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뒤에 홍수가 오건 말건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1]를 읽은 사람들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결국, 운명이 옳다고 증명된 이는 그녀를 의심하던 이들이 아닌 카산드라였던 사실을 말이다. 실제로 엄청난 발전의 기간은 글로벌 경제의 흐름을 관리하는 어떤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1970년대가 되자 그 시스템이 심각한 지장을 받게 된다. 첫 번째는 1971~1972년에 브레턴 우즈 체제가 사실상 붕괴한 것이었다. 그다음은 1973년과 1979년의 에너지 위기였는데, 이는 1970년대 “거대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됐지만, 가난한 나라들에서는 그 영향이 고르지 않았다(물론 석유를 수출하는 나라들은 심각하게 타격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서방은 장기간의 경기 침체를 경험하면서 1970년대를 보냈다. 1979~1981년에는 소위 볼커 쇼크(Volcker shock)라고 이르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B)의 대폭 금리 인상이 있었고, 이로 인해 마침내 인플레이션이 중단됐다.
부유한 세계에서 볼커 이후의 시기는 인플레이션 하락, 심각한 경기 침체, 실업률의 급증과 함께 찾아온 원자재 가격의 하락을 의미했다. 1972년부터 1982년 사이에
목재의 평균 가격은 40퍼센트,
구리는 25퍼센트,
커피는 20퍼센트 이상,
설탕은 약 10퍼센트 떨어졌다.
[2] 그러나 가난한 세계의 고통은 단연코 훨씬 더 컸다. 호황을 맞던 원자재 사이클이 혼란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수십 개국의 경제가 삐걱거리면서 멈춰 섰다. 강력한 성장을 가정해 구축된 확장적 재정 프로그램들이 이내 위기에 처한 반면, 높은 차입 금리로 인해 달러 표시 부채(dollar-denominated debt)의 이자 상환 비용은 크게 늘었다. 브라질이 대표적이다. 1960년부터 1980년까지 브라질의 실질적 1인당 GDP는 140퍼센트 상승했지만, 1980년부터 2000년까지는 그 성장세가 20퍼센트
미만이었다.
[3] 유사한 경기 둔화와 침체, 불황이 가난한 세계 전역에 걸쳐 발생하면서 지속적인 피해를 남겼다. 2018년 과테말라의 1인당 GDP는 1978년 수준보다 겨우 20퍼센트 증가했으며, 코트디부아르는 16퍼센트 증가에 그쳤다. 일부 지역은 결코 회복하지 못했다. 콩고민주공화국, 아이티, 니제르,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2018년 1인당 생산량은 40년 전보다 턱없이 낮았다.
볼커 쇼크 이후 20년은 안정적인 성장 대신 끊임없는 위기가 찾아온, 발전의 잃어버린 20년으로 요약될 수 있다. 가난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심각한 경기 침체는 재정 부실, 사회 및 정치의 붕괴, 대규모 유혈 사태로 이어졌다. 서반구에서는 이 시기에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의 장기적인 침체를 야기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데카다 페르디다(década perdida· 잃어버린 10년)” 사건이 발생했다. 페루의 심각한 경제 위기는 좌익 게릴라 그룹인 ‘빛나는 길(Shining Path)’이 반란을 일으키는 데 기여했다. 니카라과, 과테말라, 엘살바도르에서는 내전이 일어났으며, 콜롬비아에서는 마약 카르텔과 좌파 반군과 콜롬비아 정부 사이의 내부적 갈등이 고조됐다. 한편, 러시아처럼 구공산권 국가(postcommunist states) 들은 서방의 지도를 받으며 고통스러운 “충격 요법”의 대상이 됐는데, 수많은 사람이 고통에 빠졌고, 소련의 산업적 유산은 상당 부분 파괴됐다. 이로 인해 (소련의) 저렴한 무기들이 가난한 세계로 흘러들면서 분쟁은 더욱 악화했다. 몽골처럼 저개발된 구공산권 국가들은 에릭 라이너트(Erik Reinert)가 경제적 “원시화(primitivization)”라고 표현한 상태를 경험하게 됐다. 많은 산업은 운영을 중단했고, 산업 노동자들은 목축과 같은 전통적인 생활로 복귀했다. 아프리카의 대호수(Great Lakes) 지역에서는 무력 충돌의 서사가 번져나갔는데, 여기에는 우간다 내전, 르완다의 대학살, 콩고의 모부투 정권 붕괴와 뒤이은 “제2차 콩고 전쟁”이 포함된다. 동시에 서아프리카에서도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 사이의 전쟁을 중심으로 위기가 발생했다. 한편 남아프리카에서는 에이즈가 퍼지면서 보츠와나, 에스와티니, 레소토, 말라위, 남아프리카, 잠비아, 짐바브웨의 기대 수명이 크게 줄었다. 