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으로 쓰는 트렌드 보고서
5화

잘 먹고 잘 살고 싶다는 욕망

거지방 챌린지, 얼마를 가져야 행복할까?


“거하!” 오픈 카톡방에 입장하자 기존 참여자들의 경쾌한 인사가 쏟아진다. ‘거지 하이’라는 뜻이다. 세간의 화제라는 이른바 ‘거지방’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거지방 챌린지는 고물가 시대에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소비 내역 또는 소비 충동을 자백하고 서로가 서로의 절제를 돕는, 이른바 무지출 챌린지의 일환이다. 거지방으로 오픈 카톡방 수백 개가 검색되지만, 참여자 수가 제한 인원에 이른 ‘풀(full) 방’이 여전히 많다. 절약과 무지출에 대한 요즘 사람들의 관심이 뜨겁다는 걸 보여 주는 방증이랄까. 취지는 절약이지만 다소 과격하게 거지방으로 불린다. 무절제한 소비로 거지가 되기 싫은 사람들이 모이는 방 또는 이미 소비 여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더 이상 쓰면 안 되는 사람들이 모인 방이기 때문이다. 참여자들은 닉네임에 월간 누적 소비 액수를 수시로 업데이트하고, 그때그때 어떤 품목에 돈을 썼는지 고백하도록 돼있다.

돈 써도 될까요?

챗 방에 이모티콘을 쓰면 “다른 사람들에게 소비를 유도하지 말라”는 경고가 날아오고 이윽고 누군가가 해당 이모티콘을 어설프게 따라 그린 그림을 올리면서 “이건 공짜니 이걸 쓰라”고 말한다. 속옷에 구멍이 나 새로 샀다고 소비 내역을 올리면 “바느질을 배우라”거나 “물려받아 입으라”는 조언이 날아오기도 한다. 무지출 챌린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소비라면 사정없이 꽂히는 비난과, 또 지출을 반려하는 다른 사람들의 잔소리 때문에 소비 내역을 애써 위장하는 대화들도 거지방의 매력 포인트다. “사회적 품격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 1만 5000원”, “똑바로 말하세요”, “친구한테 커피랑 조각 케이크 사줬습니다”, “더 나은 나를 위한 한 발자국 20만 원”, “구체적으로 쓰세요”, “옷입니다” 등.

지난 2023년 3월 기준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4.2퍼센트를 기록했고, 또 외식 물가 상승률은 7.4퍼센트에 이르렀다. 원자재 가격, 가공비, 인건비, 물류비까지 오르지 않은 게 없다. 그러다 보니 실생활에서 체감하는 경기가 매우 팍팍하기 그지없다. 매월 급속도로 줄어드는 잔고를 지켜보고 있으면 ‘이대로 살다 간 거지꼴 면하기 어렵다’는 말이 바로 이해된다. 혹독한 경기에 대응하기 위해 소비를 줄여야 하는 사람들에게 거지방은 유쾌한 챌린지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오픈 카톡방에서 가장 많이, 자주 접하는 건 바로 소비와 관련된 정보다.

거지방에서 소비 정보방으로?

약 열흘간 다섯 개의 거지방에 참여해 참가자들의 대화를 지켜봤다. 쓸 것이냐, 말 것이냐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이용자들에겐 단호하게 ‘쓰지 말 것’을 주문하는 집단 지성은 잘 통하지만, 이미 써버리고 소비 내역을 익살스럽게 통보하는 경우엔 오히려 소비 정보방이 되어 버리고 만다는 점도 특징이다. “보라카이 여행 전까지 허리띠를 졸라매겠다”며 거지방에 들어온 포부를 밝히는가 하면, 어버이날을 맞이해 부모님께 수백만 원의 명품 가방을 사드렸다는 넘사벽 고백이 인증 사진과 함께 이어지고, “부모님이 나에게 수억 원을 쓰셨는데 이 정도는 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설명엔 그럴 수 있다, 소비를 용인한다, 인정하는 분위기로 흘러가는 식이다. 20만 원어치 영양제를 샀다는 고백엔 무작정 나무라는 대신, 비슷한 함량의 더 싼 제품을 소개해 주기도 한다. 영양제엔 관심도 없었지만, 그 정보를 보니 솔깃하다.

무지출을 요구받는 썩 유쾌하지 않은 상황에서 거지방이 우후죽순 만들어지고 있지만, 이것이 엄격하게 소비를 제지받는다는 애초의 목적보다 소비 여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였다’는 동질감과 안도감을 느끼려는 용도가 더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돈이 (충분히) 없다”는 한탄을 그야말로 하루 종일 해도 그 누구도 눈총을 주지 않는 대화방이니 말이다.

