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스너는 1944년 이탈리아 북부의 자치도인 사우스티롤(South Tyrol)에서 태어났는데, 참고로 이곳은 1919년까지 오스트리아의 일부였다. 그는 돌로미티(Dolomite) 산맥에서 여덟 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자랐다. 그의 엄마 마리아(Maria)는 ‘헌신적인’ 여자 가장으로, 아버지가 비운 집안의 공백을 메웠다. 교사였던 아버지 요제프 메스너(Josef Messner)는 나치의 동조자로, 독일군에 입대하여 히틀러의 동부 전선에서 (소비에트연방을 침공하는)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에 투입됐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자주 집을 비웠고, 폭력적으로 굴었다. 메스너는 《벌거벗은 산(The Naked Mountain)》이라는 회고록에서 언젠가 개 사육장의 지저분한 무더기 속에 있는 귄터를 발견했다고 썼다. 아버지가 동생을 채찍으로 때린 것이다. 그러나 기분이 조금 좋을 때면 요제프는 아들들ㅇ레게 산이 주는 자유로움을 소개해 주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발판 삼아 메스너는 산악 훈련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고향에 첨탑처럼 높이 솟은 돌로미티의 압벽들을 정복했다. 후에 그는 이 시기에 익힌 기술을 유럽의 서알프스(Western Alps)에서 눈과 얼음으로 덮인 루트를 개척하는 데 이용했다. 최소한의 장비만을 사용해서 빠르고 효율적인 등반을 한 것이다. 그런 다음 메스너는 가벼운 ‘알파인 스타일(alpine style)’을 적용해서 8000미터 이상의 봉우리들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는 산소통과 고정 로프, 대형 캠프와 지원팀을 버린 방식을 말한다. 그는 2차 세계 대전 후에 오랫동안 고수되었던 민족주의적 탐험 방식인 ‘포위 스타일(siege style)’을 거부했다. 그리고 또한 낭가파르바트에 함께 올랐던 오스트리아계 독일인 팀원들과 그의 아버지가 지지한 정치적 견해를 멀리했다. 대신 메스너는 선대의 개척자들로부터 영감을 얻으며 산악 철학을 주조하는 데 몰두했다.
1971년에 그는 《불가능의 살해(The Murder of the Impossible)》라는 제목의 신랄한 에세이를 집필했다. 이 책에서 그는 볼트(bolt)와 펙(peg)을 이용해 등반의 난이도를 낮추고 암벽을 “자신이 생각하는 가능성”으로 왜곡시키는 현대 등반가들을 격하게 질타했다. 그는 이렇게 성토했다. “등반이라는 순수한 샘물을 오염시킨 것은 누구인가?”
결코 타협하지 않는 메스너의 이러한 방식이 때로는 도저히 감당 불가능한 경우도 있었다. 자신의 동생이 묻혀 있는 낭가파르바트에 다시 돌아갔던 1973년, 그는 ‘알파인 스타일’을 시도했지만 결국 6500미터 지점에서 심리적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나는 완전히 길을 잃고 외로웠던 나머지 결국 뒤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가 《벌거벗은 산》에 쓴 내용이다. “그 정도의 환경에 나 혼자 노출되는 것을 견뎌낼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 명확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산산조각이 나는 것 같았다.”
1978년에 메스너는 오스트리아의 페터 하벨러(Peter Habeler)와 함께 의료진을 동반하지 않고 산소 없이 에베레스트를 처음 등정했다. 그런데 그들이 10년 넘게 로프를 사용하며 알프스와 남아메리카에서 다수의 탐험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벨러가 산악 탐험에 대해 쓴 《고독한 승리(The Lonely Victory)》라는 책을 출간한 이후 두 사람의 사이는 극적으로 멀어졌다. 하벨러는 메스너가 등반에 있어서 자신의 지도력을 과장하여 말하며, 그들이 함께 이룬 성공이라는 주장에 대해 분개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메스너는 이런 비난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메스너의 확고한 개인주의는 결국 보상을 받았다. 같은 해, 그는 낭가파르바트의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디아미르사면의 새로운 등정 루트와 하산 루트를 통해 낭가파르바트 단독 등정에 처음으로 성공했다. 그곳은 귄터와 함께 고통스럽게 하산했던 곳이며, 결국 동생의 사체가 발견된 지점 아래였다. 8000미터급 봉우리에 대한 최초의 단독 등정이었다. 놀랍게도 이러한 업적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듯, 메스너는 등반 도중 발생한 지진으로부터 살아남았다. 그가 개척한 루트를 다시 성공한 사람은 아직까지 아무도 없다.
