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으로 쓰는 트렌드 보고서
3화

동시대 비즈니스의 원리

포켓몬 빵 열풍이 보여 주는 팬덤 소비


오픈 런의 장소가 바뀌었다. 샤넬, 루이비통 같은 명품 매장들이 즐비한 백화점 앞이 아니라 현대인의 오아시스, 편의점 앞이 오픈 런 손님으로 가득하다. 주인공은 ‘SPC삼립’이 16년 만에 다시 출시한 ‘포켓몬 빵’이다. 통상 편의점에 새 상품이 입고되는 시간이 늦다 보니 밤마다 포켓몬 빵을 사냥하려는 이들이 이른바 원정에 나서고 있다. 바야흐로 16년 전, 2006년 ‘라떼’는 하나에 500원이었던 빵 하나 가격이 이제 1200원이다. 빵값이 두 배 넘게 오를 만큼 세월이 흘렀다. 변하지 않은 것은 빵과 함께 들어있는 추억의 포켓몬 ‘띠부씰’이다. 당첨 확률이 낮은 일부 포켓몬 띠부씰은 중고 시장에서 개당 5만 원에도 판매가 되고 있다고 하니, 우당탕탕 포켓몬 빵 오픈 런 사태의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이 띠부씰이라 할 수 있겠다. BTS의 RM도 포켓몬 띠부씰을 찾아 헤맬 정도다. 16년 전 잠든 줄만 알았던 유행을 다시 부활시키고 출시 2주 만에 빵 350만 개를 완판한 힘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그 비법은 다름아닌 팬덤에 있을지 모른다.

포켓몬 빵 품귀 현상이 일어난 이유

화제의 중심에 있는 ‘띠부씰’은 ‘띠부띠부씰’을 줄여 부르는 이름이다. ‘떼었다 붙였다’할 수 있는 씰(seal)이라는 뜻이다. SPC 측에 따르면 수년 전 다른 제품을 출시할 때 자사가 최초로 개발한 이름이다. 최근 유례없이 치솟은 포켓몬 빵의 인기에 코로나19로 존폐 위기에 내몰렸던 경북 경산 ‘띠부씰’ 제조 중소기업도 활황기를 맞았다. P VC 방수 소재로 만들어진 스티커라 접착력이 강하면서도 떼어내고도 흔적이 남지 않은 점이 강점이다. 포켓몬 빵 재출시를 기획한 마케터는 연이은 품귀 현상에 생산 일정을 새로 짜느라 조만간 병가를 내야 할 정도로 눈코 뜰 새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사실 재출시 기획이 마케터의 머릿속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수년간 포켓몬 빵을 잊지 못한 고객들의 출시 요청이 빗발쳤다. 고객의 소리에 잔뜩 쌓인 민원과 실무 마케터 본인의 팬심, 그리고 때맞춰 적절하게 성사된 〈포켓몬〉과의 상표권 계약이 대박을 견인했다.

구매력이 충전된 소비자들의 어릴 적 향수를 자극해 죽은 게임도 살려 내는 팬덤의 사례는 더 있다. 2002년 넷마블에서 서비스를 시작해 많은 이용자를 끌어모았던 게임 〈노바 1492〉는 2011년 서비스가 종료됐다. 4년 뒤인 2015년, 이 게임을 그리워하던 팬들로 꾸려진 개발진이 직접 회사를 차려 게임을 되살려 냈다. 재출시 소식을 기다리던 다른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시작된 텀블벅 펀딩에는 하루 만에 1000만 원이 모였고, 현재까지도 게임 서비스가 운영되고 있다.

1000명만 있으면 성공하는 팬덤 경제학

유명 과학 기술 문화 잡지 《와이어드》를 공동 창간한 경영 전문가 케빈 켈리(Kevin Kelly)는 2008년 디지털 시장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수백만 명의 고객이나 수백만 달러가 아니라 ‘1000명의 확실한 팬’이라는 내용의 에세이를 썼다. 이 확실한 팬은 그야말로 당신이 생산한 모든 것을 소비하는 사람들이다. 처음부터 100만 명의 팬을 모으려는 것보다 크리에이터의 모든 창작물에 1년에 최소한 10만 원가량을 쓸 용의가 있는 진정한 팬 1000명을 모으는 것이 훨씬 더 현실적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크리에이터는 팬 각각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그들을 더욱 수월하게 챙길 수 있다.

대형 유통사를 거쳐야만 창작물을 판매하는 경로를 확보할 수 있었던 종전과는 달리, 지금은 클릭 한 번으로도 창작자가 팬들과 직접 소통, 거래할 수 있는 시대다. 크리에이터가 더 개별적이고, 더 희귀한 팬들의 요구 사항에 직접 응답할 가능성도 커졌다. 100만 명 중 한 명만 관심을 가지는 작품이나 아이디어라 해도 지구상으로 따지면 이런 사람들이 7000명일 수 있다. 이 7000명이야말로 나를 배신하지 않고 끊임없이 소비해줄 팬이다. 다시 말해 유명세와 제품 다양성의 상관관계를 그린 그래프에서 오른쪽으로 끝없이 뻗어 나가는 ‘긴 꼬리’의 기적을 명심하라는 교훈이다.
애초에 다수에게 통할 아이디어는 큰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는 대박 상품이 되지만 이 ‘정답’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극소수에게만 향유되는 제품이라도 오른쪽으로 길게 뻗어 가는 저 꾸준함에 기적이 있다. 케빈 켈리는 꾸준한 소비의 가능성, 16년이 지나도 잊지 않고 재출시를 갈망하게 되는 그 팬심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어느덧 10년이 훌쩍 넘은 케빈 켈리의 에세이는 그 뒤로 각종 크라우드 펀딩의 활성화, 가치 소비 유행, 맞춤형 광고 시장의 부흥과 같은 사례로 증명되며 디지털 마케팅의 교본이 됐다.

서브컬처의 뚝심 소비

BTS의 성공이 가장 확실한 예화로 거론될 수 있겠다. 무차별 대중을 타깃으로 히트 상품을 내놓는 것이 전통적인 관습처럼 굳어졌던 아이돌 산업에서 과감히 팬 서비스에 베팅한 전략이 대박을 터뜨렸다. BTS의 대성공을 사다리 삼아, 어느덧 전 세계적인 유력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성장한 하이브는 종전의 성공 전략을 더 영민하게 갈고닦는 데 매진하고 있다. 하이브 소속 남자 아이돌 그룹 ‘엔하이픈’의 결성 과정을 보여 줬던 Mnet 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지난 2020년 비록 매우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하며 종영했지만, 디지털 클립 누적 조회 수로 무려 1억 8000만 뷰 이상을 기록했다. 첫 앨범을 내기 전부터 구축된 전 세계 팬덤이 기반이 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이브에 따르면 자회사가 운영하는 커뮤니티 플랫폼 ‘위버스’에 있는 엔하이픈 커뮤니티 가입자는 280만 명이 넘는다. 비록 국민적 인지도가 높지 않고 눈에 띄는 히트곡도 마땅히 떠올리기 쉽지 않지만 파편화된, 그러나 결코 얕잡아 볼 수 없는 굳건한 글로벌 팬덤이 어디선가 그들의 스타를 떠받치고 있다.

