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촨푸, 운명을 개척하다
비야디의 창업자이자 현재 최고 경영자(CEO)인 왕촨푸는 1966년 안후이성(安徽省) 우웨이현(无为县)의 평범한 농민 가정에서 일곱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왕촨푸의 아버지는 목공 일로 가족을 부양했는데 왕촨푸가 13세가 되던 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홀로 남은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힘든 나날을 보낸다. 형편이 어려워지자 왕촨푸의 누나 다섯 명은 일찍이 출가했고, 왕촨푸의 형인 왕촨팡 역시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었다. 그러나 왕촨푸가 중학교 졸업을 앞둔 15세 때 어머니마저 숨을 거둔다. 혼란한 상황 속에 왕촨푸는 마지막 중학교 시험 중 두 과목에 결석했고 중등 전문학교에 신청할 기회를 놓친다. 1980년대 초 중국은 중등 전문학교만 가도 정부에서 일자리를 구할 기회가 많았으나 진학 실패로 기회의 문은 닫히고 말았다. 왕촨푸의 초년은 그야말로 암담함 그 자체였다.
형은 가족을 부양 중이었고 왕촨푸 역시 언제까지고 형과 형수에게 짐이 될 순 없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찾으려 했으나 오히려 형과 형수에게 쓸데없는 생각과 걱정은 하지 말고 공부에나 집중하라는 호통을 듣는다. 이들의 따뜻한 지원 덕분에 왕촨푸는 눈물을 닦고 공부에 매진해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다행히 왕촨푸는 형과 형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17세에 중국 정부에서 권위를 인정한 국가 중점 대학인 중난대학 야금물리학과에 입학한 것이다. 형과 형수는 그를 계속 보살피기 위해 학교 부근으로 집을 이사했다. 왕촨푸는 본격적으로 학업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바꿔 나가기 시작했다.
1987년에 중난대학을 졸업한 그는 베이징유색금속연구소 본원에서 석사를 거쳤다. 이미 대학교에서 배터리 관련된 물리 화학을 공부한 그는 대학원에서 본격적으로 배터리 연구에 들어간다. 연구 성과가 워낙 뛰어났던 탓에 그는 파격적으로 연구원 부주임으로 승진해 처장급의 대우를 받는다. 이때 왕촨푸의 나이는 고작 26세였다.
당시 왕촨푸의 꿈은 인류 기술 발전에 이바지하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로젝트 때문에 선전에 방문한 이후 그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선전에서 왕촨푸를 맞이한 것은 개혁 개방의 새로운 물결이었다. 그는 그 거대한 변화에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많은 사람이 다거다(大哥大·벽돌폰)로 통화를 하는 것에 놀랐다고 한다. 당시 그 거대한 휴대폰은 2~3만 위안에 달하는 고가품이었다. 거기엔 수천 위안의 배터리가 탑재됐다. 왕촨푸는 본능적으로 언젠가는 본인도 저 배터리 사업에 뛰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베이징유색금속연구소에서 일을 이어 가던 왕촨푸는 동 연구소에서 선전에 설립한 ‘비거(比格)’라는 중국 배터리 회사의 총경리 자리에 임명된다. 그곳에서 그는 1993년부터 2년간 근무하며 배터리 사업과 생산 및 제조의 실질적인 경험을 쌓았다. 그러던 1994년, 기회가 찾아왔다. 일본 기업이 각종 환경 오염 등의 문제로 니켈카드뮴 배터리를 감산, 심지어 생산을 중단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 것이다. 왕촨푸는 일본이 조만간 니켈카드뮴 배터리의 생산을 중단하면 분명히 배터리 공급 대란이 생길 것으로 예상했다. 이와 더불어 중국에서 휴대폰과 각종 전자 기기의 신속한 발전으로 배터리 분야가 향후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을 확신했다.