하지만 거지방이 아무리 유행이라 해도 사회 전체적으로 허리띠를 졸라매는 분위기라 보긴 어렵다. 여행업계에 따르면 2023년 5월 해외여행 수요는 전년 동월 대비 많게는 3000퍼센트, 적게는 1000퍼센트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고급 호텔에서 즐기는 호캉스의 수요 역시 폭증했다. 각종 해외 브랜드 명품 업체들은 가격 인상에도 식지 않는 오픈 런 소비를 등에 업고 한국 영업 이익을 연일 역대 최대치로 갈아 치우고 있다. 이렇듯 한편엔 극도로 소비를 절제하며 3000원 미만의 편의점 도시락 매출을 올리는 거지방 등의 무지출 챌린지가 있지만, 다른 한편에선 억눌린 소비 욕구를 마구 분출하는 럭셔리 보복 소비가 있다. 이분화된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빈곤은 절대적이면서도 상대적인 개념이다. SNS를 통해 타인이 전시하는 보복 소비 내역에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또 욕망을 쉽게 전파할 수 있는 지금, 스스로를 거지라 자조하며 소비를 억제하려는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빈곤으로 인식하고 있을까? OECD는 2019년 중산층의 기준을 중위소득의 75~200퍼센트로 정해두고 각 국가별로 비중을 계산해 비교하고 있다. 2022년 ‘NH투자증권’에서 낸 이른바 ‘중산층 보고서’에 따르면 중산층에 해당하는 소득 범위는 월 385만 원에서 1020만 원이다. 그런데 이 기준에 따라 중산층인 사람들도 절반에 가까운 45.6퍼센트가 스스로를 하위층이라고 정의했다. 이들의 셈법에 따르면 한 달 소득은 686만 원, 또 한 달 소비 지출이 427만 원가량은 돼야 중산층이다. 이들이 평균치라 생각하는 지출 수준은 상위 9퍼센트에서나 가능한 수준이다. 세상은 과시 소비와 전시로 가득한데 나의 가처분 소득은 그에 미치지 못하니, 사람들은 스스로를 만성적 빈곤 상태로 인식한다.

우리는 얼마를 가져야 행복할까

중요한 건 절제와 절약을 통해 참여자들이 달성하고자 하는 행복이다. 왜 갑자기 행복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여기, 거지방 참여자들이 인용해도 좋을 연구가 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면 당신이 돈이 부족한 게 아닌지 생각해 보라’라는 인터넷 격언을 증명하는 연구다.

지난 2010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 교수와 앵거스 디턴(Angus Deaton) 교수가 미국인 45만 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당시 기준으로 연 소득 7만 5000달러가 되면 그 이상의 소득을 벌어도 매일의 행복감에 큰 차이가 없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 뒤로 10년간 해당 연구 결과는 거의 정설로 굳어졌다. 그런데 카너먼 교수 본인이 최근 10여 년 전 냈던 논문을 수정한 논문을 다시 내놨다. 자신의 논문을 반박한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스쿨의 매트 킬링스워스(Matt Killingsworth) 교수와 공동 연구한 결과인데, 가장 큰 차이는 행복감의 임계치가 된 숫자가 7만 5000달러에서 50만 달러로 크게 늘었다는 점이다. 우리 돈으로 치면 연봉 약 1억 원에서 약 6억 5000만 원 정도로 오른 셈이다. 그러니까 연봉 6억 원까지는 ‘돈으로 행복을 충분히 살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지난 논문과 마찬가지로 버는 돈과 상관없이 영원히 불행할 수밖에 없는 소수의 그룹도 존재했다. 마음에 큰 상처가 있거나, 심적으로 우울감을 느끼거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상실을 겪은 사람들은 아무리 연봉이 높아져도 불행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이 논문은 절약하고 모으고 불려서 목표치를 달성하더라도 ‘행복할 수 있는 태도’를 갖춘 사람만이 그 과실을 따 먹을 수 있다는 교훈을 주기도 한다.

욕망을 공유하고, 가끔 뻔뻔하게 자랑도 하면서, 서로를 북돋아 주는 거지방의 유쾌한 챌린지를 경험하며 모든 무지출 챌린지의 목표는 역시, 지출이라는 점을 느꼈다. 많은 사람이 언젠가 정말로 값지다고 생각하는 무언가를 ‘지르는’ 그날을 위해 현재의 욕망을 억누르고 또 절제한다. 소비는 여전히 많은 이들의 삶의 활력소이며 이해하기 쉬운 삶의 의미다. 대다수 거지방에서 결국 소비는 무조건적인 배격의 대상이 아닌 더 의미 있어야 하는 행위로 인식되고 있다.

 

무기력증에는 쿠팡 치료가 장땡이라고?


현대인의 씁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등장한 여러 치료가 있다. 매너리즘에 시달리는 직장인들을 위한, 이른바 ‘월급 치료’, 비타민 주사보다 활력 개선에 도움이 된다는 ‘소비 치료’, 친구든 연인이든 속상한 마음을 신속하게 풀어주는 데엔 역시라는 ‘금융 치료’ 등……. 그렇다면 ‘쿠팡 치료’라는 말도 들어 봤을까? 택배를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현상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틀렸다. 하루 아홉 시간 정도의 짤막한 단기 아르바이트 이야기다. 장기적으로 시간을 많이 할애할 수 없는 사람들에겐 쿠팡 단기 아르바이트가 이른바 국민 알바로 자리 잡았다.

돈이 필요할 때 당장 구하기 쉽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겠지만, 쿠팡 아르바이트가 요즘 부업 대세가 된 데엔 꼭 돈만 이유가 된 건 아니다. 단기간의 고단한 노동과 그에 대한 보상이 바로 따르는 구조가 무기력한 일상을 회복하고 자기 효능감을 일깨우기에 좋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다. 그래서 쿠팡 알바는 치료의 일종이다. ‘인생 노잼’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처방하는 노동 치료 말이다.