어원으로 보면 팬덤은 fanatic의 fan, ‘영지(領地)’라는 뜻을 지닌 dom의 합성어다. fanatic은 라틴어 ‘파나티쿠스(fanaticus)’에서 온 말로, 교회에서 금전적 요구 없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또 특정한 분야나 인물을 열정적으로 좋아하기 때문에 완전히 몰입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열성 팬들이 스스로 2, 3차 저작물을 생산해 내고, 저작물들은 세계관으로 발전한다. 창작과 소비의 경계가 흐려지는 지점, 마케터들이 열광하는 순간이다. 시장에서는 이미 팬덤을 마케팅의 도구가 아닌 전부로 받아들이고 있다. 마케팅 전문가 데이비드 미어먼 스콧(David Meerman Scott)은 2020년 출간한 저서 《패노크라시(Fanocracy)》에서 제품과 서비스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팬덤을 만드는 것이고, 팬덤이야말로 모든 조직의 로켓 연료가 될 수 있다고 표현했다.

책에서는 상호 작용의 중요성과 가까운 거리감이 여러 차례 강조된다. 고객을 심리적, 물리적으로 친밀한 소통이 가능한 개인적 거리, 1미터 이내로 끌어들이는 일이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기에 가장 좋다는 것이다. 언제든 쉽게 아이돌의 생활상에 접속할 수 있게 하는 인프라를 형성한다거나, 특별한 팬심을 드러낼 기회를 많이 부여하는 등의 전략이 그 사례다. 대륙의 실수라 불리는 샤오미는 아예 회사 슬로건을 ‘오직 팬들을 위해서!(Only for Fans!)’로 삼았다. 샤오미는 제품의 기획·개발에 팬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적극적으로 커뮤니티에서 유저들 간의 소통을 장려한다. 애정을 쏟은 팬들은 자부심을 갖고 제품 소비는 물론, 홍보와 브랜드 마케팅까지 떠맡는다. 숫자로 기업과 브랜드를 한계 짓는 숱한 지표들을 한방에 무력화시키는 강력한 팬덤 경제는 이제 누구나 아는 비책이 됐다.

 

CNN은 왜 한국에 패션 회사를 차렸을까


큼지막한 빨간색 ‘코닥’ 로고와 빗금 무늬가 박힌 노란색 후드 티,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교 이름인 ‘예일(YALE)’ 글씨가 가슴팍에 새겨진 맨투맨 티셔츠가 거리에서 자주 보인다. 예일대학교 학생이 이렇게나 는 것일까? 노란색 테두리 직사각형 로고 옆으로 ‘내셔널지오그래픽’ 글자가 새겨진 바람막이, 웬만한 백화점마다 입점해 있는 ‘디스커버리’ 겨울 패딩은 어떤가? 이 옷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전부 한국 패션 브랜드 제품이라는 것이다. 외국에서도 봤다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것도 한국 패션 회사가 수출한 제품이다. 이젠 CNN 로고가 새겨진 ‘버킷 햇’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을 거리에서 자주 마주칠 수도 있다. 2021년부터 CNN 로고가 박힌 옷도 팔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역시 한국 패션 회사가 판다. 지금 패션 업계의 강자는 바로 ‘K-라이선시(계약한 상표권으로 제품을 생산·유통하는 업체)’다. 미국 케이블 뉴스 채널 CNN은 어쩌다 본토에서도 안하는 어패럴(패션) 제휴 사업을 한국에서 시작했을까? 그리고 이런 옷들을 과연 누가 사는 걸까?

CNN이 패션 회사라고?

CNN은 워너 브라더스, HBO 등과 함께 워너미디어 그룹이 소유한 미국 케이블 채널이다. 미국 애틀랜타에 본사를 두고 있는 CNN은 24시간 뉴스를 공급하는 전문 채널로 1980년 설립됐다. 전 세계 분쟁 지역과 전쟁터에서 전하는 생중계 뉴스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각인하며 현재도 국내 여러 언론사와 제휴 계약을 맺고 있다. “어디든 간다”는 취지의 “Go there”이 회사의 슬로건이다.

CNN과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패션 브랜드를 창업한 회사는 2020년 설립된 기업 ‘스톤글로벌’이다. CNN 본사를 대상으로 수개월의 설득 끝에 6년간 라이선스 사용 계약에 성공했고, 2021년 6월 온라인에 처음 브랜드를 선보였다. 현재는 오프라인으로도 전국에 10개가 넘는 매장을 두고 있는데, 일상생활에서도 입을 수 있는 아웃도어가 주력 품목이다. 스톤글로벌 관계자는 “뉴스만이 아닌 CNN의 다큐, 음식, 테크를 다룬 오리지널 콘텐츠를 보고, 스토리를 입힐 수 있는 영역이 확장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가령 2021 S/S 시즌 라인업 중 하나엔 CNN이 만드는 콘텐츠로 연결되는 QR코드가 삽입됐다. 멸종 위기에 대해 다룬 환경 콘텐츠나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여행지’ 등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잘 알려진 CNN 콘텐츠를 패션으로 확장하겠다는 것이다. 스톤글로벌은 콘텐츠에서 받은 영감을 디자인에 반영하고, 동시에 패션을 통해 해당 콘텐츠를 더 알리는 상호 작용이 곧 스토리텔링이라고 말한다.

패션 산업 이끄는 라이선시들

CNN이 라이선스 계약으로 패션 업계에 진출한 건 이번이 세계 최초다. CNN 관계자는 여러 차례 성공을 거둔 한국 라이선스 패션 산업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해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전했다. 앞서 말한 내셔널지오그래픽, 디스커버리와 같은 대중화된 패션 브랜드도 모두 해외 미디어 콘텐츠 기업의 라이선스를 국내 패션 기업이 사들인 경우다. 이 분야의 ‘갓생’으로 꼽히는 회사는 F&F다. F&F는 1997년 사실상 국내 최초로 비(非) 패션 분야 라이선스 브랜드인 ‘MLB’를 도입했다. 업계에 있는 이들은 F&F를 ‘라이선스 어패럴 분야의 삼성’이라 부른다. MLB의 성공 이후 미국의 자연 탐사 보도 채널 디스커버리의 라이언스로 시작한 어패럴 사업도 연타 성공하면서 2019년엔 중국에도 진출했다.

