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의지에 대해서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면 1980년대에 미국의 신경과학자인 벤저민 리벳(Benjamin Libet)이 수행했던 일부 악명 높은 실험들에 대해서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 그가 진행한 실험들은 자유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로 해석되어 왔다. 그는 피험자들을 두뇌 스캔 장치에 연결한 후, 그들이 원하는 순간에 손가락을 움직여 보라고 했다. 그리고 리벳은 그들이 의식적인 결정을 내리기 300밀리초(ms) 전에 이미 그 선택에 대한 두뇌 활동이 감지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던 것 같다(다른 연구들을 보면, 의식적인 선택보다 최대 10초가량 앞서서 그런 활동이 감지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만약 실험 장비가 그들의 결정을 미리 알았다면, 이들 피험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판단에 자유롭게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대부분의 양립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실험은 공연한 난리법석에 다름 아니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식적 선택은 우리의 신경 프로세스(neural process)가 인과 관계의 사슬로 묶인 링크(연결 고리)이다. 그래서 당연히 두뇌 활동의 일부는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보다 앞서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찰스 휘트먼과 같은 사례는 이제 우리가 그 누구의 악행에 대해서도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거나, 또는 그 누구의 성취에 대해서도 찬사를 보낼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여 미리 당황할 필요는 없다(그들을 대신해서 말하자면, 내가 이야기를 나눠 본 자유 의지 회의론자들도 그렇게까지 주장하지 않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대신에 우리는 그들의 행위에 비추어 볼 때 그 사람이 과연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정상적인 능력을 가졌는지를 물어보면 된다. 우리 모두 신생아에게는 아직 그런 능력이 없다는 데 동의하기 때문에, 아기들이 한밤중에 깨어난다고 해서 비난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 이외의 동물들도 대부분 그런 능력이 없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혹여 말벌이 사람을 쏜다고 해서 벌들을 향해서 격한 분노를 쏟아 내는 이들은 거의 없는 것이다. 심각한 신경학적 장애나 발달 장애를 가진 이들 중에서도 그런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있다. 아마 휘트먼도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어떨까? “제가 내세우고 싶은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버니 매도프(Bernie Madoff)입니다.” 철학자인 에디 나미아스(Eddy Nahmias)의 말이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으며, 자신이 하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는 우리가 “자유 의지”라고 부르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활용해서 투자자들에게서 171억 달러 이상의 돈을 가로챘다.
자유 의지 회의론자들에게는 이런 모든 사실들이 그저 체면치레이자 주제를 전환하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라고 생각한다. 즉, 자유 의지라는 것을 우리가 어떤 선택을 마주했을 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이름을 붙일 가치도 없는 것으로 재정의하려는 노력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행위자가 아니라는 아이디어를 싫어한다”고 제리 코인은 주장한다. 샘 해리스는 대니얼 데닛을 두고, 잃어버린 도시인 아틀란티스를 발견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에게 그냥 시칠리아에 여행 가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주제를 접근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아무튼 그러한 비유는 몇 가지 기준에서는 적절한 것이다. 즉, 그것은 바다에 떠 있는 하나의 섬이며, 고대에 기원을 둔 문명의 고향이라는 점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실은 명확하다. 아틀란티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바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해도,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자유 의지가 허상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도 허상이다
철학적 진실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우리는 자유 의지가 있는 것처럼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근거로 들어서, 자유 의지와 관련한 논쟁을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라며 묵살하고 싶을 수도 있다. 나는 확실히 누구를 만나든 그들에게 자유 의지가 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대답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나 자신 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한다면, 당신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기 때문에)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을 거라는 점을 참작해서 너그럽게 웃어넘기기보다는, 맹세컨대 당신에게 격렬하게 분노할 것이다. 이러한 경험적인 감각에서 보자면, 자유 의지는 그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의 마음이 최대한 고요할 때, 예를 들어서 네 살짜리 아이가 깨어나기 전에 아침 일찍 혼자서 조용히 커피를 마시는 상황이라면, 상황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게 편안하게 집중할 수 있는 순간이면, 우리의 의도와 선택들은 다른 모든 생각이나 감정들과 마찬가지로 나의 의식 속에서 뜻하지 않게 발생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나 자신이 그러한 판단의 입안자라는 생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순간에 내가 커피 잔을 내려놓고 샤워를 하러 간다면, 왜 그랬던 걸까? 왜냐하면 그러고자 하는 의도가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인데, 이는 분명 의심의 여지없이 나의 두뇌에서 일어난 온갖 종류의 활동들에 의해서 야기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두뇌의 활동은 나의 명령을 듣지도 않을뿐더러,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밖에 존재한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뭔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한 판단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자면, 어떤 친인척의 장례식에 참석할 것인지, 또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의 직업적인 기회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와 같은 선택에 있어서 말이다. 나는 그러한 사안에 대해서 나 스스로에게 “결정을 내려야 해”라고 말하면서 몇 시간, 아니 며칠이라도 보내기도 한다. 그런 후에도 정작 내가 하는 행동이라는 것은, 솔직히 말하자면, 여전히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방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 갑자기 어떤 예측하지 못했던 순간에, 또는 해당 사안에 대해서 외부적으로 설정된 마감 시한에 쫓겨서 한 가지 경로를 실행하기로 결심하거나, 아니면 그냥 단순히 또 다른 방안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샘 해리스가 말하는 것인데, 자세히 살펴보면, 자유 의지가 허상이라고 말 할 때 그것은 자유 의지 그 자체가 허상일 뿐만 아니라, 자유 의지가 허상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도 허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우리는 심지어 자유로워 보이지도 않는다. 그는 내게 이메일을 통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누구나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면, 무언가를 경험하는 와중에는 그 경험의 주체가 없고 오직 경험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그저 그 자체로 발생하는 것입니다.”
