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사회학자, 외교관이었던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한(Daniel Patrick Moynihan)과 철학자이자 법학자였던 로널드 드워킨(Ronald Dworking) 등 수많은 사상가들이 소수 집단 우대 정책에 대해 고심해 왔다. 그러나 1971년에 쓰인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진보적 자유주의 저작은 인종에 대해 침묵했다. 존 롤스의 《정의론》의 핵심 사상은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이다. 이 베일을 쓰고 각자의 재능, 계급, 성, 그리고 인종에 대해 모르는 상태의 사람들이 공평한 사회의 설계에 대해 사고해 보자는 것이다. 자의적인 요소들을 떼어 내면 사람들은 정의의 원칙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비평가들이 논평했듯 실제 세계가 어떻게 불의에 의해 황폐화되었는지를 고려하지 않고 완벽하게 정의로운 사회의 모습을 그려 내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뉴욕시립대의 찰스 밀스(Charles Mills) 교수는 이론화된 자유주의가 “사회적 억압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케임브리지의 롤스 안내서(Cambridge Companion to Rawls)》는 2002년에 출간된 약 600쪽의 책으로 인종을 다룬 챕터나 섹션이 전혀 없다. 밀스는 “학계에서 벌어지는 주요 논쟁에서는 인종주의와 반인종주의 간 투쟁의 근대 세계사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제외했다”고 썼다.
시민권 투쟁 시대의 성과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위한 지속적인 진전으로 이어지지 못하면서 자유주의에 대한 불만이 싹텄다. 이에 가장 먼저 응답한 이들 중 하나가 1970년대의 하버드대 법학자 데릭 벨(Derrick Bell)이었다. 노예제 폐지주의자이자 노예 출신이었던 프레드릭 더글라스, 사회학자 두 보이스(W.E.B. Du Bois)와 같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통찰과 프랑스 탈근대주의를 융합한 “비판 인종 이론(Critical race theory)”이 탄생한 것이다.
비판 인종 이론은 먼저 미국 흑인들의 물질적인 조건들, 그리고 그들이 법정에서 공평한 재판의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를 개발하는데 집중했다. 그중 하나는 법학자이자 시민권 운동가인 킴벌리 크렌쇼(Kimberlé Crenshaw)가 1991년 출간한 중요한 논문에서 정립된 “교차성(intersectionality)” 개념이다. 크렌쇼는 고용 차별 재판에서 흑인 여성이 고용주가 흑인 남성이나 백인 여성에 대해서는 차별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입증하는 것으로는 패소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보편적인 것으로 상정되어 왔던 자유주의 법 체계가 여성이며 흑인이라는 특수한 교차 지점을 이해하는 데 실패한다는 것이다.
크렌쇼의 논문이 발표된 후 30년간, 비판 인종 이론은 교육학, 정치학, 젠더 연구, 역사 등 다양한 학계로 퍼지며 융성했다. 기업의 인사과에서는 이 이론에 등장하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백인 특권(white privilege)”이나 “무의식적 편향(unconscious bias)”에 대한 암시는 일반적이다. JP모건체이스, 화이자, 월마트 등 1000개가 넘는 기업의 CEO들은 반인종주의 연대에 동참해 직원을 대상으로 한 무의식적 편향 개선 교육을 약속했다(이러한 프로그램의 효과를 보여 주는 증거는 제한적이다). 저널리즘의 목적이 “객관성”이 아니라 “도덕적 명확성”이라는 주장도 비판 인종 이론의 영향을 받았다.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
그러나 비판 인종 이론이 성장함에 따라, 담론과 권력에 대한 집중이 현실적인 고려를 대체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로 인해 이론은 비자유주의적으로, 심지어 혁명적으로 변했다.
비판 인종 이론을 하나의 이론으로 결합시키는 철학적인 구조는 불명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이브람 X. 켄디(Ibram X. Kendi)의 《반인종주의자 되기(How To Be An Antiracist)》나 로빈 디안젤로(Robin DiAngelo)의 《백인성의 유약함(White Fragility)》등의 베스트셀러 도서로 간결하게 정리되고 있다.
이런 대중서 성격의 정리 작업에는 자유주의의 사회적, 도덕적 진보 방법에 대한 경멸이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단어들이 어떻게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인종주의”는 상대의 피부색을 바탕으로 한 편견이 아니다. 켄디에 따르면 인종은 “근본적으로 권력 정체성”이며 인종주의는 백인을 가장 강력한 집단으로 유지시키는 사회적, 제도적 체계다. 디안젤로가 설명하듯, 그래서 “백인 우월주의”는 스킨헤드족이나 KKK(Ku Klux Klan) 등과 결부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내 백인의 중심성, 우월성과 연결된다.
어떤 행위에는 생소한 종류의 중요성이 있다. 누군가와 대화하는 일은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발언은 중립적일 수 없기 때문에 발화자의 정체성이 중요하다. 발언은 나쁘거나(백인 우월주의를 주창하여 오늘날의 인종 차별적 제도를 옹호하게 되는 것), 좋거나(억압의 피해자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밀거나 백인 권력을 전복하는 것) 둘 중 하나다. 비판이라고 불리는 전복의 기술은 발언의 의미를 분석하여 그것이 어떻게 “문제적”인지, 인종 차별적인지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발언은 또 다른 의미에서도 생소하게 이해된다. 화자가 무엇을 말할 때, 중요한 것은 화자의 의도가 아니라 청자가 파악하는 의미다. 특권을 가진 인간은 그 시각에서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백인은 그들이 미치는 해악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반면, 억압당한 이들은 그들 자신의 곤경과 압제자의 세계관에 대한 통찰을 모두 가질 수 있다. 디안젤로는 “백인성이 하나의 입장이라는 말은 백인 정체성의 중요한 점 하나가 자신을 인종 바깥에 있는, 인종과 무관한 ‘단지 인간’인 하나의 개인으로 본다는 의미”라고 썼다.
