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할 수 있고, 누구든 당할 수 있다
2018년 1월 새벽, 미국 프로 농구(NBA) 밀워키 벅스의 유망주 스털링 브라운(Sterling Brown)은 편의점 앞 장애인 지정 주차 구역에 불법 주차를 했다. 브라운의 차를 발견한 경찰관은 편의점에서 나오는 그에게 접근했다. 키가 2미터에 가까운 젊은 흑인 남성인 브라운을 보자, 경찰은 곧바로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가 주머니에 손을 넣자, 다섯 명의 경찰관이 달려들어 그를 바닥에 패대기친 후 테이저건(전기충격기)을 발사했다. 브라운은 체포돼 경찰서로 끌려갔으나, 벌금 200달러짜리 불법 주차 외에는 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져 뒤늦게 풀려났다.
브라운은 이름이 많이 알려진 슈퍼스타는 아니지만, 미국인에게는 선망의 대상인 NBA 선수다. 스카우터들이 고등학생인 그의 경기를 보러 일리노이(Illinois)주로 찾아왔고, 프로 입단과 동시에 백만 불이 넘는 연봉 계약서에 사인했다. 미국 경찰관의 평균 연봉은 6만 7600달러(7485만 원)다.[1]돈이나 사회적 지위로만 본다면 브라운 쪽이 강자다. 하지만 피부색으로는 아니었다. 그는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경찰에게 폭행당하는 차별의 피해자가 됐다.[2]
차별은 강자로 여겨지는 사람을 피해자로 만들기도 하지만, 약자로 여겨지는 사람을 가해자로 만들기도 한다. 2020년 1월, 트랜스젠더 학생이 숙명여대 법과대학에 합격했다. 이에 일부 극단적 페미니즘 단체들은 입학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쏟아진 증오 발언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당사자는 결국 입학을 포기했다.[3] 여성은 사회적 약자이다. 하지만 숙명여대 입학 반대 운동을 주도한 학생들은 지금까지 태생적 여성만이 점유해 온 여대라는 공간에 진입하려는 트랜스젠더 학생과 비교해 본인들이 상대적 강자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들은 가부장적 기득권이 수많은 여성을 억압하듯, 본인들의 기득권을 이용해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만으로 한 개인을 평가했고, 결국 교문에 발도 들이지 못하도록 쫓아내는 차별의 가해자가 됐다.
차별은 강자 집단이 약자 집단에 가해하는 현상이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이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차별이라고 하면 남성이 여성에게, 이성애자가 동성애자에게, 한국인이 다른 인종에게 가해하는 것처럼 틀에 박힌 모습들만을 상상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정해진 강자와 약자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사회적 강자로서의 특성과 약자로서의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인간관계나 상황에 따라 언제든 차별의 가해자가 될 수 있고, 또 피해자도 될 수 있다. 차별에 대한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서로 다른 차별이 동시에 얽혀 있고 모든 사람이 강자와 약자, 가해자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을 ‘교차성’이라고 한다.
차별 문제를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접근할 때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점은 무관심이다. 무관심은 내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통상적인 사회적 약자 집단에 속하지 않았다고 해서 차별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인격이나 개성과 상관없이, 속한 집단에 대한 편견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모든 행위가 차별이다. 차별이 심한 사회란 단지 여성이나 성 소수자를 안 좋게 대우하는 사회만을 뜻하지 않는다. 저마다의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모든 구성원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사회가 이런 행위에 관대하다는 의미다. 돈이 없거나 학벌이 안 좋다고 무시당하는 것, 직장 상사로부터 부당한 업무 지시를 받는 것 등 누구나 한 번쯤 겪어 봤을 만한 경험들이 모두 차별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차별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모든 차별이 같은 것은 아니다. 당연히 약자 집단에 속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심하게, 자주 차별받는다. 교차성 강조는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 문제도 중요하지만, 이성애자에 대한 역차별도 똑같이 심각한 문제라고 주장하는 궤변이 아니다. 차별의 경험에 정도의 차이가 있음은 인정하면서도, 차별의 차이가 아닌 공통점에 주목함으로써 공감대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차별은 마치 대기 오염과 같다. 오염이 심해지면 가장 먼저 쓰러지는 건 기저 질환이 있는 사람들이겠지만, 계속 방치하면 결국 모두가 호흡할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당장 내가 받는 차별이 적다고 해서 이에 무관심하거나 계속 방치한다면, 우리 사회 안에서 차별은 한없이 퍼져 나가고 후에 그 피해는 나와 우리 모두에게 되돌아온다.
