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재 전쟁
1화

프롤로그: 제재 전쟁이 온다

2020년 미국 대선이 끝났을 때만 해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등장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대선 직후 폭도들은 미국 의사당을 점령했고, 워싱턴에는 야간 통행금지까지 선포됐다. 이 모든 책임은 트럼프에 돌아갔다. 사실상 정치적 사망 선고로 여겨졌다. 그사이 수많은 구설과 검찰 수사가 뒤따랐다. 그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4년 만에 다시 백악관의 주인이 됐다.

이는 단순히 미국의 정권 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초강대국 미국의 근원적 변화를 의미한다. 2차 세계 대전 후 계속돼 온 거추장스러운 ‘세계 경찰’ 역할을 벗고, ‘미국에,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새로운 질서를 만들겠다는 말이다.

《조선일보》 워싱턴 특파원으로 2016년 12월부터 2021년 2월까지 1기 트럼프 행정부 4년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당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MAGA)’라는 트럼프의 슬로건은 오로지 미국만의 이익을 따지겠다는 신앙 고백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미국을 구하라(Save America)’라는 구호로 돌아왔다.

미국 안에 그만큼 기존 질서를 탈피하려는 ‘변화에 대한 욕망’이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제 미국의 강력한 ‘변화에 대한 욕망’이 어디로 튈지에 따라 한국과 세계의 방향이 정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속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말이 아니라 행동에 주목해야 한다. 그의 쇼맨십에 휘둘리면 본질을 읽지 못한다. 그래서 이 책을 썼다. 세계 경찰을 그만두려는 미국은 도대체 무엇으로 패권을 유지하려 할 것인가.

2017년 3월 미국 상원 군사위원장이자 공화당 거물인 존 매케인 상원의원을 인터뷰했다. 세상은 취임한 지 두 달 남짓한 트럼프 대통령의 돌발 트윗과 갑작스러운 장관 대행 해고 등 예상치 못한 행동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였다.

앞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도대체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를 묻기 위한 자리였다. 인터뷰 말미에 매케인 의원은 손을 따뜻하게 두드리며 “트럼프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라”며 “트럼프의 진심은 행동에 있다”고 했다. 트럼프의 말이나 쇼에 휘둘리지 말고 미국 정부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란 말이었다. 보좌진이 “다음 일정이 있어요. 빨리 끝내야 해요”라고 했지만, 그는 손에 꼼꼼하게 적은 메모를 들고 기자에게 계속 말을 했다. 노회한 정치인이 한국 정부에 하는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이후 4년간 책상 위에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라’는 글을 붙여 놓았다. 말에 휘둘리면 본질을 잃기 때문이다.

그해 말 미국 워싱턴 D.C.의 한 모임 자리였다. 모임에 참석했던 한국계 미국 변호사에게 “트럼프의 관세 폭탄 때문에 일거리가 엄청 많을 거 같아요”라고 했더니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아니에요. 관세나 덤핑이 문제가 아니라 수출 통제(export control) 일거리가 훨씬 더 많아요. 이제 수출 통제가 메인이에요”라고 했다.

“수출 통제? 그게 뭐예요?”라는 반문에 그 미국 변호사는 답답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거 있잖아요. 제재(sanction)하고, 중국이나 이런 데 수출해서는 안 되는 물건들 골라내는 거요. 그런 걸 수출 통제라고 해요”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로펌에선 이미 관세보다 수출 통제가 훨씬 더 큰 일거리예요”라는 것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어느 날은 중국과 무역 전쟁을 선포했고, 다른 날은 북한 김정은을 겨냥해 트위터에 ‘(핵무기) 장전 완료’라고 써서 올리는 좌충우돌 행보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트럼프의 ‘말폭탄’ 속에서 미국의 실제 전장은 조용히 ‘제재’와 ‘수출 통제’로 이동하고 있었다. 트럼프는 “힘을 통한 평화”라는 말로 대외적으로 군사적 근육을 과시했지만, 실제 전투는 제재와 수출 통제를 통해 이뤄지고 있었다. 물밑에 흐르는 새로운 거대한 조류를 처음 본 순간이었다.

