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와 징후
변화: 팹리스들의 팹리스, ARM이 퀄컴에 라이선스 취소를 선언했다.
징후: AI가 새로운 시대를 정의하려면 새로운 하드웨어가 필요하다. 일반 사용자가 어떤 성능의 AI를 누릴 수 있게 될지, 반도체 패권 경쟁에서 판가름 난다.
‘윈텔(Window+Intel)’ 시대의 종말과 ARM의 부상
한때는 인텔의 시대였다. ‘윈텔(Window+Intel)’의 시대였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 시대는 끝났다. 아이폰의 등장 때문이었다. 컴퓨팅 자원을 쓰기 위해 무조건 책상 앞에 앉아 데스크탑 컴퓨터를 켜고 윈도우가 실행되기를 기다려야 했던 시대는 끝났다. 모바일이 개인의 컴퓨팅 자원 활용 방식을 완전히 바꿨다. 이걸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ARM’ 아키텍처다. 아이폰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ARM 아키텍처를 활용한 칩셋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CPU는 계산하는 기계다. 쉽게 말해 최첨단 계산기다. 계산 방법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구구단을 미리 외워 3X4=12라고 단번에 답할 수도 있지만, 3X4+3+3+3+3=12라고 쉽게 풀어 계산할 수도 있다. 이런 계산 방법에 해당하는 것이 아키텍처다. 현재 두 종류의 아키텍처가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 X86: 인텔과 AMD가 생산한다. 비유하자면, 대학 수학 문제도 쉽고 간단하게 풀어낸다. 대신, 초등학생 수준의 수학 문제도 미적분으로 푼다. 고성능 게임이나 복잡한 작업에 적합하다. 복잡하게 계산하니 전기도 많이 쓴다. 윈도우 PC 대부분에 장착되어 있다.
- ARM: 퀄컴, 삼성전자, 브로드컴, 미디어텍은 물론 애플도 ARM 아키텍처 기반으로 CPU를 생산한다. 소프트뱅크의 비전펀드가 투자한 영국의 팹리스 회사, ‘ARM’이 만든다. 초등학생 수준의 수학 문제는 초등학생 수준으로 푼다. 반면, 대학 수학은 쉬운 계산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방식으로 풀어낸다. 그래서 전기를 적게 쓴다. GPU나 NPU 등을 붙여 칩셋(Chpi Set)으로 설계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모바일 기기 대부분에 장착되어 있다.
문제는 모바일 기기의 급속한 보급으로 PC 시장, 특히 노트북 시장이 쪼그라들고 있다는 점이다. 몇 년 된 구형 노트북으로도 필요한 업무는 충분히 할 수 있다. 넷플릭스나 인스타그램 같은 개인 미디어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으로 본다. 2년에 한 번은 바꿔야 할 것 같다. 인텔은 어려워지고 ARM은 성장하는 이유다.
AI PC 시대, 좋은 CPU의 조건
그런데 기회가 왔다. 생성형 AI가 등장했고, 이걸 업무에 적용하니 생산성이 향상된다. AI를 잘 돌릴 수 있는 새로운 PC의 수요가 생겨났다. 사실, 팬데믹 시기를 제외하고 전 세계 PC 출하량은 2011년 이후 꾸준히 감소해 왔다. 이 추세를 반전시킬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한 것이다. 아직까지 ‘윈텔’의 아성은 공고하다. 적어도 PC 시장에서는 X86과 ARM의 시장 점유율이 9:1 수준이다. 당연한 결과다. 윈도우는 아주 오랫동안 X86 아키텍처와 한 몸으로 발전해 왔다.
그런데 이 시장을 ARM 진영도 넘보고 있다. 가장 먼저 성공한 것은 애플이다. 애플이 내놓고 있는 맥북 시리즈에는 M 시리즈 칩셋이 탑재되어 있다. ARM 아키텍처 기반으로 애플이 설계해 냈다. 전력 소모량은 낮고 성능은 뛰어나다. 칩셋을 자체적으로 설계해 Mac OS와의 상생을 맞춰 최적화했다. 다음 도전자는 퀄컴이다. 올해 출시된 ‘갤럭시북 4 Edge’, ‘에이서 Swift 14 AI’ 등에 ARM 아키텍처 기반으로 설계한 ‘스냅드래곤 X Elite’ 칩셋이 적용되었다. 운영체제는 윈도우다. ‘암도우(ARM+Window)’로 불린다.