앙골라 및 모잠비크와 같은 신생 탈식민지 국가에서도 유혈 충돌이 발생했다.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 소련과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을 비롯해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고조되는 종교 간 분리주의 폭력 사태 등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참화가 발생했다. 이를 면한 지역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4] 라틴 아메리카, 중동, 아시아의 상당 지역이 크게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위기로 최악의 타격을 받은 지역은 아프리카였는데, 사망자 수가 수백만 명에 달했다.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는 이를 “
아프리카의 비극”이라고 불렀다.
[5]
대부분의 가난한 국가들은 심각하게 약해졌던 20년을 벗어났다. 그 이전에 존재했던 수십 년에 걸친 담대한 국가 발전주의는 경제 위축과 생활 수준의 저하로 인해서 신뢰를 잃었다. 그것이 수카르노처럼 반식민지적인 것이든, 아니면 우푸에부아니처럼 서방과의 연합에 의한 것이든 말이다. 확장적 재정 체제(expansionary fiscal regimes)는 철회됐고, 국가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정부 활동의 초점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IMF가 부채 경감을 위해 요구했거나 에르난도 데 소토(Hernando de Soto)와 같은 열성적인 자유주의자들이 독자적으로 옹호했던 “구조 조정” 프로그램은 민영화, 규제 완화, 정부 활동 중단과 같은 조치를 내렸다. 이는 국가의 역량을 더욱 축소했다. 가난한 세계의 많은 정부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외국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그들의 자본 계좌(capital account)를 완화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변동성이 커져 일련의 금융 위기들이 정점에 달했다. 1994년 멕시코, 1997년 아시아의 여러 국가, 그리고 1998년의 러시아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개혁”은 데 소토나 아나톨리 추바이스(Anatoly Chubais)와 같은 서방의 경제학자나 외국 학자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성장의 기반을 개선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조치들은 가난한 세계를 공허한 상태로 만들었다. 그 상태로 그들은 새로운 세기를 맞게 됐다. 많은 공공 부문은 그러한 혼란으로 인해 너무도 무기력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도하는 사회를 제대로 관리조차 할 수 없었다. 1990년대에 국가가 붕괴되면서 관습법이 부활한 소말리아처럼, 최악의 위기가 닥친 지역에서는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됐다. 정부의 핵심 기능은 국제 인도주의 단체에 넘겨졌다. 나이지리아의 역사학자인 라흐마네 이드릿사(Rahmane Idrissa)는 이를 두고 “
원조 산업에 의해 유지되는 정부”라고 표현했다.
[6]
탈산업화와 탈농업화
이러한 위기들은 끔찍했다. 그러나 1980~2000년 기간의 핵심적인 구조적 변화는 궁극적으로 더욱 심각하고 해로운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 바로 가난한 세계에서 예상치 못한 탈산업화가 도래했다는 점이다. 1970년대 이후 세계를 휩쓴 연속적인 탈산업화의 물결이 미국의 러스트 벨트, 잉글랜드의 북부와 스코틀랜드, 프랑스 북부 등 서방의 해안에 들이닥쳤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탈산업화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고, 지구상의 거의 모든 국가에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1980년 이후 가난한 나라들은 선진국이 경험한 것만큼이나, 때로는 그보다 더욱 심각한 탈산업화 과정을 겪었는데, 원인은 바로 중국이라는 산업 괴물의 출현이었다. 그들은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멕시코와 이란의 노동자들을 무섭게 대체했다.
