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주둔한 20년 동안, 탈레반이 장악했던 도시는 쿤두즈(Kunduz) 한 곳밖에 없었고, 그 기간도 잠시뿐이었다. 그러나 지난 8월 6일에 남서쪽의 자란즈(Zaranj)를 시작으로 그들은 지역의 수도를 하나하나 차지하기 시작한 끝에 8월 15일에는 결국 카불을 점령하며 정점을 찍었다. 그들은 2001년에 미국이 의존했던 반 탈레반 세력들의 연합인 북부동맹(Northern Alliance)이 차지했던 지역을 사실상 모두 장악하고 있다. 가니(Ghani) 정권의 부통령이었던 아므룰라 살레(Amrullah Saleh)는 판지시르(Panjshir) 계곡으로 피신하여 자신이 대통령 권한대행이라고 선언하며 “저항”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그의 명분은 허망해 보인다.
탈레반의 성공은 파키스탄의 지원, 이라크에 주의가 분산된 미국, 마약 자금, 아프간 엘리트 계층의 부패 등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러나 탈레반 무장세력 역시 상당히 민첩했다. 이번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들은 최고의 전쟁은 싸우지 않고 적을 이기는 것이라는 손자(孫子)의 격언을 자주 입증해 보였다. 헬만드(Helmand) 지역의 영국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현재는 킹스칼리지런던에서 근무하고 있는 마이크 마틴(Mike Martin)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일어난 일은 아마도 역사상 최고로 잘 짜이고 계획된 게릴라 작전의 하나일 것입니다. 탈레반은 모든 지역으로 들어가서 여러 노선의 부족들과 협상을 함으로써 현지의 군대들을 자기들 편으로 돌려세웠습니다.” 예를 들어서, 헤라트에서는 지역의회의 의장이 탈레반의 현지 사령관과 협약을 맺었다. 참고로, 두 사람 모두 알리자이(Alizai) 부족의 일원이었다. “그렇게 지역의 병력들이 돌아서면서 정부의 힘이 약화되었고, 군대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틴의 말이다.
탈레반이 그러한 협상을 타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더욱 깊은 문제가 있음을 시사한다.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은 고도로 중앙집중화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산파의 역할을 자처해왔다. 이 나라가 2004년에 제정한 헌법은 1960년대의 왕정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세계은행의 전직 관료였으며 《실패한 국가들을 고치기(Fixing Failed States)》 라는 책의 공동저자인 가니 전 대통령은 지역 실세들의 힘을 박탈한 강력한 국가권력을 세우고자 했다. 이는 주요 부족들과 씨족들에게는 나쁜 영향을 끼쳤다. 싱크탱크인 국제위기그룹(International Crisis Group)의 이브라힘 바히스(Ibraheem Bahiss)는 이렇게 설명한다. “수도인 카불과 지역의 실세들 사이의 이러한 긴장관계는 탈레반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제한된 지역에서만 호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전국적인 운동으로 번졌습니다.”
미국이 조직한 아프간 군대는 규모가 거대했고, 무장도 잘 되어 있었으며, 공군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을 치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싱크탱크인 로열유나이티드서비스연구소(Royal United Services Institute)의 잭 와틀링(Jack Watling)은 아프간 군대의 정식 지휘계통이 가족과 부족에 대한 충성심과 충돌했다고 말한다. 그 결과는 끊이지 않는 부패였다. “부대 안으로 장비가 반입되면 일단 커다란 창고 안에 넣어 두었지만, 그러고 나면 온갖 곳으로 빼돌려지기 일쑤였습니다.” 그의 말이다.
싱크탱크인 CNA에 의하면, 아프간 군대가 서류상으로는 35만2000명으로 막강한 규모였지만, 실제로 가용한 병력은 약 9만6000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탈레반의 병력이 6만 명 정도임을 감안하면, 압도적인 규모가 아니었던 셈이다. 미국이 제공한 장비들은 너무 복잡해서 유지보수가 어려웠으며, 때문에 잦은 고장을 일으켰다. 그로 인하여 그러한 병력들의 상당수도 포위된 기지의 영내에만 묶여 있었다. 많은 병사들이 급여도 받지 못한 채 굶주림에 시달렸고, 사상자도 많았다. 결국엔 아프간 특수부대들의 소수 간부들이 전쟁의 상당부분을 치러야 했는데, 그들만으로는 턱도 없었다.
