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해선 시트콤을 막을 수 없다
힘들 때 우는 것은 삼류고, 참는 것은 이류지만, 웃는 사람은 일류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지난 2013년, 탤런트 이상민이 한 방송에 출연해 셰익스피어의 경구라며 인용했는데, 큰 빚에 시달리면서도 쓴 미소를 짓던 이 씨의 표정 그리고 문구가 어우러지며 절묘한 ‘짤’이 생성됐고 이윽고 급속도로 퍼져 나가게 됐다. 이상민 씨는 그 후로 ‘일류좌’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은 출처가 불분명하다. 아무래도 셰익스피어가 남긴 많은 경구 중에서, 환난을 극복하기 위한 올바른 마음가짐에 대한 일부 글귀를 어느 의욕적인 해설가가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게 의역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베니스의 상인》 중에는 비슷한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운명을 정복하는 사람들은 어려울 때도 웃으며,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자기 것이지, 자기가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셰익스피어가 일류로 인정했는지의 여부는 불확실하더라도, 역시 웃음은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함과 여유의 상징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의 연설문에도 유머적 요소가 포함된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당선인이 보통 가장 먼저 꾸리는 보좌진이 ‘정무팀’인데, 여기엔 향후 당선인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지 고민하는 인사들로 채워진다. 역대 당선인들의 메시지 팀엔 코미디 작가, 방송 작가 출신 등으로 유머를 담당한 사람이 더러 눈에 띈다.
웃음은 규칙 위반에서
웃음이 막중한 역할을 하다 보니 언어 및 수사학계는 담화 과정에서 웃음이 발생하는 요건을 활발히 연구하고 있다. ‘무엇이 유머를 만드나’라는 고심은 연설 실력이 곧 정치력이었던 고대 그리스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과 같은 이른바 ‘선생’도 유머를 연구한 흔적이 있다. 그렇다면 성공적인 농담의 조건은 무엇일까? 학계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정설을 아우른다면 바로 ‘의외성’과 ‘부조화’라 할 수 있다. 긴장감 속에 있다가 그 긴장감이 사라질 때 웃음이 나온다는 각성 이론, 다른 사람의 열등감을 갑자기 깨닫게 될 때 우월감과 기쁨을 느끼면서 웃음이 유발된다는 우월성 이론, 원래 심각한 의미로 인지된 것이 갑자기 기대와 다르게 어처구니없거나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여겨져 웃음이 유발된다는 부조화 이론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부조화 이론의 예시는 이런 것이다. 이제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추억의 최불암 시리즈를 소환해 보자. 연예인 최불암이 약사가 되었다. 어느 날 약국에 손님이 와서 쥐약을 달라고 했다. 최불암이 손님에게 물었다. “댁의 쥐는 어디가 아픈가요? 증상을 말해 주세요.” 마지막 문장이 나오기 전까지는 일반적인 담화 구조와 차이가 없지만 담화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마지막 문장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유머가 완성된다. 이를 이른바 ‘급소 문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머와 웃음이 대화가 통하기 위해 암묵적으로 지켜지기를 기대하는 원칙을 위배했을 때 탄생한다는 가설도 있다. 영국의 철학자 폴 그라이스(Paul Grice)는 이런 원칙을 ‘격률’이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먼저 협동의 원리가 있다. 사람들이 대화를 할 때 화자와 청자는 대화의 맥락을 서로 일치시키도록 협동한다는 것이다. 이 격률이 위배되면 다음과 같은 사태가 빚어진다.
A : 나잇값 좀 하세요!
B : 나이 한 살에 얼마입니까!
그다음으로는 양과 질의 격률이다. 양의 격률은 수용자가 유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정보가 주어져야 한다는 원칙, 그리고 질의 격률은 화자의 말이 진실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말한다. 그 밖에도 대화 주제에서 관련 있는 내용만 말할 것을 기대한다는 ‘관련성 격률’, 화자와 청자가 서로 간단명료하게 말할 것으로 기대하는 ‘방법의 격률’이 있다.