국민 알바 쿠팡 알바

사람들은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불가피한 목적 외에도, 여행 경비 마련, 무기력 탈출, 추억 쌓기 등의 이유로 주변의 적당한 ‘물류 센터’를 검색한다. 공고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구인 구직 플랫폼에 ‘쿠팡’만 검색하면 수천 건의 인력 모집 안내가 나온다. 웹상에서도 대중교통이 끊긴 새벽 시간 일꾼들을 나르는 셔틀버스를 타는 방법부터 친절하게 설명한 각종 후기들이 많고,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아르바이트 갤러리 등지에선 개별 물류 센터마다 일의 형태, 관리자들의 분위기나 노동 강도 등에 대한 평가가 마치 맛집 리뷰처럼 올라와 있다.

지게차 운행 등의 특수한 직역이 아닌 일반 공정의 경우 7만 원에서 10만 원 사이의 일당을 받을 수 있다. 최저시급 9620원을 기준으로,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의 주간 근무자는 7만 6960원, 저녁 7시부터 새벽 4시까지 야간반의 경우 10만 1010원을 받게 된다. 시급 차이가 크기 때문에 웬만해선 야간반의 인기가 높은 편이다. 24살 대학생 김예랑 씨는 새벽을 꼬박 새우는 야간 쿠팡 알바를 연속 20일 동안이나 해본 적이 있다. 친구와 2주간 여행을 가기 위한 경비를 모으려는 생각으로 쿠팡 물류 센터에 처음 방문했다. 저녁 6시에 거주지 근처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물건을 집어 들어 분류한 바구니에 넣고, 레일 위에 올려 두는 작업을 맡았다. 내부 전자 기기 반입이 금지돼 있기 때문에, 일곱 시간 내내 휴대 전화도 확인하지 못하고 단순 노동에만 몰두했다. 동이 틀 무렵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했지만 그날 바로 수고한 일당 9만 원 정도를 받았다. 봉투를 받아 드니 생각보다 보람이 컸다. “집에 가서 침대에 누웠는데, 되게 기분이 좋은 거예요. ‘이거 또 할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다음 날도 하고, 그다음 날도 해서 연속해서 거의 20일 동안 일했던 것 같아요.”

예랑 씨는 노동의 결과가 바로 눈에 보이는 효능감이 가장 짜릿했다고 말한다. 가끔은 같은 물류 창고에서 대학교 친구를 마주치기도 했다. “카페나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는데 당일에 바로 일당이 나오는 게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자칫 중독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지금은 자제 중이에요.” 대학생 김진수(가명) 씨도 군 전역 후 친구들과 베트남 여행을 가기 위한 경비를 마련하려고 3일 연속 물류 센터 일에 지원했다. 역시 시급이 더 높은 야간반에 지원했는데, 셔틀버스 타기가 여의치 않아 대중교통으로 이동한 근처 카페에서 새벽 2시까지 버틴 뒤 업무를 시작했다. 그간 과외나 학원 알바만 해오다가 택배 물품을 정해진 기준대로 차에 싣는 노동을 반복했다.

“일하는 동안은 머릿속이 정말 비워지는 느낌이 들어서 스트레스가 덜하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과외나 학원 일이 시급은 더 높아도 평소 일상에서도 계속 진도 관리나 수업 내용을 떠올려야 했는데, 잡다한 생각과 고민에서 해방된 느낌? 또 그 뒤로는 ‘이게 몇 시간짜리 시급인데’라는 생각이 들어서 친구들이 술 먹자고 불러도 잘 안 나가요.”

신체 노동의 효능감

‘돈벌이’ 그 자체가 주는 보람과 더불어 자신의 노동이 정확히 어디에 쓰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자기 효능감에 크게 기여한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와 블로그 등지에선 쿠팡 치료가 우울증 개선에 도움을 줬다는 간증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유은정 정신의학과 전문의는 “몸의 활동이 정신적 힐링을 돕는다”면서 “정신 노동으로 피로해진 많은 현대인들이 이제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리는 경험을 통해 정신적 스트레스와 피로감을 해소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많은 연구에 따르면 신체 활동과 우울증 사이에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국민건강영양조사자료를 토대로 박세윤이 연구한 바[1]에 따르면, 우울증 유병률은 근력 운동 또는 유연성 운동이 일주일에 1회 이하인 집단에서 높은 경향을 띠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유연성 운동보다는 근력 운동이 우울증에 더 유익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스트레칭도, 웨이트 트레이닝도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신체를 활용한 단순 반복 노동 작업을 통해 심리적 위안을 느낀다는 다소 역행적인 행태는 쿠팡 치료에만 한정되는 건 아니다. 상시 단기 고용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여러 플랫폼 업체의 등장으로 투 잡, 쓰리 잡 등 본업 외에 할 수 있는 부업의 종류가 늘어났고, 배달, 심부름, 청소, 건설, 도배 등 아직까지 사람의 신체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일할 기회가 많아졌다. 집 정리, 짐 분류와 정리 정돈, 청소 등의 신체 노동을 통해 자기 효능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다 이 취미 생활 부업이 아예 본업이 되기도 한다. 소위 ‘쓰레기 집’만 골라 청소 예약을 받는 인기 블로거 ‘청소 요정’은 직장 생활을 거치며 극심한 무기력증에 시달리던 중, 자신이 좋아하는 청소, 설거지, 빨래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다 전문 청소업자로 전업하게 된 사례다. 쓰레기가 가득 쌓여 있는 집을 깨끗하게 비워 내면서 얻는 카타르시스 탓에 안 더러운데 서비스 신청하면 돈 더 내는 규정도 마련했다.