천재일우의 비즈니스 기회를 포착한 그는 자기가 근무 중이던 비거 배터리 회사에 니켈카드뮴 배터리 분야로 과감히 투자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비거는 베이징유색금속연구원과 연계된 국영 기업이었다. 국영 기업 특성상 신속한 결정이 이뤄질 리 없었다. 관련 신청이 계속 지연되고 비준받지 못하자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회사를 뛰쳐나왔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된 젊은이에게 창업 자금을 빌려주는 이는 없었다. 다행히 왕촨푸의 사촌 형인 뤼샹양(吕向阳)이 거금 250만 위안을 빌려줘 그는 20여 명의 임직원과 함께 선전 경제특구에 비야디실업(比亚迪实业)를 설립하고 배터리 공장을 세울 수 있었다. 왕촨푸의 배터리 신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왕촨푸의 청년 시절에서 기구함을 지워내면 말 그대로 배터리로 가득한 삶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배터리 관련 대학교를 졸업하고 배터리 관련 대학원을 다녔으며, 대학원에서 배터리 관련 부교수(동 대학원 최연소 부주임 역임)로서 학생들과 같이 배터리 연구를 했고, 대학원 자회사 격의 배터리 관련 회사를 운영하다가 자신이 직접 배터리 회사를 설립하고 그 회사를 중국 최고 배터리 회사 중 한 곳으로 키워 냈다. ‘배터리 인간’으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비야디의 배터리는 다르다
비야디가 배터리로 시작해 나중에 차량 제조로 사업 분야를 확장한 것은 결국 배터리에 대한 자신감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비야디 배터리의 핵심 경쟁력은 뭘까?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을 대표로 하는 한국계 배터리 제조사들은 ‘삼원계 배터리’를 쓴다. 삼원계는 니켈(Ni)·코발트(Co)·망간(Mn)으로 구성되어 NCM 배터리로도 불린다. 반면 중국 배터리 1위 기업인 CATL(宁德时代)과 비야디가 주력으로 내세우는 리튬인산철 배터리는 리튬(Li)·철(F)·인산(P)으로 구성돼 있다. LFP 배터리로도 불린다. 두 배터리는 전기차 시장의 표준이 되기 위해 경쟁해 왔다. 그간 NCM 방식이 지배적이었지만 2021년 CATL이 LFP 배터리를 테슬라 보급형 모델에 납품한 것에 이어 비야디도 테슬라와 배터리 납품 계약을 체결하며 변화가 감지됐다. 이후 포드, 폭스바겐, 애플도 연이어 LFP 배터리 채택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며 무게추가 기울기 시작했다.
프롤로그에서 언급했듯 LFP 배터리가 이미 NCM 배터리의 점유율을 추월했다는 통계에서 LFP 배터리는 이미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 LFP 배터리가 과거 업계의 예상처럼 시장에서 도태되기는커녕 오히려 글로벌 점유율이 높아지자 한국 배터리 3사도 LFP 관련된 개발에 나서고 있다.
LFP 배터리가 주목받은 가장 큰 이유는 원가 경쟁력과 원자재 조달의 용이성이다. LFP는 희귀 금속에 속하는 니켈, 코발트 대신 철을 사용하므로 안정적이고 저렴한 가격에 배터리를 만들 수 있다. 업계에서는 LFP 배터리가 삼원계 대비 원가가 약 30퍼센트 정도 낮은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 등 지정학적 리스크로 니켈과 코발트의 공급 문제가 일어나고 있어 LFP의 장점이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다.
2021년 선전에 소재한 비야디 본사에 업무차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비야디 전시관을 둘러보기 전에 비야디에서 자사의 홍보 영상을 보여 주는데, 그중에서 중점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비야디 배터리에 대한 안정성 테스트였다. 영상에선 배터리에 못을 박는 실험인 ‘네일 테스트(Nail Penetration Test)’가 나왔다. 삼원계 배터리는 표면 온도가 500도씨℃를 넘기면서 발화 및 폭발했지만, 비야디의 LFP 블레이드 배터리는 30~60도씨를 유지했다. 이처럼 LFP 배터리는 삼원계에 비해 열과 충격에 의한 폭발에 강하다는 것 역시 장점이다.