사라진 시트콤의 자리에는 캐릭터 쇼가
먹히는 법칙까지 다종다양하게 연구되는 웃음을 상업 시장에서 써먹는 건 당연지사다. 사람들에게 웃음과 기쁨을 주는 콘텐츠는 아예 예능이라는 구획으로 나뉘어 있다. 지금은 국내 지상파에서 찾아보기 어렵지만 시트콤 역시 이 분야의 대표 주자였다. 시트콤은 서사와 캐릭터를 갖추고 주 4일 이상 같은 시간대에 30분가량 방송되던 에피소드 단위의 극이다. 시추에이션 코미디(situation comedy)의 약칭인 시트콤은 고정된 무대와 등장인물을 배경으로 독립된 에피소드를 코믹하게 엮는다. 드라마와 코미디의 혼성 장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주로 인물의 성격, 인물 간 배경, 사건 등을 토대로 한 특수한 상황 설정이 웃음을 유발한다. 시트콤이 장르로서 한국에서 전성기를 누렸던 시기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 후반이다. 비교적 가까운 시기 방영된 MBC의 〈하이킥〉 시리즈에 앞서, SBS에도 이 시절 나온 명작들이 많다. 〈순풍산부인과〉, 〈웬만하면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똑바로 살아라〉 등은 현재도 방영 당시엔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젊은 세대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는 시트콤이다.
걸출한 신인과 여전히 회자되는 명대사를 배출한 〈순풍산부인과〉 시리즈는 SBS 유튜브 채널 ‘빽능’에서 무려 1400만 회의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매일 저녁 정해진 시간에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보던 추억을 잊지 못한 ‘그때 그 시절’의 시청자들은 물론, 충분히 콘텐츠가 공급되지 않는 한국 코미디 시장의 고객들이 꾸준히 채널을 방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이렇듯 주 5회 30분씩 방영되는 ‘정통 지상파 시트콤’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통상 메인 작가 다섯 명과 보조 작가 다섯 명이 필요하다. 이들은 매일 회의를 거쳐 100편이 넘는 에피소드 아이디어를 구상하게 된다. 제작 스태프도 마찬가지다. 한 회 분량이 적더라도 매일 정시에 방영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선 리소스가 적잖게 들어간다. 다시 말해 프로그램을 하나 제작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찮다는 이야기다. 2010년대 들어 콘텐츠 제작 환경과 규모가 급속도로 커지면서 연극 느낌의 소품과 비슷한 배경에서 찍는 시트콤에 대한 시청자들의 수요도 줄었다. 명맥을 이어오던 지상파 시트콤이 서서히 자취를 감춘 건 그때부터다. 가성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대신 코미디 장르에 대한 여전한 수요는 점차 다른 프로그램들이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슬기로운〉 시리즈(tvN)처럼 드라마에서 전통적인 시트콤 앙상블 캐스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하고, 〈마음의 소리〉(KBS)나 〈놓지마 정신줄〉(JTBC)과 같이 웹툰을 시트콤 형식으로 그대로 영상화하는 등 여러 시도가 잇따르고 있다. 웃음을 담당하는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고, 코미디 시퀀스를 알리는 효과음을 넣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각 분야에 시트콤 장르가 자잘하게 쪼개졌다.