이렇듯 화이트칼라로 불리며 책상에 앉아 사무 활동을 수행하는 업무가 아니라, 블루칼라, 기술직, 신체 노동에서 본업을 찾으려는 인식 전환도 일어나고 있다. 재작년 취업 포털 ‘사람인’이 20대와 30대 2081명을 대상으로 기술직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 79.1퍼센트는 “수입 등의 조건만 맞출 수 있다면 기술직도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사무직 근로자들은 자신의 노동이 실제로 어떻게 쓰이는지 확인할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시스템에 대한 ‘현타’와 ‘번아웃 신드롬’을 동시에 느낀다. 이 때문에 생계를 꾸릴 수 있는 확실한 수입만 보장된다면 손으로 하는 전문적인 일에 자신을 투신하기도 한다. 워싱턴 싱크 탱크 소장 출신으로, 어느 날 홀연히 높은 연봉과 사회적 지위를 뿌리치고 모터사이클 정비사로 전업해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매튜 크로포드(Matthew Crawford)는 저서 《손으로, 생각하기》에서 신체 노동이 사무실에서의 노동과 달리 ‘생각과 행동을 함께 요구한다’는 점 때문에 “직업적 공황감”을 달래 줬다고 밝힌다.

쿠팡 치료와 존버 씨의 죽음 사이

한편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디지털 시대의 인간 소외가 신체 노동을 통해 자기 효능감을 얻으려는 사람들을 쿠팡 치료로 이끌었다면, 그 반대급부에선 장시간 신체 노동에 의한 과로 희생과 열악한 노동 환경 속 참사가 끊이지 않는다. 노동의 가치에 대한 인식에서 이런 상반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순천대학교 철학과 소병철 교수는 논문에서 시간 연구자 김영선의 저서 《과로 사회》를 언급하며 “문제는 노동이 아니라 ‘과로’, 즉 ‘장시간 노동’”이며, “노동자의 심신을 닦달하는 긴 노동일의 속박에서 벗어나 건강한 노동과 건강한 여가의 균형적 선순환을 확보하기 위한 ‘시간의 민주화’ 기획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신체 노동의 가치와 의미를 빛내주는 건 “갈아 넣고 쥐어짜고 태우는 과로+성과 체제”에서는 불가능하며[2] 스스로의 안전을 확신할 수 있는 직업 환경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생산해 냈다는 자기 효능감은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 속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니 말이다. 생존 의무를 느끼는 현대인은 노동에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게 된다. 여기서 어떤 의미와 효능감을 느끼는지는 삶의 행복에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소위 ‘유망 직종’이라는 낡고 해묵은 분류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 신체 노동과 기술 노동에 대한 편견에도 균열이 가고 있다. 그런 만큼 일의 즐거움과 보람을 회복할 수 있는 직업 환경이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는 모두가 고민해 볼 숙제다. 그래야만 쿠팡 치료가 진정 무기력증을 달랠 수 있는 제대로 된 치료가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갓생이 당신을 사로잡은 이유


신조어 트렌드는 참 빠르다. 하나에 익숙해지려 하면 금세 따라잡아야 하는 다른 말이 생긴다. 요즘에는 ‘갓생’이라는 신조어가 하나 더 추가됐다. 갓생은 신(God), 또는 그에 준하는 위엄을 가진 대상에게 헌사하는 일종의 감탄사인 ‘갓’과 생(生)의 조합으로 이뤄진 말이다. 타인에게 귀감이 될 정도로 성실하고 부지런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단어로, 주로 긍정적 맥락에서 쓰인다. 다만 종래 ‘알파’가 붙은 지칭들(가령 알파남, 알파녀)이 특정인의 능력과 결과를 강조했던 것과 달리 갓생의 긍정성은 과정에서 온다는 차이가 결정적이다. 의미를 살린다면 영어로는 ‘허슬러(hustler)’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말하자면 용례는 이러하다. “정혜경 기자의 기사를 읽다니, 나태해지기 쉬운 주말에 아침부터 교양을 쌓는 당신은 정말 갓생이군요!”

갓생은 어떻게 MZ를 사로잡았나

구글에 따르면 갓생이 검색어로 등장하기 시작한 건 2020년 상반기부터다. 어느덧 SNS와 유튜브 채널에 인증되는 갓생 관련 포스팅도 수십만 건에 이르고, 어떤 기업은 젊은 세대를 겨냥한 상품을 개발하고 판매하는, 이른바 ‘갓생 기획팀’이라는 프로젝트 부서를 신설했다. 참여 조건으로 나이를 엄격하게 제한한 이 팀에서는 젊은 직원들이 상품 기획부터 마케팅, 출시까지 모두 도맡아 구매자들의 소유욕을 자극할 만한 상품을 빠르게 고안하고 시장에 내놓는다. 이렇게 내놓은 상품들이 연이어 ‘완판’ 실적을 내며 덩달아 갓생 기획팀이라는 부서 이름도 유명세를 탔다.