제재라는 거대한 조류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8년간 약 2350건의 제재를 했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제재는 4년간 3900여 건에 달했다. 그런데 조 바이든 행정부에선 6000건 넘는 제재를 했다. 전 세계 국가 3분의 1에 미국의 제재 대상이 있을 정도다.

미국이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이 제재와 수출 통제로 바뀐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과도 연관이 된다. 바로 초강대국 미국이 ‘전쟁에 지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택한 것이 ‘피 흘리지 않는 전쟁’, 바로 제재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1기 내내 “미국은 세계 경찰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는 피곤한 삶과 전쟁에 지친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처음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겠다”고 했을 때, 미국의 주류 외교 안보 학자들은 “미친 짓”이라고 했지만, 결국 정권이 바뀌고 조 바이든 대통령 때 완전 철군을 했다. 아프가니스탄은 다시 탈레반에 정권이 넘어갔지만, 미국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과거 미국은 에너지 안보를 위해서라도 중동 등 전 세계 무역로에 개입할 필요가 있었다. 원유의 젖줄인 중동을 안정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미국은 셰일 혁명으로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많은 원유를 생산하고, 천연가스는 너무 많이 나와 불태우는 상황까지 와버렸다. 미국은 나 홀로 있어도 부족하지 않은 국가가 됐다. 여기에 AI와 바이오 등에서 후발 주자와의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미국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끊임없이 전쟁에 말려들거나 전쟁을 주도했다. 1, 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 전사자는 52만 명이었다. 6·25 전쟁에서는 3만 8000명이 또 죽었다. 이후 베트남에서 5만 명이 죽었다. 2000년 이후에도 7000명의 군인이 죽었고, 같은 기간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PTSD)로 3000명의 군인이 자살했다. 미군은 지금도 매일매일 세계 어디선가 죽고 있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군은 전선 근처도 가지 않았다. 단지 러시아에 대한 대규모 제재 패키지를 발표하고 돈과 무기만 보냈을 뿐이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승전국 중심으로 구축된 질서를 뿌리부터 흔들었다. 중국과 러시아의 이탈로 유엔 안보리가 제 기능을 못 하면서 유엔 체제는 사실상 무너졌다. 미국은 이제 ‘내 편’을 챙겨서 끌고 나가려 할 것이고, 반대로 ‘네 편’과는 점점 멀어질 것이다. 다시 냉전 시기처럼 전 세계의 블록화가 진행될 수밖에 없다.

제재와 수출 통제는 미국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이다. 미국의 수출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5퍼센트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고부가 가치 상품이 대부분이라 제재 대상 국가로 직접 수출되는 경우는 적다. 또한 미국은 세계 최대의 수입국이라 세계 각국의 기업들이 미국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미국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달러’다. 세계 무역에서 달러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40~50퍼센트에 달한다. 나머지 3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유로화 결제도 미국 금융망을 통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결국 미국이 가운데서 돈줄을 잡고 있으면 누구도 마음대로 거래할 수 없다. 미국은 자기 피를 흘리지 않고도 상대를 말려 죽이는 전법을 쓸 수 있다.

전 세계 기업들은 너무 복잡해진 수출 통제와 제재 프로그램에 비명을 지르고 있다. 네덜란드의 농협 격인 라보은행은 연간 제재와 자금 세탁 방지 비용으로만 1조 5000억 원 가까운 돈을 쓰고, 영국의 핀테크 기업 레볼루트는 제재와 자금 세탁 방지 인력이 전체 직원의 3분의 1에 달한다.

한국이 조용한 것은 제재 위반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직 제대로 이슈가 되지 않고 있어서다. 제재 대상과의 거래로 계좌가 동결되거나 물품 대금을 못 받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외교관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제재를 받을 뻔한 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동맹’을 고려해 미국이 ‘봐준’ 경우도 많았다.