온라인 콩트로 부활한 시트콤
특히 유튜브 등 온라인에선 이미 이용자들에게 익숙해진 10분 내외 짤막한 영상물과 시트콤이 결합하기도 한다. 시트콤은 각종 크리에이터의 ‘롤플레잉・체험형 ASMR’과 지상파에서 자리 잡지 못한 개그맨들의 개인 채널에서 다시 부활 중이다. 〈강유미 yumi kang좋아서 하는 채널〉, 김대희의 〈꼰대희〉와 같은 개인 채널과 여럿이 모여 만드는 〈숏박스〉, 〈피식대학〉 등의 채널은 이미 이 영역의 강자로 자리 잡았다. 특히 〈피식대학〉의 ‘비대면 소개팅’, ‘05학번 is back’, ‘한마음 산악회’ 같은 히트 시리즈물은 시트콤 제작 방식을 차용해 아예 캐릭터와 서사를 구축해 버린 사례다. 연속성을 가지고 줄거리가 이어지고, 이 서사를 바탕으로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건 물론, 거대한 ‘피식 세계관’을 형성해 개별 캐릭터들이 시공간을 넘어 시리즈를 넘나들기도 한다. 이 정도면 현대판 시트콤의 새 문법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웃음을 유발하는 원칙은 고대로부터 정해져 왔을지 몰라도 어떤 방식으로 전할 것인가는 늘 새로워질 수 있다. 돈과 시간을 들여서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목말라하는 웃음 시장의 빈자리를 공략하려는 영리한 이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원로 진화생물학자 떡상 유튜버 된 사연
첫 만남은 아마도 떨리는 새 학기, 고등학교 교과서였을 것이다. 7차 교육 과정을 거쳤다면 어렴풋하게 기억 속 저편에 있을 〈황소개구리와 우리말〉이란 제목의 글이다. 이 글은 2002년부터 고등학교 국어 국정 교과서 1단원에 실렸다. 외국어와 외래어의 범람으로 갈 길을 잃은 우리말의 처지를 외래종 개구리에 습격당한 토종 개구리의 생태계에 빗댔다. 제목의 오른쪽 아래에 쓰여 있던 저자의 이름마저 왜인지 묘하게 생태적인 느낌을 줬던 기억이 남아 있다. 최재천. 있을 재(在)에 하늘 천(天)을 쓴다고 한다. 국립생태원장, 이화여자대학교 에코과학부 석좌 교수, 코로나19 일상회복지원위원회 공동위원장, 생명다양성재단 대표 등 그에게 붙은 직함만 수 개에 이른다. 명실상부 한국 사회의 원로 최재천 교수가 시작한 유튜브 채널 〈최재천의 아마존〉이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대중의 과학화’를 꿈꾸며 30년째 대중들에게 노크하고 있는 진화생물학자는 어쩌다 요즘 것들의 아이콘이 된 걸까?
진화생물학자 최재천 교수, 유튜버가 되다?
떡상의 서막은 한국 사회 출생률에 대한 작심 발언부터다. 유튜브에 업로드한 영상에서 “지금 한국에서 아이 낳는 사람은 바보”, “아이큐가 두 자리가 안 되니 애를 낳는 거겠죠?”라는 발언이 큰 주목을 받았다. 진화생물학자의 관점에서 출산과 육아에 척박한 지금의 환경을 고려할 때 사회 문제로 부각된 저출생은 당연한 진화적 적응 현상이라는 말이다. 최 교수는 “주변에 먹을 것이 없고 숨을 곳이 없는데 거기서 애를 낳아 주체를 못 하는 동물은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며 현재 한국 사회의 현실은 과거에 비해 “지나치게 현명해진 세대, 지나치게 똑똑해진 세대의 불행”이라고도 덧붙였다. 이런 차가운 계산을 거치고도 출산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바보’ 아니면 ‘애국자’라는 것이 최 교수의 결론이다. 파격 발언에 ‘좌표’가 찍혔다. 2020년 10월 첫 영상을 시작으로 여러 영상을 올렸지만 1년 가까이 1~2만 명에 그쳤던 채널 구독자 수는 한 달도 되지 않아 9만 명을 목전에 둘 정도로 성장했다. 차츰 늘어난 구독자들이 과거 영상들을 ‘역주행’ 시청하면서 과거 발언들도 세간에 다시 회자되고 있다. “(자연에서처럼) 일부일처제가 없으면 원빈, 현빈이 몇천 명씩 데려가기 때문에 우리에겐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는 여성 착취의 역사”, “여성에게 출산을 장려한다는 것은 남성 입장에선 입을 다물어야 할 일”, “동성애는 동물 세계에서도 자연스러운 현상”과 같이 진화생물학 관점에 기반한 젠더 발언들이 특히 주목을 받고 있다.
