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코닉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이었다. 20세기 건축의 명작은 워낙 유명하기도 했지만 압도하는 조형성은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었다. 디자인은 보조적인 도구가 아니었고 건축은 그 자체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가의 작품은 너무나 멋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범접할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듯 고고했다.
10여 년의 시간이 지나 영국의 옛 공업 도시에서 아이코닉한 건축들을 만났다. 여왕이 사는 고전적인 나라에 자리 잡은 특이한 현대적인 건축들은 모두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다. 화려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미래를 향해 일어서겠다는 일종의 선언으로 읽혔다. 쇠락한 공업 지역에서 패셔너블한 쇼핑의 도시로, 문화적 영감을 주는 환상적인 장소로 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화려한 외관으로 발신하고 있는 강렬한 이미지는 미래로 가는 길의 선봉에서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는 것 같았다. 물론 관광지로서의 성패는 장담할 수 없다. 주목받을 수도 있고, 처참하게 잊힐 수도 있다. 그럼에도 아이코닉 건축은 해당 지역이, 장소가 꿈꾸는 이상적 미래를 그려 내는 상징으로 남는다.
아이코닉 건축이 활발하게 등장하고 있는 영국의 대표적인 사례들을 소개한다. 소개될 일곱 개 사례는 1997년 이후의 건축으로 뉴스 및 관련 도서 등에서 빌바오 효과를 목적으로 건립된 것으로 소개되고 있는 건축들이다.
강력하고도 현대적인 웨일스의 것; 웨일스 밀레니엄 센터
유나이티드 킹덤(United Kingdom)이라는 국가명에서 알 수 있듯 영국은 네 개의 나라로 구성되어 있다. 영국인들은 구성국들을 홈 네이션스(home nations)라고 부르는데, 잉글랜드(왕국), 스코틀랜드(왕국), 웨일스(공국), 북아일랜드(지방)로 나뉜다. 이 중 웨일스는 1272년 영국에 함락되어 웨일스 공(prince of wales)의 지위를 에드워드 2세에게 넘겨주면서 잉글랜드 왕실에 종속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웨일스 지방은 특유의 지역색을 이어 오고 있다. 웨일스에서 웨일스어(Welsh)는 영어와 함께 공용어로 쓰인다. 영어를 쓰는 웨일스인들도 독특한 지역 발음을 사용하고 있어서 표준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을 정도다. 웨일스의 수도는 카디프(Cardiff)로 런던에서는 기차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동쪽에 있다. 카디프의 베이(bay) 지역은 지리적인 이점으로 항구가 자리 잡고 있으며 석탄 산업 및 광업이 번창했다. 하지만 굴뚝 산업이 쇠락하면서 한적하고 낙후된 곳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987년 영국 정부의 재개발 계획으로 방파제와 주택, 업무 시설이 건립되고, 공원과 함께 친수 공간이 조성되면서 카디프항을 다시 세계의 지도에 올린다는 목표하에 마케팅 및 이미지 개선 사업이 진행됐다. 결과적으로 고용이 증가하고 인구가 늘어나 도시가 활성화됐다.[1]
웨일스 밀레니엄 센터(Wales Millenium Centre)는 이러한 지역 재개발의 일환으로 2009년 건립된 종합 공연장이다. 웨일스 국립 발레단의 본거지이며, 뮤지컬, 연극, 각종 이벤트가 연중 열린다. 영국의 공상 과학 드라마인 〈닥터 후(Doctor Who)〉의 촬영지로 유명해졌다.
웨일스 밀레니엄 센터의 디자인은 전략적으로 웨일스 문화를 강화하는 새로운 이미지였다. ‘세계적으로 훌륭하며 필연적으로 웨일스의 것(Unmistakably Welsh and internationally outstanding)’이라는 비전 아래 국제 공모를 진행했지만 당선된 스타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디자인은 예산 초과와 웨일스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제되었다. 대신 지역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건축가 조너선 애덤스(Jonathan Adams)를 통해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었다. 웨일스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한 이미지는 도시 재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2]
애덤스는 강력한 웨일스 민족 정체성이 깃든 건축을 목표로, 유년의 기억 속 해안 절벽을 형상화하고, 산업 구조 변화로 버려진 웨일스의 슬레이트 조각 수만 개를 재료로 활용했다. 지붕은 웨일스의 철강 산업을 상징하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마감하고, 내장재는 지역에서 생산된 유리와 나무를 썼다. 애덤스와 같이 웨일스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웨일스인들에게는 추억을 떠올리며 아버지 세대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애착의 요소들이다. 웅장한 외관 파사드에는 웨일스어 캘리그래피로 ‘이 돌에서 지평선이 노래한다’는 문장과 ‘영감의 용광로로부터 마치 유리처럼 진실을 창조해 내다’라는 문장이 새겨져 독특한 경관을 만든다.[3] 파사드에는 밤이면 조명이 들어와 아름다움을 더한다. 이 지역을 찾는 관광객들은 이곳이 웨일스임을 다시 상기할 것이며 웨일스인들은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웨일스 밀레니엄 센터는 웨일스의 강력한 지역 문화를 기반으로 건립되었다. 전통문화를 외관에 아이코닉하게 표현하면서도 기존에 부재했던 새로운 문화적 기능을 더했다. 카디프 베이를 방문하는 사람이면 가장 먼저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건립되어 웨일스 전통이 현대적으로 리뉴얼된 문화적 메시지를 전 세계에 발신하고 있다.
