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을 지배하는 성공적인 브랜드 가운데서도 사회적, 문화적 아이콘의 지위에 오르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그 제품이 특정 연령대, 특정 성별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면 아이콘이 되는 일은 더 어려울 것이다. 완구 브랜드 바비(Barbie)는 여성, 소녀를 대상으로 한 브랜드라는 한계를 넘어 애플, 코카콜라 등과 함께 첫손에 꼽히는 아이콘이다.
‘바비 인형’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여러 가지다. 소녀들이 인형을 갖고 노는 모습을 떠올릴 수도 있고, 놀라운 신체 비율의 모델, 핑크색 상자와 화려한 의상을 연상할 수도 있다. 바비의 이미지를 제조사인 마텔(Mattel)에 묻는다면 소녀들의 무한한 꿈과 이상이라 말하겠지만, 《뉴욕타임스》는 바비의 창시자 루스 핸들러(Ruth Handler)의 부고 기사에서 바비를 “미국 팝 컬처의 아이콘, 예술가의 뮤즈이자 페미니즘 정치의 피뢰침”[1]이라고 묘사했다.
바비가 장난감을 넘어 미국 대중문화는 물론 여성의 이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바비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반세기 넘게 이어진 완구 회사 마텔의 브랜딩 전략뿐 아니라, 미국 장난감 시장의 동향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 변화까지 다루는 일이다.
포르노 인형에서 미국 문화의 아이콘으로; 바비의 일대기
1950년대 마텔은 히트작이라고는 장난감 우쿨렐레(Uke-A-Doodle) 하나에 불과했던 미국 캘리포니아의 작은 장난감 회사였다. 마텔의 운명을 바꾼 것은 공동 창업자 중 한 사람인 루스 핸들러와 그의 딸 바바라(Barbara)였다. 핸들러는 바바라가 어른 흉내를 내며 종이 인형을 갖고 노는 것을 발견하고는 종이 인형을 3차원 인형으로 만들 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럽을 여행하던 중 또 하나의 발견을 했다. 바로 빌트 릴리(Bild Lilli) 인형이었다.
빌트 릴리는 독일 타블로이드지 《빌트(Bild)》에 실린 성인용 만화의 캐릭터였다. 화려한 금발 여성으로 낮에는 회사에 다니고 밤에는 부유한 남자를 유혹하는 성적 농담의 대상이었다. 당연히 빌트 릴리는 성인용 인형이었다. 빌트 릴리에 대해 미국 주간지 《타임》은 “총각 파티에서 돌리던, 웃기고 야한 선물(a prostitute gag gift handed out at bachelor parties)”이라고 일축한 바 있고, 《뉴욕타임스》는 아예 ‘섹스 토이(a sex toy)’로 정의했다. 핸들러는 이 인형을 미국으로 가져와 성적 요소를 완화한 10대 패션모델로 설정한 후, 딸의 이름을 따서 바비라고 불렀다.
마텔의 남성 임원들은 바비의 출시를 반대했다. 핸들러가 바비를 1959년 뉴욕 장난감 박람회에 소개하자 장난감 업계의 남성들까지 일제히 반발했다. 설문 조사를 해보니 부모들의 반대 의견도 많았다. 아이들에게 성인 여성의 모양(too much of a figure)을 한 인형을 줄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핸들러는 소녀들을 직접 공략하기로 했다. 디즈니의 아동용 쇼 프로그램 〈미키 마우스 클럽〉의 방영 시간에 대대적인 TV 광고를 실시한 것이다. 미국의 소녀들은 열광했고, 바비 인형은 출시 첫해에만 30만 개가 넘게 팔렸다.[2] 이전까지 소녀들을 위한 장난감은 ‘엄마 놀이’를 할 수 있는 아기 인형 정도였다. 반면 소년들은 카우보이 세트부터 블록까지 다양하게 고를 수 있었다.
동시에 1950년대는 그레이스 켈리(Grace Kelly),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등 전설적인 할리우드 여배우들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핸들러의 말대로 “모든 소녀가 장래의 꿈을 투영할 인형을 필요로 했던” 시기였다. 소녀들의 잠재적 수요가 있었기에 마텔은 시장이 성숙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마텔은 패션 인형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무혈입성했다.
