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현대 와인 제조자들이 지금껏 상품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해주었던 제조 방법을 포기해야 한다는 얘기다.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특정 지역의 와인은 언제나 특정한 맛이 나야 한다고, 또 와인 제조자는 마치 지휘자처럼 청중이 기대하는 음을 연주할 때까지 와인의 다양한 요소를 적극적으로 부각시키거나 억제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주류 와인 문화의 기대를 버려야 한다. “상세르는 상세르다운 맛이 나야 합니다. 품질은 그 다음 문제죠.” 영국 멤버십 와인 클럽 67 폴 몰(Pall Mall)의 로난 세이번(Ronan Sayburn) 마스터 소믈리에는 말한다.
여전히 와인 업계의 문화적·상업적 중심지인 프랑스에서 수용 가능한 와인 제조 방식은 단순히 역사와 관습의 문제가 아니라 법제화되어 있다. 특정 지역에서 생산한 와인임을 표시하려면 사용 가능한 포도 품종과 생산 기법, 생산된 와인에서 나는 맛에 관한 엄격한 지침을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 이때 조사관과 블라인드 테이스팅 패널이 AOC(Appellation d’Origine Contrôlée, 원산지 명칭 통제) 또는 PDO(Protected Designation of Origin, 원산지 명칭 보호)라고 하는 인증 절차를 진행한다.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와인에는 ‘뱅 드 프랑스(Vin de France)’라는 라벨이 붙는다. 이는 낮은 품질의 와인임을 가리키는 일반 명칭으로
[2] 구매자 입장에서는 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일부 내추럴 와인 제조자는 이 인증법에 반기를 들어 왔다. 해당 법이 와인을 망가뜨리고 있는 지배적인 제조 방식과 방법에 오히려 힘을 실어 주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내추럴 와인을 만드는 올리비에 꾸장(Olivier Cousin)은 2003년에 지역 AOC를 탈퇴하기로 했다. 그는 내게 보낸 편지에서 AOC 기준을 충족하려면 포도밭에 기계를 들이고 이산화황과 효소, 이스트를 첨가하고 살균 및 필터링 작업까지 해야 한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그는 자신이 만든 와인의 산지명 ‘앙주(Anjou)’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사용하다 원산지 표시 위반으로 기소되기도 했다. 그러자 꾸장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법정 계단까지 짐수레 말을 타고 가서는 문제가 된 자신의 와인을 행인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는 와인 라벨을 바꿔야 했다.
아버지로부터 포도밭 몇 곳을 물려받은 밥티스트(Olivier Baptiste)는 ‘AOC는 거짓말쟁이들’이라며 “애초 소규모 생산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원산지 표시가 오히려 와인의 질만 떨어뜨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더 이상 나쁜 빈티지는 없다
특정 지역의 와인에서 어떤 맛이 나야 하는지에 대한 기대감은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그 기대감을 바탕으로 세워진 전 세계 와인 산업은 대체로 지난 세기의 산물이다. 만약 내추럴 와인이 무언가에 대한 반발이라면, 와인 제조의 전통적인 방식을 시장의 규모와 수요에 맞출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한 반발일 것이다. 경제적 성공과 함께, 세계화는 와인 산업을 활기 없고 대중 영합주의적인 순응으로 서서히 몰아가고 있다.