없애면 모두의 파이가 커진다
차별에 대한 이분법적 시각의 부작용은 무관심뿐만이 아니다. 때로는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 문제를 지적하는 것 자체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위에서 설명했듯 모든 사람은 어느 정도 사회적 편견으로 인한 차별 피해를 공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특별히 피해가 심한 특정 약자 집단에 대한 차별이 조명될 때, 그 외 사람들은 그런 문제 제기가 자신을 가해자로 매도하는 일이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나아가 평등주의 자체가 자신의 파이 중 일부를 빼앗아 특정 집단에 주려 하는 제로섬 게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실상은 그렇지 않다. 차별은 사회 전체에 피해를 주는 보편적인 현상이고, 모든 차별은 연계되어 있다. 한 집단에 대한 차별을 개선하는 것은 단지 그 집단에 대한 사회의 대우뿐만 아니라, 차별이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인식을 바꾼다. 그 때문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이 변한다면 자연스레 모든 사람이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차별의 피해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평등주의는 다수로부터 파이를 빼앗아 소수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불공정함을 겨누는 창끝에 소수 약자를 위한 운동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위기감을 느껴야 하는 것은 다수가 아니라, 이전까지 재산, 학력, 종교, 출신 지역 등 편견에 기생하여 자기 몫보다 큰 파이를 가져갔던 소수 특권층뿐이다.
최근 들어 이슈로 떠오른 페미니즘에 대한 남성의 인식이 이런 현상을 잘 보여준다. 2018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30대 남녀를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 결과, “성차별 문제에 관심이 있다”는 말에는 남성의 70퍼센트 정도가,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는 말에는 50퍼센트 정도가 동의했다. 여성에 대한 제도적 차별이나 이로 인한 성범죄에 대한 사회의 관대한 인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남성도 공감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여성 혐오는 심각하다”는 말에는 30퍼센트 정도가,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말에는 겨우 10퍼센트만 동의했다.[4] 차별에 대한 문제 인식은 갖고 있지만, 남성의 가해자성을 명시적으로 지목하는 ‘여성 혐오’라는 말이나, 남성의 권리를 빼앗아 여성에게 주는 것이라고 인식하는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여성과 비교해 상대적 강자라고는 하나, 한국인 남성 역시 군 복무를 비롯해 가혹한 입시 및 취업 경쟁, OECD 최고 수준의 노동 시간 등 사회로부터 많은 짐을 떠안고 있다. 본인이 가진 파이의 크기도 절대 커 보이지 않는데, ‘그것은 너무 많으니 떼어서 여성에게 줘야 한다’는 운동을 페미니즘이라고 오해하면 누가 달가워할까. 하지만 페미니즘을 ‘여성 인권을 시발점으로 사회 전체의 인식을 보편적으로 개선하려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면 갇힌 사고와 시각도 변할 수 있다. 여성이 당하는 많은 차별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남성이 당하는 차별과 근본적으로 그 원인을 공유한다. “여자는 임신하면 끝”이라며 여직원에 대한 멘토링을 등한시하는 직장 상사와 “남자는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며 육아 휴직 쓰는 남직원에게 불이익을 주는 직장 상사는 동일 인물이다. 페미니즘을 한정된 크기의 파이를 두고 남성과 여성이 싸우는 운동이라고 매도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이라는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성과 여성이 함께 싸우는 운동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방치하면 우리의 권리도 없다
차별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다. 장기간 방치된 차별이 우리 사회 전체에 기본권을 경시하는 풍조를 퍼트리기 때문이다. 단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법적으로 보장해야 하는 생명권, 자유권, 행복 추구권 등 기본권은 민주주의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구성 요소다. 우리 헌법 역시 제2장을 통해 국가가 반드시 보장해야만 하는 십여 개의 기본권을 규정한다. 제37조에 의하면 이런 기본권은 오로지 “국가안전보장ㆍ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만 법률로 제한할 수 있으나, 그 경우에도 기본권의 본질은 침해할 수 없다.