한국 정부와 여론은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한국이 줄타기를 통해 이익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러한 줄타기를 통한 이익 극대화가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현실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아닌 척’, ‘모르는 척’, ‘순진한 척’하는 전략이 언제까지 작동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을 썼다. 전 세계에 일어나는 제재 현실을 알려 주는 책은 아직 한국에 없다. 워싱턴에서부터 7년간 수집한 자료와 최근 6개월 동안 외신과 해외 보고서를 검토하며 자료를 모았다. 생크션랩(SanctionLab)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뉴스와 정보 제공도 시작했다. 미국은 제재에 걸려도 회사 내에 제재 규정 준수 프로그램(Sanction Compliance Program·SCP)이 있으면 벌금을 깎아 주고 경고만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은행과 글로벌 대기업을 제외하면 제재 규정 준수 프로그램의 존재조차 모른다. 이런 간단한 사실상의 ‘보험’조차 국내 기업들은 알지 못한다. 위기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한국은 눈을 더 크게 뜨고 세상의 변화를 바라봐야 한다. 현재 한국 내에서는 반도체 패권 전쟁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반도체는 글로벌 제재 전쟁의 일부일 뿐이다. 이 책에서 반도체 관련 내용을 최소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도체뿐만 아니라 자동차, AI, 바이오, 암호화폐, 핀테크, 소셜 미디어, 패션, 심지어 수산물까지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규제의 물결이 몰려오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많은 사례는 국내 주요 언론에 소개되지 않은 것들이다.

워싱턴 D.C.에는 사야리(Sayari)라는 금융 정보 분석 회사가 있다. 2017년 《뉴욕타임스》는 사야리를 인용해 북한과 연간 100만 달러 이상 거래하는 중국 기업이 300곳이 넘는다고 보도했다. 북한의 무역을 손금 보듯 분석한 사야리는 워싱턴 D.C.의 차이나타운에 있는 허름한 건물에 입주해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이런 정보를 알 수 있을까. 실제 만나 본 사야리 대표는 “우리는 전 세계에 공개된 모든 정보를 긁어 와서 분석하고, 그물망처럼 정보를 엮는다”며 “지금까지 아무도 이런 데이터를 모아 볼 생각을 안 했을 뿐”이라고 했다. 사야리는 이렇게 전 세계 6억 개의 기업과 6억 8000만 명의 정보를 긁어모아 연결했다.

미국은 이제 버튼만 누르면 전 세계 무역망의 실핏줄까지 다 알 수 있다. 미국에는 저런 정보 업체가 사야리만 있는 게 아니다. 만약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거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유럽으로 확대되거나, 중동의 혼란이 걷잡을 수 없게 되면, 미국은 그동안 감춰 왔던 버튼을 눌러 무역망의 실핏줄까지 정밀 타격할 수 있다.

지정학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되고 있다. 냉전 이후 끝난 줄 알았던 정치 우위의 시대가 다시 돌아왔다. 기술만큼이나 정치와 안보가 경제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새로운 키워드가 됐다. 이미 해외 테크 뉴스의 중심은 기술이 아니라 제재와 규제가됐다.

이러한 제재는 산업 전반으로 급속히 확산할 수 있다. 패션 부문에선 어느 지역에서 생산된 옷감을 사용하는지가 중요한 문제가 됐다. 위구르족 탄압으로 전방위 제재를 받는 중국 신장 위구르 지역이 세계 면화 생산의 5분의 1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한강의 기적’은 우리의 근면뿐 아니라, 냉전 시기 지정학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한 결과이기도 했다. 세계 3차 대전은 사라예보의 총성 같은 무력 충돌이 아니라, 세기를 넘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제재 전쟁’의 형태가 될 가능성이 크다. 제재 전쟁의 먹구름이 전 세계를 감싸고 있다.

이 책을 사랑하는 부모님과 아내와 아이들에 바친다. 글로벌 제재 컨설팅, 정보 매체라는 비전에 함께해 준 생크션랩 동지들에게는 성장으로 보답하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면에서 부족한 나를 지금껏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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