프랑스는 오랜 세월 동안 와인 산업의 중심이었지만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포도밭은 소규모였고 수작업 의존도가 높았다. 내추럴 와인 제조자들이 보기에 와인 업계의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수십 년이 지난 뒤였다. 프랑스의 포도밭이 현대화되고 와인 산업이 글로벌 경제의 거대 산업으로 성장한 시기다. 환멸을 느낀 내추럴 와인 제조자들 입장에서 보면 와인 산업의 기술적·경제적 성공담은 어쩌다 와인이 길을 잃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만 해도 프랑스 내의 트랙터 수는 3만 5000대에 불과했다. 이후 20년 동안 그 수가 백만 대 이상 늘어났고, 미국산 농약과 화학 비료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양조학자들은 과학의 힘을 빌려 와인의 질을 향상시켰다. 특히 두 양조학자 에밀 뻬노(Emile Peynaud)와 파스칼 리베로-가용(Pascal Ribéreau-Gayon)은 부단한 연구를 통해 양조학의 학문적 정통성을 최초로 확립했고 실험실과 양조 현장 사이에 가교를 놓았다. 뻬노는 “지금까지 우리는 그저 우연히 훌륭한 와인을 만들었다”고 단언했다. 앞으로는 더욱 철저하게 와인을 만들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뻬노는 와인 제조 방식의 표준화에 기여했다. 그의 업적 가운데 가장 단순하면서도 위대한 것은 와인 제조자들이 더 나은 품질의 포도를 수확하고 더 위생적인 설비를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그 외에도 산성도pH, 당도, 알코올 농도 등에 대한 시험을 개척하여 대중화했다. 이는 와인 제조에 예전에는 없던 과학적 명확성을 가져다주었다.
와인 제조 방식의 현대화는 엄청난 성공을 가져왔다. 1970년대 말 프랑스 와인의 총 수출액은 10억 달러였다. 불과 20년 전에 비해 10배 가까이 늘어난 데다, 경쟁국인 이탈리아와 스페인, 포르투갈의 와인 수출액을 전부 합친 것보다 많은 금액이다. 와인 시장이 커지자 다른 나라들도 앞다투어 프랑스 모델을 모방했다. 프랑스 출신 기술자들과 컨설턴트들은 전 세계의 신규 와이너리에 고용되어 양조학과 전통 프랑스 양조 방식을 전수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컨설턴트 미셸 롤랑(Michel Rolland)은 한때 전 세계 100여 곳의 고객과 일하기도 했다.
와인 생산에 뛰어드는 나라가 늘어나면서 모두 프랑스 방식대로 와인을 제조했다. 프랑스 와인의 왕이라 불리는 보르도 지역의 품종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과 메를로(Merlot)는 칠레에서 캐나다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새로운 포도밭에서 경작되었다. 수익과 명성 측면에서 프랑스의 뒤를 이어 큰 격차로 세계 2위 자리를 지켜 온 이탈리아조차 토스카나 지역에서 재배한 프랑스 전통 품종으로 보르도식 와인을 만들었고, 국제 와인 경연 대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했다.
1980년대 이후, 묵직한 맛과 약간의 단맛, 높은 알코올 도수가 특징인 보르도식 와인은 프랑스 컨설턴트의 도움으로 계속해서 전 세계 와인 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보르도식 와인은 새로운 세대의 비평가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중 한 명이 바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로버트 파커다. 자칭 ‘소비자 권익 옹호론자’인 그는 미국 메릴랜드의 자택 사무실에서 해마다 1만 병의 와인을 시음하는데, 그의 추천에 따라 와인 제조자의 한 해 성패가 좌우되기도 한다[영국의 와인 비평가 휴 존슨(Hugh Johnson)은 전 세계 와인 업계의 성쇠를 좌지우지해 온 로버트 파커를 가리켜 ‘제국적 패권주의’에서 탄생한 ‘미각의 독재자’라 평했다].
파커와 동료 비평가들이 높이 평가한 종류의 와인은 국제주의 스타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표현에는 경멸의 느낌이 섞여 있다. 특색 없는 국제주의로 인해 와인의 종류와 산지 사이의 연결 고리가 끊어졌다는 느낌 말이다. 사실 이 같은 비판은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한 가지 예로 1970년대 이후 이탈리아 토착 품종의 경작 면적은 절반으로 감소하고 프랑스 전통 품종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1990년대 초 프랑스의 연간 와인 수출 규모는 40억 달러를 상회했는데, 이는 여전히 이탈리아보다 두 배 이상, 미국과 호주, 남미 전역 등의 신규 경쟁국에 비하면 10배 이상 많은 금액이다. 또한 제조 방식 측면에서도 모두가 여전히 프랑스 방식을 따랐다. 오늘날 미국이나 영국에서 판매하는 가장 저렴한 레드 와인을 보더라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프랑스 와인의 우위를 확인할 수 있다. 훈연한 나무 칩을 와인에 띄워 프랑스산 오크통의 바닐라와 스파이스 향이 나도록 하고, 설탕과 자주색 착색제를 섞어 양질의 보르도 와인이 지닌 부드러운 단맛과 짙은 색깔을 흉내 냈을 가능성이 높다.