차별로 인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약자 집단의 존재는 기본권을 경시하는 사회를 만들고, 모든 구성원의 권리 침해로 이어진다. 사회가 이전까지 하지 않던 방식으로 새롭게 권리를 빼앗는 것은 어렵지만, 이미 특정 집단에 대해 이루어지고 있는 권리 침해에 그 대상만 확대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조선 시대에는 영속이라는 형벌이 존재했는데, 이는 양인을 노비로 만드는 벌이었다. 이미 노비제라는 반인륜적 제도가 존재했기 때문에 노비가 아닌 사람이 영속형을 받는 것이 가능했다. 처음부터 모두의 권리가 똑같이 보장됐다면, 양인이 연좌제 등으로 영속형을 당해 권리를 잃어버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차별로 인한 기본권 침해는 어떤 공공적 정당성도 없이, 오로지 편견과 혐오로 인해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 비합리적 이유로 기본권을 침해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적당한 구실을 덧붙여 기본권을 더욱 쉽게 빼앗을 수 있다. 마하트마 간디(Mahatma Ghandi)의 명언으로 알려진 “가장 약한 구성원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사회의 수준을 가늠하는 기준(The measure of a civilization is how it treats its weakest members)”이란 말도 이런 점을 지적한다.[5] 자유로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약하고 미움받는 집단일수록 그 구성원의 권리가 잘 보장되는지, 침해되고 있는 건 아닌지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외국인 노동자는 우리 사회에서 권리의 사각지대에 있는 대표적인 약자 집단이다. 2004년 도입된 외국인 고용 허가제는 비숙련 외국인 노동자가 우리나라에 한시적으로 거주하며 내국인들이 기피하는 소위 3D(Difficult, Dirty, Dangerous) 업종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매년 5만 명 이상의 외국인 노동자가 이 제도를 활용해 한국에 들어온다. 하지만 고용 허가제는 철저히 노동력만을 착취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권리를 보호하지 않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이 제도를 통해 받을 수 있는 비자의 최대 체류 기간은 4년 10개월이다. 5년 이상 체류하면 영주권 신청이 가능해지는데, 애초에 그럴 여지를 주지 않고자 일부러 기간을 그렇게 맞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최초에 지정된 사업장에서 일하는 동안만 비자가 유효해 이직의 자유도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고용주가 노동자의 권리를 빼앗더라도 문제를 제기하기가 쉽지 않다.[6] 해고당하면 곧바로 강제 출국을 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차별적인 제도는 극도로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이어졌다. 2020년 12월 주한 태국 대사관의 자료 공개 요구로 지난 5년간 총 522명의 태국 국적 노동자가 한국에서 사망한 사실이 밝혀졌다.[7] 며칠 뒤에는 고용주가 숙소로 제공한 난방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비닐하우스에서 살던 캄보디아 국적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8] 고용노동부의 조사 결과, 농어촌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 중 70퍼센트가 비닐하우스 등 가설 건축물을 숙소로 쓰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9] 오랜 시간 지속되어 온 이런 폐해 때문에 유엔(UN) 사회권규약위원회에서도 이미 2018년 고용 허가제의 개선을 권고했다. 사업장 변경 제한이 “노동자들이 쉽게 착취당하는 구조를 만들고 강제 노동에 이르게 한다는 보고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10]
물론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권리 침해 자체도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내국인들이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이런 권리 침해의 영향이 외국인 노동자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권리를 보호받지 못하는 저임금 노동 계층이 생긴다는 것은 모든 노동자의 권리를 위협한다. 내국인 노동자들도 향상된 노동 조건을 요구할 때 고용주가 외국인 노동자로 대체하겠다고 위협하며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노동자의 집단행동 자체를 방해하기 위해 열악한 노동 조건의 책임이 더 싼 임금과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있다는 주장을 펼쳐 혐오를 부채질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이민자 혐오 정서를 성공적으로 부추겨 원래 민주당을 지지하던 친노동 성향의 백인 블루칼라 노동자들을 친기업 성향의 공화당 고정 지지층으로 돌려놓은 사례가 있다. 반노동 친기업 성향이 강한 공화당을 지지하게 되면서, 그들은 더 이상 본인들의 권익을 효과적으로 주장할 수 없게 됐다. 이렇게 소수 약자 집단에 대한 차별은 그 집단 밖의 다수의 권리도 위협하게 된다.