1980년, 그는 산소통 없이 에베레스트 산을 단독 등반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미국의 전문 산악인 콘래드 앵커(Conrad Anker)는 이 업적이 “다른 모든 것들이 무색해지는 것”과 같다고 말할 만한 것이라며 “달 착륙”에 비유했다. 메스너는 등반 첫날 크레바스에 빠졌고, 그곳을 탈출하려 시도하면서 녹초가 됐다. 그래서 거의 단념할 뻔 했지만 결연하게 일부 새로운 루트를 거치며 사흘 동안 계속해서 산을 올랐다. 그것도 위험천만한 몬순(monsoon) 시즌에 말이다.
대담한 단독 등정에 대해 메스너는 엄청난 강박이 있었다. 이는 점점 더 만성적인 외로움의 증상이 되어 갔는데, 이는 1977년 첫 이혼 이후 더욱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에베레스트를 단독으로 등정한 후 펴낸 《수정처럼 투명한 지평선(The Crystal Horizon)》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바보였다. 사랑과 애정에 대한 갈망으로 차가운 산에 오르는 바보였다.”
메스너의 산악인 선배들은 전인미답의 정상에 오르는 것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는 아무도 정복하지 않은 사면을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루트로 오르는 걸 통해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았다. 산소 없이, 때로는 단독으로 말이다. 1986년에 그는 8000미터 이상의 14좌를 모두 정복한 최초의 사람이 됐다. 그리고 산소 없이 그것을 이뤄낸 최초의 존재가 됐다. 그가 마지막으로 등정한 8000미터 이상의 정상은 8526미터의 로체(Lhotse)였다.
3. 아이에게는 전설이 필요 없다
1986년, 42세가 된 메스너는 더 이상 가장 높은 산에 오르고 싶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후 몇 년 동안 그는 다양하고 수많은 관심사에 손을 댔다. 예를 들면 소 기르기, 야크 목축, 설인 사냥(성공하지 못했고 대신에 그에 대해 글을 썼다), 5년간의 정치 활동(그는 이탈리아 녹색당 소속으로 유럽의회의원(MEP)을 지냈다), 사막 횡단(그는 단독으로 고비 사막을 횡단했다), 빙하 횡단(그린란드와 남극을 가로지금으로써 그곳들을 두 발로 횡단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에베레스트에서 맞이한 조지 말로리(George Mallory)의 죽음에 대한 연구(또 다른 책의 주제였다), 그리고 돌로미티 일대에 여섯 개의 산악 유산 박물관을 설립했다. 현재 79세로 사우스티롤에 위치한 두 개의 성 사이에 살고 있는 메스너는 지역에 있는 산들을 두 발로 오르며 여전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등반 업적을 회상하다 보면, 메스너 개인의 인생에 많은 우여곡절이 널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세 번 결혼했고 두 번 이혼했다. 그는 낭가파르바트 탐험대원 가운데 한 명의 아내와 외도를 했고, 결국 그녀와 결혼했다가 이혼했다. 그에게는 네 명의 자녀가 있는데 그들 가운데 현재 33세의 지몬 메스너(Simon Messner)는 산악인이 되었고, 돌로미티를 비롯하여 파키스탄에 있는 6000미터 이상 봉우리들에 오르면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지몬은 지난해 이탈리아의 한 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메스너가 아버지로서는 “엄격”했으며 “부재 중”이었다고 말했다.
“저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말했다. “아버지에 대해서 뭔가를 알고 싶을 때면, 저는 빌트(Bild) 신문을 읽어야 했습니다. 그는 늘 움직여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의 머리는 대리석처럼 단단했고, 그는 매우 변덕스러웠습니다. 전설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신화로 여기지만, 아이에게는 전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이에게는 아빠가 필요하지만, 그는 결코 아빠인 적이 없었습니다.”
지몬은 자신이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서 산악인이 된 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오히려 그는 17살에 자기 자신의 의지로 산에 오르기로 결심했다. “저는 그와 함께 등산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저를 모험에 데려간 적도 없습니다.” 그의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는 함께 메스너산악영화(Messner Mountain Movie)라는 제작사를 만들었고, 그의 인스타그램 프로필에 의하면 지몬 역시 스스로를 “전통적 알피니스트(alpinist)
[4]”라고 설명한다. 이는 그의 아버지가 고안해서 자주 인용하는 표현이다.
2021년, 메스너는 36살 연하인 룩셈부르크 출신의 다이앤 슈마허(Diane Schumacher)와 결혼했다. 지몬은 인정하지 못했다. “그녀의 나이가 제 누이의 나이와 같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가 이탈리아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하지만 그는 라인홀트입니다. 마음에 뭔가를 품으면 그걸 하고야 마는 사람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