실제 코로나19 이후 전반적인 불황이 이어지고 있는 국내 패션 섬유 업계에서도 F&F를 필두로 하는 라이선시들의 선방은 눈에 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한국거래소 및 코스닥에 상장한 패션업체 42곳의 실적 현황 중, 라이선스 패션 어패럴 회사들의 전년 대비 매출 증감률은 꾸준히 20퍼센트 이상의 실적을 보인다.
언제 어디서나, 라이프 스타일 아웃도어

대부분 이름이 알려진 라이선스 어패럴 브랜드 품목들은 아웃도어 패션으로 분류되고 있다. 디스커버리나 내셔널지오그래픽처럼 모 브랜드가 자연, 환경, 탐사 등을 다루는 채널인 만큼, 상표 이미지의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는 까닭도 있지만 이는 주 소비자층의 생활 패턴을 고려한 전략적 선택이기도 하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가 늘어나고 이른바 출근복의 개념이 바뀌면서 정장 수요가 부쩍 줄었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에 따르면 2011년 6조 8668억 원이던 국내 남성 정장 시장은 2020년 3조 6556억 원으로 대폭 축소됐다. 편하지만, 격식 떨어져 보이지 않는 옷. 그러면서도 어느 공간에서나 잘 어울리는 옷에 대한 수요가 이른바 라이프 스타일 아웃도어 시장의 확대를 견인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라이선스 어패럴 업계의 후발 주자들도 주저 없이 이 분야를 선택했다. 미국 필름 회사 코닥과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고 지난 2019년 코닥 어패럴을 세운 ‘하이라이트브랜즈’도 이 대열에 참여한 국내 회사다. 하이라이트브랜즈는 10~20대를 타깃으로 한 온라인 패션 플랫폼 ‘무신사’에서 맨투맨, 티셔츠 등 제품을 테스트 마켓 형태로 선보였는데, 짧은 시간 안에 컬렉션 전체가 완판되는 뜨거운 반응을 확인했다. 하이라이트브랜즈는 어패럴 론칭 뒤 2020년 매출액 170억 원을 기록했다. 관계자는 “10~20대 고객들을 중심으로 타깃을 잡은 건 화제성 때문”이라며 “원색의 브랜드 컬러를 활용한 제품들이 소위 ‘사진빨 잘 받는’ 옷으로 SNS에 입소문이 퍼지면서 금세 유행을 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고 전했다. 판매처가 오프라인 매장으로 확대되면서 고객층의 저변도 점차 넓어지고 있다. 필름 카메라에 대한 애착과 추억이 있는 사람들, 소위 복고 열풍 속에서 오래된 것을 고집하겠다는 회사의 철학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가슴팍에 코닥 로고가 큼지막하게 새겨진 옷을 구매하고 있다.

근본 없는 로고는 필패

취재에 응한 업계 관계자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했던 말이 있다. 라이선스 사업의 성패는 브랜드에 대한 공부에 달렸다고 말이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유명 브랜드의 로고 디자인만 상품에 붙여서 판매하는, 이른바 ‘근본 없는 로고 플레이’만으로는 소비자들을 사로잡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다 보니 단지 보기 좋게 제품을 포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 온 라이선스의 이미지를 재해석하고, 또 적극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발굴하려는 이벤트들이 이어지고 있다. 가령 코닥어패럴은 필름 제조사라는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 독립 영화 제작자들을 발굴하는 단편 영화제를 개최한다. 이른바 ‘가치 소비’의 대상으로 합격점을 받기 위한 노력이랄까? 자신이 어떤 걸 소비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고, 또 어떤 가치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흡수하려는지 잘 알고 있는 젊은 소비자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브랜드가 다년간 쌓아 올린 유산을 최소한 소비자들보다 정확하게, 그리고 일관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패션 컨설팅 업체 ‘피에프아이엔’의 유수진 대표는 “젊은 구매자들에게 패션은 이른바 자신의 가치나 지향을 보여주는 ‘굿즈’가 됐다”고 설명한다.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는 브랜드 스토리는 이들에게 제품을 구매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이 구매자들은 브랜드 충성도가 높은 대신, 자신이 기존에 생각한 철학에 부합하지 않는 디자인이나 상품이 출시되면 이를 시정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항의하고 회사를 비판하기도 한다. 모기업과 라이선시가 함께 기존 브랜드에 새로운 가치를 덧입히고 발굴하는 공생 관계가 된다는 점도 패션업계에 진입하려는 이들에겐 매력적인 요소다. 효율이 좋기 때문이다.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모기업의 유산과 역사를 활용할 수 있기에 브랜드 마케터들의 혜안이 가장 큰 무기가 된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뉴스 미디어, 스포츠 경기와 같은 엔터테인먼트 사업, 필름 회사, 유명 사립 대학까지. 대중들에게 각인된 그 어떤 것이라도 패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K-라이선스 업계와 K-가치 소비자가 몸소 증명하고 있다.

 

다이어리로 빌딩 세운 30대 창업가


〈스프〉 제작에 참여하고 있는 SBS ‘D콘텐츠기획부’에는 대학생 인턴이 네 명 있다. 맡은 일을 기대 이상으로 거뜬히 잘 해내는 열정 인턴들에게 ‘모트모트’라는 이름을 꺼냈더니, ‘다꾸(다이어리 꾸미기)’에 별 관심이 없다는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가 다 알고 있다고 말했다. 어느 늦가을 서울 중구에 있는 사무실에 찾아가 만난 김권봉 대표에게 이 얘기를 해줬더니 눈동자가 커지면서 “으악! 소름인데요?”라고 반응한다. 전해 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트모트의 김권봉 대표는 서울대 시각디자인과 07학번, 1988년생이다. 모트모트의 설립은 2018년이지만 김 대표의 창업 경험은 그전부터다. 김 대표는 전공을 살려 종이로 만들 수 있는 걸 찾았다. 그러다 보니 처음엔 문제집을 만들까 싶기도 했다. 학생들이 쓸 만한 것들을 더 고민하다 나온 제품이 플래너였다. 플래너 제품을 디자인하고, 인쇄하고, 만들어 팔았다. 만드는 족족 다 팔리는 완판을 몇 번 경험하고 나니 어느덧 7년 차 대표가 됐다. 모트모트는 외부 투자 없이 100억대 매출을 목전에 두고 있다.

투자 없이 100억대 매출

모트모트의 주요 소비자는 10대 청소년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비상 상황이었던 지난 2~3년간 김 대표는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 학생들이 학교에 가는지, 단축 수업을 하는지…… 매번 바뀌는 복잡한 학사 일정으로 인해 갈팡질팡한 일상을 보냈다. 등교 정상화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다시 상품 전략을 개발하기 위한, 숨 고를 시간이 생겼다. 효자 품목인 ‘텐미닛 플래너’가 꾸준히 사랑을 받는 동안 시장도 모트모트를 주목했지만, 창업 이래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투자를 전혀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업을 하면서 투자를 받지 않으면 ‘바보’ 취급을 하던 풍조에 대한 반발심이 컸다고 한다.

