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로드, 몽골로
기대했던 청명한 이미지와 달리 몽골의 첫인상은 스산한 잿빛이었다. ‘칭기즈 칸 공항’이라는 거창한 이름에 걸맞지 않게 내가 도착한 낡고 한산한 공항의 크기는 버스 터미널만 했다. 영상 통화로만 얘기를 나누던 몽골인 친구가 마중 나와 있었고, 나는 친구의 집에 머무르기로 한 참이었다. 친구의 가족이 모는 차에 몸을 싣고 아침부터 해 질 녘까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종일 달렸다. 어차피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고 연락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몽골인의 머릿속에는 GPS가 달렸을까? 도시를 벗어나며 바라본 차창 밖으론 뿌연 안개와 연기가 마구 뒤섞여 날리는데도 친구의 가족은 능숙하게 차를 몰았다. 어설프게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가 끊기고 모래 먼지 속으로 들어서며 나는 오프로드가 시작되리라 예감했다. 몽골 대제국을 세운 칭기즈 칸의 고향인 헨티 아이막(Khenti aimag)을 거쳐, 가장 먼저 다다른 곳은 칭기즈 칸이 왕으로 추대된 신성지 후흐 (노르Khukh Lake)였다. 모든 곳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여도 걷다 보면 멀리 있었다. 높은 건물이 빽빽이 들어선 한국이 오히려 이질적인 풍경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곳은 겪어 본 적 없는 세상이었다. 누군가 나를 끌고 한참을 돌아다니다 지구의 민머리 한가운데에 던져 놓은 것 같았다.
첫 며칠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몽골과 나 사이에 어색함이 감돌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몇 시인지도 모른 채 해가 뜨고 지는 풍경을 보며 아무런 할 일이 없다는 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만큼 시간으로부터 멀어진 적도 처음이었다. 함께 지내는 몽골인들로부터 몽골의 사회주의 혁명, 급격한 도시화에 대한 역사를 전해 들었으나 그보다 나를 감명시킨 건 그들 생활에 배어 있던 안온함이었다. 시큼한 아롤
[1]과 아이락
[2] 삭는 냄새가 좋았고 물이 귀한 초원에서 물을 길으러 멀리까지 이동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평화로웠다.
잠깐의 몽골 생활은 한국에 돌아온 이후 내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어차피 감당치 못할 것은 내려놓고, 무리한 요구를 거절하는 법도 터득하며 나름의 안식년을 즐겼다. 시간이 약이었는지 나를 찾아 주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고, 마음의 여유가 생긴 덕에 이전처럼 부담스럽지 않게 공연 제안에 응했다.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이 다가올 즈음, 폐막식 공연의 주역으로 서달라는 섭외까지 들어왔다. 연락이 올 거라곤 꿈도 꾸지 못했다. 제안받은 공연은 ‘꽃’을 주제로 한 무대였다. 60명의 무용수와 50명의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호흡을 맞추는 큰 무대였고 무엇보다 모든 음악과 의상, 조명이 나를 중심으로 관객 앞에 서는 기회였다. 나는 장애와 비장애를 포함한 모든 경계를 허무는 꽃이자 세상을 움직이는 역할을 맡았다. 그저 TV에 나오는 홍보 무대를 볼 때마다 ‘나도 저런 무대에 한번 서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무대에, 내가 주역이 되어 폐막식 공연을
마무리했다.
랑그와 파롤의 새로운 규칙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어릴 때까지만 해도 수어가 동물들이나 나누는 야만적인 대화라고 생각했다. 대학원 시절 출전한 미스 데프 월드(Miss Deaf World)
[3]에서 외국 농인 친구들과 교류하며 처음으로 국제 수어를 배웠다. 이후 한국에 돌아왔을 때, 한 지인으로부터 “너가 아무리 말을 잘해도 언젠간 수어도 네게 필요한 언어가 될 거야”라는 말을 들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기술과 인터넷이 발달하고 보청기나 인공 와우만으로 발화가 가능하다 해도 대화의 어려움을 100퍼센트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 불편을 해결하기 위해 문자 통역과 시각적인 수어가 필요했다. 반오십이 넘은 후에야 나는 손로도 말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2016년, 수어로 대화할 수준이 됐을 때였다. 수어를 권유했던 지인의 추천으로 여러 농인이 함께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다이빙 풀에서 기본 기술에 익숙해질 때쯤 진짜 바닷속으로 들어가게 됐다. 바닷속에서는 음성 언어가 불가능한 대신 수어로 소통이 가능했다. 비장애인들은 스쿠버 다이빙에서 몇 가지 수신호를 주로 사용한다. 하지만 수어는 차원이 달랐다. 본인의 안전이나 감정은 기본이요,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수다 수준의 이야기까지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수면 위에선 농인만의 언어인 수어가 물속에 들어가면 장애인, 비장애인 할 것 없이 함께 사용하는 언어였다. 환경에 따라 언어의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는 그렇게 쉽게 깨질 수 있다는 것을 부지불식간에 깨달았다.
