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이 집권하기 전 중국인에게 인터넷은 점차 생기가 넘치는 정치 공간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정교한 온라인 검열을 실시하고 있다.
2015년 12월, 수천 명의 테크 기업 경영자와 애널리스트, 국제 조직의 주요 인사가 제2회 세계인터넷대회(World Internet Conference)
[1]에 참석하기 위해 중국 저장성 우전(乌镇)에 모였다. 개회식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 인터넷의 미래 비전을 제시했다. 시 주석은 타국의 내정 간섭을 경고하면서 “개개의 국가가 자국의 인터넷 발전 방향(cyber-development)을 독자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 있던 어느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시 주석은 이미 중국의 인터넷을 공산당이 면밀하게 감시하고 관리하는 세상으로 구축했다. 최근 몇 년간 중국 지도부는 온라인 콘텐츠를 통제하는 데 더욱 많은 자원을 투입해 왔다. 중국 정부의 이러한 정책은 중국의 블로그 플랫폼인 시나 웨이보(新浪微博, 트위터와 유사한 서비스)의 게시물 수가 극적으로 감소하는 결과를 낳았고, 개혁과 인터넷 개방을 지지하는 중국의 가장 중요한 목소리를 잠재웠다.
중국의 인터넷이 늘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시진핑이 2012년 주석에 오르기 전까지 인터넷은 중국인에게 전례 없는 수준의 투명성과 소통 능력을 부여하고 있었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과감한 개혁을 주장하던 몇몇 유명 블로거들은 수천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렸다. 시민들은 가상사설망(VPN)
[2]을 이용해 차단된 웹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들은 온라인상에서 연대했고, 온라인 청원과 더불어 물리적 시위를 조직해 당국에 책임을 물었다. 2010년 중국 관료 3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응답자의 70퍼센트가 개인 신상이나 사생활의 오점이 인터넷에 유출될까 봐 두렵다고 답했다. 중국 시민 6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도 응답자의 88퍼센트가 공직자들이 이처럼 불안을 느끼는 것이 좋다고 답했다.
그러나 시 주석에게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는 차이가 없다. 양쪽 모두가 동일한 정치적 가치와 이상, 기준을 반영해야 한다. 이를 위해 중국 정부는 온라인 콘텐츠를 감시하고 검열하는 기술을 향상하는 데 투자해 왔다. 수용 가능한 콘텐츠를 법률로 규정했고, 새로운 규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혹독하게 처벌했다. 시 주석 집권기에 외국 콘텐츠 기업의 중국 내 접속 수는 감소했다. 급속히 성장하는 중국의 온라인 경제를 중국 회사가 지배해야 한다는 시 주석의 열망과 이념 전쟁이 외국 콘텐츠 기업을 밖으로 내몰고 있다.
중국 내에서 시 주석은 정보 흐름의 자유를 최우선하는 서구 버전의 인터넷은 중국 정부의 가치를 배척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외적으로는 무엇이 해로운 콘텐츠인지 결정하는 것은 중국의 주권이라고 주장한다. 시 주석은 인터넷을 통제하려는 노력이 독재 정권의 취약성을 잠재적으로 드러내는 징표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블로거 마이클 앤티(Michael Anti)의 표현을 빌리자면 ‘차이나넷(Chinanet)’
[3]의 비전을 다른 국가들이 따르는 본보기로 만들고자 한다.
중국 지도부의 과제는 기술이 정치적 변화를 가속화하지 않으면서 인터넷의 장점인 상업과 혁신 증진을 유지하는 것이다. 시 주석은 차이나넷을 유지하기 위해 경제 개발과 정부 신뢰도, 시민 사회 발전, 창의적 표현 측면에서 기꺼이 대가를 치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터넷은 사회 변화와 인권 증진을 바라는 시민들에게 여전히 강력한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고양이와 쥐의 쫓고 쫓기는 경기가 벌어지고 있는데, 고양이보다 쥐가 훨씬 더 많은 셈이다.
1990년대 말 팡빈싱은 인터넷 데이터를 사찰하는 황금방패 개발을 이끌었다. 2000년대에 이르러 그는 ‘방화장성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미국의 레이 톰린슨(Ray Tomlinson)
[4]이 세계 최초로 이메일을 전송한 지 16년이 지난 1987년 9월, 중국에서 첫 이메일이 발송됐다. 그 메일은 “우리는 만리장성을 넘어 세계 곳곳에 닿을 수 있다”는 득의양양한 메시지를 전파했다. 초기 몇 년간 중국 정부는 학자와 공무원에게 인터넷을 허용했고, 마침내 1995년 일반 대중에 개방했다. 1996년 중국의 인터넷 이용 인구는 15만 명에 불과했지만 정부는 이 해를 ‘인터넷의 해’로 여겼고, 중국 대도시에 인터넷 클럽과 카페가 들어섰다.