“모트모트는 서류상 엮인 제 네 번째 사업체입니다. 다른 사업들을 하면서 느낀 것이 지원이나 투자금을 받기 위해 상품 그 자체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보다 사업 계획서를 쓰는 데 드는 시간이 훨씬 더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모트모트를 하면서는 일회성으로 끝날 투자나 지원보다는 지속 가능한 매출을 일으킬 수 있는 영역에 더 집중하자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사업을 이어온 지 7년. 직원 수는 여섯 명에서 23명으로 불었고, 매출만으로 핫 플레이스인 성수동에 건물을 세웠다. 매출액이 100억 원대엔 아직 미치지 못하지만, 불확실성이 걷힌 지금부터는 목전에 둔 목표가 됐다. 그사이 투자관도 바뀌었다. 이제 김 대표에게 투자는 ‘충분히 잘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다.

인스타용 종이 찾기 여정

투자 유치로부터 과감히 눈을 돌려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종이의 질이었다.

“맥주를 만들 때 물이 중요한 것처럼 결국 플래너 상품도 종이가 중요해요. 그런데 상대적으로 시중에선 너무 저급한 종이를 많이들 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비용을 많이 높이지 않고 질 좋은 종이를 찾는 데 품을 많이 들였습니다.”

국내며 해외며 가리지 않고 시장 조사에 나섰고, 원재료 함량과 중량을 높인 종이 개발에 공을 들였다. 문구의 특성상 직접 써 본 사람의 만족스러운 경험이 재구매율을 높이는 중요 요소였다. 사업이 본격 확장할 무렵, 제작해 내놓는 제품마다 족족 판매되는 매출 통계를 보고 오프라인 자영업자들이 의아해했다. 화려한 일러스트로 눈길을 끄는 표지나 디자인도 아닌데 학생들의 입소문을 타고 제품은 부리나케 팔려 나갔다. 김 대표는 그때마다 ‘사장님들이 직접 써보셔야 안다’는 말을 해왔다. 종이 중량을 높이는 결정 배경엔 또 다른 전략도 있었다.

“원래는 우리 학교, 같은 반 친구, 내가 다니는 학원, 이렇게 에 공부를 공유할 만한 또는 비교 경쟁을 할 만한 사람들이 없는 느낌이었다면, 요즘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 얘기하면서 함께 뭔가를 하는 문화가 익숙한 상황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공부할 때도 내가 얼마나 했다, 이런 걸 남한테 보여 주는 것에 스스럼이 없고 또 그걸로 본인 통제를 한다든가 하는 행동도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불특정 다수와 공유하기에 더 좋은 제품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사실 그냥 줄 노트로 돼있는 건 나한테는 그냥 쓰고 나면 끝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흥밋거리가 전혀 되지 않죠. 2~3시간은 잘 가늠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텐미닛 플래너’엔 그 시간을 형광펜으로 마킹하게 하는 레이아웃을 만들었어요. 시각적으로 딱 드러나는 거죠. 내가 얼마나 쉬었구나, 얼마나 구멍 난 시간들이 있었구나. 이게 SNS에 공유가 되었을 때 스쳐 지나가면서도 이 사람이 어느 정도 공부를 했는지를 알 수가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흥미를 가질 수 있게 되죠.”

공부 시간을 쉽게 전시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여러 색깔의 펜으로 색칠하며 꾸며도 버틸 수 있는 재질의 종이가 필요했다. 중량과 펄프 함량은 이른바 다꾸한 페이지의 사진을 찍을 때 앞면과 뒷면이 비치지 않는 정도의 수준으로 조정했다.

“예를 들면 공부 시간도 마찬가지인데, 사람마다 절대 시간에 대한 가치는 다를 수 있지만, 불특정 다수에겐 어떤 수치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저희 양식엔 꼭 공부한 총 시간을 적을 수 있게 칸이 마련돼 있습니다. 이런 것도 결국 SNS 활동을 하는 데 좀 더 적합한 양식인 거죠.”

텝스, 토익 보는 대표

주로 20~30대 초반의 젊은 직원들로 꾸려진 사무실엔 노동요로 추정되는 음악이 bgm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웹페이지를 운영하는 개발자, 디자인을 책임지는 디자이너를 포함한 6~8명 정도의 직원들은 ‘콘텐츠 기획’을 담당하고 있다. 이들은 ‘공부할 때 듣기 좋은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고 때로는 집중력을 높일 수 있는 백색 소음이나 ASMR을 직접 녹음한다. 구매자의 생활 양식과 패턴을 알아보기 위한 시장 조사에는 대표가 직접 뛰어들기도 한다. 지금 현재, 공부하는 이들의 취향과 정보를 얻는 과정을 체험하기 위해서 김 대표는 주기적으로 텝스나 토익 같은 영어 시험을 치르곤 한다고 전했다.

“나이가 들다 보니 감을 잃기 마련인데 공부를 하다 보면 요즘엔 자료를 어떻게 수집하는지도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시험장도 대부분 중학교, 고등학교잖아요. 시험을 보면 학생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도 체험할 수 있고, 또 칠판 앞뒤로 붙은 가정 통신문도 볼 수 있고요. 사용자 니즈를 파악하기 위한 조사에 많이 할애하고 있습니다.”

발로 뛰는 노력에 감응해서일까. 모트모트의 공식 인스타 계정 팔로워 수는 17만 명에 이른다. 이곳엔 모트모트 플래너를 활용한 갖가지 사례들이 샘플 케이스로 제시되는가 하면, 각종 공부법이나 입시 정보도 올라온다. 제조업의 한계를 뛰어넘어 업종을 넘나드는 ‘소프트웨어’적 마케팅으로 팬덤도 구축됐다.

“인터뷰 준비를 하며 책상을 정리하다 보니 그간 고객들이 ‘고맙다’며 보낸 편지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이게 사업이기도 하지만 저희에겐 업이기도 하잖아요. 저희가 만든 제품이 ‘계획을 세우고 또 그걸 지키려는’ 용도로 구매한 소비자들에게 제대로 활용되고 또 그로 인해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피드백까지 보내 주시는 경우는 정말 보람이 크죠.”

태블릿 시대의 종이

이른바 태블릿 시대가 도래해도 공부는 종이로 하기 마련이라는 것이 김권봉 대표의 지론이다.

“디지털 디바이스가 아무리 발달했다 해도 공부에 필요한 멀티 디바이스로 완벽히 종이를 대체하긴 쉽지 않아요. 노트가 없어진다, 종이 디바이스가 사라질 것이다……. 이런 얘기는 제가 창업하기 전인 7년 전부터 나왔던 얘기지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학생들은 종이로 된 문제집, 종이로 된 노트를 펴들고 종이로 된 플래너를 체크하며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말미에 어쩌면 처음에 했어야 할 질문을 던졌다.

“사명 모트모트( mote-mote)는 작고 사소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 모트(mote)의 반복입니다. 어떤 일이든 사소하고 작은 것의 반복이 모여 성취를 가져온다는 의미가 제품을 사용하는 고객들에게 전달되길 바랐습니다.”

자취방에서 후배와 한 땀 한 땀 제작해 한 부씩 팔았던 플래너가 10대 다꾸 열풍의 견인차가 되기까지. ‘써 본 사람은 무조건 느끼는 차이’라는, 문구 특유의 사소하지만 치밀한 물성의 진정성이 이룬 성취가 아닐까.