여기까지만 보면 갓생을 좌우하는 것이 마치 성공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이 선망받는 삶의 형태가 명백히 성취를 지향하긴 하나, 그 성취의 모습은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승진, 부의 획득, 신분의 변화 등과 같은 극적인 결과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사소할 수 있는 ‘작은 성취들’이 갓생을 이루는 핵심 요소다.

갓생이 등장한 배경엔 코로나19 팬데믹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통설이다. 재택과 사회적 고립이 일상화된 상황에서 학교나 회사가 아닌 스스로 삶의 규칙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도 커졌다. 매일 작은 목표들을 시간 단위로 계획하고 실천하는 것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는 너무 쉽게 무너지고 만다. 예를 들자면 ‘이른 기상 시간’은 가장 대중화된 갓생의 시행 규칙이다. 아주 작은 습관처럼 보이지만 꾸준히 지속하기는 어려운 루틴, 갓생러들은 이를 ‘리추얼(ritual)’이라 부르고, 가능하면 매일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이른 기상이라는 이데올로기

이른 기상 시간은 자기 계발 씬(scene)에서 처음 등장한 트렌드가 아니다. 차라리 이 분야의 변하지 않는 상수로 봐도 무방하다. 《명심보감》에 따르면, 일찍이 유명했던 인플루언서 공자는 삼계도(三計圖)에서 “일생의 계획은 어릴 때에 있고(一生之計在於幼), 일 년의 계획은 봄에 있으며(一年之計在於春), 하루의 계획은 인시(새벽)에 있다(一日之計在於寅)”고 말한다. 책에 등장하는 인(寅) 시는 십이시의 세 번째 시로, 오전 3시부터 5시까지다. 요컨대 새벽잠을 줄이는 것은 문명사회가 시작된 이래 꾸준히 ‘부지런한 인간’이 되기 위한 필수 요건으로 자리 잡아 왔다. 그만큼 일반적으로 성취하기가 어렵다는 뜻일 테다. 실상 방만해지기 쉬운 생활과 마음의 자세를 수련하는 자기 계발의 역사는 이 어려운 것을 해내고 그에 따른 성취감을 맛보기 위한 강제력의 역사라 봐도 무방하다.

1970년대엔 국가가 이런 자기 계발을 적극 독려했다. 1972년 3월 7일 대통령령으로 설립된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는 근면, 자조, 협동의 3대 이념을 당시 갓생의 요건으로 정립하고 ‘새벽종’을 울려 전 국민을 깨웠다. 표준 인간의 모습이 제정됐고 이는 관습으로 강제됐다. 새마을 운동은 지금도 평가가 엇갈리고 있지만, 당시의 기억은 한국인들의 유전자 어딘가 깊숙이 각인된다.

한국인들에게 또 중요한 동기 부여의 해로 기록될 시기는 바로 2003년이다. 책 한 권이 현해탄을 건너온다. ‘Y2K’로 시작한 2000년대 초는 새로운 희망과 기대 그리고 쇄신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시기였다. 양한방 의학자 사이쇼 히로시의 책 《인생을 두 배로 사는 아침형 인간》 은 출간 즉시 히트작에 등극하며 성장에 목마른 현대 한국인의 공허함을 채워 줬다. 주요 논리는 이러하다. 남들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하루 두세 시간을 추가로 이용할 수 있는데 이 시간을 밑천 삼아 소속 조직과 집단에서 더 뛰어난 능력을 구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고 앞서가기 위해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다. 저자의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생활 습관이 인체 리듬과 자연의 섭리에도 부합한다는 설명도 덧붙었다.

아침형 인간과 같은 갓생적 생활 태도는 이내 전 국민적인 유행으로 번졌다. 작용엔 반작용도 따르기 마련이다. 아침형 인간에 대한 성토와 분노, 국가주의적 음모라는 견해, 올빼미형 인간이 오히려 더 영리하다는 취지의 세계 각지 연구 등이 쏟아졌다. 영국 서리대학교(University of Surrey)의 사이먼 아처 교수 팀은 수백 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검사한 결과 생체 시계를 조절하는 데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진 ‘PER 3’라는 유전자의 길이에 따라, 그러니까 사람마다 고유한 유전자에 따라 능률이 좋은 시간대가 따로 있다고 주장하며 반동 측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이 연구는 지금까지도 아침형 인간에 반대하는 측의 주요 논거가 되고 있다. 이후에도 기상에 관한 이데올로기 투쟁은 거듭됐다. 그사이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욜로(YOLO)’와 ‘미니멀리즘’, ‘R=VD(Reality=Vivid Dream)’, ‘시크릿’ 같은 사조가 반짝이며 스쳐 갔다. 그리고 약 10년이 흘러, 《미라클 모닝》이 등장한다.