탈산업화는 이전에는 발전의 사다리를 빠르게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던 수많은 국가를 휩쓸었다. 브라질은 1986년, 인도는 2002년, 콜롬비아는 1970년, 멕시코는 1980년, 페루는 1971년, 인도네시아는 2001년, 가나는 1978년, 나이지리아는 1982년에 제조업 고용 수준의 정점에 이르렀지만, 그들의 제조업 고용률과 1인당 GDP는 서방의 국가들이 제조업의 최전성기에 이르렀던 시절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이었다.
[7] (제조업 고용은 일반적으로 생산량보다 더욱 유용한 산업화의 지표다.)
[8]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은 가장 심각하게 타격을 받으면서 산업이 더 이상 하락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아시아의 많은 국가는 장기간의 정체에 가까운 상태가 됐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는 산업화의 매우 낮은 수준으로까지 제조업 기반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들이 산업화를 이룬 적이 있었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였다.
[9]
경제학자 로드릭은 이런 현상을 “조기 탈산업화”라고 부른다. 이런 현상의 발생은 단지 로스토와 같은 더욱 오만한 경제학자만이 아니라 발전의 황금기에 있었던 경제학자들이 예측했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일이었다. 마치 과일이 익기도 전에 썩어가는 것과 같았다. 서방의 국가들에서 탈산업화는 적어도 풍족함으로의 진화라는 편리한 서사에 끼워 맞춰질 수 있었다. 즉, 숙련되고 세계 시민적인 “지식 노동자들”이 편안한 “성숙 경제”를 채우는, 더욱 높은 단계로의 전환에 있어서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브라질이나 인도와 같은 지역에서는 그러한 서사가 통용될 수 없었다. 그곳에서의 탈산업화는 여전히 압도적인 수준의 후진성 및 빈곤과 함께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업화가 가난한 세계를 떠나면서 그것의 역사적 과제는 여전히 미완으로 남겨졌다.
동시에, 또 다른 구조적 변화가 느껴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1980년 이후 몇 년 동안 가속화된 탈농업화의 과정이다. 2차 세계 대전 종식 이후로 전 세계의 모든 곳에서 농촌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감소했는데, 이는 대부분 다양한 농업 개혁 프로그램으로 인해 농업의 생산성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일부 국가는 토지 개혁을 실시했고, 또 다른 국가는 자본 집약적인 녹색 혁명(Green Revolution)
[10] 기술을 도입했다.
[11] 그러나 20세기 말까지도 농업은 여전히 세계 인구의 대부분이 종사하는 직업이었는데, 특히 가난한 나라들의 막대한 인구들이 여기에 속해 있었다. 1970년에는 인도 인구의 80퍼센트와 인도네시아의 83퍼센트가 시골 지역에 살았다. 그러나 1970년대에 시작된 일련의 개혁들은 가난한 세계의 소지주와 농민들의 삶을 점점 더 힘들게 만들었다. 녹색 혁명 이후, 농업의 자본 집약도가 높아지면서 많은 사람이 인공 비료와 같은,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의 투입물이 필요해졌다. 이는 많은 영세 농업인에게 특히 큰 압박이 됐다. 비슷한 시기에 자국의 농업 경제가 세계 시장에 더욱 노출되면서 가난한 세계의 농업은 전문화의 방향으로 재구성됐다. 그 때문에 내수 위주의 자급 자족적이었던 국가 농업은 현금 작물(cash crop)의 우위를 강조하는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했다. 1980~2000년의 위기 기간에 국가 농업의 보조금과 관세가 철폐되며, 동남아프리카 및 아이티와 같은 지역에서 열악한 토지 관리로 인한 사막화와 토양 황폐화가 더욱 심화했다.