이 풍경에서만 가능한 디자인; 자이언트 코즈웨이 방문자 센터
웨일스 밀레니엄 센터가 강력한 민족의 문화를 바탕으로 건축되었다면 자이언트 코즈웨이 방문자 센터(Giant Causeway visitor centre)는 강력한 자연 유산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자이언트 코즈웨이는 북아일랜드 지방의 용암 해안 지대로 세계문화 유산이며 북아일랜드의 수도인 벨파스트에서 97킬로미터 떨어진 앤트림 고원(Antrim Plateau)과 해안 절벽의 기슭에 위치해 있다. 약 4만여 개의 원주(column)가 바다로부터 튀어나와 육각형의 주상절리를 형성해 전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특이한 지형이다. ‘거인의 뚝방길’이라는 뜻으로 아일랜드에 살고 있는 거인이 스코틀랜드에 살고 있는 거인의 도전을 받아 길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2000년에는 자이언트 코즈웨이의 방문자 센터가 화재로 소실되어 새로운 방문자 센터의 건립이 추진되었다. 새로운 방문자 센터는 헤네건 펭 건축 사무소(Heneghan Peng Architects)가 2012년에 건립했다. 유리, 벽, 현무암 기둥을 사용했고, 자이언트 코즈웨이의 육각형 모양 용암 화산 지형을 이미지로 차용해 지역에 조응하도록 디자인되었다. 건축가는 ‘풍경 속의 두 주름’이라고 건축을 표현하며 신중하게 자연에 개입해 세계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가리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아이코닉한 이미지를 완성했다. 방문자 센터는 기존의 자연 환경을 관람하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벼랑 쪽에서는 보이지 않고 육지 쪽에서만 보인다. 외관은 ‘핀 맥쿨(Finn McCool)’과 ‘베난도너(Benandonner)’라는 이름의 두 거인이 만들었다는 전설의 전투를 은유해 절제된 현대미로 표현하고 있다. 방문자들은 경관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면서도 보는 각도에 따라 시선 위로 떠오르는 건축을 창조적이라고 느낄 것이다. 잔디가 깔린 건축의 지붕은 자연스럽게 주변과 같은 높이의 언덕이 되어 360도 조망이 가능하다. 내부에서는 거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와 프레젠테이션을 감상할 수 있다.
새로운 방문자 센터는 개장 후 이전보다 30퍼센트 이상 증가한 연 60만 명이 넘는 방문자를 수용하고 있다.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지역 주민 150명과 자원봉사자 30명의 고용을 창출하고 있다. 방문자 센터는 영국 언론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에서 선정한 영국의 현대적 랜드마크 중 하나로 소개되기도 했다. 심사 위원인 영국 왕립 건축가 협회RIBA 스테판 호더Stephen Hodder 회장은 “방문자 센터가 경관과 사람 사이의 뛰어난 중재자로서 원래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하면서, “이곳이 아니면 안 되는 건축을 완성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4] 자연 유산의 지역성을 최대한 반영했기 때문에 아이콘이 되었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다크 투어리즘; 타이태닉 벨파스트
불행했던 사고를 관광으로 승화시킨 사례가 있다. 유명한 타이태닉호의 출항지에 건립된 타이태닉 벨파스트(Titanic Belfast)다. 영국 북아일랜드의 수도인 벨파스트 내 타이태닉 쿼터에 위치한 이 박물관은 지역의 스토리텔링을 완성한다. 옛 조선소가 위치했던 타이태닉 쿼터(Titanic Quarter)는 타이태닉호가 만들어지고 운항을 시작한 곳이다. 첫 항해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배 중 하나였던 타이태닉호는 화이트 스타라인이 운영한 영국의 북대서양 횡단 여객선으로 1912년 첫 운항 중 빙산 충돌로 침몰했고, 1541명이 사망했다. 비극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 침몰의 긴박감을 각색한 영화 〈타이타닉〉이 개봉해 세계 흥행 1위를 기록했다. 전 세계적인 영화의 성공에 힘입어 벨파스트시는 관광업의 부흥을 목적으로 타이태닉호와 관련한 아이코닉 건축을 건립하기로 한다.