타인과의 연대

아침형 인간과 미라클 모닝. 아침에 일찍 일어나자는 메시지는 같은데, 성격이 좀 다르다. 정신과 전문의이자 기업 정신 건강 진단 및 관계 치료 전문가인 ‘마인드루트’ 이경민 대표는 이때부터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성공의 형태가 달라졌다고 지적한다.

“아침형 인간이 표준화된 성공에 초점을 두었다면 이젠 타인의 시선에서 성공이 어떤 모습일지의 중요성이 떨어졌습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시간표가 아닌 내가 내 삶을 충만하게 살기 위해 아침 시간을 활용하자는 움직임이 나타난 겁니다.”

실제로 《미라클 모닝》의 저자 할 엘로드(Hal Elrod)는 20살에 죽을 뻔한 교통사고를 겪고 난 뒤 삶의 여러 굴곡을 거치면서 인생의 목표를 기억하고 자기 주도적으로 삶을 경영하기 위한 가이드로 아침 시간을 제안한다. 회사나 조직에서 성공하기 위해 더 일하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을 돌보는 자기만의 시간으로 말이다.

이 대표에 따르면 현재의 갓생은 이러한 미라클 모닝의 이데올로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일정한 시간에 따뜻한 물 마시기, 짤막하게라도 감사 일기 쓰기, 명상하기 같은 작은 것들을 계획하고 또 이를 실천하면서 성취에 대한 자부심을 획득한다. “타인의 시선에서 의미가 있는 성공보다는 자신의 하루를 충실하게 사는 데 더 큰 의미를 둡니다. 국가나 조직의 인정과 신뢰가 아닌 나 자신이 납득할 만한 성취가 필요한 겁니다.” 갓생 트렌드는 이런 작은 성취들을 ‘함께’ 실현한다는 특징이 있다. 갓생러들은 ‘오운완(오늘 운동 완료)’과 같은 각종 목표를 완료했다는 표식을 자신의 SNS에 전시하고 공유한다. 이들은 자기 효능감을 적극적으로 기록하고 홍보한다. 심지어는 같은 목표(매일 일기 쓰기 등)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모아 주고 또 이를 독려해 주는 코치, 인플루언서를 함께 고용하는 서비스 플랫폼도 여럿 등장했다. 개별적이나 확실하게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은 욕망은 이렇듯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고 있다.

구부러진 갓생과 번아웃

개인주의, 워라밸과 같이 손꼽히는 MZ세대의 상징어들은 사실상 요즘 것들을 향한 기성세대의 힐난이 포함된 말로도 인식되곤 한다. 이런 상징어들은 젊은 세대를 못마땅하지만 협력하기 위해 이해해야 하는 대상으로, 끊임없이 불가해한 미지의 대상으로 만듦과 동시에 그 속에 있는 다양성을 뭉개며 납작한 이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그런 점에서 근래의 갓생 트렌드는 자기 계발의 유구한 DNA를 공유하는 후배 세대로서, 성장에 대한 갈망을 품은 MZ세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다만 모든 세대가 경험하고 또 시달려 왔던 번아웃 증후군과 타임 푸어 증후군은 여전히 ‘더 부지런한 사람이 되고 싶은’ 갓생 트렌드에서도 부작용이 될 수 있다.

‘버즈피드’와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출신인 앤 헬렌 피터슨이 쓴 저서 《요즘 애들》[3]은 MZ세대 중에서도 밀레니얼 세대에 대한 내용이다. 이 책에선 밀레니얼 세대가 필연적으로 처하게 된 번아웃 증후군에 대해 설명한다. 이들은 대표적인 ‘낀 세대’다. 밀레니얼 세대는 부모인 베이비부머 세대가 일군 중산층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만, 바뀐 현실 속에서(부모보다 적게 버는 최초의 세대) 악전고투를 경험하게 된다. 게다가 부모 세대로부터 학습된 낙관론, 체제에 대한 순응,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시행착오와 갈등을 겪으며, 결국엔 번아웃 증후군에 이르게 된다.

이런 소진 증후군을 이겨내고 또 예방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단계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허창구[4]는 자기 계발의 동기를 아래처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한다. 자신이 어떤 자기 계발에 매진하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자.

자기 계발의 동기 세 종류
  • 향상적 자기 계발: 이상적인 목표를 추구하고 성취 지향적인 전략을 통해 새로운 성과를 얻고자 함.
  • 예방적 자기 계발: 당위적인 목표를 추구하고 안정적인 전략을 통해 손실을 방지하고자 함.
  • 강박적 자기 계발: 직접 보상이 없음에도 부정적 결과에 대한 불안감을 감소시키기 위해 반복적으로 하게 됨.

사소한 성취의 힘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노력은 언제나 박수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긍정하는 태도는 그보다 더 중요하다. 오늘 계획한 작은 것들을 성취한 나를 위해 체크리스트에 표시를 하는 것도 좋지만, 만약 이를 성취하지 못했더라도 내가 나를 변화시키고 있는 방향을 믿고 내일 다시 뚜벅뚜벅 걷는 힘이 자기 착취의 굴레로 빠져들지 않는 길이다. 우리는 갓생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일 뿐, ‘갓’은 아니라는 겸허함과 함께 말이다.

