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 전시회에서 최근 공개된 기록들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점령 당국이 캉봉 거리의 마드모아젤 샤넬(디테 코코(dite Coco))을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임시 요원(occasional agent)’으로 분류했던 것이다. 그녀는 1943년 초부터 이듬해 봄까지 레지스탕스와 함께 일했다. 이 문서는 사넬이 수행한 업무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이 없어 그녀가 참여했을지도 모르는 잠재적인 작전이나 첩보 활동에 대해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기록은 그녀를 영국 정보부와 관련된 에릭(ERIC) 네트워크와 연관시키고 있다. 이 네트워크는 1944년 4월에 조직 지도자인 르네 시모냉(René Simonin)의 체포 이후 소멸됐다. 전시회에서는 1950년대 프랑스 정부가 발행한 또 다른 문서를 보여 준다. 여기에서도 샤넬은 레지스탕스 일원임이 입증된다. 전시회 큐레이터인 오리올 큘런(Oriole Cullen)은 최근 《가디언(The Guardian)》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새로운 증거가 그녀의 무죄를 입증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림을 좀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건, 그녀는 양쪽 모두에 연루돼 있었다는 겁니다.”
디데이(D-Day) 이후, 적군과 동침했다는 이유로 ‘수평적 협력자(horizontal collaborator)’라고 불리며 기소된 여성들은 잔인하게 취급받았다. 타르를 뒤집어쓰고, 머리카락을 강제로 밀어야 했으며, 수모를 견디며 길거리를 행진해야 했다. 샤넬은 이런 굴욕에 직면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자유 프랑스(Free France)
[1]에 의해 몇 시간 동안 심문을 받았지만 결국 풀려났다. 그녀의 전기 작가들은 처칠과의 친분이 그녀에게 우호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파리 해방 이후 영리한 홍보 활동의 일환으로, 그녀는 캉봉 거리의 매장을 열어 연합국 병사들에게 샤넬 넘버5를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여론을 완전히 뒤집기에 이런 평판 관리 활동은 충분치 않았다. 부역자라는 오점이 들러붙은 그녀는 캉봉 거리의 매장 문을 닫고 스위스에서 몇 년 동안 조용히 보냈다. 모델후트 작전의 책임자였던 나치 장교 발터 셸렌베르크(Walter Schellenberg)의 회고록 발표 계획이 알려지자, 샤넬은 그와 그의 아내가 머물 저택의 비용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이후 그녀는 그의 건강 관리를 위한 기금을 조성했고, 딩크라케와 헤어진 지 한참 지난 뒤에도 그를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5. 패션계로 돌아오다
그런데 이미 70세의 고령에 접어든 그녀를 1954년에 다시 패션계에 돌아오게 만든 건 무엇이었을까? 바로 젊은 녀석이 틀렸다는 걸 입증하고자 하는 완강한 욕망이었다. “어느 날 밤 저녁식사 자리에서, 크리스티앙 디올(Christian Dior)가 여성은 절대 위대한 디자이너가 될 수 없다고 말하더군요.” 그녀가 훗날 《라이프(Life)》 매거진에 한 말이다. 풀 스커트(full skirt)와 허리를 졸라 맨 디올의 뉴 룩(New Look)은 수십 년 전 샤넬이 개척한 실루엣으로부터 벗어난 세계였다. 그리고 파리 패션계의 귀부인이던 샤넬은 그의 노력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디올은 여성에게 옷을 입히는 게 아니라 천을 둘러씌우고 있죠.” 라이벌 디자이너를 겨냥한 그녀의 신랄한 비판이었다. 발언을 이어가며, 그녀는 디올의 드레스를 입고 앉아 있는 여성은 “오래된 안락의자”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1954년, 그녀의 컴백 쇼는 아이러니하게도 피에르 베르트하이머로부터 자금을 후원 받았다. 여기서 샤넬의 고전적인 스타일이 부활했다. 이를 바라보는 패션계 인사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특히 그녀의 고국에서는 반응이 잠잠했다. 전시 부역자라는 오래된 그림자 때문이었다. 샤넬은 개의치 않았다. 아마도 고집스러움으로 유발된 동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몇 년 동안 그녀는 왕성한 창작 활동을 했으며, 마침내 가장 가혹했던 비평가들까지도 사로잡게 되었다. 현재 샤넬이라는 이름과 동일시되는 수많은 스타일이 이러한 말년에 선을 보이게 됐다. 누빔 처리한 고풍스러운 2.55 샤넬백은 1955년에 나왔고, 1956년에는 부클 트위드 수트가 뒤를 이었으며, 1957년에는 투톤 샤넬 펌프스가 출시됐다. 샤넬은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1971년에 사망하기 불과 며칠 전까지도 그녀는 차기 컬렉션을 작업하고 있었다.
전기 작가인 파울 모랑과의 인터뷰에서, 샤넬은 자신의 생애 전반을 돌아보며 커리어를 간단히 설명했다. “저는 그곳에 있었고, 기회가 손짓했고, 그걸 잡았죠.” 그러나 그녀는 좋은 나쁘든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순간을 포착했던 궁극적인 기회주의자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