중국 정부는 열성적으로 인터넷 지지를 선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통제하는 조치도 가동했다. 옥스퍼드대학교의 중국 전문가인 로지에 크리머스(Rogier Creemers)는 “인터넷이 공공이 접근 가능한 정보와 소통의 플랫폼이 되면서, 정부의 감독 아래 있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단지 그러한 통제를 어떻게 실행할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고 말한다. 1997년 중국 정부는 국가 안보나 국익을 해치기 위해 게시한 것으로 보이는 온라인 게시물을 불법화하는 최초의 법안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중국 지도자들의 우려는 적중했다. 시민들은 인터넷에 내재된 정치적 잠재력을 빠르게 알아차렸다. 1998년 30세의 소프트웨어 공학자 린하이는 미국을 거점으로 하는 민주주의 옹호 잡지에 중국의 이메일 주소 3만 개를 전달했다. 린하이는 당국에 체포됐고, 온라인에서만 벌어진 정치 범죄 혐의를 다룬 중국 최초의 재판을 받고 결국 수감됐다. 이듬해에는 영적인 집단인 파룬궁이 자유로운 수행이 불가함을 항의하기 위해 공산당의 심장부인 중난하이(中南海) 주변에서 1만여 명의 추종자들이 참여하는 침묵시위를 조직했는데, 여기에 이메일과 휴대 전화가 이용됐다. 정부가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열린 이 집회는 중국 정부로 하여금 파룬궁 수련자들을 계속 박해하고, 인터넷 통제를 강화하기로 새로이 결심하는 계기가 됐다.
이 시기 중국 정부의 기술적인 대응을 이끈 인물이 바로 팡빈싱(方濱興)이다. 1990년대 말 팡빈싱은 ‘황금방패’ ― 중국 정부가 어떠한 수·발신 데이터라도 사찰하고, IP 주소와 도메인명을 차단할 수 있게 한 변형 소프트웨어 ― 개발을 주도했고, 정치적 입지의 급상승으로 공로를 인정받았다. 2000년대에 이르러 그는 ‘방화장성
[5]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고, 결과적으로 중국 인터넷 사용자 수십만 명의 원성을 샀다.
2000년대 초반 내내 중국 지도부는 중국 인터넷에 접속하는 모든 사람이 중국 법규를 따르도록 다양한 규제를 도입해 팡빈싱의 기술을 보완했다. 2000년 9월 국무원은 인터넷 서비스 업체가 자사 서비스를 통해 발송하는 정보가 법률을 준수하고, 일부 도메인명과 IP 주소를 기록하도록 하는 292호 명령(인터넷정보서비스관리방법)을 공포했다. 2년 후에는 구글을 최초로 봉쇄했다(몇 년 후 구글은 검열 버전인 구글 중국어판 Google.cn을 개설했지만, 결국 2010년 중국 시장에서 철수한다). 2002년에는 법률, 정당함, 신뢰도, 정직을 애국적으로 준수한다는 네 가지 원칙을 정립한 ‘중국인터넷업계 자율규제 서약(中國互联网行业自律公約, the Public Pledge on Self-Discipline for China’s Internet Industry)’을 만들어 기업의 자체 검열을 강화했다. 야후를 포함한 100여 개의 회사가 이 서약에 서명했다.
아마도 가장 중대한 상황 변화는 2004년 인터넷 검열 지침이 도입됐을 때다. 중국 정부는 중국 대학이 인터넷 평론원을 고용해 온라인 토론을 정치적으로 수용 가능한 방향으로 지도하고, 중국 법률을 따르지 않은 발언은 신고하도록 했다. 인터넷 평론원들은 게시물당 지급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사례비를 따서 ‘우마오당(五毛黨)’, 영어로는 50센트당(50-cent party)’으로 불렸다.
이처럼 중국 정부가 개인의 정보 접근을 제한하기 위해 분투했지만, 많은 시민들이 괄목할 만한 수준으로 중국 정치계를 파고들었다. 그들의 주요 목표는 부패한 지방 관료들이었다.
2012년 베이징에서 발생한 홍수는 정부의 무능함뿐만 아니라, 온라인 커뮤니티가 어떻게 현실 커뮤니티로 변모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줬다.
