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말 외환 위기 시절에 10대를 살아낸 세대, 지금의 30대를 흔히 ‘IMF 키즈’라고 부른다. 격동의 시대를 거친 유년 시절의 상흔이 그 이후의 삶과 가치관을 좌우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보다는 작은 규모이지만, 한 직능 집단 안에서도 구성원들의 운명과 사고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일들이 일어난다. 의사 집단 내에서 한 세대의 사고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큰 사건을 꼽는다면, 20년 간격으로 일어난 두 차례의 파업[1]이다. 의약 분업 파업과 공공 의대 파업. 전자는 전문가 권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후자는 전문가 수(數)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계기가 되어 벌어진 집단행동이다.
어쭙잖은 작명일지 모르지만, 나는 ‘의약 분업 파업 키즈’다. 의사가 처방한 약을 약국에서 사는 지금의 당연한 절차가 2000년도 이전까지는 없었다. 의사는 자신이 처방한 약을 자신의 병·의원에서 지어 팔았고, 약사는 전문 의약품인 항생제, 스테로이드를 처방 없이 팔 수 있었다. 이 상황을 말 그대로 ‘의사는 처방만, 약사는 조제만’ 하도록 정리한 것이 의약 분업인데, 이 결정은 의사와 약사 집단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특히 의사들은 장장 6개월에 이르는 파업까지 강행했다.[2] 의대생들도 동맹 휴업에 들어갔는데 당시 졸업반이었던 나는 12월에 파업이 풀리면서 간신히 졸업하고 의사 면허를 딸 수 있었다.
2020년 공공 의대 파업이 그랬듯, 2000년의 파업도 종합 병원에서 수련 중인 20대의 젊은 의사들과 의대생들이 주도했다. 이제는 40대가 된 의약 분업 파업 세대가 의사로서 커리어 초반에 파업을 겪으며 마음에 새긴 단어는 각자도생(各自圖生)과 불신(不信)이었다. 전문가의 권한을 지키기 위해 파업까지 불사했지만, 국가와 사회는 이를 존중하지 않았다는 기억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았다. 의사로서의 사명감과 책임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누구도, 심지어 법과 면허라는 제도도 그 권한을 지켜주지 않으며, 우리는 언제든지 공격받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있었다. 사회와 국민 건강에 공헌하는 전문가이자 지식인이라는 자의식은 내부에서 냉소의 대상이 됐다.
한마디로 그들은 집단적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에 빠졌는데, 이는 지금도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싶다. 번아웃 증후군의 특징은 에너지의 고갈, 업무와 관련된 부정적인 관념, 그리고 업무 효율의 감소다. 환자를 진료하는 것에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지쳐가는 것이 개인적인 번아웃이라면, 집단적 번아웃은 의사들이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다할 에너지가 없고 그럴 이유조차 찾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2020년에 의대를 다닌 ‘공공 의대 파업 키즈[3]’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난해 9월 초, 최대집 대한의사협회장이 정치권과 합의하고 파업을 풀기로 한 다음날이었다. 한 의사 커뮤니티에는 “우리의 의사 국가시험(국시) 응시 거부가 정부에 대항하는 마지막 카드가 될 수 있다”는 어떤 의대생의 비장한 글이 올라왔다. 당시에 이 글을 보고 느낀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이들이 느끼는 억울함과 비관의 정서가 나를 비롯한 기성세대가 상상한 것 이상의 강도라는 점이다. 앞서 말한 번아웃의 정서가 이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된 것으로 보이는데, 능력주의를 내면화해 성공 가도를 달려오다 다시금 불확실성을 맞닥뜨린 청년 세대의 불안이 더해지면서 비관의 정서는 더 증폭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 이들은 아직 의사가 되지도 않았는데 병원 밖 정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의대라는 공간이 병원보다 더 온실 같은 곳이므로 크게 놀랍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결과적으로 많은 의사가 해당 글에 응원과 격려의 댓글을 달았다. 그 분위기에 압도돼 ‘그래도 시험을 봐야 한다’고 생각하던 소수의 의사가 입을 닫으면서 결국 그들이 현실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날아가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이들은 결국 국시를 보고 면허를 취득하게 되었지만, 그들의 선택이 그들 자신에게는 물론 사회적 논의 과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보건 의료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역할에 대해 전개됐어야 할 논의가 의대생 특혜 논란 및 공정성 담론으로 흘러가 버렸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의사 사회의 정서를 대다수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 당연하다. 누구나 병원에 가면 약자가 되고, 인간으로서의 존재감 상실을 경험하는 상황에서 의사라는 사람들이 환자의 권리와 안녕에 그리 관심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환자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도, 설명을 제대로 하지도 않는 이유가 바빠서 혹은 과로에 시달리기 때문이라면서 정작 의사 수를 늘릴 필요가 없다고 한다. 수능 시험 고득점자만이 능력 있는 의사가 될 자격이 있다는 천박한 엘리트 의식을 스스럼없이 내보일 수 있는 사람들,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진료를 중단할 수 있는 무서운 사람들이다. 우수한 학생들이 의대로 몰리는 현상이 점점 더 심해지는 건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소득 수준이 그만큼 좋다는 방증일 텐데, 도대체 여기서 무엇이 부족해 그들은 좌절하는가? 진정한 좌절이라는 것을 맛본 적 없는 이들의 좌절이 정말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장난처럼 비칠 수도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마치 박완서의 소설 《도둑맞은 가난》의 주인공이 부잣집 도련님에게 느끼는 처절한 모욕감을 떠올렸을 수도 있겠다.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엘리트 의식과 특권을 지키려는 이기심에서 비롯했다는 설명이 바깥에서 볼 때 가장 합리적인 이해 방식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의사들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이 비정규직의 정규화를 반대했던 이유를 “정규직들이 배가 부르고 이기적이어서”라고 설명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이다. 마찬가지로, 의사의 집단행동 역시 도덕적으로만 재단하기 어려운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의약 분업을 비롯해 정부와 갈등을 겪으며 쌓아 온 집단적 번아웃은 이 집단행동의 배경 중 하나다. 전문가인 동시에 자영업자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의사 집단은 내부에서도 다양한 이해관계가 있고 충돌이 많은 데다가, 리더십이 부재하고 조정이 잘 안 된다는 특성이 있다. 결국 이들이 내부에서 합의할 수 있는 공통의 정서인 집단적 번아웃 외에는 결속의 수단이 없는데 이것만이 날것으로 대중에게 드러나 가진 자의 횡포로 비치게 된 것이다.