수용자(inmate) 역시 권리의 사각지대에 놓인 대표적인 약자 집단의 예다. 특히 수용자는 선천적 특성이 아닌 본인의 선택으로 인해 취약한 집단에 속하게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혐오의 대상이 되기 쉽다. 물론 법을 어겼다면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처벌 수위를 정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도 개인의 기본권은 보장돼야 한다. 이런 주장은 보통 “반사회적인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인권을 사회가 굳이 챙겨야 하냐”라는 반대 여론에 맞닥뜨리게 된다. 여론의 주목을 받는 흉악 범죄 사건이 있을 때마다 인권위에는 범죄자 인권을 보호하지 말라는 식의 항의 전화가 빗발친다. 이 때문에 2008년에는 수용자 인권 개선이 필요한 이유에 대한 해명자료를 발표하기도 했다.[11] 이런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정부도 수용자 인권에 관해서는 적극성이 떨어진다. 2018년에는 인권위에서 교정 시설을 방문 조사하고 수용 환경 개선을 위한 15가지 권고 사항을 발표했는데, 법무부는 이 중 여섯 가지를 불수용했다.[12] 2020년 12월 서울 동부구치소에서 코로나19 집단 감염이 발생했는데, 당국의 무관심 속에 확진자 수는 한 달 만에 한 명에서 1000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죄를 지어 자유를 빼앗긴 범죄자이기 이전에 사람이다. 미국에서 수용자 인권 업무를 하는 변호사들은 이런 점을 고려해 서면에 의식적으로 수용자라는 말 대신 ‘사람(person)’이라는 말을 쓴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일지라도 권리를 지켜 줘야 하는 이유는 단지 그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다. 우리를 위해서다. 사회의 미움을 받는 집단이 기본권의 사각지대에 방치되면 혐오의 감정은 점점 커진다. 혐오는 차별과 학대를 합리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정신적 도구이기 때문이다. 혐오하기 때문에 학대를 당해도 돕지 않게 된다. 학대가 장기간 방치되면 자연스레 더 큰 학대로 이어진다. 더 큰 학대를 다시 정당화하기 위해서 더 큰 혐오가 필요해진다. 이러한 악순환이 이어지다 보면 눈 깜짝할 사이, 사회는 이 집단의 기본권을 무참히 짓밟아 비인간화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러한 비인간화는 처음 미움받은 집단에만 머물지 않고 모든 사람의 권리를 심각하게 위협한다.
자유를 침해하는 자유의 나라
변호사로서 간혹 이민자 사건을 다룰 때가 있다. 해마다 수십만 명의 사람이 남부 국경을 통해 중남미에서 미국으로 넘어온다.[13] 이들 중 대부분은 합법적인 입국 비자를 받지 않은 비인가 이민자다. 미국은 이들 비인가 이민자에 대한 차별이 굉장히 심하다. 물론 어느 국가에나 일정한 규정을 정해 출입국을 통제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국경을 지킨다는 미명 아래,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에 대한 대우가 비인간적인 학대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지금 미국이 바로 그런 상태다.
1900년대 중후반까지는 미국도 별다른 단속 없이 비인가 이민자들을 방치했다.[14] 하지만 그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외부인을 향한 혐오의 목소리가 커지고, 반이민 정책은 점점 공격적으로 변해갔다. 국경은 군사 대치지역을 방불케 할 만큼 요새화됐고, 1998년과 2018년 사이 미국 관세국 국경 보호청의 공식 통계에 집계된 것만 하더라도 약 7000명 이상이 국경을 넘다가 목숨을 잃었다.[15] 이들의 죽음에 미국 사회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오히려 아직도 단속이 느슨하다며 더 강력한 대책을 요구했다.
결국 미국 정부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이전에는 체포돼도 국경에서 훈방되던 이민자들을 대규모 수용소에 잡아 가두는 정책을 채택한다.[16] 엄밀히 말하면 비인가 이민자 신분이 아니라, 엄연히 국제 조약으로 정해진 합법적인 권리를 주장하는 난민 신청자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변화로 수용소를 단기간에 열 배 이상 증설해야 했고, 정부 차원에서 여력이 없어 대부분은 영리 업체에 용역을 주게 되었다. 이들 업체는 최대한 저예산으로 많은 이익을 남기기를 원했고, 그로 인해 수용소 환경은 점점 더 지옥으로 변해갔다. 2019년 미국 일간지 《USA 투데이(USA Today)》의 탐사 보도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19년 사이 약 5만 명의 이민자가 이러한 시설에 수용됐다. 그 3년간 수용소 안에서 교도관의 수용자 성폭행 사건은 400회 이상, 폭력 사건은 800회 이상, 사망 사건은 29회 발생했다. 반면 이민자 수용소를 운영하는 업체들은 연간 21조 원가량의 돈을 벌어들였다.[17]