사실 최재천 교수는 2004년, 헌법재판소의 호주제 폐지 판결 심리 당시, “생물학적으로 암컷이 수컷보다 진화에 기여하는 바가 크므로 호주제는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제출하는 등 여권 신장을 꾸준히 발언하고 실천해 온 학자다.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수상했는데, 당시 수상 소감에서 최 교수는 “허울뿐인 가부장 계급을 떼어 내면, 편해지는 건 남성들”이라 말하며 지금까지 양성평등의 편익은 남녀 모두에게 돌아간다는 점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솔직함과 진정성
기성세대의 ‘내로남불’이라면 치를 떠는 젊은 세대들의 마음을 원로 교수의 진정성이 제대로 두드린 걸까? ‘남의 눈치 보지 말고 꿈을 이루라’는 덕담 대신, “같이 사는 세상인데 눈치 안 보는 사람들 싫다”, “까딱하다간 굶어 죽는다는 걸 모르고, 세상 물정에 약간 느렸던 덕에 생태학을 하게 됐다”는 솔직한 발언들도 공감을 얻고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 강화 방침이 발표되기 전날, 밤늦도록 김부겸 국무총리와 유선 회의를 했다던 최재천 교수는 몇 시간에 걸친 인터뷰에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이야기를 이어 갔다. 유튜브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침팬지 학자인 제인 구달 박사와 함께 창립한 공익 재단 법인 생명다양성재단의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기초 과학을 지원하고 다양성 보전을 위한 방안을 개발하는 역할을 하고자 했는데, 후원금 모으는 일이 쉽지 않았다. 고민하던 차에 주변의 조언을 얻어 시작한 유튜브 채널이 1년 지나 입소문이 퍼지면서 이젠 조금씩 재단 후원도 늘고 있다. 열대 지역의 벌레는 왜 크기가 큰지, 겨울잠을 자는 동물을 깨우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처음엔 할아버지 과학자가 생태학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는 교육 콘텐츠로 출발했다. 그러다 콘텐츠 콘셉트를 한 번 바꿨다. 네이버 지식인 서비스에 실명 ‘등판’해 질문에 직접 답해 주고, 그 대가로 ‘내공’을 쌓아 ‘지존’ 계급에 도전하는 새로운 콘셉트로 변신했다. 길을 가다 우연히 스마트폰으로 찍은 곤충이 무엇인지 설명해 달라는 질문부터 교수의 월급이 얼마인지를 묻거나 첫사랑 이야기를 해달라는 등의 당혹스러운 요청도 있었다. 심지어는 최재천 교수의 책으로 독후감을 써야 하는데 다섯 문장으로 써달라는 짓궂은 요청도 있었다. 그렇게 차근차근 쌓은 내공은 (비록 당초 목표치였던 ‘지존’ 계급엔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가 좋아한다는 트로트 가수 ‘임영웅’과 이름이 같은 ‘영웅’ 계급에 도달하며 시즌의 막을 내렸다.
작심 발언 콘셉트를 어떻게 고안했냐는 질문에 69세 원로 교수가 요즘 유튜버 같은 대답을 내놨다.
“조회 수가 한동안 1만 5000명에서 늘지를 않더라고요. 그러다 주변 과학자 중에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장동선 박사(뇌과학자)가 한번은 그러더라고요. 선생님 그런 거 하지 말고 좀 진지한 거를 해보라고요. 자기로 치면 뇌과학자가 본 죽음 같은 걸로요. 자기도 그러니까 갑자기 늘었다고 하더라고요.”
출생률 발언에 대한 열렬한 반응엔 본인도 놀랐다고 한다. 해당 발언의 골자는 무려 최 교수가 2005년 출간한 책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 에 이미 언급한 내용이다. 최 교수는 이 책에서 여성의 난모세포가 고갈되고 더 이상 임신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자고 주장했다. 이제는 많이 알려진 표현이지만 당시 ‘폐경’을 ‘완경’으로 부르자고 처음 제안했다.
“(출생률 IQ 발언 반응은) 그 생각을 저만 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거겠죠? 생태의 기본이 개체군 변동이거든요. 옛날에 합계출산율이 1.2명 정도로 떨어지는 걸 보고 저출생 고령화가 한국 사회에 당면한 심각한 문제가 될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 너무 사람들이 모르는 것 같아서 책을 썼는데 당시엔 아무 반응도 없었어요.”
2022년 합계출산율은 0.78명. 인구 절벽에 직면한 한국 사회에서 ‘최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현실화할 동안 ‘번식’, ‘도태’와 같은 진화생물학 용어들도 일반인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세상이 됐다.