강점만 있는 건 아니다. 가격 경쟁력, 원자재 조달 및 안정성에서 앞서 있지만 LFP 배터리는 삼원계 배터리에 비해 에너지 밀도가 낮고, 배터리 수명이 짧으며 저온에서 성능 저하가 심하다. LFP 배터리의 에너지 효율은 삼원계의 약 60~80퍼센트 수준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고급형 차량보다는 중저가의 보급형 차량에 LFP 배터리가 장착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2020년 출시된 비야디의 전기차 ‘한(汉)’은 LFP 배터리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한에 최초로 탑재된 ‘블레이드(刀片) 배터리’는 칼날처럼 얇고 긴 배터리 셀로 구성됐는데, 안정성과 에너지 밀도, 크기 등 다양한 측면에서 당시 테슬라에 장착된 삼원계 배터리에 버금가는 스펙을 보여 줬다. 이 블레이드 배터리는 비야디의 다른 전기차에도 장착되며 비야디의 핵심 경쟁력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보통 전기차를 평가할 때 가장 많이 따지는 것은 최대 주행 거리다. 2023년 모델 기준 블레이드 배터리를 장착한 한은 최상위 트림 기준 715킬로미터(기본 트림은 506킬로미터)의 최대 주행 거리를 보여 주고 있다. 중국은 전기차의 최대 주행 거리 측정시 자체 기준인 CLTC(China Light-duty vehicle Test Cycle)을 사용한다. 이 측정 기준은 여타 국제 기준보다 최대 주행 거리가 후하게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동일한 기준으로 테슬라 2023년형 부분 변경된 모델3의 최대 주행 거리가 최상위 트림 기준 713킬로미터(기본 트림은 606킬로미터)로 측정됐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최상위 트림에서는 한의 주행 거리가 더 길게 나온 것이다. 비야디와 테슬라의 차량별 최대 주행 거리는 나중에 본격적으로 다룬다.
비야디는 어떻게 배터리를 혁신했나
비야디의 배터리는 무엇이 특별한 걸까? 전기차 배터리의 기본 상식부터 살펴보자. 스마트폰과 달리 무거운 차체를 굴려야 하는 전기차에는 엄청난 양의 전력이 필요하다. 스마트폰 배터리는 배터리 셀이 통상 하나인 반면 전기차에는 배터리 셀이 수백 개에서 많게는 수천 개까지 들어간다. 일반적으로 전기차 배터리는 셀(Cell), 모듈(Module), 팩(Pack)으로 이뤄져 있다.
배터리 셀을 기본 단위로 생각하면 이를 여러 개씩 묶고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모듈과 팩이라는 형태로 전기차에 싣는 것이다. 배터리 셀이 여러 개 묶인 게 모듈, 모듈을 여러 개 묶은 게 팩이라 보면 된다.
전기차 배터리의 기본 형태를 살펴본 이유는 비야디 배터리의 특징이 이 형태에 대한 접근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많은 배터리 전문 제조 기업은 주로 배터리 셀에 집중해 왔다. 셀의 양극재나 전해질을 어떤 물질로 넣을지, 또한 이 물질들은 어떤 비율로 넣어서 셀 자체의 성능을 높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연구하고 고민한 것이다.