[12] 이러한 추세는 소규모 농부들에게 훨씬 더 커다란 압력을 가했다. 많은 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게 되면서, 인도의 농부들 사이에서는 마치 전염병처럼 자살이 이어졌다. 그렇지 않은 이들은 농업에서의 소득 감소를 메우기 위해 도시에서 계절형 일자리(seasonal job)를 구해야 했다. 그로 인한 궁극적인 결과는 탈농업화 과정의 가속화 및 도시 중심부로의 대규모 이주였다.
[13] 도시화의 속도는 놀라웠다. 1980년부터 2010년 사이에 동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의 도시 인구는 24퍼센트(7억 2000만 명), 남아시아는 9퍼센트(3억 명), 라틴 아메리카 및 카리브해 지역은 14퍼센트(2억 3000만 명), 중동 및 북아프리카는 13퍼센트(1억 5000만 명),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는 14퍼센트(2억 2500만 명)가 증가했다. 중국은 전 세계적 탈농업화에서 가장 크게 기여한 단일 국가지만, 같은 시기 전 세계적 도시화의 약 75퍼센트는 다른 지역에서 발생했다.
[14]
1970년 이후, 인구 급증과 농촌 이민자의 유입으로 인해 가난한 세계의 도시는 크게 성장했다. 라고스의 인구는 1970년 140만 명에서 2022년 1390만 명으로, 다카는 140만 명에서 2250만 명으로, 상파울루는 760만 명에서 2240만 명으로 늘었다. 그보다 규모가 작은 도시들도 빠르게 성장했다. 앙골라 북서부의 주도인 우이게(Uíge)의 인구는 1950년 3200명에서 72년에 거의 60만 명이 되었다. 나이지리아 남부의 우요(Uyo)의 인구는 5800명에서 120만 명 이상으로 늘었다.
[15] 그러나 이러한 증가 추세 대부분은 도심의 주변부에서 계속 커지는 슬럼 지대에 집중됐으며, 현재 그곳에는 수많은 빈곤층이 거주하고 있다. 불과 1제곱마일 내에 스톡홀름의 인구
[16]와 맞먹는 사람들을 수용하고 있는 뭄바이의 다라비(Dharavi), 카이로의 만시에트 나스르(Manshiet Nasr), 브라질의 파벨라(favela), 포르토프랭스의 악명 높은 시테 솔레이(Cité Soleil) 등은 “슬럼의 행성”의 몇몇 전초기지에 불과하다. 고(故)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는 2005년의 저작 《슬럼, 지구를 뒤덮다》에서 슬럼의 행성을 “인류의 거대한 비극”이라고 표현하며 암울한 진단을 내렸다.
[17]
이렇게 탈농업화와 탈산업화가 동시에 벌어지면서 가난한 세계의 경제에는 공백이 생겼다. 점차 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된 국가들은 계획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대응했다. 한쪽에서는 원자재 수출에 의존적인 경제가, 다른 한쪽에서는 저숙련 서비스 노동 위주의 경제가 만들어졌다.
산업과 농업이 모두 상대적으로 쇠퇴함에 따라, 많은 탈산업(postindustrial) 국가들은 원자재 수출로 돌아섰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중국의 도약으로 인해 글로벌 원자재에 대한 수요가 회복되기 시작한 이후에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브라질이 대표적인 사례다. 탈산업화를 거치면서 브라질의 수출 포트폴리오에서 자동차 부품이나 기계 장치, 전자 제품과 같은 고급 상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었다. 그 자리는 급증한 철과 석유 무역이 대체했다. 1995년에 철광석은 브라질 수출의 3.8퍼센트를 차지했고, 원유의 비중은 0.1퍼센트에 불과했지만, 2020년이 되자 그들은 각각 10.8퍼센트와 8.1퍼센트가 되었다. 산업 기계 수출은 7.1퍼센트에서 3퍼센트로 감소했다.