1990년대 들어 보르도의 와인 제조자 브루노 프라(Bruno Prats)가 한 것으로 알려진 말은 주요 와인 매체에 거듭 실렸고, 마치 신성한 주문이라도 되는 양 와인 투자자들 사이에 회자되었다. “더 이상 나쁜 빈티지는 없다”는 발언이었다. 경작 및 양조 기술의 발전이 자연을 거의 정복했다는 의미다. 2000년, 지금은 고인이 된 와인 저널리스트 프랭크 프라이얼(Frank J. Prial)은 《뉴욕타임스》에 다음과 같이 기고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전 세계 와인 제조자들은 셀러와 포도밭에서 더 이상 빈티지 차트(연도별로 와인 제조에 적합한 해였는지 아닌지를 고려하여 비평가가 작성한 기록)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냉전 종식으로 일부 사람들이 10년이나 일찍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 것처럼 인류가 와인의 종착지에 도달한 듯했다.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내추럴 와인의 기초
와인 산업이 기술을 받아들인 덕분에 와인은 그 어느 때보다 생산량이 늘어났고 수익성도 개선되었으며 앞날을 예측하기 쉬워졌다. 하지만 1980년대에 프랑스 와인이 글로벌 시장 장악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을 때 와인 제조자들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후에 내추럴 와인으로 알려지게 된 것의 청사진은 부르고뉴 지방 남단에 위치한 보졸레 지역에서 나왔다. 1950년대 보졸레 지역에서는 신속하게 생산되어 시즌 초에 출시되고 저렴한 가격에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와인 ‘보졸레 누보(Beaujolais Nouveau)’를 만들기 시작했다. 보졸레 누보는 큰 인기를 누렸다. 게다가 1970년대 말 즈음에는 대략 뉴욕시 크기와 맞먹는 보졸레 지역에서 해마다 1억 리터 이상의 와인이 생산되었고, 호주와 캘리포니아주의 와인을 합친 것보다 많은 양이 수출되었다.
하지만 상업적으로 거둔 성공에도 불구하고 보졸레는 기술적인 와인 제조가 도를 넘은 비참한 사례로 남았다. 《뉴욕타임스》는 와인 제조자들이 권고 수확량을 두 배로 늘리기 위해 포도나무를 ‘몰아붙이는’ 방법(faire pisser la vigne, 포도나무가 마치 오줌을 싸듯 많은 양의 포도즙을 만들게 하는 과정)을 사용했다며 비난했다. 단기간 내에 보졸레 누보를 생산하기 위해 와인 제조자들은 실험실에서 배양한 이스트로 발효 과정을 시작하고 대량의 유황으로 발효를 중단시키는 방식으로 일정을 앞당겨 와인을 안정화시켰다.
보졸레 지역의 소규모 반대자들은 이 같은 컨베이어벨트식의 와인 생산을 혐오했다. 이들은 마르셀 라삐에르(Marcel Lapierre)라는 와인 제조자를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했다. 라삐에르는 2010년 사망 후 ‘내추럴 와인의 교황’으로 널리 칭송받은 인물이다. 그의 동료들에 의하면 라삐에르는 화학 물질이 보졸레 와인의 맛을 망쳐 놨고 동시대인들이 엄청난 속도로 질 낮은 와인을 생산함으로써 “스스로의 미래를 저당 잡혔다”고 비판했다고 한다. 그는 시장의 수요와 보졸레 AOC의 제약이 와인 제조를 옥죄고 있다고 느꼈다.