 

실리콘밸리에서 맨땅 헤딩하기


경제 상황이 위축되는 시기엔 투자사들도 지갑을 닫는다. 소비 매출 증대로 투자 성공을 보장받기가 어려우니 말이다. 국내외 스타 유튜버 시장 확대와 더불어 가파르게 성장한 스타트업 ‘샌드박스’도 투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도티, 곽튜브 같은 유명 유튜버들이 소속된 업계 1등인데, 일부 구조 조정도 감행했을 정도로 상황이 썩 좋은 편이 아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뜨겁게 불었던 퇴사 열풍과 ‘경제적 자유’라는 트렌드도 살짝 움츠러들었다. 자산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역시 근로 소득이 제일’이라는 말이 다시 떠오르는 시절로 돌아왔다. 업계 선두를 달리던 스타트업들이 줄줄이 매각 시장에 나왔고 창업 열기를 주도하던 미국 IT 기업들은 대규모 감원에 나섰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여전히 ‘혁신’과 ‘기업가 정신’, 그리고 ‘스타트업’이 시대정신이라 외치며 글로벌 시장으로 본격 확장에 시동을 걸고 있는 스타트업이 있다. 국내외 스타트업 생태계와 창업가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콘텐츠 기업 ‘EO 스튜디오’다.

스타트업은 시대정신이다

창업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면 필수 시청한다는 이 유튜브 채널의 이름 ‘EO’는 창업자 김태용 대표의 이름 초성 ‘ㅌㅇ’에서 따왔다.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과 기회(Opportunity)라는 의미도 담았다고 한다. 오리지널 채널 ‘EO 이오’의 구독자 수는 2023년 7월 기준 54만 명, 2022년 9월 론칭한 글로벌 채널의 구독자 수는 약 11만 명 정도다. 실리콘밸리에 진출해 좋은 성적을 내는 한인 창업가 인터뷰를 비롯해 자신의 일에 진심인 직장인들, 투자를 받기 위한 스타트업들의 무삭제 IR 피칭 영상, 스타트업 서바이벌 오디션 같은 웹 예능까지. EO는 혁신과 일에 관한 다양한 종류의 콘텐츠들을 기획 제작해 왔다. 덕분에 EO는 창업을 앞두고 있거나, 혹은 창업 초기에 고민하는 이들의 ‘필수 코스’로 입소문이 났다. 이 채널의 비결은 무엇일까?

“처음엔 1인 미디어였습니다. 애초에 콘텐츠 사업을 하려 했던 것도 아닙니다. 학부생 시절부터 여러 방면에 관심을 두고 제조 등 커머스, 커뮤니티 사업 등을 연이어 창업한 끝에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흘러 왔습니다.”

1인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시작해 직원 수 21명의 법인을 세우기까지. 1990년생 대표는 어떤 ‘혁신론’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폭설이 내린 날, 서울 강남구에 있는 EO 스튜디오에서 김태용 대표를 만났다.

경제 관련 유튜버들 참 장사 안 되는 시절이다. 스타트업에 특화된 콘텐츠인데 요즘 같은 경기 불황기에 살림살이가 어떤가?

비즈니스 문의가 줄어든 건 사실이지만 놀랍게도 트래픽은 하나도 줄지 않았다. 사실 늘 놀랍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대개 30세쯤 되면 경제 활동을 하고 주식 투자나 재테크에 뛰어든다. 이 수요가 적용된 콘텐츠 구독자 수가 대략 250만 명 정도라고 본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재테크 영역이 아니라 스타트업에 특화한 콘텐츠인데 49만 명씩 구독자가 모이는 걸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주식 재테크에 대한 관심에 비하면 30분의 1도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예상치를 뛰어넘은 거다. 그만큼 젊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주도적으로 하고, 커리어 발전을 위해 주도적으로 일을 만들고 싶은 게 아닐까.

어려운 상황에서도 EO는 최근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투자 성과는 어땠나?

류중희 대표와 신재식 대표, 그리고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플루언서 마케팅을 진행하는 ‘데이터블’이라는 회사에서 시드 머니 3억 원을 받아 사업을 시작했다. 구조 조정을 단행하는 회사도 늘고, 몇 가지 계약이 어그러지면서 힘들 때가 있긴 했지만 글로벌 시장으로 성장의 방향을 틀었던 게 주효했다. 글로벌 채널에도 스타트업 CEO들을 만나 대표한 콘텐츠 등이 올라가고 있는데, 거의 하루에 1000명씩 구독자가 늘고 있다. 한국에만 있었으면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성장 가능성을 보여 주면서 프리 시리즈 A 수준의 20억 규모 투자를 유치할 수 있었다.

1인 미디어로 시작해서 이만큼 성장했다. 여러 차례의 창업을 거듭했다고 들었다.

대학교 학부생 때 처음 창업했다. ‘예술가들 돕는 일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게 ‘좋아요’ 많이 받은 제품 만들어 파는 사업이었다. 처음엔 IT 서비스를 만들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플랫폼은 잘 안되고 브랜드 제조업이 됐다. 그 이후에도 IT 서비스로 돌아가려고 소상공인들 가게에서 쓸 수 있는 쿠폰을 발행해 대학생들에게 파는 사업을 했다. 그런데 이것도 이상하게 비즈니스는 잘 안 되고 대학생들 모여 노는 커뮤니티만 잘 됐다. 커뮤니티를 운영하려다 보니 콘텐츠가 필요하게 됐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콘텐츠 사업을 하게 됐다.

습관이 된 도전

김태용 대표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건 홀로 실리콘밸리로 훌쩍 떠나 외지에서 고군분투 중인 한인들을 인터뷰한 콘텐츠들을 업로드하면서부터다. 연고도 없는 지역에 무작정 찾아가 ‘20대 청년이 홀로 사업가들을 만나 인터뷰하는 프로젝트를 하려고 하니 도와주면 좋겠다’는 글을 한인 커뮤니티에 뻔뻔하게 올린 게 시작이었다. 생각 외로 맨땅 헤딩이 효과가 있었다. 42일 동안 40명의 창업자, 엔지니어, 디자이너, 마케터 등을 만나고 그중 스토리가 있는 16명을 영상에 담았다. 이를 다듬어 만든 〈리얼밸리〉라는 콘텐츠 시리즈를 2017년 태용 유튜브, 페이스북 계정에 올렸다. 두 달 만에 400만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했다.

맨땅 헤딩을 즐기는 편인가?

창업한 분들은 아마 공감할 텐데, 사업을 하다 보면 좋은 점이 있다. 도전하는 게 습관이 돼서 뭔가 새로운 걸 할 때 딱히 큰 용기가 필요 없도록 단련이 된다. 두렵고 막연하고 이런 감정은 창업 초기 때야 있었지만 처음의 장벽을 넘고 나면 뭔가를 시도할 때 두려움이 꽤 사라진다.