“제가 동물학자니까 과거에는 ‘번식이 끝나면’ 이런 식으로 표현했는데 그때는 사람들이 대단히 불편해했어요. 요즘엔 제가 아무리 번식 어쩌고 해도 거부감 없는 걸 보면 그간 생물학에 대한 인식도 폭이 많이 넓어진 거 같아요. 한국인들의 과학책 베스트셀러 부동의 1위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인데 그간 이 책을 많이들 읽으신 것 같아요.”
수위 높은 발언에 유입된 구독자들이 꾸준히 〈최재천의 아마존〉에 머무르게 되는 건 10년, 20년 동안 일관된 모습을 보여 준 최 교수의 무해한 이미지 때문이기도 하다. SNS와 각종 커뮤니티에선 최재천 교수 콘텐츠를 ‘힐링물’로 소비한다는 감상이 많다. 주로 자기 전에 본다고 한다. 정치적 편향성을 찾아보기 어려운, 일평생 연구한 동물과 자연의 생태에서 발견한 실마리를 담담한 어조로 전하는 최재천 교수의 유튜브엔 악성 댓글도 적은 편이다. 유튜브 콘텐츠가 친숙한 이미지로 소비되면서, 직접 실천한 공동 보육, 글쓰기에 관한 태도도 회자되고 있다.
인터뷰 중엔 아내 이야기가 많았다. 하버드대학교에서 유학하던 시절 음악학을 전공한 아내를 만나 신혼 9년째 되던 해 아들을 얻었다. 결혼할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집안일에서 설거지는 본인의 몫이라고 말한다. 상대적으로 학위 과정을 일찍 마쳤기에 아내보다 시간적 여유가 많았던 최재천 교수가 어린 아들의 양육을 도맡는 일이 많았다. 미국에선 아기 띠를 매고 안은 채 강의하기도 했다.
“미국에선 아이를 바구니에 넣으려 하면 자청해서 자기 앞에 두고 아이를 들여다봐 주기도 했어요. 그런 생각을 하고 서울대학교에 부임하고선 피치 못하게 두어 번 아이를 강의실에 데리고 가서 앉혀 놓고 수업했지요. 큰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강의 평가에 6~7명이 ‘집에 가서 애나 봐라’, ‘마누라도 없냐’고 써서 크게 실망했던 일이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아이 낳는 것을 제외하곤 보육의 모든 과정을 남자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 최 교수 역시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사내자식이 부엌에 한 번 발을 디뎠다고 두 시간 동안 무릎 꿇고 벌을 받았다고 한다. 최재천 교수는 존경과 원망의 감정이 뒤섞인 아버지에 관한 일화를 소개했다.
“아버지가 덧니가 많은 분인데 남들은 모르고 지나가는 돌을 꼭 골라냈습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늘 밥을 다시 해야만 했습니다. 그때마다 모두가 고요하게 아버지의 눈치를 봤습니다. 어머니가 상을 정리해 들고 나갈 때의 그 소리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 때문에 밥상 위에 있던 그릇들이 부딪혀 달각달각하는 소리를 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말랑 팥죽’같은 아버지가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아들 결혼식에선 자랑스럽게 ‘황제처럼 키웠다’고 말했어요.”
최 교수는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혐오와 갈등에 대해서도 10여 년 전 예상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준말을 잘 쓰지 않아 ‘여혐(여성 혐오)’이란 말을 직접 쓰진 않았지만 비슷한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껏 남성들이 억지로 추를 붙들고 있었어요. 경제권을 쥐고 있으면서 휘두르는 사회를 만들고 있었는데 이게 풀리기 시작하면서 추를 놓아야 하는 순간이 온 겁니다. 다만 이 추를 놓으면 남녀 평등이라는 정중앙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추는 저쪽으로 갑니다. 한동안은 남성들이 불평하고 억울해할 수 있을 거라 말했습니다. 그때가 이제 온 것 같네요.”
최 교수는 이런 갈등이 오래 지속될 것으로 보진 않는다고 말했다. 오히려 갈등의 골을 메우기 힘든 쪽은 세대 간 갈등이다.