라삐에르는 명확한 혁명 노선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급진주의자였다. 또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기 드보르(Guy Debord)와 상황주의 시인 알리스 베커-호(Alice Becker-Ho)의 친구이기도 했다. “우리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고 다른 와인을 내놓고 싶었어요. 우리 자신을 존중하는 와인, 그리고 마시는 사람을 존중하는 와인 말이죠”라고 라삐에르의 조카이자 와인 제조자인 필립 파칼레가 말했다.
그들은 예상 밖의 출처에서 나온 이단적인 아이디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80년 라삐에르는 부유한 지역 와인상 쥘 쇼베(Jules Chauvet)를 만났다. 당시 70대의 쥘 쇼베는 수년간 일체의 첨가물 없이 소량으로 와인을 만들어 왔다. 화학을 전공하고 발효에 관하여 폭넓게 논문을 저술해 온 그는 건강하고 다양한 야생 이스트를 같은 포도밭에서 채취하여 사용할 때 가장 복잡하면서도 바람직한 와인의 부케(bouquet, 와인의 발효와 숙성 과정에서 생기는 향)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산화황은 강력한 항균제이기 때문에 쇼베는 이산화황을 비롯한 기타 첨가제가 이스트의 활동을 방해하는 ‘독’이 된다고 논문에서 밝혔다.
와인 제조에 있어서 쇼베가 정한 원칙은 발효 및 화학 물질 배제에 대한 그의 집착에서 나왔다. 첫째, 야생 이스트를 채취할 수 있도록 무농약 농법으로 포도를 건강하게 재배해야 한다. 둘째, 와인 제조는 느린 속도로, 매우 신중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방부제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썩은 포도가 조금이라도 포함되어 있거나 비위생적인 설비를 사용했을 경우 전체 양조 과정이 실패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파칼레는 “쇼베가 우리에게 이러한 원칙과 과학적 근거를 알려 주었다”고 말하며 쇼베의 기법을 ‘내추럴 와인의 기초’라고 묘사했다.
이 모든 것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였을지는 두말할 것도 없다. 1980년대에 유황을 사용하지 않고 와인을 제조하는 것은 마치 로프 없이 산을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정부는 19세기 이후로 유황의 사용을 장려하고 법률로 규정했고, 현대 양조학자들도 유황 없이 와인을 만들기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유황을 사용하면 발효 과정을 통제하고 박테리아에 의한 부패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황은 한마디로 와인 업계의 페니실린이라 할 만한 만병통치약이었다.
유황을 일체 사용하지 않고 괜찮은 와인을 만들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지만 라삐에르와 동료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라삐에르의 일기에는 작황이 좋지 않았던 해와 빈티지 전체를 뿌옇고 신맛이 도드라지게 만든 변덕스러운 이스트, 그리고 거의 15년간의 실험 기록이 담겨 있다(쇼베는 1989년 사망했다). 결국 그는 1992년 즈음에 이르러 ‘인위적인 개입을 줄인’ 양질의 와인을 일관되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불가능한 일을 해낼 수 있음을 입증했지만 라삐에르와 동료들이 거둔 성공은 낯선 것이었다. 그들은 마치 지리적·문화적 주류에서 완전히 벗어난 채 이목을 끄는 밴드 같았다. 지역 주민들의 눈에 비친 그들은 괴짜였다. 와인 저널리스트 팀 앳킨(Tim Atkin)은 푸드 매거진 《사뵈르(Saveur)》에 기고한 글에서 “등 뒤에서 그들을 비웃는 이웃들이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라삐에르와 동료 내추럴 와인 제조자들에게도 파리와 해외에 비록 적지만 열성적인 추종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을 대신해 기꺼이 내추럴 와인을 전파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1990년대에 처음 내추럴 와인을 시음했을 때 제 몸이 떠오르는 줄 알았습니다. 세상에! 쇼베의 영혼이 살아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2010년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와인 수입업자 커밋 린치(Kermit Lynch)가 밝혔다. 일본인들도 초기에 내추럴 와인으로 전향한 열성적인 추종자들이었으며 ‘최초의 큰손 고객’이었다고 올리비에 꾸장은 말했다. “그들은 훌륭한 미각을 가지고 있었고 씀씀이도 컸다”고 덧붙였다.