내가 의뢰인과 접견하기 위해 방문했던 캘리포니아 사막의 한 수용소 역시 영리 업체가 운영하는 시설이었는데, 2016년 12월부터 2017년 10월 사이에만 여덟 명이 목숨을 끊으려 한 곳이었다.[18] 대기실에서 몇 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만날 수 있었던 의뢰인의 모습은 늘 참담했다. 성 소수자라는 이유로 온두라스에서 마을의 폭력 조직에 쫓기다 국경을 넘어온 그는 체포된 이후 한 달 가까이 세면도구를 받지 못해 양치조차 하지 못했다. 급식에서는 벌레 사체가 나오고, 아파도 의사를 만나지 못해 몸이 심하게 망가진 상태였다. 2000명 가까운 사람이 수용된 이 시설에는 간단한 충치 치료를 위해 2년 이상 기다리다가 이빨이 여러 개 빠진 사람도 있었다.[19] 여러 차례 이곳을 드나들며 본 사람들의 모습은 자유의 나라라는 미국의 별칭을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민자 수용소의 끔찍한 현실에 대한 보도가 이어져도 이민자 혐오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으로 건너오는 멕시코인은 강간범, 살인마”라고 외치던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혐오는 정점을 찍었다. 2017년 11월 이후 미국 정부는 가족 단위 이민자에 대해 부모와 아이들을 의도적으로 분리해서 수용하는 정책을 시행한다. 부모와 생이별당한 아이들을 가두기 위해 어린이 집단 수용소가 만들어졌다. 이들을 다시 부모와 연결하기 위한 어떠한 행정적 절차도 없었다. 미국 정부의 자체 통계에 따르면 지난 3년간 이런 식으로 부모와 강제로 떨어트려 가둔 어린이가 총 4000명이 넘는다.[20] 이들 중에는 다섯 살 이하의 영유아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이민자 혐오가 극에 달하면서 성인 수용소 교도관들의 가학적 범죄도 급증하기 시작했다. 특히 여성들은 교도관들에게 빈번하게 성폭행을 당했고, 그 사실이 알려지면 수사 당국에 증언을 못 하도록 빠르게 강제 출국당했다.[21] 최근에는 한 이민자 수용소에서 다수의 여성을 상대로 강제 자궁 적출 수술이 이뤄지고 있다는 충격적인 공익 제보가 나와 언론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22]
이런 혐오 정책의 영향은 이민자에 국한되지 않았다. 이민자 단속을 위해 초법적 권한과 군 장비 수준의 중무장을 갖추게 된 미국 세관 및 국경보호청(CBP)은 국경 내 100마일(160킬로미터)까지 관할권을 갖는다.[23] 이 지역 안에서는 비인가 이민자를 색출하기 위해 미국 시민을 상대로도 불심 검문과 수색, 심지어 체포까지 할 수 있다. 그런데 국경에는 바다까지 포함되므로, 해안에 있는 미국 대도시 대부분이 관할구역으로 들어간다. 그러다 보니 CBP가 이민자를 공격적으로 대하자, 대도시에 사는 중남미 혈통의 미국 국민도 불심 검문의 대상이 되었다. 미국은 특히 형사 기본권 보호가 굉장히 철저해서 일반 경찰의 검문, 수색, 체포에는 굉장히 엄격한 기준이 따른다. 하지만 이민자 통제를 위해 공격적인 정책을 펼치는 CBP에게는 이러한 제약이 상대적으로 적다.
2020년 여름, 미국 전역에서 벌어진 흑인 인권 집회는 CBP의 초법적 권한이 미국 시민의 기본권까지 위협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였다. 연방 정부는 수도와 대도시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CBP와 이민세관단속국(ICE) 병력을 대거 투입했다.[24] 그리고 이들은 이민자를 상대로 사용하기 위해 학습한 군사 전술, 획득한 장비의 표적을 자국민에게 돌리게 되었다. 진압 병력이 시위대를 구타하고, 차로 들이받고, 고무탄을 쏴 실명하게 하는 등 세계를 놀라게 한 이때의 참상에는 분명 이민자를 상대로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하는 일에 익숙해진 대원들이 그 틈새에 섞여 있는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미국 사회의 모습은 우리에게 반면교사가 되어야 한다. 성 소수자는 존재 자체가 자연의 이치에 거스르니 권리가 없다는 생각, 범죄자는 죄를 지었으니 교도소 안에서 무슨 짓을 당해도 상관없다는 생각, 난민은 우리 사회에 자기 문화를 퍼트리려 나타난 침략자라는 생각. 아무리 전통적인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으로 거짓 포장을 해도 이런 생각은 모두의 기본권을 위협하는 자충수일 뿐이다. 우리가 차별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모두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권리의 안전망을 만들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