수어에 익숙해지며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왔다. 나는 농인인가 난청인인가?
[4] 음성 언어를 쓰기도 하니 비장애인 아닐까? 또 나의 모국어는 무엇일까. 한국 음성 언어일까, 20년 넘게 나를 표현해 온 춤일까, 아니면 제일 늦게 배운 수어일까? 내 안에서 세 가지 언어가 충돌하기 시작했다. 늑대 무리에서 발견된 아이가 사회로 이끌려 나와서도 여전히 늑대처럼 행동하며 평생 문명의 말을 배우지 못했다는 이야기처럼, 나도 ‘평생 어느 한 언어도 완전히 익히지 못한 채 세 가지 언어를 불완전하게 구사하며 살아가진 않을까’라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런 나를 위로해 준 건 소쉬르의 언어 이론이었다. 언어학자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는 언어를 랑그와 파롤로 나누었다. 랑그(Langue)는 추상적인 언어 체계로, 문법과 같이 우리가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여러 사람 사이에서 약속된 것이다. 반면 파롤(Parol)은 구체적인 발화이자 개인의 언술이다. 우리가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할 때, 목소리나 억양 등 개인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발화를 파롤이라 한다. 나는 청력의 소실이 많지 않은 청인으로 비장애인의 랑그를 배우며 자랐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나만의 규칙들이 점차 침범을 만들어 냈다. 그게 춤이나 몸짓, 늦게나마 배운 수어와 같은 나만의 파롤이고 오히려 내가 발레에서 가진 큰 장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체성에 대한 고민, ‘다른 사람들이 쓰는 말을 완전히 배우는 건 영원히 불가능할까’와 같은 고민은 필요 없어졌다.
대신 내가 가진 언어가 어떤 새로운 꿈과 연결될지 고민한다. 한 공영 방송국 라디오에 게스트로 참여했을 때, 담당 PD가 “장애인 관련 프로그램을 10년 넘게 맡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나처럼 구화를 하는 청각 장애인은 처음”이라고 했다. 청각 장애인이 수어로만 대화할 거라고 생각하는 비장애인의 인식이 내겐 충격적이었다. 그때부터 여러 기관에 강연을 나서기 시작하고, 청각 장애인 학생들의 진로 고민을 돕는 멘토링 프로그램도 참여했다. 언젠가는 장애인 예술계 단체를 만들어, 창작 활동을 하는 장애인들이 사회에 나갈 기회를 직접 만드는 CEO가 되겠다는 결심도 했다.
최근엔 지휘 인지 장치 ‘버즈비트’를 사용해 공연했다. 버즈비트는 원래 지휘자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시각 장애인 연주자를 위한 것으로, 지휘자가 팔을 움직일 때 지휘봉에서 나오는 동작을 감지해 진동하는 장치다. 내가 참여한 프로젝트는 청각 장애인을 위한 기술을 추가한 버즈비트를 손목에 착용하고 공연하는 것이었다. 비록 아직은 지휘자의 몸짓에 의존한 장치이지만, 기술이 발달한다면 지휘자 없이 음악에 맞는 진동을 느끼며 마음 편히 연습할 날도 올 것이다.
나는 꿈을 세 가지로 생각한다. 되고 싶다, 하고 싶다, 돼야 한다. ‘되고 싶다’는 건 막연한 바람이다. 누구나 어릴 적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다고 상상할 수 있다. ‘하고 싶다’는 그보단 구체적인 행동이 드러나는 의지다. 하지만 정말로 그 꿈을 이루고자 마음먹으면 내가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이 ‘돼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긴다. 나는 발레에 있어서는 세 가지 꿈을 이미 이뤘다. 그래서 이젠 다른 꿈을 고민한다. 나는 앞으로 발레리나 말고 무엇이 되고 싶고 어떤 일을 하고 싶으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사회적 랑그를 유연하게 넘나들며 나의 세 가지 파롤을 가장 잘 전하는 일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