30년 경력의 직장인이자 꾸준함의 대명사로 스스로를 소개하는 정김경숙 구글 글로벌 디렉터는 단기적인 목표에 매진하기보다 방향성 설정에 더 집중하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지치지 않는 열정의 근간엔 수십 년간 다져온 체력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것이 50살이 돼서도 새로운 커리어에 도전하기 위해 미국 실리콘밸리 본사로 떠날 수 있게 해준 가장 큰 지원군이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인생 역전 기회? 이모티콘의 제국


‘이모티콘’ 써 본 적 있냐는 질문은 새삼스럽다. 한 달 몇천 원으로 이모티콘을 구독까지 하는 시대에 말이다. 한 번이라도 이 구독 서비스를 사용해본 사람들이 약 1000만 명이 넘는다. 카카오톡이 국민 90퍼센트 이상이 사용하는 이른바 ‘국민 메신저’가 되고, 그 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이모티콘 시장을 출시한지도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라떼’ 시절이지만 바야흐로 20여 년 전인 2000년대 초입, 서브컬처를 호령했던 인터넷 소설들의 주 언어가 텍스트를 활용한 이모티콘(^^, -_-, =_=)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가히 장족의 진화라 할 만하다. 지금은 때와 장소, 상황까지 고려해 특정한 환경에서 적재적소로 쓸 수 있는 이모티콘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모티콘을 활용한 디지털 공간의 소통이 정교해지는 동안 시장도 급격하게 커졌다. 한국콘텐츠진흥원과 카카오에 따르면 지난 2017년 약 1000억 원 규모였던 국내 이모티콘 시장은 2021년 7000억 원 규모로 점프했다. 이모티콘 하나에 커피값 정도의 비용을 마다하지 않는 사용자들이 늘면서 이 분야도 인생 역전을 위한 개인 창작자들의 주요한 통로가 됐다. 이모티콘 시장과 창작자는 어쩌다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게 된 걸까?

이모티콘으로 인생 역전이 가능할까

7000억 원 규모의 시장은 물론 하루아침에 이뤄진 건 아니다. 텍스트 이모티콘 시대를 넘어 본격적으로 캐릭터 이모티콘 시대가 열린 건 2011년 네이버의 라인프렌즈 캐릭터 출시부터다. 이후 2012년 11월 카카오에서도 카카오프렌즈를 출시했다. 그로부터 카카오에서만 창작된 누적 이모티콘 수는 30만 개에 이른다. 떡상 이모티콘으로 인생 역전했다는 소식들이 워낙 끊이지 않다 보니 청운(퇴사?)의 꿈을 담아 출시되는 상품만 해도 한 달에 400~500개 정도다. 카카오가 이모티콘 마켓 론칭 10주년을 기념해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지금껏 이모티콘 판매로 100억 원대의 매출을 기록한 작품은 다섯 종인 것으로 나타났다.

‘라떼’ 이야기로 잠시 돌아와, 이모티콘의 역사를 톺아 보자. 디지털 환경의 소통 방식으로서 이모티콘은 세 가지 세대로 분류되곤 한다. 자판의 글자들과 문장 부호를 이용해 표정을 조합한 방식의 1세대 이모티콘에 이어, 이른바 기본형으로 불린, 그래픽을 활용한 표정 콘텐츠의 2세대 이모티콘, 그리고 움직이는 gif로 구성되며 실사와 일러스트, 캐릭터 등을 동원해 형식적 다양성을 확보한 3세대 이모티콘이 그것이다.
이모티콘 3세대 역사 ©SBS
영어로 감정을 뜻하는 ‘이모션(emotion)’과 ‘아이콘(icon)’을 합친 단어인 이모티콘은 이젠 대중들에게도 위화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외국어 합성어다. 외국에서는 ‘이모지(emoji)’로 더 자주 불리는데 사실상 별 차이가 없는 똑같은 개념으로 지칭되곤 한다. 그러나 사전적 정의는 조금 다르다. 브리태니커 사전에 따르면 이모티콘은 구두점, 글자, 숫자를 활용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뜻한다. 반면 이모지의 어원은 일본어에서 왔다. 그림을 뜻하는 ‘에’, 캐릭터를 뜻하는 ‘모지’를 결합한 일본어에서 기원한 단어로 구두점 등을 제외한 요소로 감정과 기분 등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사전적으로만 분류하자면 현재 주류를 이루고 있는 3세대 이모티콘이 이모지, 웹 소설 시대를 풍미한 1세대 이모티콘이 이모티콘이라 말할 수 있다.

최초의 이모티콘이 무엇이냐에 대해선 논쟁이 있다. 1982년 미국 카네기멜런대학교 컴퓨터과학과의 스콧 팔먼 교수가 지금으로 치면 ‘커뮤니티’라 할 수 있는 학술 온라인 게시판에서 사소한 농담이 분쟁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농담일 경우 :-)를 쓰자”고 제안하면서 유행이 됐다는 것이 이른바 정설이다. 팔먼 교수는 미소에 대응하는 슬픈 표정은 :-(로 표현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이모티콘의 역사가 이보다 무려 100년 이상 앞섰다는 주장도 있다. 1881년 3월 30일 미국의 풍자 잡지 《퍽Puck》에서 처음으로 모스 부호를 이용한 이모티콘이 소개됐다는 내용이 2015년 영국 언론 《데일리메일》 에서 보도된다. 기쁨(joy), 우울함(melancholy), 무관심(indifference), 놀람(astonishment)까지 무려 네 가지 표정이다. 어떤 것이 진정한 이모티콘의 시초인지의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겠다.