유황을 사용하지 않고 와인 제조를 시도한 사람은 라삐에르만이 아니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전역의 수많은 와인 제조자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헌신과 와인 제조자로서의 능력, 쇼베의 와인 제조 과정에 대한 과학적 검증이 맞물리면서 반향이 일어났다. 오랜 기간 남모르게 기울여 온 라삐에르의 노력은 다른 수많은 와인 제조자들의 지지로 마침내 그 정당성이 입증되었다. 그들은 라삐에르의 프로토타입을 발판 삼아 그들만의 내추럴 와인 운동을 시작했고, 관습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와인 산업의 ‘문 앞의 야만인’이 되었다.
완벽함의 대안
1990년대 내추럴 와인이 보졸레 지역을 벗어나 프랑스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자 재미있게도 반현대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상당수 와인 제조자들은 하이퍼 로컬리즘(철저한 지역주의)을 수용하여 유행과는 거리가 먼 토착 품종을 심고 오래전 생산 기법을 도입했다. 루아르 밸리에 기반을 둔 한 단체는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을 관통하는 신비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은 거의 한 세기 전에 오스트리아의 오컬트 철학자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가 창안했다(슈타이너는 논란의 대상인 대안 학교 발도로프 학교의 창립자이다). 이 농법은 포도밭의 생물 다양성을 증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소뿔과 내장을 땅에 묻어 우주 안테나로 사용하는데, 슈타이너에 따르면 “생명을 주는 것이나 별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우주로 되돌려 보내 준다”고 한다.
오랜 기간 내추럴 와인은 인기 없는 하위 장르로 남을 운명인 듯했다. 하지만 2000년대 말부터 변화의 바람이 불었고, 브루클린과 이스트 런던, 코펜하겐과 스톡홀름의 번화가에 있는 레스토랑 메뉴에 내추럴 와인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종류의 와인은 더욱 폭넓고 새로운 기호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내추럴’이나 ‘장인’처럼 모호한 용어는 세련됨의 대명사가 되었다. 소비자들은 직접 키운 식자재로 요리하는 팜투테이블(farm-to-table)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재활용 목재로 만든 가구나 인더스트리얼 가구로 집을 꾸미고 싶어 한다. 한때 프랑스 동부의 괴짜 와인 제조자 집단의 열정에 불과했던 내추럴 와인이 어쩌다 보니 쿨해진 것이다.
런던의 와인 전문가들은 2010년 즈음부터 내추럴 와인에 주목하기 시작했지만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내추럴 와인은 정의가 매우 모호하기 때문에 곤혹스러웠습니다. 정말 잘 만든 내추럴 와인도 있지만 기포가 빠지고 거품이 일고 악취가 나는 와인, 한마디로 끔찍한 와인을 만날 수도 있죠.” 67 폴 몰의 로난 세이번은 말했다. 와인 매체는 내추럴 와인을 마치 지뢰밭이라도 되는 양 표현하곤 했다. 형편없이 질이 떨어지는 와인들 중에서 극히 일부만 안전한 선택인 것처럼 말이다. 《텔레그래프(The Telegraph)》의 와인 비평가 빅토리아 무어(Victoria Moore)는 ‘내추럴 와인 박람회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라는 제목의 2011년 기사를 통해 “단순히 와인에서 다른 맛이 나거나 예상치 못한 맛이라는 이유로 좋은 와인일 거라 생각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영국 와인 수입사 레이번 파인 와인(Raeburn Fine Wines)의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상당수 와인 전문가들과 기고가들은 애초부터 내추럴 와인을 업신여겼습니다. 일반 와인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한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