미국의 철군 결정은 결정적인 한 방이었다. 랜드연구소(RAND Corporation)가 1978년에 출간한 베트남에 대한 연구를 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병력의 철수, 미국 공군력의 축소, 줄어드는 원조 등 물리적인 측면이 가장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러한 결정으로 인해 미국이 자신들을 더 이상 구해줘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심리적인 영향이 더욱 비참한 것이었다.”
친구를 얻고 영향력을 추가하기
서방의 국가들은 곤경에 처해 있다. 처참하게 실패한 그들은 이제 두 가지의 수단을 활용하여 영국의 도미닉 랍(Dominic Raab) 외교부 장관이 말하는 “완화력(moderating influence)”을 행사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두 가지의 수단이란, 새로운 정권에 대한 원조와 외교적인 인정이다. 둘 다 효과가 있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한때 탈레반에게 적대적이었던 이란과 러시아는 현재 그들에게 좀 더 우호적이 되었다. 둘 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당한 굴욕을 즐기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 주재하는 러시아의 대통령 특사인 자미르 카불로프(Zamir Kabulov)는 탈레반의 승리를 한껏 갈채를 보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탈레반은 카불의 꼭두각시 정부에 비해서 훨씬 더 많은 합의를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파키스탄은 탈레반이 탄생했을 때부터 자국의 정보기관이 그들을 키워왔기에, 더욱 첨예한 논평을 내놓았다. 파키스탄의 임란 칸(Imran Khan) 총리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쏟아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들은 노예의 사슬을 끊어냈습니다.”
그러나 탈레반이 외교적으로 거둔 최대의 성과는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와칸 회랑(Wakhan corridor)을 통해서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미국의 철수가 거의 끝나가던 7월 28일, 중국은 탈레반 지도부의 대표단을 톈진(天津)으로 초청하는 쇼를 벌였는데, 그들을 두고 “결단력 있는 군대이며 정치적인 세력”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주장이 사실로 입증된 직후, 중국의 외교관들은 “우호적이며 협업하는 관계”가 되기를 바란다며 환영했다.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가 실제로 어떻게 될지는 부분적으로 국제 지하드 단체들과 탈레반의 연관성에도 달려 있다. 예를 들어서, 중국은 신장(新疆)의 안정을 위협하는 요소로 보고 있는 호전적인 위구르족의 존재를 우려하고 있는데, 이 지역의 다수를 이루는 위구르족은 강력한 탄압을 받고 있다.[2]
이슬람의 극단주의 세력은 2001년 이후로 그 위협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서방의 국가들에게는 오랫동안 관심의 대상이었다. 미국의 토니 블링컨(Antony Blinken) 국무장관은 지난 8월 15일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20년 전에 한 가지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갔습니다. 그 임무는 9월 11일에 우리를 공격한 사람들을 처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테러를 일으킨 단체인 알카에다는 예전에 비하면 애처로울 정도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념은 멀리까지 넓게 확산됐다. 그것은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훨씬 더 악랄한 단체인 이슬람국가(IS)를 비롯하여, 그 외 분파와 독자적인 테러리스트들을 양산했다.
탈레반의 무자히드 대변인은 아프가니스탄이 다시 9.11과 같은 테러의 국제적인 온상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달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이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해 이용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모든 이들을, 특히 미국을 안심시키고 싶습니다.” 그러나 지난달 지하드 단체들을 감시하는 UN의 조사단은 알카에다가 아프가니스탄의 34개 주 가운데 15군데에 잔존해 있는데, 주로 이 나라의 동쪽 변방을 따라서 분포해 있다고 보고했다. 이슬람국가의 현지 분파 역시 여러 지역에 존재하는데, 각 세력들의 규모는 수백 명에서부터 많게는 1만 명에 달하는 곳도 있다. 서방의 정보기관들은 미국이 2011년에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한 이후에 알카에다의 리더가 된 아이만 알 자와히리(Ayman al-Zawahiri)가 병에 걸리긴 했지만 아프가니스탄에 있다고 추정한다. 탈레반이 카불의 풀에차르키(Pul-e-Charkhi) 교도소에서 석방한 수천 명의 죄수들 중 상당수는 강경한 지하드 조직원들이어서 더욱 우려스럽게 하고 있다.