2012년 문을 연 타이태닉호 박물관인 타이태닉 벨파스트는 매년 30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명소가 되었다. 2016년에는 ‘월드 트래블 어워즈(World Travel Awards)’의 세계 최고의 관광 명소로 선정됐다. 타이태닉 벨파스트는 타이태닉 쿼터 재생 산업의 출발점이었으나 지역을 넘어서 북아일랜드의 관광에 일조하고 있다.[5]
타이태닉 벨파스트의 디자인은 에릭 쿤 건축 사무소(Eric Kuhne and Associate)에서 설계했다. 기하학적인 구조물로 타이태닉호의 뱃머리와 건조 회사인 화이트 스타의 로고를 모티브로 했다. 얼음 조각을 떠올리게 하는 날카롭게 솟은 외관은 자연스럽게 타이태닉호의 침몰 원인이 된 빙하를 연상시킨다. 외피는 3000개의 은도금 알루미늄 조각으로 덮여 있다.[6] 박물관은 타이태닉호의 건조부터 침몰까지의 스토리를 다룬다. 타이태닉호의 옛 모습 그대로인 호화로운 식당과 거대한 계단 구조물이 만들어져 있다. 불행했던 대형 사고를 관광 상품으로 만든 것은 지역과의 깊은 연관성이었다. 건축이 여기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관광객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타이태닉 벨파스트는 지역의 가장 강력한 스토리인 타이태닉호의 침몰을 이미지화해 ‘다크 투어리즘’의 요소로서 아이코닉 건축을 완성한 사례다.
스토리텔링 장소 브랜딩; 터너 컨템퍼러리
터너 컨템퍼러리(Turner Contemporary)는 쇠퇴한 영국의 작은 해변 휴양지에 스타 건축가가 설계한 갤러리로 지역의 부흥을 꾀한 사례다. 영국 켄트(Kent) 지방의 마게이트(Margate) 지역은 런던에서 가까운 이점으로 오랫동안 해변의 휴양지였지만, 최근까지는 쇠퇴한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와 마을의 연관성에서 영감을 얻어 미술관 터너 컨템퍼러리를 건립해 지역 재생에 성공했다.[7] 영국을 대표하는 화가인 터너는 건축가의 어시스턴트로 직업을 시작해 14세에 왕립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20대에 이미 명성을 얻은 천재였다. 그는 일생 동안 풍경화를 그렸는데, 아름다운 영국 곳곳의 풍경을 그린 작품의 환상적인 빛과 색채로 독자적인 화풍을 만들었다. 터너는 마게이트에서 학교를 다녔고, 주기적으로 이곳을 방문하면서 바닷가의 게스트하우스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는 바다가 모든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터너 컨템퍼러리는 이러한 스토리를 건축에 담았다. 건축은 화가가 자주 방문한 게스트하우스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터너 컨템퍼러리를 찾는 관람객은 터너가 사랑했던 그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 건축가는 대영제국 훈장CBE을 받은 데이비드 치퍼필드(David Chpperfield)다. 서울 용산의 아모레퍼시픽 사옥 내·외관을 디자인한 것으로도 유명한 치퍼필드의 건축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문화와 역사의 맥락에 맞는 절제미를 보여 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뾰족한 지붕, 불투명한 유리로 된 파사드의 외관은 6개의 동일한 크리스털 라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빛은 터너의 그림에서도, 건축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다. 터너 컨템퍼러리는 채광창을 통해 걸러지는 자연 채광을 극대화하고 있다. 관람객은 현대 미술을 관람하면서 동시에 계절마다 변하는 마게이트의 풍광을 조망할 수 있다.
터너 컨템퍼러리는 마게이트 도시 재생의 중심이다. 개관 이후 200만 명이 방문해 4100만 파운드(622억 원)의 경제 효과를 창출했다. 10년 동안 문을 닫았던 빈티지 놀이 공원인 드림랜드(Dreamland)가 다시 문을 열 정도로 방문객이 늘었다. 레스토랑과 호텔 등 35개의 새로운 상점이 문을 열었고 투자를 받았다. 도시민의 자부심은 높아졌다. 특히 런던의 높은 임대료와 제한된 공간 문제를 해소하면서도 런던과 가깝다는 이점이 있어 많은 예술가들이 이주하는 예술의 허브가 되었다.[8] 마게이트는 170년 전의 화가와의 인연을 건축으로 풀어내 지역의 아이콘을 만들고 장소 브랜딩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