1960년대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미국 대통령은 젊음과 활기를 약속하며 당선됐다. 바비의 패션도 50년대의 조신한 숙녀 스타일에서 경쾌하고 색채감 넘치는 모드(Mod)풍으로 변신했다. 1961년에는 바비의 남자 친구 켄(Ken)이 등장했고, 1962년에는 바비의 집 드림 하우스(Dream House)가 출시되며 바비의 세계가 완성되기 시작했다. 판매량도 증가해서 바비는 미국 소녀 완구 시장의 정상에 올랐다.
1970년대는 베트남전과 반전 시위의 대결 구도 속에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불안감이 커진 시기였다. 히피 문화가 등장하고 60년대 민권 운동 결과로 흑인 문화가 성장했다. 여성 인권 운동에 불이 붙은 시기이기도 하다. 이 무렵부터 바비는 진취적인 신흥 브랜드가 아니라, 기성세력의 일부로서 사회적 비난을 받으며 방어하는 처지가 되었다. 1971년 출시된 말리부 바비(Malibu Barbie)는 캘리포니아 서퍼 걸(Surfer girl)의 이미지를 선보여 히트작이 되었지만, 바비의 성장세는 꺾이고 있었다. 1974년 마텔은 파산 위기에 직면했고 핸들러는 실적을 조작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1975년 사직했다.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 휘하의 1980년대 미국에서 정치의 흐름은 우익으로 급변했다. 여피족, 즉 도시의 젊은 고수익 종사자들이 시대를 주도했다. 소비 중심 문화와 여성의 사회 진출이 겹치며 바비도 화려하게 부활했다. 70년대의 비난을 의식한 듯 바비의 직업도 다양해졌다. 진취적인 이미지를 되찾은 바비는 미국 문화의 아이콘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했다. 1986년에는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Andy Warhol)이 바비를 그린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1990년대에도 바비는 베스트셀러였다. 체조 선수 바비(Gymnast Barbie), 인어 바비(Mermaid Barbie), 제너레이션 걸 바비(Generation Girl Barbie) 등 히트작이 쏟아졌고, 바비 역사상 최다 판매작인 토털리 헤어 바비(Totally Hair Barbie, 발목까지 내려오는 롱 헤어가 특징이다)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마텔은 바비 상품을 본격적으로 다각화했고, 수집가용 바비 제품군도 정착시켰다. 패션 디자이너와의 의상 협업도 확대했다.
그러나 전성기를 재현하는 듯했던 이 시기에 위기도 닥쳤다. 성차별적이고 인종 차별적인,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브랜드라는 비판이 시작됐다. 1992년 출시한 말하는 바비(Teen Talk Barbie)는 바비의 대사가 성 역할의 고정 관념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도마에 올랐다. 1997년에는 오레오 바비(Oreo Fun Barbie)를 만들어 인종 차별 논란을 일으켰다. 1997년에는 휠체어를 탄 바비(Share a Smile Becky)를 만들었으나, 휠체어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난에 직면했다.
2000년대에는 처음으로 등장한 라이벌 브랫츠(Bratz)와 법정 공방을 벌였고, 2010년대부터는 매출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2012년 전 세계 매출의 3퍼센트가 감소했고, 2013년에는 6퍼센트, 2014년에는 16퍼센트가 또 감소했다. 2014년에는 마텔의 주가가 40퍼센트 가까이 폭락했다. 10분기 동안 이어진 매출 감소 후에, 마텔은 2015년 바비를 대대적으로 리브랜딩(rebranding)했다. 그 덕에 2016년 매출이 반짝 증가하는 듯했으나 2017년에는 다시 매출이 감소했다. 마텔은 지난 4년간 세 번이나 CEO를 교체하며 혼란기를 겪고 있다.
부진에도 불구하고 바비는 여전히 마텔 최대의 브랜드이자 10억 달러 규모의 연 매출을 자랑하는 세계적 베스트셀러다. 마텔은 2009년까지 150여 개 국가에서 총 10억 개 이상의 바비 인형을 판매했다. 《타임》에 따르면 미국의 3~12세 소녀 가운데 92퍼센트가 바비 인형을 소유한 적이 있다.
