 입주 지연과 계약 해지 요청을 불러왔다. 지방의 미분양은 서울의 대형 단지까지 위협했고, 둔촌주공 재건축과 같은 우량한 사업에 대해서도 8000억 원의 조합 대출 회수를 단행했다. 축제가 끝났다.
10년 후의 은마
은마아파트는 어떤 모습으로, 어떤 브랜드로 재건축될까? 조합의 희망대로 49층 랜드마크 아파트로 재건축될 수 있을까? 재건축 과정에서 대출과 분양은 문제없이 진행될까? 이 모든 것은 언제 끝날까? 10년 뒤에는 재건축이 끝나있을지 아니면 조합 내분과 인허가에 발목 잡혀 여전히 현재 모습 그대로 남아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마 서울시장이나 국토부 장관, 대통령도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20년간 추진해 온 역사와 기록, 현재 상황, 그리고 몇몇 가정을 섞으면 어느 정도 현실감 있는 소설을 써볼 수 있다. 미래를 상상해 보자.
먼저 49층은 가능해 보인다. 서울 도시 기본 계획이 갱신되면서 35층 규제는 없어졌다. 박원순 전 시장의 도시 계획을 지지했던 시민들에겐 뼈아픈 일이겠지만 이를 오세훈 시장만의 독단적 결정이라 보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오 시장이 생각하는 도시에 대한 철학과 생각, 정책이 그를 시장으로 만든 것이고 그게 서울 시민들의 공감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고밀 도시, 직주 근접, 적극적인 정비 사업과 주택 공급은 오 시장 재임 이래 서울시의 흐름이다. 보존과 조화, 규제보다는 개발과 발전, 자율로 도시 계획의 방향이 바뀌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은마아파트 재건축의 계획 변경을 허가해줄 가능성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어떤 건설사가 은마아파트 재건축을 하게 될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본격화된 경기 침체와 부동산 가격의 불안정은 건설비 상승과 함께 큰 불안 요소기 때문이다. 대치동과 같은 핵심 입지의 재건축이라 해도 미분양 리스크와 그에 따른 공사 비용 손실 등이 상당해 어떤 건설사도 참가를 결심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지금보다 경제의 불확실성이 줄어들고 부동산 가격 변동이 어느 정도 진정된다면 상황은 급변할 것이다. 은마아파트급의 강남 대규모 단지는 시공사가 원하는 가장 대표적인 수주 사업이기 때문이다. 다만 국제 정세와 거시 환경은 기업이나 조합이 관리할 수 없는 문제이며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보다 중요한 사항은 지금보다 부동산·건설 시장이 개선되어 사업이 본궤도에 올라오는 시점에 이를 내부에서 힘있게 추진할 수 있을 것이냐다. 진짜 문제는 조합 외부보단 내부에 있다.
정비 사업이 오래 걸리는 가장 큰 까닭은 결정권자가 결단을 내려야 할 때, 결정하지 못하고 판단을 미루기 때문이다. 농구나 축구를 생각해 보자. 최고의 퍼포먼스를 내는 팀은 한 선수가 공을 혼자 가지고 있지 않는다. 끊임없이 공을 패스하며 그사이 다음 전략을 준비하기 위해 달려간다. 사업도 마찬가지다. 본인이 해야 할 일을 끝내면 그 즉시 다음 플레이어에게 패를 넘겨 인허가를 받고, 공사를 준비해야 한다. 공을 전달받은 사람이 결정을 못 하거나 안 하고 시간을 허비하게 되면 다음 단계와 결정이 연달아서 지연되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처음 허비한 시간의 몇 배에 달하는 시간이 흘러가 버린다. 다수가 함께하는 정비 사업은 주요한 사항을 조합총회나 대의원회 승인받아야 하지만, 이 회의를 소집하는데 최소 일주일 길게는 한 달 이상이 걸리게 되고, 그때도 안건이 100퍼센트 통과되리란 보장은 없다.
예를 들어 49층 설계 변경을 몇 달에 걸친 회의와 조합총회 끝에 통과시켜서 강남구청에 안건을 접수했다고 가정해 보자. 조합의 염원과 다르게 강남구청이 여러 이유를 들어 49층이 아닌 46층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조합장이 임의로 ‘이 정도면 조합원들도 동의할 겁니다’라고 말하며 46층으로 빨리 통과시켜 달라고 해야 할까. 혹은 ‘49층이 아니면 절대 안 됩니다, 결코 물러설 수 없습니다’ 하면서 강경하게 나서야 할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대의원과 조합원을 소집해 상황을 설명한 후 안건에 대해 투표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전까지 49층 계획을 46층으로 변경하는 건축 설계를 다시 해야 한다. 협상과 타협의 연속인 인허가에서 내부의 의견 통일과 빠른 의사 결정은 파워 게임의 가장 큰 강점이다. 4500여 명의 서로 다른 개인들로 구성된 조합은 이 무기를 쥘 수 없다.
“내 집은 어디 안간다.” 이 문장은 조합원에게 가장 안정감을 주는 문장일 것이다. 어떻게 지지고 볶더라도 대한민국에서 강남 아파트를 강제로 빼앗을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고 재건축을 지연시키거나 심지어는 무산시킬 수는 있어도, 소유권을 강제로 이전하진 못한다. 진보에서 보수로, 보수에서 다시 진보로 정권은 계속 바뀔 수 있고 그때그때 부동산값은 요동치겠지만 내 이름으로 되어있는 아파트는 든든한 보호막이 된다.
하지만 그 보호막은 깊은 참호와 같다. 깊고 넓은 참호는 적군이 내 영토를 침범하지 못하게끔 지켜주지만, 자신이 그 참호를 넘어가기 위해서도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인허가가 통과되든 안 되든, 사업이 언제 삽을 뜨든 ‘내 집 어디 안 간다’라는 명제는 변함이 없다. 실제로 재건축 현장에선 최선의 결과가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으로 사업 진행이 차일피일 늦어지는 게 다반사다. 정치인도 정해진 임기가 있고, 시공사 임원들도 매년 성과를 증명해야 하지만 소유권은 만기가 없으며, 조합원도 지정된 해촉 일자가 없다. 10년은 절대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재건축이 완성되기 넉넉한 시간이 아니다. 은마는 과연 100년 후의 강남에 남루하게 남겨진 이권 다툼의 상징물이 될 것인가, 10년 후 새로운 강남의 랜드마크가 될 것인가. 이 답은 소유자들의 의지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