나는 의사들이 왜 그토록 불친절하고 바쁘며 오만한지, 또 그러는 한편 번아웃에는 왜 빠지는지 말하고자 한다. “그걸 왜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가?”, “당사자들이 알아서 잘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사회 지도층인 당신들이 먼저 달라져야 하지 않나?”라고 묻는다면 아마 잠시 주춤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의사 집단 또는 의사라는 직업 전반에 대한 불신은 의사 자신들에게 독이 될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비용이 커진다는 더 큰 문제를 안고 있다. 당장 아플 때 의지해야 하는 의사가 이기적인 엘리트이자 장사꾼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주하면(이미 많은 분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치료적 인간관계를 형성하기 어렵다. 그뿐만 아니라 의료와 관련한 사회적 이슈에서 전문가가 신뢰를 얻지 못하면 사회 구성원들의 문제 인식과 대응에 차질이 빚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는 코로나19 판데믹이라는 중대한 공중 보건 위기 상황에서 확인했다.
제 한 몸 챙겨 살기도 바쁜 국민에게는 의사들을 이해할 여력이 없다. 좌절한 의사들도 무엇이 문제인지 계속해서 말하는 데 지쳐 버렸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먼저 설명하고 설득해야 하는 쪽은 의사라고 생각한다. 궤변인 것 같지만, 모든 의사는 의사가 아니었던 적이 있으니까. 적어도 의사 면허를 따기 전까지는 말이다. 의사가 본격적으로 ‘국민 밉상’으로 떠오른 의약 분업 파업 직후 면허를 따 진료를 시작하고, 지난 20년간 의료 현장에서 각종 모순을 보고 또 그 모순에 일조해 온 중견 의사로서 왜 이 시스템이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왜 의사들은 좌절하는 것인지 말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 이 책에서는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의 문제들을 통해 의사 집단의 번아웃 현상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진료과별 인력 편중 문제, 짧은 외래 진료 시간, 그리고 낮은 입원 진료 만족도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사실 나는 환자를 보는 임상 의사이고, 이런 문제들을 사회학적으로 다루는 의료관리학이나 분석 도구에 익숙하지 않다. 정교한 분석을 선보일 능력도 부족하다. 여러 이해관계 당사자들을 취재할 능력과 여력도 없어 저널리즘 관점의 글도 쓰지 못할 것이다(누군가는 이런 작업을 해 주기를 바란다). 또한, 수도권의 대형 병원에서 근무하는 전문의 시각에 한정된 이야기라는 점에서 지역, 개원가, 중소 병원의 현장을 담지 못하는 치명적인 한계이자 단점이 있다. 어쩌면 이 책도 우리가 왜 ‘의레기’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열심히 역설하나 대중에게는 가닿지 못한 수많은 글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중과 전문가 사이에 존재하는 언어의 간극을 메꾸는 글을 쓰고 싶었던 사람으로서 도전해 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의료 현장에 발 딛고 있으면서 느끼는 불합리함을 이곳에 있지 않은 이들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옮기기 위해서다. 환자, 의료 소비자, 또는 일반 국민의 관점이 의사와 같을 수는 없겠지만 그 지점을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 가는 것은 여전히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 나의 의약 분업 파업 키즈 동료들은 피곤한 눈을 뜬 채로 “당신은 너무 순진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들을 충분히 이해한다. 사실은 나 역시 피곤하다. 그러나 공공 의대 파업 키즈, 그리고 그 이후 세대의 의사들은 적어도 집단적 번아웃의 정서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또 국민 입장에서 의료 문제를 바라보고 그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