미국의 관계자들은 주의 깊게 지켜보는 정보요원들과 표적화 된 공격이라는 조합을 통해서 테러리스트들을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이 “전방위적인 테러 대응 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 지역에서 미국의 군사력과 외교적인 존재감은 조만간 사라질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자체 첩보기관인 국가안보국(NDS)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설령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서방 세계와는 협업을 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첩보기관들은 대부분 아프가니스탄의 외부에서 채용한 요원들과 신호정보(signals intelligence)[3]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운용할 수 있는 공군기지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사방이 내륙으로 둘러싸인 이 나라의 지리적인 요건이 또 하나의 힘겨운 제약사항이 된다. CIA의 드론들이 한때는 바로 옆의 파키스탄에서 이륙한 적도 있었지만, 현재 파키스탄과 미국의 관계는 최악이다. 미사일이나 전투기가 페르시아만이나 아라비아해의 항공모함에서 날아오를 수는 있지만, 그러려면 이란이나 파키스탄의 영공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들로부터 허가를 받든 말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한 수뇌부들은 베트남과의 비교를 거부하고 있지만, 그래도 비교를 할 수밖에 없다. 두 경우 모두 민간의 지도층과 군부의 지도부가 미국인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 목표는 불확실했고, 파트너들은 신뢰할 수 없었으며, 두 군데 모두 미국이 한 번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문화적 환경이었다. 그러나 많은 차이점이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2452명의 미군 사망자가 발생하며 고통을 안겼지만, 베트남 전쟁은 훨씬 더 참혹해서 무려 25배나 더 많은 미국인들이 죽었다. 그리고 미국 내에서도 상당히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아프가니스탄의 실패가 더욱 뼈아프다. 조지타운대학교의 케이틀린 탈마지(Caitlin Talmadge)는 북베트남 군대가 뛰어난 기갑부대였고, 규모는 탈레반보다 두 배 정도 컸으며, 초강대국의 지원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보다 약세인 탈레반은 남베트남보다 네 배나 넓은 지역을 차지했다.
전 세계에 울려 퍼진 충격
많은 역사학자들은 소비에트연방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중앙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대리국들에 대한 지원을 확대했던 이유의 일부에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으로 약화되었다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중국은 이미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대실패를 미국이 하락하는 것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후퇴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발행하는 강경한 논조의 신문인 환구시보(環球時報)는 지난 8월 16일자 논평에서, 미국의 철군이 “대만의 미래에 대한 전조”라며 떠들어댔다. 그들은 만약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한 수천 명의 사망자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면, 대만에서의 전쟁은 “상상할 수도 없는 대가를 의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만의 전직 국방부 장관이었던 양니엔주(楊念祖)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군이 대만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데 동의했다.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대만이 미국의 지원에 의존하는 대신에 자체적인 방어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럽의 국가들은 미국의 철수가 이미 기정사실화 된 상태에서 자신들에게 알려왔다며 분개했다. 어느 외교관 한 명에게 있어서, 그것은 “미국이 장기적으로 분쟁지역에서 철수하려는 추세를 확인해준 것”이었다. 그는 유럽의 국가들이 중동이나 사헬(Sahel)지역에서 위기가 닥쳤을 때 과연 미국을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의 관계자들도 화가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영국 하원 외교위원회의 위원장이며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되어 복무하기도 했던 톰 투겐다트(Tom Tugendhat) 보수당 의원은 이렇게 말한다. “영국은 유럽의 NATO 회원국들이 단 하나의 우방국과 단 한 명의 지도자의 결정에 의존하지 않게 할 수 있는 비전을 수립해야 합니다.
그러나 미국의 신뢰성에 대한 불만은 오래된 것이다. 유럽의 국가들은 버락 오바마가 2011년에 리비아 사태에 개입하는 것을 꺼렸던 것이나, 2013년에 시리아에 대한 공습을 취소했을 때에도 불만을 드러냈다. 2019년에 이란이 사우디의 석유 시설들을 공격했지만, 트럼프가 이란을 응징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걸프만 국가들은 조바심을 냈다. 대만은 미국이 1979년에 공산 중국을 외교적으로 정식 승인해주면서 미국으로부터 이미 배신을 당한 경험이 있지만, 어쨌든 그들에게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의 철군 방식이 미국의 변덕스러움을 드러내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또한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러시아와 중국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들로부터 등을 돌리는 동맹국들은 거의 없다. 시드니의 싱크탱크인 로위연구소(Lowy Institute)의 마이클 풀릴러브(Michael Fullilove)는 “이것은 미국에게 커다란 타격”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의 계산법은 바뀌지 않았다”고 말한다. 일본은 우려하고 있는지를 물었을 때, 도교의 어느 고위공직자 한 명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뇨,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가니스탄이고, 일본은 다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