2009년 5월 후베이성의 한 호텔에서 일하던 젊은 여성 덩위자오(鄧玉嬌)가 매매춘 제의를 거절하자 자신을 성폭행하려 한 당 간부를 칼로 찔러 죽였다. 사건 발생 초기에 경찰은 덩을 정신 병원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유명 블로거인 우간(吳淦)이 덩위자오의 사건을 공론화했다. 우간은 인터넷 사용자들이 협업해 특정한 개인이나 기관의 정체를 밝혀내는 ‘인육수색(人肉搜索)’
[6]이라는 방법을 이용해 당 관계자의 행동과 사건을 파헤치는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우간은 당시 《디 애틀랜틱(The Atlantic)》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육수색의 문화적 의의는 이렇다. 비민주적인 나라에서 사람들은 정보를 얻는 수단에 제한이 있다. (…) 하지만 시민들은 인터넷을 통해 정보에 접근할 수 있고, 거짓과 진실을 드러낸다.” 덩위자오 사건은 젊은이들이 베이징에서 “누구나 덩위자오가 될 수 있다”고 적힌 팻말을 들고 집회를 열면서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결국 법원은 덩위자오의 행동이 정당방위였다고 판결했다.
후진타오 집권 말기이던 이 시기에 인터넷은 중국 시민들이 관료들에게 책임을 물리는 기제로 작동하며 점점 더 강력해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덩위자오 사건처럼 지역 수준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해결을 보는 정도였지만, 몇몇 사건은 베이징의 중앙 당국에까지 이르렀다. 2011년 7월 23일 해안 도시 원저우(溫州)에서 고속열차가 탈선해 최소 40명이 숨지고 172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고가 발생하자 중국 당국은 기자들의 취재를 금지하고 ‘당국에서 배포한’ 정보만을 사용하게 했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은 증거물 조사 없이 곧바로 매장되고 있는 기차 잔해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은 급속히 전파됐고, 정부의 목표가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키웠다.
시나 웨이보에서 실시한 설문 조사 ― 나중에 차단당했지만 ― 에 따르면 설문 참여자의 98퍼센트(6만 1382명)가 기차 잔해가 묻힌 것은 증거 인멸을 의미한다고 응답했다. 온라인에서는 “우리가 천국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기차표 한 장이면 갈 수 있다”, “철도부는 여러분이 천국당 특급열차에 탑승하실 것을 열렬히 요청합니다” 같은 씁쓸한 농담이 퍼졌다. 여론의 압박으로 충돌 사고의 전면적 수사가 이뤄졌고, 12월 말 정부는 부실 설계된 신호 장비와 불충분한 안전 조치를 사고 원인으로 꼽은 보고서를 내놨다. 이 사고로 54명의 공무원이 징계 처분을 받았다.
또한 인터넷은 튼튼한 시민 사회 조직이 부족한 중국 시민들에게 새로운 공동체 의식을 제공했다. 2012년 7월 베이징에 발생한 엄청난 홍수로 주민 6만 5000명이 대피하고 최소 77명이 숨졌다. 피해 규모는 19억 달러로 추정됐다. 지역 공무원들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전해진 바로는 경찰이 주민을 지원하기는커녕 오도 가도 못하는 차량에 딱지를 끊었고, 조기 경보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이징의 인터넷 사용자들이 고립된 시민들에게 자신의 집과 음식을 자발적으로 내어 주는 등 놀라울 정도로 지원이 넘쳐났다. 불과 24시간 사이에 웨이보에는 홍수 관련 메시지가 880만 건이 올라왔다. 홍수 이야기는 정부의 무능함뿐만 아니라, 온라인 커뮤니티가 어떻게 현실 커뮤니티로 변모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줬다.
중국 정부는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에 대해 엄격한 규제를 도입하는 한편, 만리대포를 개발해 인터넷 검열에 방해가 되는 해외 서비스에 디도스 공격을 감행했다.
중국 인민이 인터넷을 이용하는 방식들을 탐구하는 동안, 지도부 역시 인민의 관심사를 더 잘 파악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새로운 방법 등 인터넷이 제공하는 힘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터넷이 점점 더 반대를 위한 수단이 되면서, 지도부 내에서는 중앙 정부를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의 대규모 정치 시위를 동원하는 데 쓰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높아졌다. 정부는 일련의 기술적 보완과 정치 지침으로 대응했지만, 인터넷 생활의 경계는 계속 확장됐다.