“남녀 갈등은 언젠가 풀립니다. 남성과 여성은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대남’, ‘이대녀’, 이렇게 놓고 보니까 심각해 보이는데 남성 전체와 여성 전체를 놓고 보면 오히려 남성들이 반기는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남성들 입장에선 전통적으로 돈 버는 기계에서 가정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직장에서 여자들한테 ‘내 직장 빼앗긴다’고 느끼지 않고 내 아내의, 내 딸의 직장을 확보한다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요즘 들어 주 4일제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는데 저는 예전부터 주 3일제를 주창해 왔습니다. 이런 겁니다. 일주일에 하루 쉰다 치면 3일은 남자가, 3일은 여자가 일하는 겁니다. 그렇게 나눠서 일하고 쉬고. 남자들도 카페에 앉아 수다도 떨고 아이도 돌보고. 얼마나 좋습니까?”
수백 권의 책이 꽂혀 있는 연구실엔 곳곳에 책을 빌려 간다는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열정적인 저술가이면서 애서가, 장서가이기도 한 최 교수에게 독자들을 위한 추천 도서를 부탁했다.
“저는 경쟁보다 협력이 더 중요하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쟁은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자연을 잘 들여다보면 손잡은 놈들이 서로 협력하면서 경쟁에서 함께 살아남습니다. 그간 우리는 자연 선택이라는 과정을 ‘적자생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Survival of the Fittest’라고 하는데 여기서 최상급이 잘못 들어갔습니다. 우리 사회는 마치 1등이 아니면 다 망할 것 같은 강박 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자연은 절대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이상하게 자연을 그런 식으로 바라봅니다. 자원이 부족해지면 저 밑에 경쟁력 없는 누군가 죽어가는 거지 1등만 남겨두고 다 죽는 게 아닙니다. 몇 명이서 같이 힘을 내서 잘해서 함께 살아남자, 잘 들여다보니까 자연이 그런 곳이더라는 겁니다. 이런 생각을 집대성해서 쓴 책이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입니다. 그걸 최근에 생물학자들이 많이 얘기하기 시작했습니다. 《휴먼카인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우정의 과학》 세 권을 추천합니다. 마음이 따뜻해지실 겁니다.”
좀비는 어쩌다 노다지가 되었나
독일의 철학자 니체가 말했다. “가장 나쁜 것은 곧 죽는 것이고, 그다음으로 나쁜 것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었지만 죽은 게 아닌’ 건 나쁘기로 치면 몇 번째 정도일까? 죽었지만 죽은 게 아닌 존재, 좀비가 되는 건 썩 좋지 않은 일이지만 좀비로 덕 보는 사람은 꽤 많은 것 같다. K-좀비물이 전 세계 무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다. 화제가 된 하나의 주자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이다. 한 고등학교에서 시작된 좀비 바이러스로 인해 시 전체가 재난 상황을 맞게 되는 내용이다. 2022년 2월 둘째 주 기준 누적 재생 2억 3600시간을 넘겨 〈오징어 게임〉에 이어 한국어 작품 중 미국에서 1위를 차지한 두 번째 작품이 됐다. 드라마 〈킹덤〉 시리즈와 영화 〈부산행〉 역시 K-좀비물의 흥행작으로 꼽힌다. 미국 잡지 《포브스》는 이 두 작품을 들며 “워킹데드(AMC가 제작한 좀비 시리즈) 시즌이 아무리 많아 봤자 현대 좀비 콘텐츠의 최고 제작자는 한국”이라고 논평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좀비도 어느덧 ‘두유노(Do you know) 클럽’에 들어갈 수 있는, 한국의 주요 특산품으로 자리매김한 것 같다. 등장한 지도 어언 한 세기가 되어 가는 좀비는 어쩌다 근래 몬스터계의 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을까?
