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the hell.” 바이든의 인내심도 바닥난 모양이었다. CNN 기자에게 쏘아대기 시작했다. “왜 푸틴 대통령이 행동을 바꿀 거라고 그렇게 자신하는가”라고 물은 기자였다. 바이든은 따져 물었다. “내가 언제 자신한다고 말했나? 빌어먹을.” CNN 기자가 반문했지만 최강대국 미국의 대통령 바이든은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치켜들면서 말을 끊어 버렸다. “나는, 나는, 내가 말한 건, 분명히 하자. 나는 무엇이 그의 행동을 바꿀 것인가를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자신하지 않는다. 나는 사실을 말할 뿐이다. 내가 언제 확신한다고 했나?”
캡틴 아메리카와 윈터 솔져
지난 6월 16일이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미국과 러시아의 정상 회담이 끝난 직후였다. 바이든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은 이번 정상 회담이 건설적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건설적이란 수사는 외교 은어다. 의견 차이가 커서 결론난 건 없다. 적어도 이견이 무엇인지는 직접 대화로 확인했다. 이런 말이다. 미러 사이의 쟁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난 5월에 발생한 미국 최대 송유관 회사 콜로니얼에 대한 랜섬웨어 공격이
대표적이다. 콜로니얼은 미국 동부권 에너지의 절반을 책임지고 있다. 하루 송유량만 250만 배럴에 달한다.
일주일 가까이 석유 공급이 끊기자 미국에선 주유 대란이 벌어졌다. 주유소 앞에서 가솔린을 놓고 운전자들끼리 난투극을 벌이는 미친 지경에 이르렀다. 영화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의 현실판이었다. 주유 대란은 금융 시장도 혼란에 빠뜨렸다. 석유 가격이 치솟으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코로나로 무너진 미국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전방위 돈 풀기에 나선 상태다. 그런데 인플레이션율이 비정상적으로 치솟으면 미국의 금융 정책과 재정 정책이 무력화된다. 석유 송유관에 대한 해킹은 결국 달러 송유관에 대한 해킹인 셈이다.
미국 정보기관은 콜로니얼에 대한 랜섬웨어 공격의 배후에도 러시아가 있다고 확신한다. 러시아 해커 집단이 미국의 기간 시설과 민간 기업을 해킹해서 돈을 요구하는 랜섬웨어 공격이 한두 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가 테러리스트들과 협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이야 유명하다. 미국 기업들의 사정은 좀 다르다. 사실상 러시아의 랜섬웨어 공격에 속수무책이다. 콜로니얼도 500만 달러를 비트코인으로 지급해서 문제를 해결했다.
문제는 에너지나 상수도 같은 미국의 인프라가 대부분 민영화돼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 기업에 대한 공격은 곧 미국 인프라에 대한 공격인 셈이다. 지난 2월엔 플로리다주에 있는 플로리다시 상수도 관리 회사에 대한 랜섬웨어 해킹 시도가 있었다. 치사량의 화학 물질을 상수원에 주입하려다 발각됐다. 플로리다 시민들의 생명을 볼모로 잡으려는 시도였다. 이와 비슷한 시도가 2016년 우크라이나에서도 있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군사적 긴장 관계다. 미국은 푸틴 정부가 러시아와 적대적인 국가들에 대한 자국 해커들의 렌섬웨어 공격을 사실상 묵인 방조하고 있다고 본다.
바이든은 푸틴을 싫어한다. 솔직히 푸틴 같은 독재자들을 혐오한다. 대선 토론에서 바이든은 푸틴과 김정은 그리고 시진핑을 공개적으로 “Thug”이라고 불렀다. 국내 언론에선 깡패자식 정도로 순화됐다. 툭 까놓고 말해서 양아치란 뜻이다. 바이든은 반세기 동안 외교 무대를 누볐다. 독재 국가의 정상을 마주하면 바이든은 면전에다 독재자라고 면박을 주곤 했다. 바이든은 그것이 강대국의 의무라고
여겼다. 전 세계를 민주주의 체제와 권위주의 체제로 이분해서 바라보는 바이든 정부의 세계관은 확실히 전략적이지만 다분히 정서적이다. 정치인 바이든의 영혼으로부터 기인하기 때문이다. 바이든은 레이밴 선글라스를 쓴
캡틴 아메리카다.
그런데도 캡틴 아메리카는 이번 미러 정상 회담에선 독재자 윈터 솔저의 얼굴에 침을 뱉어 주지 못했다.