물론 ‘암도우’ PC는 한계가 있다. CPU의 계산 방법에 해당하는 아키텍처는, 일종의 ‘언어’라고도 볼 수 있다. 이탈리아어로 쓰인 책을 한국인이 당장 읽으려면 방법은 두 가지다. 책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팔거나 한국인이 번역기를 돌려서 읽거나. 마찬가지다. X86이라는 언어로 짜인 각종 프로그램을 ARM 기반 PC에서 돌리려면 이에 맞게 프로그램이 호환성을 확보했거나, 번역기 에뮬레이터를 이용해 돌려야 한다. 그러나 이런 사정은 모두 퀄컴과 마이크로소프트, 프로그램 제작 기업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다. 결론적으로 스냅드래곤 X Elite가 탑재된 암도우 PC들은,
쓸만하다.
ARM이 퀄컴을 막아 세운 이유
AI PC의 조건은 무엇일까. 전성비다. 단순 연산을 수없이 반복해야 하는 생성형 AI의 특성상, 전력 관리, 발열 관리가 체감 성능으로 이어진다. ARM 아키텍처가 AI PC 시대에 더 유망한 까닭이다. 시장 조사 업체 가트너는 전 세계 AI PC 출하량 성장세를 예측하며, ARM 아키텍처 기반 AI 랩톱이 X86 기반의 점유율을 앞지르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 X86과 ARM의 노트북 점유율이 9:1 수준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판이 뒤집히는 수준의 변화다. 퀄컴은 여기에 다 걸었다. 그 결과가 스냅드래곤 X Elite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됐다. 현지 시각 지난 23일, ARM이 퀄컴 측에 라이선스 사용 중지를 통보한 것이다.
ARM이라는 회사는 ‘팹리스들의 팹리스’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퀄컴도, 애플도 직접 칩셋을 제조하지 않는다. TSMC와 삼성전자 같은 파운드리 업체에서 공장을 돌려 제조한다. 퀄컴과 애플은 칩셋을 설계할 뿐이다. 그런데 설계할 때 기본 도면을 ARM에서 사 온다. 기본 도면의 종류는 두 가지다.
- TLA(Technology License Agreement): 쉽게 말해, 전자레인지에 데우기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는 반조리 식품이다. 몇 분 데울지, 소금을 더 넣을지, 어떤 그릇에 담을지 등을 내 취향과 상황에 맞게 조정하면 된다. ARM이 스마트폰용, 서버용, 모뎀용 등 각 용도에 맞게 설계한 코어를 라이선스받아 최종 칩셋을 설계하는 방식이다.
- ALA(Architecture License Agreement): 요리 재료와 기본 레시피만 제공하는 밀키트다. 구성과 조리 방법을 내 상황에 맞게 ‘자체 설계’할 수 있다. 애플이 이 방식으로 아이폰용 A시리즈, 맥북용 M 시리즈 칩셋을 설계했다. 퀄컴도 이 방식으로 스냅드래곤 X Elite 시리즈와 스냅드래곤 8 Elite를 만들었다.
퀄컴은 그동안 TLA 방식으로 칩셋을 만들어왔다.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ALA 방식으로 칩셋을 만들 수 있었을까. 비밀은 지난 2021년에 인수한 ‘누비아(Nuvia)’라는 스타트업에 있다. 누비아는 애플 출신들이 ARM 기반의 서버용 칩셋을 개발하겠다며 설립한 회사다. ALA 방식으로 ARM과 계약해 코드명 ‘피닉스(Phoenix)’라는 CPU를 개발하는 데에 성공했다. 퀄컴은 이 기술을 활용해 오라이온(Oryon) CPU를 개발했다. 이를 두고 ARM이 소송을 제기했다. 누비아에 ALA 방식으로 제공한 라이선스를 퀄컴이 활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퀄컴은 버텼다. 결국 ARM이 퀄컴에 부여한 라이선스를 취소하기에 이르렀다.
사유
우리는 아직 새로운 시대를 정의할 하드웨어가 무엇인지 모른다. AI 스마트폰일지, AI PC일지, 아니면 새로운 AI 에이전트 기기일지 말이다. 다만, 이 시대를 지배할 하드웨어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이 시대에 꼭 맞는 두뇌가, 칩셋이 필요하다. 인텔은 그 패권을 잃어버렸다. X86 진영과 ARM 진영의 다툼은 인텔과 ARM의 전쟁이 아니다. 다음 시대를 정의할 새로운 기술을 정의하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