물고 찢고 쫓는 좀비들의 인기 비결은
이제는 스테레오 타입이 된 좀비의 존재론적 특성이 있다. 인육을 먹는다는 점, 그리고 좀비에게 물리면 좀비가 된다는 점, 마지막으로 뇌를 완전히 파괴해야만 동작을 멈춘다는 점이다. 시대를 거듭하며 갖가지 변주를 거치면서도 이 특성들은 바뀌지 않았다. 조지 로메로(George Romero) 감독은 현대 좀비의 창시자로 불린다. 1968년 작품인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앞서 나열한 좀비의 원칙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좀비의 기원은 아이티의 괴담이다. 기록에 따르면 좀비는 부두교의 주술 행위로 탄생했다. 1932년 빅터 핼퍼린(Victor Halperin) 감독이 영화 〈화이트 좀비〉에서 최초의 좀비를 형상화했다. 등장인물들은 아이티 주술사의 약을 먹고 전두엽이 손상돼 스스로 생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좀비는 자유를 잃어버린 여성 그리고 노예로 살아가는 흑인을 은유한 것으로 분석되곤 한다.
단! 여기선 좀비가 적어도 무서운 괴물은 아니었다. 주술을 건 사람의 명령만 따르는 영혼이 없는 괴이한 존재긴 했지만 말이다. 이랬던 좀비가 호러 무대의 주인공으로 본격 데뷔한 건 앞서 언급한 조지 로메로의 이른바 ‘좀비 3부작’부터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선 우주 탐사를 마치고 돌아온 위성에서 나오는 방사능에 오염된 이들이 좀비로 변한다. 심지어 그때는 좀비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았다. 서로 잡아먹는 가족, 쇼핑몰을 근거지로 되살아난 좀비 떼 등, 이 영화에 등장한 많은 이미지가 마침 당대 비평가들의 구미에 잘 들어맞았다. 당시 좀비 3부작은 핵가족 제도와 물신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해석과 더불어 더 근본적으로는 베트남전을 치러 낸 미국 사회의 ‘내가 아닌 다른 존재’, 즉 ‘타자’에 대한 공포를 형상화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세월과 함께 좀비도 진화했다. 좀비 현상의 기원과 확산이 조금 더 동시대의 사회사적 맥락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변한 것이다. 미치광이 과학자, 자본의 탐욕, 거대 권력의 실수 등으로 바이러스가 노출된다는 서사가 등장했다. 영화의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건 좀비들의 속도다. 점점 빨라지는 좀비로 인해 감염 범위도 대폭 확대됐다. 〈새벽의 저주〉, 〈월드워 Z〉 등 좀비 영화는 블록버스터급으로 진화했다.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호러 장르에서 거대 재난을 대하는 스릴 액션 영화로 그 성격을 바꾼 것이다.
경계에 선 괴물
좀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근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괴물 캐릭터다. 어느덧 탄탄한 장르로 자리 잡은 좀비의 매력은 아무래도 흐릿한 경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라는 특성과 더불어, 내 편이 순식간에 나를 해치는 존재로 돌변한다는 점 말이다. 그래서 내가 살려면 반드시 이들을 제압하거나 격리해야 한다. 통상 괴물 이야기의 구조는 ‘정상(또는 내 편)’과 ‘괴물’의 대립으로 전개되곤 한다. 그것과 나 사이엔 넘을 수 없는 선이 있고 그 선을 가운데에 둔 채 괴물을 무찌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좀비는 어떤가? 좀비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그 누구의 사연과 관계없이 무차별적으로 이뤄지는 감염은 두려움을 극대화하는 장치가 된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언캐니(uncanny)’라는 개념으로 인간이 괴물에게 갖는 두려움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괴물이 두려운 이유는 그것이 일찍이 자신의 일부를 이뤘던 것, 즉 친밀한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친밀한 일부가 억압되면서 불쾌한 것으로 바뀐다. 이윽고 익숙했던 것은 낯선 것으로 전환된다. 그 전환은 두려움이 된다.