2012년 시진핑의 등장은 게시물을 삭제하고 규제 법안을 통과시키는 수준을 넘어서는 새로운 결의를 가져왔다. 중국 정부는 인터넷 콘텐츠가 공산당의 이익에 보다 적극적으로 기여하기를 바랐다. 현실 세계와 마찬가지로 가상 세계에서도 공산당은 반대 의견을 잠재우고, 당원들이 당의 가치를 지지하도록 동원하고, 외래 사상이 중국의 정치와 사회생활에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움직였다. 시 주석은 2013년 8월 누출된 연설에서 “인터넷은 여론 투쟁의 주된 전장이 됐다”며 암울한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임기 초기 시 주석은 소셜 미디어 세계를 포용했다. 2012년 말에 등장한 ‘시 주석한테 배우는 팬 모임(Fan Group to Learn from Xi)’이라는 웨이보 그룹은 중국의 선전 담당자들을 미소 짓게 했다(계정 소유자는 부인했지만, 많은 중국인이 이 계정을 정부 관계자가 관리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시 주석은 자신의 허베이성 방문을 관영 언론이 웨이보에 생중계하는 것을 허용했고,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不知該怎麼稱呼你, How Should I Address You)’라는 인기 뮤직비디오를 포함해, 시 주석의 산간 마을 순시를 담은 영상들은 중국 정부의 디지털 선전 기술이 향상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시 주석 시대 중국 정부는 인터넷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신기술도 개발했다. 2015년 1월 정부는 시민들이 방화장성을 회피하기 위해 사용하던 수많은 VPN을 차단했다. VPN이 다국적 기업과 은행, 소매업체 등을 지원하고 있어서 중국 경제에 너무나 유용하기 때문에 정부가 엄중히 단속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외부 관측통들에게는 놀랄 만한 조치였다.
2015년 봄 중국 정부는 만리대포(Great Cannon)를 출시했다. 중국을 넘나드는 트래픽을 차단하는 능력을 갖춘 방화장성과 달리, 만리대포는 인터넷에 떠도는 콘텐츠를 조정하고 대체할 수 있다. 만리대포의 첫 번째 목표물 중 하나는 미국의 코딩 및 소프트웨어 개발 사이트인 깃허브(GitHub)였다. 중국 정부는 만리대포를 이용해 바이두(구글과 유사한 중국의 검색 엔진)에서 재전송한 트래픽으로 깃허브를 압도해 버리는 분산 서비스 거부(DDoS) 공격을 펼쳤다. 깃허브가 《뉴욕타임스》의 중국어판, 그리고 중국 정부의 인터넷 검열을 피할 수 있도록 돕는 인기 VPN인 그레이트파이어(GreatFire.org)와 연결한 페이지를 제거하도록 압박하려는 의도였다.
시 주석의 여러 정책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온라인에서 이용 가능한 콘텐츠의 성격을 제한한 것이다. 2013년 8월 중국 정부는 ‘칠조저선(七條低線, 온라인에서 지켜야 할 7가지 기준)’
[7]이라는 새로운 규제책을 발표했다. 중국의 인터넷 기업들은 즉각 반응했다. 시나는 새 법규를 준수하지 않는 웨이보 계정 10만 개를 폐쇄하거나 ‘처리’했다.
중국 정부는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에 대해서도 엄격한 규제를 도입했다. 2013년 9월 중국 최고인민법원(대법원)은 고의적으로 소문이나 거짓말을 퍼뜨리고, 5000명 이상이 보거나 500회 이상 공유된 온라인 게시물의 작성자를 명예훼손죄로 최대 3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2016년 7월 허베이성 대홍수 때 소설 미디어를 통해 사망자 수와 홍수 원인에 대해 ‘가짜 뉴스’를 퍼뜨린 혐의로 세 명이 구속됐다. 홍수 관련 게시물과 사진, 특히 희생자 사진이 검열의 대상이었다.
여기에 더해 시진핑 정부는 소셜 미디어에서 팔로워가 많아 공산당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개인을 겨냥하기 시작했다. 2013년부터 온라인 인플루언서에 대한 규제가 실시되면서 중국의 인터넷 생활에 중대한 전환이 일어났다. 온라인 토론은 정치에서 벗어나 개인적이고 덜 민감한 쟁점으로 이동했다. 시나 웨이보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웨이보 이용자 160만 명을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웨이보 게시물의 수가 2011년과 2013년 사이에 70퍼센트가 감소했다.
중국 정부는 소셜 미디어에서 연간 4억 4800만 개의 게시물을 조작, 게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게시물 수동 삭제를 위해 10만 명이 정부와 민간 기업에 고용되어 있다.