바비는 미국의 유년기와 자본주의를 동시에 상징하는 문화적 아이콘으로서 장난감 이상의 대우를 받고 있다. 1974년에는 뉴욕시 타임스퀘어 일부가 일주일 동안 바비의 거리(Barbie Boulevard)로 불린 적이 있다. 1976년에 묻은 미국 타임캡슐에는 바비와 남자 친구 켄이 포함되었다. 2002년에는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스타들의 손자국이 새겨져 있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명소 명예의 거리(Walk of Fame)에 바비의 손발이 새겨지기도 했다. 바비 탄생 50주년이었던 2009년에는 축하 행사의 일환으로 뉴욕 패션위크에서 바비 런웨이 쇼가 열렸는데, 쇼에서 바비에게 의상을 헌정한 디자이너는 베라 왕(Vera Wang), 캘빈 클라인(Calvin Klein)을 포함한 50명의 스타 디자이너들이었다. 2016년에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700개 이상의 바비 인형들과 바비에서 영감을 받은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을 선보인 바비 전시회가 열렸다.
그러나 바비가 늘 환대를 받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는 바비를 두고 “미국 소비주의의 늘씬한 상징”이라 비꼬았다. 1997년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끈 덴마크 밴드 아쿠아(Aqua)의 히트곡 〈바비 걸(Barbie Girl)〉은 바비와 켄을 성적으로 묘사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마텔은 명예 훼손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이 곡이 미국 수정 헌법 1조의 보호를 받는 패러디라고 판결했다.
바바라 밀리센트 로버츠
소비자가 캐릭터에 몰입하게 하려면 사람과 같은 프로필과 스토리가 필요하다. 바비는 프로필 수준이 아니라 비공식 전기까지 있는 살아 숨 쉬는 캐릭터다.
바비의 풀 네임은 바바라 밀리센트 로버츠(Barbara Millicent Roberts)다. 고향은 미국 중부 위스콘신(Wisconsin)주의 가상의 도시 윌로우즈(Willows)이고, 생일은 바비가 뉴욕 장난감 박람회에 처음 선보인 날인 1959년 3월 9일이지만 나이는 영원한 10대 후반으로 설정되어 있다.
바비는 수동적으로 옷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아니라 옷의 판매를 돕는 10대 패션모델로 설정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바비는 처음부터 직업이 있었다. 현재까지 바비가 경험한 직업은 우주 비행사부터 대통령까지 150가지가 넘는다. 하지만 본업은 패션모델이기 때문에 비현실적 체형을 유지하면서 옷과 액세서리를 끝없이 수집한다.
바비의 성격은 바비의 비즈니스 모델에 최적화되어 있다. 바비가 세상에 나온 1950년대의 엄마들은 딸이 빨리 자라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여자의 생계 수단은 사실상 결혼뿐이었던, 어른이 된다고 해서 좋을 것이 없는 시대였다. 바비는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의 꿈을 충족시켜 주면서도, 엄마들에게는 딸이 곱게 성장해 훌륭한 남편을 사로잡을 것이라는 꿈을 제공하는 이상형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바비에게는 반항아 기질이 없다. 바비 이외의 제품군, 즉 서브 캐릭터들을 출시하려면 친구가 많아야 한다. 동시에 수시로 새로운 의상을 탐내야 한다. 바비 인형은 아이들을 바비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열쇠이고 수익을 창출하는 것은 옷과 액세서리다. 최초의 바비 인형이 3달러에 팔려 나갈 때, 최신 유행에 맞춰 제작된 바비의 옷은 1~5달러에 판매됐다. 마텔은 시장 지배적 지위를 형성한 후에도 바비 인형의 가격을 10달러대의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유지하고 있다. 바비를 갖고 노는 소녀들은 바비 인형과 자기를 동일시하고 미래를 상상한다. 바비가 가진 물건들을 통해 소녀들이 대리 만족을 느끼는 지점에서 바비의 비즈니스 모델이 성립되는 것이다.