[18] 석유 지대(
oil rents)
[19]는 1970년 GDP 대비 0.1퍼센트에서 2008년 2.4퍼센트로 상승했고, 광물 지대(
mineral rents)도 0.5퍼센트에서 1.9퍼센트로 상승했다.
[20] 이러한 추세는 브라질 경제를 빠르게 탈복잡화했고, 채굴을 통한 지대 추구는 갈수록 중심이 돼가고 있다. 2000년에 브라질은 세계 26위의 경제적으로 복잡한 국가로 평가받으며 폴란드 및 멕시코에 근접했었다. 20년 뒤 그들은 60위로 떨어졌는데, 이는 키르기스스탄이나 북마케도니아보다도 낮은 순위다.
[21] 이와 동일한 탈복잡화, 수출을 다시 우위에 두는 경향은 우크라이나, 에콰도르, 아르헨티나, 몽골, 카자흐스탄과 같은 여타의 조기 탈산업화 국가에서도 나타났다.
2000~2015년의 원자재 슈퍼 사이클과 같은 호황기에는 이러한 채굴 모델이 엄청난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다. 중국의 성장 덕분에 에콰도르나 볼리비아, 브라질과 같은 라틴 아메리카의 자원 수출국들은 자원 채굴과 경제적 재분배를 결합한 (좌파 세력이 휩쓸던) “핑크 타이드(Pink Tide)” 정부들을 지원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빈곤을 줄이고 기초 인프라를 구축할 수도 있었다. 한편 러시아는 국가의 천연자원 부문의 호황으로 인하여 몇 년 동안 비교적 번영을 누렸으며, 2011년에는 국민의 기대 수명이 마침내 1988년 수2준을 넘어섰다. 나이지리아나 앙골라처럼 정부의 기능이 떨어지는 체제에서는 자원 수출로 벌어들인 수익이 부패한 지대 추구 엘리트들에게 거의 전부 흡수됐다. 그래서 나이지리아의 OPEC 일일 할당량인 180만 배럴 중에서 약 5분의 1이 매일 다양한 생산 단계에서 도난당했으며, 그렇게 나라 밖으로 빠져나갔다.
[22] 가장 극단적인 경우, 이러한 고질적인 자본 도피가 2010년대에 포르투갈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기괴한 장면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앙골라의 집권당은 표면적으로는 “앙골라 해방 인민 운동 MPLA”이라는 사회주의적인 명칭을 내걸고 있었고, (1975년에)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쟁취할 때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 당의
엘리트들은 당시 리스본의 호화 부동산을 사들여서 횡령한 자금을 세탁하기 시작했다.
[23]
2014~2015년에 중국의 성장이 둔화하고 미국의 셰일가스 개발로 인해 유가가 곤두박질치면서 원자재 사이클이 뒤바뀌자 채굴 모델은 취약한 것으로 입증됐고, 경제 위기는 전 세계적인 정치 불안의 물결로 이어졌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에콰도르에서는 채굴과 재분배 체제가 다른 것으로 대체됐고, 베네수엘라는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핑크 타이드 시대는 이렇게 혼란스러운 종말을 맞았다. 이라크나 나이지리아와 같은 조금 더 가난한 원자재 수출국에서는 심각한 예산 위기가 파괴적인 이슬람 반군과 맞서 싸울 있는 정부의 역량을 훼손시켰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원자재 추출에 기반을 둔 전략들은 글로벌 수요가 강력할 경우, 소득을 (또는 적어도 GDP 수치를) 늘릴 수 있었다. 그러나 2014년에서 2016년, 개발도상국들의 위기는 이어졌다. 그 후 몇 년 동안 지속된 빈곤을 감소시키려는 노력의 약화(예를 들어 브라질의 빈곤율은 2014년보다 2019년에 더 높았다)는 원자재 추출의 전략이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는 건실한 방법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했다.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