2017년 태용으로 개설한 채널을 2년 뒤 EO로 바꿨다. 앞으로도 더 높은 성장이 목표겠지만 지금껏 본인 채널의 ‘티핑 포인트’는 뭐였다고 생각하나?

시청자, 타깃 오디언스(target audience)가 가장 중요하다. 우리 채널은 이 사람들의 니즈에 콘텐츠를 맞추려고 매우 노력한다. 규모가 커지더라도 매스 미디어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지 않았던 게 주효했다고 생각한다. 기업가 정신을 갖고 스타트업에 참여하거나, 혹은 스스로 기업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맞닥뜨릴 수 있는 장벽을 없애주는 것. 그 목표에만 충실했다. 특히 영상 초반부에 이 타깃 오디언스들이 왜 영상을 믿고 봐야 하는지, 생전 처음 보는 스타트업인데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빠르게 제시하려 했고 그밖에 군더더기를 없앴다. PD를 채용할 때도 깔끔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한지 여부를 굉장히 많이 본다. 어느 지역에서 우리 콘텐츠를 주로 보는지 데이터를 살펴보는데 딱 강남 테헤란로, 성남 이렇게 두 지역이 많이 찍힌다. 구독자 전략이 맞은 것이다.

1인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살아남는 것도 꽤 치열한 일이다.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세운 원칙이 있었나?

사실 채널이 뜨면서 나 개인에게 이목이 쏠릴 때 좀 혼란이 오긴 했다. 시청자들이 나라는 개인에 관심과 기대를 키우고, 실리콘밸리 왔다 갔다 하니까 꼭 유학파라고 생각을 했다. 어떤 분은 인터뷰하다가 갑자기 영어로 말을 걸거나 내가 모두 알 거라 생각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던지는 경우도 있었다. 블록체인 같은 개념이 대표적인 예다. 그래서 콘텐츠 만들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공부하고, 머리에 지식을 채워 수준을 맞춰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고민을 했다. 조금 방황했다. 그렇게 몇 달 동안 힘들다가 결국 사람이 다 모자란 부분이 있고, 나는 내가 잘 하는 것만 잘하면 된다는 결론에 이르면서 약간은 편안해졌다.

그렇게 찾은 자신만의 강점과 무기는 뭔가?

실행력이다. 5분 전에 생각하면, 또는 몇 초 전에 생각한 것도 해야겠다고 하면 바로 행동을 할 정도로 실행력이 빠른 건 강점이다. 그리고 꿈이 크고 장기적으로 계획을 세운다. 성과는 반드시 결과로 보여 주려고 한다는 것도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단기간에 주가를 얼마나 빠르게 올려서 비싸게 팔아 엑시트(exit)하자는 식의 목표보다는 어떤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만들겠다는 원대한 목표 아래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게 성취에 도움이 된다는 건 수백 명, 수천 명 넘는 기업가를 만나면서 느낀 바다.

문제는 시장만이 해결할 수 있을까

EO의 주 수익원은 기업으로부터 광고 수익을 받고 제작하는 브랜디드(branded) 콘텐츠와 함께 기업과 대학, 공공 기관 등에 판매하는 교육 콘텐츠다. 기업가를 두 시간 정도 인터뷰한 내용을 재가공해 커리큘럼으로 만들고, 또 실제 ‘창업 계획서 쓰기’ 같은 대학 강좌의 교재로 만들어 팔기도 한다. 이외에도 스타트업 투자 유치 행사를 기획하는 등의 이벤트도 수익 사업으로 진행하고 있다.

‘혁신’과 ‘스타트업’은 시장성을 고려한 콘텐츠 키워드인가?

개인적으로도 ‘스타트업 하는 사람들 멋지다’라는 생각이 컸다. 채널 운영하면서 꼭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성공시켜야지, 얼마나 돈을 벌어야지 이런 생각보다는 ‘꾸준히 만들어 보자’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제작했다. 채널로 돈을 벌지 못할 땐 한 1년 정도 친구 회사에 마케팅 팀장 같은 직책으로 들어가서 주 3회 정도 일하고 월급을 받기도 했다. 지속할 수 있던 원동력이 바로 구독자였다. 채널을 열었을 때 구독자가 3000명 정도였는데, 이때부터 봐주시던 분들이 내가 만나서 뭔가 배우고 싶은 창업가이자 ‘진성 구독자’였다. 그래서 실제 초기부터 구독하고 계신 분들이 출연도 많이 해주면서 채널을 같이 키웠다. 콘텐츠 제작 자체가 사업을 키우는 좋은 수업이었다고 생각한다.

침체된 경기 상황에서 ‘스타트업’의 시장 가치는 어느 정도나 된다고 생각하나?

산업적으로는 잠깐 침체기일 수 있지만 스타트업은 시대적 무브먼트(movement)라 생각한다. 예전만 해도 10~20대 분들이 ‘스타트업 같은 데 왜 가’라는 생각을 했는데 최근 통계를 보니 구직자 열 명 중 일곱 명이 스타트업에 가고 싶다고 응답했더라. 예전엔 뭔가를 창조하려면 큰 공장을 지어야 하는 시대였다면 지금은 본인이 해결하고 싶은 문제를 소수 집단에서도 해결하면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이건 돌이킬 수 없다. 경기 침체랑 상관없는 흐름이다. 스타트업이 언젠가 주류 문화가 되었을 때 지속적으로 신뢰를 갖고 들여다볼 수 있는, 글로벌한 ‘스타트업 시대의 블룸버그’가 되는 게 EO의 목표다.

‘될 만한’ 혁신 기업과 ‘진짜 인사이트’를 가진 창업가를 골라내 콘텐츠를 만드는 사업이다 보니 안목도 중요할 것 같다. 자기 PR 과잉 시대라 할 만한데, ‘진짜’를 찾는 기준이 뭔가?

진짜와 가짜를 확언할 수 없는 동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고 본다. 지금은 혁신 같아도 몇 차례 연속해 의사 결정을 실수하면 한순간에 나락으로 갈 수도 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는 회사의 재무 상태를 확인하고 문제가 없는지 등을 투자사 등과 크로스 체크한다. 그 이후에는 두 가지 기준에 부합하는지 본다. 먼저 이 회사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문제’를 풀고 있는지, 그리고 푸는 과정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해결, 진보하고 있는지’다.

1000명에 가까운 기업가들을 만나는 일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그 자체로 ‘사업 어드바이스’였을 것 같다. 이를 토대로 창업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언하고 싶은 내용이 있나.

