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모든 노력들이 나름의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백인주의라는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완벽한 비전을 결코 완성하지 못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그로부터 이득을 얻는 위치에 있지만 인종적 우월함이라는 교리를 거부하는 이들을 포함해서 언제나 반대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서 역사적으로 기억되는 사람들로는 엘리자베스 프리먼(Elizabeth Freeman),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 시팅 불(Sitting Bull), 프란츠 보아스(Franz Boas), 하비바 레이크(Haviva Reik),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가 있고, 그 외에도 지금은 잊혔지만 자신이 가진 모든 수단을 활용해서 저항했던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부분적으로는 그들의 일관성 없는 원칙도 한몫했다. 즉, 선조들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흑인이 있으면 백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미국의 한 방울 원칙(one-drop rule), “백인종(caucasian)”
[1] 이 무엇인가에 대한 끝없는 논쟁, 히틀러가 일본인들에게 “명예 아리아인”이라는 지위를 주었다는 사실 등 백인의 범위를 규정하는 말도 안 되는 원칙은 인류사회의 엄청난 복잡성에 비하면 그 논리가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백인주의라는 종교가 결코 불변의 과학적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었지만, 사회의 현실을 형성하는데 있어서는 여전히 거대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이러한 성공의 일부는 그것이 가진 유연함과 관련이 있었다. 그것이 노예 제도를 더욱 활성화하는 데 기여한 덕분에 미국에서는 백인이라는 의미가 흑인의 반대 개념으로 정의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이러한 두 가지의 극단 사이에는 전략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1751년에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잉글랜드와 색슨(Saxon)계의 후손만이 “이 지구상에서 백인들의 주요한 몸체를 이룬다”고 선언했고, 거의 80년 후에는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 중국인이나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아일랜드계 사람들도 백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문화적으로 누가 백인인가에 대한 정의는 남유럽의 가톨릭교도, 아일랜드계, 그리고 심지어 수세기 동안이나 철저한 외부인으로 여겨졌던 유대인들에게까지 확장되었다.
백인주의라는 종교는 또한 그들이 억압했던 사람들이 희생자가 아니라, 자신들이 진정한 희생자라고 추종자들을 설득하면서 성공을 거두었다. 1692년에 영국령 바베이도스의 식민지 입법의원들은 이렇게 불평했다. “이 섬에 있는 온갖 니그로와 노예들이 가장 끔찍하고, 피비린내 나고, 지독하고, 혐오스러운 반란과 대학살과 암살과 파괴를 오랫동안 준비하고, 획책하고, 음모를 꾸미고, 계획해왔다.” 이러한 내용은 1903년 우드로우 윌슨(Woodrow Wilson)이 큐 클럭스 클랜(Ku Klux Klan, KKK)을 창설한 남부인들을 두고 “단지 자기보호 본능에 의해서 이끌린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나, 도널드 트럼프가 2015년에 대통령 선거 운동을 시작하면서 멕시코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마약을 가져오고 있으며, 범죄를 들여오고 있고, 그들은 강간범들이다”고 경고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백인주의라는 종교가 설득이나 공포심의 조장을 통해서 개종자를 얻을 수 없었던 곳에서는, 법률, 제도, 관습, 교회를 동원하여 그 특권을 행사하면서 그러한 권력을 확보하기 위한 더욱 조악한 조치들을 전개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무력에 의존했다. 20세기 중반까지, 백인이라고 불리는 인종의 사람들이 다른 모든 이들보다 우월하다는 추정은 단지 대서양 양안의 노예무역에만 중심적인 정당성을 부여해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에 대한 거의 완전한 말살, 콩고에서 벨기에가 저지른 잔혹 행위, 대영제국의 인도, 동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피로 물든 식민지화, 프랑스가 북아프리카 및 서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서 저지른 똑같이 피로 물든 식민지화, 나치 독일의 집단 학살 집행, 그리고 남아프리카에서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까지 정당성을 부여해주었다. 그리고 이들은 그저 가장 극단적인 사례들일 뿐이다. 이런 사례 이외에도 백인이라는 이들이 저지른 살해, 강간, 노예화는 그 건수만 따져도 최소한 아홉 자리(10억 건)에 달하는데, 거의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늘 결핍에 시달리고, 제약을 받았고, 적대시당하고, 모욕을 받으며 살았다.