[1] 구속 중인 나발니 이야기를 꺼내긴 했다. 알렉세이 나발니 전 러시아 진보당 대표는 반푸틴 저항 운동의 상징이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반푸틴 시위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미국 입장에서 나발니는 2000년부터 이어진 푸틴 독재를 끊어 낼 수 있는 결정적 지렛대다. 그런데도 바이든 대통령은 정상 회담이 끝난 뒤 가진 개별 기자 회견에서 이 정도 언급에 그쳤다. “나발니의 죽음이 러시아에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구두 경고다. 레드카드는커녕 옐로우카드도 못된다. 푸틴 앞에서 바이든은 방패 없는 캡틴 아메리카였다.
이러니 바이든 대통령도 화가 날 수밖에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자기 자신한테 화가 났을 법 하다. 양아치를 마주하고도 못 본 채 했기 때문이다. 사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직후만 해도 러시아와 난타전을 벌였다. 4월엔 러시아에 대한 전방위적 제재 패키지를
발표했다. 결국 미국과 러시아는 1952년 이후 처음으로 상대방 외교관을 추방해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2차 대전 이후 미러 관계가 최악이 된 셈이다. 특히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 은행들의 러시아 국채 매입을 금지시켰다. 러시아 경제가 악화되면 경제 위기가 나발니를 중심으로 한 정치 변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악시오스〉는 바이든 행정부의 러시아 경제 제재를 “러시아 경제에 대한 광범위한 냉각 효과”라고 표현했다.
문제는 뜨뜨미지근한 냉각 효과였다. 지금 러시아 경제는 코로나로 인한 타격을 빠르게 만회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미러 정상 회담 직전에 열린 2021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 경제 포럼에서 사실상 러시아 경제가 코로나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선언했다. 경제만 회복되면 미국 은행이 아니더라도 러시아 국채를 구매할 투자자는 시장에 널렸다. 게다가 바이든은 러시아 경제 제재를 말하면서도 정작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송유관인 노르트 스트림2에 대한 제재는 풀어
줬다. 사실상 천연가스 같은 자원 수출로 먹고 사는 러시아한텐 금융 규제보다도 더 치명적인 제재일 수 있었다. 노르트 스트림2는 러시아 뿐만 아니라 미국의 동맹 독일의 이해관계도 걸린 예민한 이슈다. 트럼프는 동맹의 입장을 무시했다. 트럼프가 노르트 스트림2를 묶어 버릴 수 있었던 이유다. 바이든은 그럴 수 없다. 푸틴 입장에선 트럼프보다 바이든이 쉬운 상대란 말이다.
그때, 바이든 대통령은 미러 정상 회담이 끝난 뒤 단독 기자 회견을 마치고 스위스
제네바 파크 데 오 비브 호텔로 걸어 들어가는 중이었다. 상의 재킷을 벗고 선글라스를 든 채였다. 워싱턴 외교 전문가들은 미러 정상 회담이 끝나더라도 공동 기자 회견만큼은 절대 해선 안 된다고 조언했다. 푸틴이 미러 정상 회담을 불리한 국내 정치에 대한 반전 카드로 이용할게 뻔했기 때문이다. 바이든도 조언에 따랐다. 공동 기자 회견만큼은 피했다. 그런데도 푸틴이 신이 나서 떠드는 것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푸틴은 1시간 가까이 프롬프터도 없이 기자 회견을 했다. 바이든의 기자 회견 시간은 10분 남짓이었다.
두 정상 모두 이번 회담이 러시아 쪽으로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걸 알고 있었다. 만남 자체만으로도 푸틴 체제를 바이든 정부가 인정했단 의미였다. 인사만 했어도 악수도 한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러시아에 대한 미국 정부의 경제 제재도 기대만큼의 냉각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번 정상 회담은 캡틴 아메리카도 윈터 솔져한텐 별 수 없다는것만 만천하에 드러낸 꼴이었다. 이미 미국 언론은 회담 전부터 “이것은 초강대국끼리의 협상이 못된다”라며 김을 빼고 있는 분위기였다. 러시아의 위상이 구소련과는 격차가 크다는 지적이었다. 러시아의 경제 규모는 대략 스페인 수준이다. 2020년 GDP 기준으론 한국에 이어 11위다.
그런데도 바이든은 푸틴과 정상 회담을 했다. 과거 냉전 시절처럼 중립국 스위스에서 만나서 양자 회담을 가졌다. 심지어 “두 강대국”이라는 표현까지 써줬다. 러시아를 소비에트처럼 추켜세워 준 셈이다. 《폴리티코》는 이걸 바이든의 도박이라고 설명했다. 바꿔 말하면 미국과 바이든은 지금 도박이라도 해야만 하는 상황이란 말이다. 배알이 꼬여도 양아치와 만나서 4시간 동안 건설적이라고 쓰고 시간 낭비라고 읽어야 하는 회담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란 말이다. 중국 때문이다.
바이든의 민주주의 연환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