혁신형 창업은 리스크가 높고 장기적 목표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실패가 많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가장 버려야 할 건 조급한 마음이다. 부자들 중에서도, 어중간한 부자가 아니라 수천 억 원에서 조 단위의 돈을 만지는 사업가들은 ‘돈은 정말 따라오는 것’이라 말한다. 이 말을 거듭 반복해 들으면서 그 의미를 체화했다. 실제 창업에 성공하려면 세 가지가 무척 중요하다. 첫째, 사업하려는 아이템이 정말 내 인생에서 5년에서 10년 정도 이상의 시간을 들여 해결하고 싶은 문제인가 생각해 봐야 한다. 창업하려는 이유가 가장 중요하다. 둘째,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시장’이 최선인가를 고려해야 한다. 세상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지만, 이걸 공공 기관이나 정치가 아니라 꼭 영리로, 시장으로 해결해야 하는 이유가 필요하다. 이 문제를 과연 기업의 형태로 해결하는 것이 최선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셋째, 이 문제의식과 해결 방식에 공감하는 사람이 중요하다. 흔히 스타트업이 망하는 이유가 셋째 이유 때문이다. 당장 개발자가 필요하다, 당장 디자이너가 필요하다 해서 뜻에 맞지 않는데 아무나 구해 일하다 보면 문제가 터지게 돼있다.

압구정동에 위치한 건물 2층과 4층을 임대해 사용하고 있는 EO 사무실의 한 회의실 유리창엔 이 글귀가 가득 붙어있다.

“It’s better to be a pirate than join the navy(해군에 입대하는 것보단 해적이 되는 것이 좋다).”

자신의 강점으로 실행력이 좋고 꿈이 원대하다는 점을 꼽는 김태용 대표에게 EO의 향후 비전에 대해 물었다.

“2023년엔 우리가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스타트업 미디어가 되는 게 목표다. 혁신가들은 미국,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싱가포르 등 세계 전역에 있으니까. 이 사람들 상당수가 아는 미디어 브랜드가 될 생각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스탠퍼드대학교, 하버드대학교, UC버클리, 서울대학교, 카이스트…… 이 정도 학교에서나 제공됐던 창업 교육을 전문적으로 하는 플랫폼으로 성장하고 싶다. 또 스타트업 관련 다큐멘터리와 웹 예능을 만드는 콘텐츠 회사로도 나아가고 싶다.”

전날 밤에도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을 연속해 보는 바람에 새벽 3시에나 잠들었다는 김 대표에게 성취하고 싶은 개인적 목표도 함께 물었다. ‘세계 최고’ 얘기를 하던 김 대표는 문득 머리를 긁적이며 ‘아마추어 자전거 대회’ 완주를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같이 스타트업 하는 대표 친구들이랑 자전거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설악산, 지리산 이런 대회 나가서 좋은 자연도 보고, 막걸리도 먹고 그러고 싶네요.”

 

구글 맵이 바꿔버린 한 남자의 인생


당신에게 ‘서울’은 어떤 모습인가? 서울에서 산 지 10년이 훌쩍 넘어가는 나조차도 SBS 방송국이 있는 양천구 목동이 주 생활 반경이다 보니 성북동, 제기동 근방은 갈 일이 없다. 조금 생소한 이런 지역들에 대해 생각할 때는 어김없이 지하철 노선도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정확하지 않더라도 얼추 4호선과 6호선 노선도를 떠올려 보고, 해당 노선을 따라 지도 동북쪽 한 귀퉁이에 위치한 공간 정도로 인식하는 것이다. 잘 경험하지 않거나 아예 가보지 않은 지역에 대한 공간 감각은 이렇게 지도의 형태로 우리 기억 속에 자리 잡게 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공간에 대한 인식에는 굉장히 주관적인 경험도 작용한다. 얼마 전, 트위터에 인천에 대한 재미있는 농담이 올라온 적이 있다. 인천은 강남이든, 수원이든, 부산이든, 제주도이든 심지어 인천에서 인천으로 이동하더라도 1시간 30분이 걸린다는 내용이다. 비슷한 상황을 경험한 다른 사용자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으면서 해당 글은 다른 웹 커뮤니티로 퍼 날라졌다. 공간에 대한 기억은 이렇듯 동서남북 사방 어디에 붙어 있냐가 아니라 어디서 얼마나 걸리는 곳인지, 직접 겪은 경험으로 구성되기도 한다.

신인류의 공간 감각

‘지오게서(GeoGuessr)’라는 게임이 있다.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지리 (geography)에 대해 추정(guess)하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오게서는 2013년 스웨덴의 한 게임 스타트업에서 개발한 게임으로, 구글 맵을 활용해 거리뷰를 띄운 다음 해당 장소가 어딘지 지도에서 마킹을 하도록 하는 게임이다. 최대한 정확하게 그리고 빠르게 위치를 맞추는 플레이어가 더 많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 제한된 횟수만큼은 무료로 게임을 할 수 있고, 더 하고 싶을 땐 구독료를 내면 된다. 게임 회사는 구글에 지도 서비스 사용료를 낸다.

국내에서도 이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긴 하지만 그렇게 대중화된 게임은 아니다. 사진을 보고 위치를 맞추는 게임이다 보니 사실 학습 게임 성격이 강하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범생들이나 하는 게임이라는 인상이 박혀 있었는데, 이 게임에 특별한 재능을 보유한 한 능력자가 나타나 순식간에 전 세계적 인지도를 얻게 된다. 올해로 24살 미국 국적의 트레버 레인볼트(Trevor Rainbolt)는 스냅챗에 온라인 스포츠 콘텐츠를 잘라서 공급하던 디지털 PD였다. 보통 주중에는 근무 후 5시간, 주말에는 하루 8~10시간씩 지오게서를 고강도로 훈련했다. 덕분에 거리뷰만 봐도 불과 1~2초 만에 지역을 알아맞히는 지오게서의 최강자가 됐다. 그는 직업적 재능을 살려 자신의 플레이를 틱톡, 인스타 쇼츠로 편집해 올렸고, 그 결과 대중들의 관심을 얻으면서 이젠 100만 명 이상의 팔로워를 보유한 전업 인플루언서로 활동하고 있다. 맞다. 성공한 덕후다. 게임 덕후.
지오게서 게임 화면 ©SBS
디지털 콘텐츠 PD가 어쩌다?

허허벌판을 보고도 흙 알갱이의 모양, 풀이 누워 있는 모습, 도로의 표지판 등 디테일한 요소들을 빠르게 확인하고 어딘지 맞혀버리는 영상을 보다 보면, 현대판 셜록 홈스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24년 만에 방구석을 탈출해 첫 해외여행에 나섰다는 트레버 레인볼트를 화상으로 인터뷰했다.

78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보유한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엔 106개 국가의 각종 거리 사진을 보면서 습득한 지역의 특징들이 스토리로 정리돼 있다. 캘리포니아만 유일하게 미국에서 전봇대에 노란 색깔 세 줄을 그어 놓는다거나, 하늘색 페인트가 칠해진 수전은 크로아티아에서만 발견된다는 점, 핑크색 택시는 멕시코시티에만 있다는 점, 노란색 가드레일은 일본 야마구치현에만 있다는 등의 생생한 체험 정보들을 ‘꿀팁’으로 제공한다. 고등학교 지리 수업 시간에는 늘 맨 뒷자리에서 지오게서 게임만 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세계 각지에 대해 놀라울 정도의 직관적 이해력을 갖추게 됐다.