그런데 왕촨푸가 이끄는 비야디는 달랐다. 이런 기초 연구에 기반한 배터리 성능 향상을 꾀하는 동시에 상대적으로 싸고 안정적인 LFP 배터리 셀을 어떻게 패키징하여 성능을 향상할지 함께 고민했다. 삼원계 배터리보다 태생적으로 낮은 에너지 효율로 인한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비야디가 내놓은 혁신 방안은 놀라웠다. 배터리 셀-모듈-팩으로 가는 3단계 과정에서 과감하게 모듈을 없애 버린 것이다. 얇은 셀을 묶어서 바로 셀-팩의 2단계 과정으로 단계를 축소했다. 이렇게 셀투팩(CTP·Cell To Pack) 기술을 적용하면 배터리가 공간을 덜 차지하고 늘어난 공간에 배터리를 추가 장착해 주행 거리를 최대한 늘릴 수 있다.
삼원계 배터리는 에너지 밀도 및 효율이 높은 대신 발화 및 물리적 충격에 대한 안정성이 상대적으로 낮아 셀을 모듈로 한 번 묶음으로써 일종의 방화벽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 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삼원계는 25~30도씨 정도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한 냉각 시스템이 탑재된다.
반면 LFP 배터리는 이미 그 자체로 온도 안정성이 뛰어나고 물리적 충격에 강하다. 비야디의 블레이드 배터리는 이 장점을 극대화한 형태다. 방화벽 역할을 해주는 냉각 시스템 및 충격 완화 장치를 비롯한 각종 모듈을 없애 버리고 그 대신 셀을 칼날처럼 길게 만든 후 배터리 셀들을 모아서 바로 패키징을 한 것이다. 이렇게 모듈화에 필요한 단계와 관련 부품을 생략해 버리니 공간 확보, 무게 감축, 원가 절감 세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전기차의 핵심 요소인 배터리의 부피, 무게 및 원가가 줄었으니 비야디 한의 스펙과 가격 경쟁력이 향상된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실제 비야디 한은 21~30만 위안(3875~5536만 원)으로 다른 전기차보다 저렴한 편이다.
2020년 셀투팩 기술로 세계를 놀라게 한 비야디는 2년 후인 2022년 5월 새로운 양산차 모델 하이바오(海豹·바다표범)을 공개했는데 여기에는 셀투팩 기술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셀투바디(CTB·Cell to Body) 기술이 적용됐다. 배터리 뚜껑을 차체 바닥으로 활용하여 구조를 간소화하고 이를 통해 공간 활용도와 에너지 밀도를 각각 66퍼센트, 10퍼센트 향상했다. 하이바오의 고성능 모델의 경우 제로백 3.8초로 테슬라 모델3의 상위 트림인 롱레인지의 제로백 4.4초보다 빠르다. 최대 주행 거리도 700킬로미터로 모델3의 롱레인지의 713킬로미터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는다. 배터리 자체의 혁신을 뛰어넘어서 차량과 어떤 식으로 결합하는 것이 가장 좋을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가 속속 나오는 것이다.
비야디, 니오, 링파오(零跑)를 비롯한 중국 기업뿐 아니라 테슬라, 폭스바겐, 볼보, 포드 등 완성차 기업과 CATL 등 배터리 기업도 차체와 배터리의 일체화를 통한 기술개발 경쟁에 일찌감치 돌입했다. 이 기술은 셀투바디, 셀투섀시(CTC·Cell to Chassis), 셀투비클(CTV·Cell to Vehicle) 등 기업에 따라 다르게 불린다.
배터리와 차체의 결합 기술 개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건 완성차 기업과 배터리 기업 간의 주도권 경쟁이다. 그런데 비야디는 차량과 배터리 기술 양측을 다 가지고 있다 보니 아무래도 이 분야에서 조금 더 우위를 점할 가능성이 있다. 테슬라 등 다른 전기차 기업들이 자체 배터리 기술을 이미 보유했거나 새로이 갖추려는 이유기도 하다.
배터리에 미쳐 있던 배터리 인간 왕촨푸가 지금까지 이끌었던 비야디 배터리의 혁신 과정은 이렇다. 왕촨푸는 전형적인 CTO형 CEO로서 비야디의 배터리 연구 개발 방향에는 그의 배터리에 대한 고민과 경영 철학이 녹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