위협받는 백인 우월주의
백인 우월주의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주장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영미권의 대중적인 담론에서 광범위하게 반감을 사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주로 시민권 운동 및 반식민지 활동가들의 공로 덕분이기는 하지만, 세계 대전도 그 자체로 한 몫을 했다. 나치 정권이 저지른 참상이 당시의 미국이나 영국에서 일어난 그 어떤 사건보다도 훨씬 더 끔찍하긴 했지만, 2차 세계 대전은 미국과 영국 모두에서 여전히 팽배해 있던 인종 차별주의를 무시할 수 없게 만드는 반면교사의 역할을 했다. (1946년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이처럼 잔인하고 그릇된 정책으로 세계를 지배하려고 시도했던 적들이 패배하는 것을 최근에 목격했기 때문에, 올해는 선입견과 편견, 인종 증오라는 해악에 맞서는 캠페인을 펼치기에 확실히 좋은 시기”라고 주장하며 그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백인들이 결속해야 한다는 정치적 호소는 느리기는 했지만, 확실히 줄어들었다. 예를 들어서, 1955년 윈스턴 처칠은 “영국을 하얀색으로 유지하자”라는 표현을 총선 승리를 위한 테마로 구상할 수 있었고, 1964년 말에만 하더라도 보수당의 후보인 피터 그리피스(Peter Griffiths)가 노골적으로 인종 차별적인 슬로건을 지지하면서 깜짝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1968년에는 이녹 파월(Enoch Powell)이 “피의 강물(Rivers of Blood)”이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어느 유권자가 “15년이나 20년이 지나면 흑인이 백인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며 한탄했다는 내용에 동의하는 발언을 했다가 타임스(Times) 신문으로부터 “악랄한 연설”이라는 표현을 받으며 거센 비판을 받았고, 결국 그는 보수당의 그림자 내각(shadow cabinet)
[2]에서 축출되었다. 노예의 세기를 거쳐서 인종 차별의 세기가 이어졌던 미국에서도 인종 차별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 발언에 대해서는 대중적인 질책이 점점 더 심해졌다. 60년대를 지나 70년대로 접어들면서, 미국 의회는 공공 생활의 많은 영역에서 노골적인 인종 차별을 불법화하는 일련의 법령들을 통과시켰다.
정부에 의해 강요된 노골적인 백인 우월주의를 거부하는 분위기가 점점 더 커지는 것은 공공 정책의 측면에서는 매우 중요한 결과였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인 영향력으로서의 백인주의가 그 호소력을 잃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일례로, 파월의 연설이 있은 지 몇 주 후에 실시된 갤럽(Gallup)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영국인들의 74퍼센트는 갈색 피부의 이민자들을 본국으로 추방해야 한다는 파월의 주장을 지지한다고 대답했다. 그것은 또한 백인주의가 오랜 지배의 역사로부터 진정으로 분리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더욱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두었다.
많은 백인들은 그들의 백인주의가 남긴 추악한 역사를 힘겹게 들여다보는 것보다는, 시민권 운동 진영이 인종 차별 반대와 관련하여 그들이 해야 할 모든 일을 완수했다고 판단하는 것이 좀 더 쉽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결과는 기이한 데탕트(détente)였다. 반면에 백인주의는 대중들의 관심 주제에서 멀어졌고, 인종의 피부색 무시(colour-blindness)라는 새로운 논리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다. 반면에, 백인들이 가진 경제 및 문화적인 엄청난 차이 덕분에 그들은 굳이 정치 권력이 아니더라도 지난 3세기에 걸쳐서 축적해 온 제도적 권력과 구조적 영향력을 계속해서 행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