“게임을 많이 하다 보면 두뇌가 정보를 습득하는 속도가 빨라집니다. 그리고 파악하는 속도도 빨라지고요. ‘어떻게 이걸 보고 나이지리아인 걸 맞힐 수가 있어?’라고 물어보는데 저는 그때마다 그냥 나이지리아처럼 생겨서 그렇다고 답할 수밖에 없어요.”

‘신종 지리 천재’가 한국에 대해선 얼마나 알고 있는지도 물어 봤다. 게임의 범위에 포함된 국가들은 구글 로드뷰가 생산되는 나라인데, 점수를 매기는 방식의 특성상 땅덩어리가 큰 나라일수록 더 자세히 지역별로 들여다볼 유인이 커진다고 한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 내부를 속속들이 지역별로 다 파악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한국임’을 확인할 수 있는 특징은 뚜렷하다고 말했다. 한국어, 녹색 거리 표지판, 그리고 노란색과 검은색 줄이 그어진 전봇대가 특징적이라고 한다. 국내 지형 중엔 현무암을 꼽았고, 현무암으로 지은 돌담이 인상적인 제주도를 언급하기도 했다.

트레버 레인볼트 역시 종이 지도보다 구글 맵이 훨씬 더 익숙한 Z세대기도 하다.

“언론이나 책에 기록된 각국에 대한 설명보다 직접 그곳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도구들이 세계를 제 방식대로 소화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는 것 같아요. 사진들을 보며 감명을 받을 때가 많은데, 가령 라오스라는 나라에 그렇게 아름다운 언덕들이 많을 줄은 몰랐어요. 제 콘텐츠를 보면서도 감명을 받는 분들이 있으면 좋겠네요.”

구글 맵으로만 보던 세계를 제대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해외 여러 나라에서 한 달 살기를 시작한 트레버는 뜻하지 않게 각종 사회 공헌 활동까지 하고 있다. 해외 입양 아동이 과거의 원래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의 장소를 물어보거나, 수십 년을 함께 산 부부가 오래전 즉석으로 프러포즈를 한 장소를 물어보는 등의 요청이 빗발치는데, 그는 사진이나 영상 속 위치를 단번에 파악해 내는 자질을 발휘하며 각종 의문을 훌륭하게 해결하고 있다.

종이 지도에서 3D 지도까지

차량 뒷좌석에 늘 꽂힌 ‘대한민국 전도’를 보던 종이 지도 시절을 지나, 이제 초행길이라도 각종 맵 서비스와 내비게이션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구글 맵 덕에 트레버 레인볼트가 인생을 바꾸었다면, 어떤 지도를 쓰느냐는 심지어 우리 두뇌 구조도 바꿔버릴 수 있다. 20년이 다 돼가는 연구다. 영국 런던의 택시 기사는 8000시간의 절대 연습 시간과 함께 혹독한 테스트를 거쳐 면허를 획득하게 돼 있다. 약 2만 5000개의 거리와 2만 개의 건물 위치를 모두 외워야만 택시 기사가 될 수 있다. 지난 2006년 런던대학교 연구진들이 이 택시 기사들과 정해진 노선만 다니면 되는 버스 기사들의 두뇌를 MRI 영상을 찍어 확인해 봤다. 인간의 두뇌에서 공간 기억을 담당하는 ‘후위해마’가 버스 기사에 비해 택시 기사가 훨씬 더 발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내비게이션이나 GPS에 의존하는 운전자의 해마 크기는 스스로 위치를 생각해 내는 운전자와 비교해 점점 축소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쓰는 모바일 맵은 네이버 또는 카카오, SKT가 제공하는 맵 서비스일 것이다. 모두 국토지리정보원이 만드는 ‘국가기본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정부는 매해 꽤 큰 예산을 편성해 이 국가기본도를 수시로 업데이트한다. 2021년엔 우리나라 최초로 국토 촬영을 주 기능으로 하는 국토위성 1호를 발사하기도 했다. 이 위성은 특히 자율주행차나 스마트 시티 같이 ‘공간의 디지털화’가 필요한 분야에서 쓰인다. 국토 정보에 대한 권한은 모두 국가에 귀속돼 있다. 마치 영토에 대한 주권이 국가에 있듯 말이다. 국토지리정보원은 항공 및 위성 사진은 물론, 현재는 국토 지형지물의 높이까지 계측하는 등, 공간의 3D 정보 수집 작업을 이어 가고 있다. 다만 국내 기업들이 가지고 있는 각종 데이터를 구글은 가지고 있지 않다. 지난 2016년 정부는 국토 정보의 해외 기업 반출을 둘러싸고 고심 끝에 반출 금지 결정을 내렸다. 정부는 구글에게 군사나 핵심 보안 정보를 가리라고 요청했으나, 구글은 해당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독도 지명과 세금 관련 문제도 영향을 줬다. 대한민국에서 구글 내비게이션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다.

당신의 지도가 당신의 세계라면

모바일 속으로 들어온 지도는 현대인의 삶을 지도 위의 삶으로 응축하는 효과를 가져다 줬다. 실제로 내가 돌아다닌 동선과 행적, 즐겨 찾는 맛집과 공공장소, 내 집의 가격과 그 외 부동산 가격에 영향을 주는 여러 인프라, 플랫폼 사업자는 당신의 삶이라는 커다란 덩어리를 개별 데이터들로 잘게 소분한 다음, 그 데이터를 차곡차곡 지도 위에 쌓아 올리는 중이다. 미디어 생태를 연구하는 인천대학교 이동후 교수는 ‘별점’이 기반이 되는 모바일 지도가 대중들의 장소 인식을 상당히 바꿔 놨다고 말한다.

“여행은 이제 완전히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느낌이라기보다, 원래 그대로의 생활을 영위하면서 내 몸만 다른 어딘가로 다녀오는 형태가 됐습니다. 생활의 편의가 늘어난 대신 다양한 경험의 폭은 좁아졌죠. 온라인의 경험이 오프라인 풍경을 바꿔 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직접 맞닥뜨리고 인식할 수 있는 ‘장소’는 인스타그램 기록과 블로그 후기, 별점과 평점들을 보면서 으레 다녀와야 하는 곳들의 경로가 정해진 형태의 공간이 되고 있습니다.”

지도 형태는 여기서 더 진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경제지 《포천(Fortune)》이 개최한 ‘브레인 스톰’이라는 콘퍼런스에서 구글 수석 부사장 프라바커 라하반 (Prabhakar Raghavan)은 영상을 기반으로 정보를 검색하는 요즘 세대들의 습성을 거론하며 “종이 지도를 모바일 속에 구겨 놓은 형태로는 고객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발언으로 인해 구글이 기존 맵 서비스와 다른 형태의 증강 현실, AR을 접목한 형태의 영상 기반 3D 맵 서비스를 준비 중인 것이 아니냐는 전망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용자가 실제로 지도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맵 서비스가 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날로 빨라지고 있다. 우리는 또 어떤 새로운 지도와 세계에 익숙해질까? 우리의 세계는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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