좀비의 외양도 이질감을 증폭하는 데 도움을 준다. 훼손된 신체, 어색한 걸음걸이, 선혈이 낭자한 거리……. 호러 영화 사상 가장 많은 양의 피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피터 잭슨 감독의 1992년 영화 〈데드 얼라이브〉도 좀비 캐릭터를 활용한 영화다. 그런데 죽었는데 움직이고, 살아있는 자를 계속 따라다니는 시체라면 동양권에도 꽤 친숙한 이미지가 하나 있다. 쿵, 쿵, 쿵, 다가오는 소리로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바로 강시 말이다. 좀비가 지구촌을 강타한 대세 괴물이 되는 동안 동양의 강시들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걸까? 강시와 좀비를 비교한 연구 논문[1]에 따르면 청나라 시대 저술 기록 《열미초당필기》 에 공력이 뛰어난 한 의원이 강시를 만난 일화가 소개돼 있다. “눈이 붉은빛을 띠고 송곳니와 손톱이 길었다. 온몸이 통나무처럼 단단해 때리고 발로 차도 끄떡없다.” 이 묘사는 향후 1970~1980년대를 구가한 숱한 홍콩 영화 속 강시 모습의 원류가 된다. 강시의 발현 기제는 잘못 매장된 시신이다. 죽은 사람을 땅에 잘 묻지 않으면 영혼이 구천을 떠돌면서 사람들에게 해코지를 하게 된다는 중국 괴담이 기원이 됐다. 아사 또는 동사로 뻣뻣하게 굳은 몸이 특색이다. 그래서 강시들은 다리를 구부리지도 못하고 양발을 모아 뜀박질하며 이동한다.
그러나 전염 자체가 유일한 동력인 것처럼 질주하는 좀비와 달리 산 자의 양기를 빨아들이는 강시는 제약 조건이 많다. 일단 무서워하는 것들이 있다. 부적, 닭 피, 찹쌀 등에 맥을 못 춘다. 강시를 다스리는 방법은 술법이 적힌 부적을 이마에 붙여 다시 무덤 속에 눕히는 일이다. 중국 후난성 상시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민간 전설엔 객지에서 죽은 사람들을 고향 땅에 묻기 위해 도사들이 시신들을 제 발로 걷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강시로 촉발된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비정상의 상태를 정상으로 돌려놓는 것에 가깝다. 살점이 튀는 현장에서 생존을 위해 좀비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심지어 강시의 복색이 청나라 시대 관리들이 입던 관복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일각에서는 이를 통해 강시가 주류 문화의 질서를 상징한다는 분석을 내놨다. 강시를 대할 때의 목적은 살육이 아닌 질서 회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강시를 소재로 한 영화에서 강시들은 ‘공포의 대상’이기보다 ‘무술 대결의 상대’로 묘사된다.
빠르고 사연 있는 K-좀비
사실 민간 전설과 설화로 전해 내려오던 괴물이 그럴듯한 존재감과 이야기를 갖추게 되는 건 구체적 상상력으로 구현된 후대의 창작물에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꼭두각시에 가까웠던 아이티의 괴담 속 좀비가 조지 로메로 감독 영화에서 호러 영화의 장르가 된 것도 그렇고, 1985년 홍콩 영화 〈강시 선생〉으로 스타일을 찾은 강시가 그렇다.
상승세를 타고 있는 좀비 제작국 한국의 사정은 어떨까? 서두에 언급한 미국 잡지 《포브스》 는 “한국은 종래 서양에 등장하던 느리고 게으른 좀비가 아닌, ‘빠른 좀비’라는 훨씬 더 무서운 괴물을 창조했다”고 전했다. 같은 좀비라도 K-좀비가 더 빠르다는 말이다. 빠름에 일가견 있는 건 좀비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우리나라 최초의 좀비 영화로 언급되는 영화는 1981년 작품 〈괴시〉다. 죽은 지 3일이 지난 주인공 용돌이가 다시 살아나 주변 인물들을 공격하는 상황이 주요 내용이다. 물론 당시에는 좀비라는 말도 쓰이지 않았고, 개봉 당시 큰 반향을 일으키지도 못했지만 현재는 국내 좀비 영화의 효시로 꼽히고 있다. 한을 품은 혼령의 복수라는 서사가 국내 콘텐츠 시장의 주를 이뤘던 시기를 지나, 국내에서 좀비 모티프가 본격적으로 창작에 활용되기 시작한 건 2000년대 후반부터다. 바로 웹툰을 통해서다. 양대 포털 네이버와 다음카카오에 최근까지 약 20여 년간 좀비를 소재로 하거나 세계관으로 삼은 주요 웹툰 목록을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