흑인들도 인종 차별에 관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만약 두 명의 흑인이 한 백인의 발언을 다르게 듣고 그가 인종 차별주의자인지에 대해 다른 의견을 보인다면 어떨까? 비판 인종 이론가들은 사회에 다양한 억압의 형태가 존재할 수 있다고 지적할 것이다. 법학자인 안젤라 해리스(Angela Harris)는 1990년에 당시의 페미니즘이 마치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의 경험이 같은 것처럼 다루고 있다는 점을 비판했다. 이성애자 남성인 청자는 인종을 제외한 구조 내에서 지배적인 집단에 속한다. 억압에서 벗어나는 길은 집단 정체성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인정하고 힘을 실어 주는 것에 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사회 내에서 인종 차별이 지속되는 진정한 원인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은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육받아야 한다. 켄디는 “인종주의의 생명은 부인으로 유지되며, 반인종주의는 고백으로 지속된다”고 썼다.
이런 생각들에는 혁명적인 함의가 있다. 우선 인종주의가 사회 전반에 깔려 있다는 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진보에 대해 비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데릭 벨은 개혁이 백인의 기득권과 부합할 때만 일어난다고 결론 내렸다. 1991년에 그는 “우리가 성공적이라고 칭송하는 엄청난 노력들조차도 일시적인 ‘진보의 봉우리’에 불과할 것이다. 이 짧은 승리는 사회가 백인의 지배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적응하게 되면서 무의미해질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두 번째 함의는 좋은 의도를 가진 백인들도 흔히 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색맹’인 백인들은 사회의 구조적인 인종 차별을 부정한다. 디안젤로는 “인종 차별에 대한 백인의 도덕적 반감은 그들 자신이 차별에 공조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고 지적한다. 순응주의자(Integrationist, 흑인 문화와 사회가 백인 사회와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를 일컫는 켄디의 용어)들은 인종주의와 싸우기 위해 필요한 흑인의 정체성을 앗아가 버린다. 켄디는 순응주의가 “흑인 문화를 린치”한다고 비난한다.
이것이 자유주의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헬렌 플럭로즈(Helen Pluckrose)와 제임스 린제이(James Lindsay)가 공동 집필한 책 《냉소적인 사상들》은 두 사상 체계(비판 인종 이론과 자유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이유는 저자들이 하나의 “사상”으로 명명하는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그리고 장애에 대한 탈근대주의 사고는 집단 정체성을 강조하고 개인을 무력화한다는 점이다. 억압을 끝내기 위해서는 정체성 연합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다른 이유는 고착화한 기득권을 밀어낼 수 있는 것은 권력이라는 사상가들의 믿음이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강조는 약자가 승리하지 못하게 만들거나, 승리하더라도 지배적인 집단의 대체에 그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증거, 논쟁, 그리고 법의 지배를 통해 강자에 대항하는 약자를 무장시킨다. 세 번째 논리는 이 사상이 자유주의적 진보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지속적인 토론을 통한 개인의 평등 보장이라는 메커니즘이 없다면, 진보는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쉬운 답은 없다
대안은 무엇인가? 비판 인종 이론(또는 적어도 대중서에서 정리한 사상)의 매력은 부분적으로는 이 이론이 불의와 싸우기 위한 방안들을 자신 있게 제안한다는 것이다. 조력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론은 어느 정도 면죄부를 부여한다. 백인이 결코 인종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반인종주의의 대의에 몸과 마음을 바칠 수는 있다.
자유주의에는 이와 같이 단순한 해답이 없다. 옥스퍼드 대학의 마이클 프리든(Michael Freeden)은 자유주의자들이 항상 권력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접근 방식에 문제를 느껴 왔다고 지적한다. 자유주의에서는 (개인이 아닌) 집단이 정당한 정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비판 인종 이론에 대한 자유주의의 응답은 보수적인 무관심, 또는 완전한 부정으로 보일 수도 있다.
자신을 비판 인종 이론가이며 자유주의자로 여기는 하버드대 토미 셸비(Tommie Shelby)는 인종 불평등을 시정할 수 있는 자유주의의 역량에 대한 회의론은 “자유주의가 경제 정의에 대한 평등주의적 헌신과 양립할 수 없다는 잘못된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셸비는 롤스의 정의론의 “공정한 기회 균등(fair equality of opportunity)” 원칙은 인종적으로 정의로운 사회로의 큰 진전을 이루는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고용 관행과 같은 공적 절차에서 차별을 배제하도록 보장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동일한 재능을 갖추고 유사한 노력을 하는 이들이 비슷한 삶의 전망을 갖고 궁극적으로는 과거 인종 차별의 유산을 근절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 거대한 프로그램은 주거 분리를 억제하고 학교를 더 평등하게 만들며 세금을 공제해 주는 정책과 관련된다. 또 다른 자유주의자이자 비판 인종 이론가인 밀스에게는 이것도 충분하지 않다. 밀스는 자유주의자들이 “교정적 정의”를 정립하기를 바란다. 이는 인종적 위계의 유산과 차별적 구조를 인식할 수 있는 또 다른 버전의 ‘무지의 베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자유주의자들은 과거의 잘못들에 대한 보상을 용인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실패에 대한 계산을 요구하게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