철학자인 데이비드 흄(David Hume)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의 근원을 불교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즉,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명령을 내리는 지휘관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그 자체적인 인과 관계에 의해서 결정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는 그저 마음의 작용만이 계속되고 있다. 또는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가 1871년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내 생각이 전개되는 것을 바라보는 관전자이다. 나는 그것을 관찰하고, 그것을 경청한다.”
사울 스밀란스키(Saul Smilansky)의 의견에 동의해야 하는 이유는, 설령 그것이 사실로 밝혀진다 하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해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대니얼 데닛은 비록 우리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도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자유 의지가 없다는 주장을 퍼트리는 것이 도덕적으로 무책임하다고 주장한다). 2008년에 수행된 일련의 연구에서 심리학자인 캐슬린 보스(Kathleen Vohs)와 조너선 스쿨러(Jonathan Schooler)는 한 그룹의 참가자들에게 DNA의 구조를 공동으로 밝혀낸 프란시스 크릭(Francis Crick)이 쓴 《놀라운 가설(Astonishing Hypothesis)》에서 발췌한 내용을 읽어 달라고 요청했다.
참고로 이 책에서 저자는 자유 의지가 허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유 의지의 존재를 의심해야 한다는 내용을 읽은 이 그룹의 사람들은 다음 단계의 테스트에서 돈이 걸려 있는 시험을 진행했을 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서 부정행위를 저지를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연구에서는 자유 의지에 대한 믿음이 적어지면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자진해서 나서려는 의지가 줄어들었고, 인간관계에 대한 관심과 노력의 수준이 낮아졌으며, 감사함을 느끼는 정도도 낮아졌다.
그러나 보스와 스쿨러의 연구 결과를 재현하려는 시도들이 성공하지 못하자, 그들의 연구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설령 그 연구 결과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일부 자유 의지 회의론자들은 그러한 연구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한 가지 공통적인 실수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주어진 과제를 상당히 빠르게 해결하는 참가자는 오히려 자유 의지에 반하는 사례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한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연구에서 갑자기 비도덕적인 태도를 보인 참가자들은 결정론과 운명론을 혼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에게 자유 의지가 없다면 우리의 선택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선한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행동은 우리의 선택과는 관계없이 미리 정해진 것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아이에게 채소가 풍부한 식단을 먹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결정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선택은 대단히 중요하다. 또는 차들이 바삐 오가는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에 도로의 양쪽을 조심스럽게 확인할 것인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회의론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는 그러한 선택을 자유롭게 내릴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오늘도 스스로 커피를 마신다
어느 경우든, 만약 자유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실제로 밝혀진다 하더라도, 그 의미가 완전히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물론, 냉혈한 살인자가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 그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거나, 한편으로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스밀란스키의 표현대로 “이미 주어진 결과가 전개되는 것”이며 인간적인 특징은 전혀 없이 그저 냉랭한 인과 관계에 불과하다고 특징짓는 것은 상당히 거부감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해방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즉, 우리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보다 관대해질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해왔던 것처럼 정확히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는 것이 치유에 도움이 될 것이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우리 스스로가 그보다 더 잘 해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사소한 잘못에도 쉽게 화를 내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신 역시도 얼마든지 그들처럼 실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물론, 자유 의지에 대한 불신이 사람들을 더욱 친절하게 만든다는 연구 결과들도 존재한다).
해리스는 만약 우리가 자유 의지에 반하는 사례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싫어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 비난할 수 없는데, 그 사람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사랑이라는 개념은 거의 상처받지 않고 살아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원하고, 그러한 윤리적이며 정서적인 유대감에 의해서 우리 스스로가 행복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개의 감정은 그 어느 것도 손상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외에도 우리들 인생의 수많은 긍정적인 측면들도 비슷하게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스트로슨의 표현대로, 자유 의지에 대한 믿음이 없는 세상에서도 “딸기는 여전히 예전처럼 맛있을 것”이다.
아침 일찍 커피를 마시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떠나서, 개인적으로 나는 자유 의지에 반하는 결정적인 사례를 찾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우리의 삶에 있어서 명백하게 사실이라고 여겨지는 다른 수많은 사례들과 상충할 뿐이다. 그러나 비록 가상의 가능성으로만 느끼는 즐거움에 불과할지라도, 자유 의지에 대한 회의론은 한 개인의 성취가 오직 그 사람 한 명에게만 귀속되며, 따라서 실패한 사람들은 그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만 물어야 한다는 삭막한 개인주의적인 철학에 대한 해독제가 될 수 있다. 이는 우리의 출생이라는 사건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우리 인생의 궤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는 단지 우리가 태어난 사회 경제적인 지위만이 아니라, 우리의 재능, 약점, 낙천성, 그리고 폭력이나 게으름, 절망에 빠지려는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떠나게 되는 여정 등 우리의 성격은 물론이고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전반적인 경험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실의 모습 안에는 인간적인 동료애라는 깊은 의식이 존재한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폭풍우가 몰아치는 운명의 바다 위를 표류하는 같은 배에 올라타서 서로에게 필사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