공산당은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정보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인터넷을 통제한다. 방화장성과 황금방패 같은 정교한 기술을 채택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러나 영향력 면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정책 실행을 위해 꾸린 사이버 부대일 것이다.
인터넷에서 여론을 모니터하고 콘텐츠를 검열하기 위해 고용된 사람들 ― 완곡한 표현으로 ‘인터넷 여론 분석가’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 ― 의 수는 2013년에 200만 명으로 추산됐다. 이들은 정부의 선전 부서와 민간 기업, 언론 매체 등에 고용된다. 2016년 하버드대학교에서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소셜 미디어에서 연간 4억 4800만 개의 게시물을 조작, 게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상당한 양의 검열이 게시물을 일일이 수동으로 삭제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는데, 이를 위해 약 10만 명이 정부와 민간 기업에 고용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민간 기업들 또한 인터넷 검열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민간 인터넷 업체들이 그들이 운영하는 사이트를 검열하는 데 깊이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인터넷 학자인 궈빈 양(Guobin Yang)은 “인터넷 콘텐츠 통제의 민영화라고 말해도 비약이 아닐지 모른다”고 말한다. 민간 기업의 인터넷 검열은 몇몇 거물 IT 기업가가 정치직을 가지고 있기에 한층 간단해진다. 예컨대 휴대 전화 업체인 샤오미의 창업자이자 CEO인 레이쥔(雷軍)은 전국인민대표대회(중국의 국가 의사 결정 기관이자 집행 기관) 대표이고, 바이두의 회장 리옌훙(李彦宏)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중국의 정책 자문 기구) 위원이다.
시진핑 정부가 인터넷 통제를 강화하면서 대가를 치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효율적으로 작동하지 않거나 정보 접근을 제한하는 인터넷은 경제 성장을 지연시켰다. 중국의 인터넷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악명이 높고, 속도로는 세계 91위에 그치고 있다. 《뉴요커(New Yorker)》의 작가 에반 오스노스(Evan Osnos)는 시 주석 임기 중 중국 인터넷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2015년에 얼마나 많은 나라가 인터넷 접속이 1년 전보다 나빠졌을까?”
특히 중국 지도부가 중요하게 여기는 과학 혁신 또한 위험에 처할 수 있다. VPN 단속 이후 한 중국 생물학자는 ‘과학자들에게 왜 구글이 필요한가?’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소셜 미디어에서 인기를 끌었다. 그 글의 일부다. “만약 어떤 나라가 이처럼 수많은 과학자들이 전문가로서 보내는 단기간의 삶에서 시간을 쪼개 방화장성에 오르는 기술을 탐색하고, 이를 라우터와 컴퓨터, 태블릿과 휴대용 기기에 설치하고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하기를 원한다면 이런 행동이 엄청난 시간 낭비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정말 말도 안 된다.”
중국 지도부의 신뢰도에 미친 악영향은 비용을 가늠하기 어렵다. 방화장성을 비판하는 인터넷 사용자들은 중국의 검열 제도를 조롱하는 말장난을 일삼는다. ‘강국(强國)’과 ‘장국(墻國, 담장국가)’이라는 말이 중국어로는 ‘창궈(qiangguo)’로 발음이 같다는 사실을 이용해 일부에선 중국을 지칭할 때 ‘장국’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콘텐츠 통제를 담당하는 사람들도 널리 조롱당하고 있다. 2010년 12월 팡빈싱이 시나 웨이보에 계정을 개설하자 수천 명의 이용자가 그를 정부의 앞잡이라고 비난하는 욕설을 남겼다. 팡빈싱은 재빨리 계정을 닫았고, 시나 웨이보의 검열관은 ‘팡빈싱’을 검색어에서 차단했다. 한 트위터 이용자는 “차단하는 이가, 차단을 당했으니, 참으로, 시적일세”라는 글을 올렸다. 팡빈싱이 2011년 중국 중부의 우한대학교에서 연설할 때는 몇몇 학생이 그에게 달걀과 신발을 던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을 더욱 강력히 통제할 수 있다면, 중국 정부는 신뢰도에 끼칠 잠재적 피해는 물론이고 경제적, 과학적 비용까지 기꺼이 감수할 것으로 보인다. 국제 사회에서 중국 정부의 사이버 정책은 언론의 자유 같은 가치를 우선시하는 자유 민주적인 세계 질서를 향한 도전의 상징이다. 이는 또한 인터넷 주권을 주장하며 외국의 정보와 투자로부터 자국의 사이버 세계를 폐쇄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세계화의 챔피언으로 선전하려는 중국의 노력에 내재한 역설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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