친근함이 생명

지금 주류를 이루고 있는 3세대 이모티콘의 가장 큰 특징은 아무래도 그래픽과 텍스트가 결합해 구성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하이브리드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3세대 이모티콘은 짧은 단어부터 한 문장 정도까지 문자나 음성 언어로 포함할 수 있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구구절절 여러 말들을 조합해 입력하지 않아도 이모티콘 하나로 설명 또는 정리되는 상황을 선호하는 언어 습관도 이모티콘 구독 시대와 함께 정착됐다. 텍스트가 포함된 이모티콘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2023년 2월 기준으로 기출시된 텍스트와 결합한 움직이지 않는 카카오 이모티콘 가운데, 가장 길게 첨부된 문장은 ‘선물티콘’의 ‘야이게무슨일이냐난리났다난리났어와내가뭘받은거냐너무대박이다증말’이다.
연령별로 이모티콘 사용 동기가 조금씩 다르다는 연구[5]도 있다. 이희주의 연구에 따르면 내국인 남녀 187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10대와 30대는 재미를, 20대는 유용성을, 40대는 친근함을 이모티콘 사용의 가장 큰 요인으로 뽑았다. 짤막한 의성어, 의태어로 이뤄진 단답형 멘트와 함께 쓰인 이모티콘을 선호하는 10대와 달리, 20대는 사랑과 행복에 관련된 대화를 선호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이에 비해 30대는 감정을 쉽게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대안적 성격을 띤 이모티콘을 선호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해당 상황을 대신할 수 있는 표정이나 액션을 과장한 이모티콘을 말한다. 40대는 감정 표현보다 정보 전달이 가능하고, 정확한 상황을 표현하는, 주로 인사말을 담은 이모티콘을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모티콘에 한국인의 생애 주기별 관심사와 애환이 담긴 셈이다. 직장 생활, 육아, 아르바이트, 의뢰인을 상대하는 일 등 특정 상황에서 이뤄지는 대화의 소재 또는 패턴으로 오르내리는 말들을 정확하게 포착할수록 이모티콘이 언어를 대체하는 경우가 잦아지고 결과적으로 떡상 가능성이 높아진다.

치열한 레드 오션에서 30대 선호 이모티콘 상위권을 꿋꿋이 지키고 있는 히트 상품 ‘와다다곰’ 시리즈의 작가 ‘띵똥’은 각종 SNS와 유튜브를 통해 동시대 가장 인기 있는 밈과 짤의 웃음 코드를 벼리는 일이 필수 루틴이라고 강조한다. 친구들, 가족들 할 것 없이 요즘 세상에서 많이 쓰이는 말에 늘 주의를 기울이라고 조언한다. 더불어 그녀는 새로 진입하려는 신진 작가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이미지를 직접 꺼내 놓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띵똥 작가는 새 상품 출시를 앞두고 둘째 아기의 출산이 임박해 산통을 느끼면서도 산통을 줄이기 위해 이마를 때리며 이모티콘을 그렸다고 한다.

좁은 떡상의 문이지만

호기롭게 뛰어드는 도전자에게 떡상의 문은 활짝 열려 있다만, 그 문을 통과하는 건 극소수에 불과하다. 카카오 소속 직원 10여 명으로 구성된 심사 위원단이 쏟아지는 후보작들의 상품 가치를 판별해 시장에 내놓는 관문 역할을 맡는다. 탈락한 창작자들에게 별도로 탈락 사유를 설명하진 않는다. 심사 기준과 과정을 공개한다면 작품 창작의 다양성이 저해될 수 있다는 게 그 이유다. 좁은 문을 뚫고 상품을 등록한 작가들은 최연소 12세부터 최고령 81세까지 지금껏 1만여 명에 이른다. 이 중에서도 일부 히트작들은 그 자체로 브랜드가 돼 대기업과 협업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작가는 팬들과 직접 소통하며 팬덤을 구축하기도 하고, 해당 캐릭터를 활용한 굿즈를 판매하는 사업자가 되기도 한다. 길다면 140년, 짧다면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모티콘이라는 작은 아이디어는 오늘날 다양한 창작자들의 기회이자 삶으로 거듭났다. 표현은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을까? 그리고 또 어떤 욕구가 새로운 시장을 만들 수 있을까?
[1]
박세윤, 〈신체활동과 만성질환 우울증 및 건강 관련 삶의 질의 관계성〉, 《체육과학연구》 25(2), 2014.
[2]
김영선, 《존버씨의 죽음》, 오월의봄, 2022.
[3]
앤 헬렌 피터슨(박다솜 譯), 《요즘 애들》, RHK코리아, 2021.
[4]
허창구, 〈스펙경쟁 사회에서 자기계발 동기와 자기계발 강박이 취업준비생의 심리상태에 미치는 영향〉, 《한국심리학회지》 33(1), 2017.
[5]
이희주, 〈카카오 이모티콘의 표현 유형에 따른 연령별 소비자 호감도 비교 연구〉, 《조형미디어학》 24(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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