종합하면 바비는 상냥하고 친절하며, 패션에 대한 열정과 상상력은 충분하지만, 어디까지나 소비 지향적인 소녀다. 이런 성격은 미국 사회가 경제적 번영 속에 소비를 중시하던 80~90년대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성이 사회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쇼핑 정도였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성격의 소녀는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마텔은 바비의 성격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바비 공식 인스타그램[3]은 바비의 성격을 이렇게 설명한다. 바비에게 친구가 많은 것은 “타고난 리더”이기 때문이고, 다양한 직업을 시도하는 것은 “끝없는 열정과 결단력” 때문이다. 늘 새로운 의상과 드림 하우스를 구입하는 것은 바비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1960년대 랜덤 하우스 출판사가 출시한 바비 소설 시리즈는 바비의 성장 배경을 이야기하고 있다. 바비의 세계에 가장 먼저 등장한 인물은 1961년 출시된 남자 친구 켄이었다. 바비가 누군가의 여자 친구라는 설정이었다기보다는 켄이 바비의 최종판 액세서리(ultimate accessory)[4] 역할을 했다. 1963년에는 바비의 첫 친구 미지(Midge)가 출시되었고, 1964년에는 바비의 동생 스키퍼(Skipper)가 등장했다. 이후 바비의 형제자매는 6살 막냇동생 첼시(Chelsea)까지 총 7명으로 불어났다. 이외에도 바비는 꾸준히 사촌과 친구를 늘리고, 40종이 넘는 애완동물과 시대마다 진화하는 드림 하우스를 보유하고 있다. 핑크색 컨버터블부터 캠핑카까지 다양한 종류의 차량도 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가진 바비에게도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부모다. 랜덤 하우스의 소설에서 바비의 부모는 조지 로버츠(George Roberts)와 마가렛 로버츠(Margaret Rawlins Roberts)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멀쩡히 살아 있다는 설정이지만 한 번도 인형으로 제작된 적은 없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기를 꿈꾸는 것은 부모로부터의 독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많은 아이들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것들만 있는 세상을 꿈꾼다. 바비의 부모님 인형이 없고, 디즈니 만화 주인공들부터 해리 포터까지 아동 콘텐츠의 주인공 대부분이 고아이거나 편부모 슬하인 이유다.
바비에게는 아기도 없다. 바비 이전의 인형들이 주로 아기 모양이었고 소녀들이 엄마 역할을 하면서 인형을 돌보는 콘셉트로 판매됐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1960년대 초 소비자들이 바비의 아기 인형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지만, 마텔은 바비를 성장시켜 엄마로 만드는 대신 남의 아기를 돌봐 주는 콘셉트의 베이비시터 놀이 세트(Barbie Baby-Sits)를 제작했다.
핑크, 블론드, 포니테일
통상 대기업의 브랜딩이라면 세련된 로고나 태그 라인, 패키지 디자인이 떠오른다. 마텔도 바비의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 디자인부터 마케팅까지 많은 자본을 쏟아붓고 있다. 목적은 소녀들의 꿈과 이상이라는 바비의 이미지를 사용자인 소녀들과 구매자인 부모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시각적 메시지의 핵심인 색상을 보자. 바비 하면 떠오르는 색상은 밝고 선명한 연분홍색이다. 마텔이 바비 로고, 상자부터 웹사이트까지 수십 년 동안 일관되게 이 색상을 사용한 덕택이다. 색채 전문 회사 팬톤의 색상 PMS219는 아예 바비 핑크(Barbie Pink)로 불린다.
연분홍색은 여성스러움, 달콤함을 상징한다. 채도와 농도에 따라 느낌이 다른데 선명할수록 젊음과 활기를 연상시키고 연할수록 따뜻한 느낌이 강하다. 바비는 어린 소녀들부터 10대까지 선호하는 선명한 연분홍색을 채택했는데, 아이스크림 브랜드인 배스킨라빈스도 유사한 연분홍색을 사용하고 있다. 연분홍색을 사용하는 또 다른 브랜드로 미국의 온라인 섹스 토이 유통업체 베이브랜드(Babeland)가 있다. 업계가 다를 뿐 색상의 취지는 바비와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