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용기 있는 반대파의 지도자를 용병 무리 바그너 그룹의 예브게니 프리고진(Yevgeny Prigozhin)과 비교하는 건 불합리할지도 모른다. 프리고진은 이번 주 초에 그의 비행기가 하늘로부터 추락하면서 암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모든 정황이 푸틴의 복수임을 가리키고 있다. 처형한 방식이나 특유의 냉담한 방식 등이 모두 그러하다.
프리고진은 왁자지껄한 영상을 통해 러시아의 군부 조직을 비판했고, 그런 다음 지난 6월에는 모스크바로의 기이한 진격을 시도했다. 결국 무위로 돌아가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푸틴을 바보로 만들었다. 프리고진에 대한 처벌은 비교적 신속했다. 불편한 진실을 들추던 다른 정치인이나 언론인, 전직 첩보원에 비하면 말이다.
4. 푸틴이 정적을 제거하는 법
푸틴의 수법은 셀 수 없고 다양하다. 독극물, 총격, 비행기 추락 등의 방법이 쓰였다. 창문 밖으로의 미스터리한 추락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방식도 있다. 푸틴의 정적 제거는 때로는 은밀하게 수행되지만, 그에 대한 도전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리듯 간혹 공개적으로 수행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표적 살인은 푸틴이 2000년에 권좌에 오르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1990년대에는 이러한 사건이 체첸 지도부의 승인하에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아니면 범죄 조직 및 그들의 정치적 주군이 원한을 갚기 위해 일을 벌였다. 그런데 푸틴은 이러한 국가 차원의 암살을 산업적 규모로 바꾸어 놓았다.
나발니 외에도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그들이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러시아 정찰총국(GRU)의 전직 장교였다가 영국의 이중 첩자가 되었던 세르게이 스크리팔(Sergei Skripal)이 2018년 3월에 (영국의) 솔즈베리에서 독극물 공격을 받았던 사례도 그러했다. 실패 후에는 계획을 그르친 책임이 있는 자들이 공개적인 질책을 받는다. 스크리팔과 그의 딸은 그들이 점심 식사를 하던 피자 가게의 가까운 공원 벤치에서 발견됐다. 그들은 약물로 인한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영국은 이 공격의 범인으로 두 명의 러시아 첩보원을 지목했는데,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러시아 TV 채널에 출현해 자신들이 그 “아름다운” 도시에 갔던 이유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 첨탑 가운데 하나”를 보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그 인터뷰는 해당 방송국의 대표
[1]가 진행했는데, 그녀는 푸틴의 측근이었다. 방송에서 그녀는 좀처럼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 사건은 잠시 세간에 회자되었는데, 이는 분명히 러시아에게는 굴욕이었을 것이다.
많은 암살 시도들 가운데서도 유독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띈다. 그것은 바로 전직 KGB 요원이자 푸틴을 거침없이 비판했던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Alexander Litvinenko)가 병상에 누워 있는 사진이다. 그는 이 사진을 찍은 직후인 2006년 11월에 사망했다. 그는 런던의 심장부에 있는 메이페어(Mayfair) 지구에 위치한 어느 호텔에서 강력한 방사성 동위원소인 희귀한 폴로늄-210이 첨가된 녹차를 마셨다. 성공과 실패의 차이는 매우 잘 알려져 있다. 영국이 이 암살을 수행한 것으로 지목한 두 명의 러시아인 가운데 한 명인 안드레이 루고보이(Andrei Lugovoy)는 러시아 국회의원이 되는 것으로 보상을 받았다.
영국의 수도가 (러시아 출신 망명자들의 천국이라는 의미의) 런던그라드(Londongrad)로 알려지면서, 런던의 주변 지역들이 주기적으로 암살 장소가 되었다. 알렉산드르 페레필리크니(Alexander Perepilichny)는 러시아의 자금 세탁 계획에 대한 스위스 당국의 조사를 도와주고 나서 2009년에 영국으로 망명을 신청했다. 3년 뒤, 그는 조깅을 하러 나갔다가 서리(Surrey)의 웨이브리지(Weybridge)에 있는 자택 근처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참고로 그의 자택은 출입문으로 닫혀 있어서 접근하기 힘든 곳이었다. 부검 결과 어떤 용의점도 공식적으로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평소 그의 건강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사인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2013년 3월에 애스컷(Ascot) 경마장 인근에 위치한 자신의 저택에서 사망한 보리스 베레조프스키(Boris Berezovsky)의 사건도 동일한 의구심이 제기된다. 그의 사체는 욕실에 잠긴 채 경호원에 의해 발견됐는데, 목에는 끈이 매여 있었다. 올리가르흐(Oligarch)
[2]이자 출중한 정치 공작원이었던 베레조프스키는 푸틴이 정치적으로 부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당시에 병약했던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 대통령이 엘리트 집단을 대표하여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사람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라고 대통령의 가족들을 설득했다. 첫 번째 임무에서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그는 자신의 후배인 푸틴에 의해 요란스럽게 쫓겨났다. 베레조프스키는 누구보다도 심한 앙심을 품은 망명자가 되었다. 필자는 《뉴 스테이츠먼(New Statesman)》의 에디터로 재직하던 2006년에 그를 한 차례 만난 적이 있다. 내가 점심 식사 자리를 마련하여 그를 손님으로 초대한 것이다. 베레조프스키는 거칠고 무뚝뚝한, 좌절한 정력가였고 고정된 규범이나 충성 대상도 없었다. 그는 러시아 권력의 역학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는 프리고진의 비군사적 버전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내 적의 적(my enemy’s enemy)”이었기에 같은 무리로 분류할 수도 있었다. 다만 그의 유일한 정치적 유산은 그가 푸틴에 맞섰던 것뿐이다.
크렘린은 암살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은 없다는 걸 보여주길 좋아한다. 어떤 국가도, 굳게 문이 잠긴 어떤 지역도 그들로부터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2015년 2월, 푸틴 시대의 가장 파렴치한 정치적 처형 가운데 하나가 벌어졌다. 보리스 넴초프(Boris Nemtsov)가 크렘린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 것이다. 그는 밖에서 저녁 식사를 한 후 자신의 여자친구와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옐친 아래에서 주지사와 부총리를 지낸 넴초프는 야당의 저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푸틴은 해당 사건의 조사에서 “개인이 벌인 일”이라고 판단했고, 북코카서스(North Caucasus) 출신의 다섯 명이 투옥되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탐사 저널리스트인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Anna Politkovskaya)의 암살은 거대한 울분을 촉발시켰다. 당시는 아직 푸틴의 집권 초기였고, 그런 사고가 흔하지 않을 때였다. 그녀는 2006년 10월에 슈퍼마켓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중 모스크바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 승강기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폴리트코프스카야는 제2차 체첸전쟁 기간에 벌어진 인권 유린에 대한 보도를 통해 주목받는 여성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