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맥락에서 두 번째 역풍인 “보호자 지도 권고: 노골적인 가사(Parental Advisory: Explicit Lyrics)” 스티커의 도입이 몰아닥쳤다. 일군의 워싱턴 D. C. 거주 주부들의 캠페인에서 시작된 이 제도는 성적 표현에 대한 검열의 강화를 주된 목표로 삼았다. 이들은 자위와 섹스를 묘사한 신디 로퍼의 〈쉬 밥(She Bop)〉, 프린스의 〈달링 니키(Darling Nikki)〉, 마돈나의 〈드레스 유 업(Dress You Up)〉 등의 노래를 포함하여 ‘부도덕한 15곡(the filthy 15)’ 리스트를 만들고, 워싱턴 정가의 인맥을 활용하여 강력한 입법 로비 활동을 벌였다.[11] 이들은 부도덕한 음반에 대해 X-등급 음란물에 상응하는 규제를 가하라고 요구했다.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음반은 제한된 장소에서 신분증 확인 절차를 거쳐서만 판매하라는 요구였다. 이들의 요구는 결국 관철되지 못했지만, 미국 음반산업협회(RIAA)의 검열과 스티커 부착으로 이어졌다. 이 조치가 강제력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월마트를 비롯한 일부 대형 매장들이 스티커가 붙은 음반의 유통을 거부하기로 결정하면서 해당 음반사와 아티스트에게는 상당한 경제적 타격이 예상되었다. 음반사들은 클린 버전을 별도로 만들어 유통하는 방식으로 변화에 대응했다. 그러나 스티커의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스티커 버전을 구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스티커 버전을 진본으로 간주하여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도 생겨났다. 일시적 역풍은 있었지만 록 음악의 에로티시즘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주류 팝 음악에까지 전파되어 성적인 코드를 대중문화 전반으로 확산시켰다.
억압 속의 여성 섹슈얼리티
아시아의 대중음악은 서양에서 유래한 모더니티의 산물이다. 나라와 지역마다 전통과 접합하여 제각기 독특한 혼종의 형태를 만들어 내기는 했지만, 20세기 아시아 각국 각지의 대중음악 트렌드는 크게 보아 재즈, 로큰롤, 사이키델릭·포크, 디스코, 헤비메탈, 얼터너티브, 힙합으로 이어지는 서양, 그중에서도 미국과 영국의 발전 궤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서양 대중음악의 최신 트렌드를 부지런히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대중음악은 서양의 에로티시즘과 일정한 담을 쌓고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강력한 비트, 자극적인 사운드, 격렬한 스테이지 액션, 약물에의 탐닉, 비명을 지르는 여성 팬들, 정열적인 댄스 플로어까지 서양에서 발생한 모든 것들이 아시아에서도 나타났지만 긍정적인 의미에서 성적으로 의미화된 경우는 드물다. 밴드의 프론트 맨이 아무리 성적으로 ‘활발한’ 삶을 영위해도 그가 섹스 신으로 추앙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의 화려한 편력은 믿거나 말거나식 풍문으로나 전해질 뿐, 성에 관한 모든 것은 침묵이 원칙이었다.
20세기 아시아 각국의 성적 보수주의에서 그 원인의 일단을 찾을 수 있다. 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같은 포스트 식민주의 독재 국가든, 중국, 북한, 베트남 같은 사회주의 국가든,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이란 같은 종교 국가든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들은 지극히 보수적인 잣대로 대중의 성도덕을 규제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는 사회 전반적으로 국가의 직접적 개입이 없어도 성적 표현을 억압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에로티시즘이 피어날 여지는 적었다. 그러나 금욕적인 분위기에서도 성적 욕망과 에너지는 완벽하게 통제되지 않았다. 오히려 억압된 욕망은 미세한 자극에도 터져 나오도록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20세기 아시아 대중음악에서 여성은 바로 이 지점에 위치한다. 여성 가수들은 한편으로 가부장제의 금욕적 규율에 순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남성 청중의 에로티시즘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모순적 위치를 갖고 있었다. 모순 사이의 협상과 규범에 대한 전략적 위반이 아시아 대중음악의 에로티시즘을 형성했다.
20세기 초의 아시아는 극단적 가부장제가 지배한 공간이다. 남성과 여성은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서로 다른 성 역할을 수행하도록 규율되었다. 여성의 공간인 가정을 벗어나 남성의 공간에 들어온 여성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취급되었다. 대중음악은 비교적 일찍부터 여성의 참여가 이루어진 분야다. 비록 가수나 무용수 등 일부 분야에 국한되었을 뿐이지만 대중음악은 여성 엔터테이너에 대한 일정한 수요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 진출을 용인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일반 가정의 규수가 선뜻 이 길에 뛰어들기는 어려웠다. 초창기 여성 대중음악가들이 주로 낮은 신분에서 충원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0세기 초 한국의 여성 가수 중에는 기생이나 작부 출신이 많았고,[12] 이는 아시아 전역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대중음악의 이러한 기원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여성 가수와 성매매 여성을 동일시하는 편견이 만연하게 된 근본 원인이다.[13]
물론 이러한 편견에는 대중 엔터테이너라는 직업의 특성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외간 남성과는 눈도 맞출 수 없는 사회 분위기에서 여성 가수들은 뭇 남성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그들에게 웃음을 던지고 말을 걸며, 육체의 일부인 목소리로 쾌락을 제공했다. 가부장제의 시각에서 이는 성매매와 비슷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당시의 여성 가수들은 남성 관객들의 성적 희롱과 도덕적 비난을 일상적으로 받아넘겨야 했다. 여성 가수들은 처음부터 성애화된 존재로 생산되었다. 그들이 특별히 성적으로 자극적인 행위를 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목소리, 외양, 몸동작, 그들에 관해 만들어진 담론 하나하나가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여성 가수의 몸은 세심하게 관찰되고, 평가되고, 욕망되었다. 그들은 존재 자체로 에로티시즘의 화신이었다.
여성 가수의 에로티시즘을 증폭시키는 데는 기술의 발전도 한몫했다. 방송과 음반이 보급되면서 ‘육체에서 분리된(disembodied)’ 목소리가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언제 어디든 도달하게 되었다. 이는 여성의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 내밀한 가정집 침실에까지 침투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가 지니는 성적 함의는 건전한 주류 사회의 도덕적 공황을 불러일으켰다. 1934년 12월호 《개벽》에는 라디오의 보급이 초래한 도덕적 타락을 개탄한 기사가 실려 있다.
“술 취해서 부르는 요정의 불건실한 기분과 타락한 가사를 기생의 입으로 부르는 그 노랫소리가 가정에까지 매일 밤 드러온다. 이는 자녀 교육에 불소(不少)한 정신상 해독을 받을까 보아 두렵다.”[14]
마이크 기술의 발달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마이크가 광범위하게 활용되면서 가수들은 더 이상 소리를 지를 필요가 없어졌다. 이는 다양한 창법과 보컬 표현의 가능성을 열어젖혔다. 특히 여성 보컬은 속삭임과 호흡, 비음 등을 활용하면서 보다 여성적이고 내밀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압도적인 성량을 과시하는 오페라식 창법은 섹시함과 거리가 있다. 귀에 대고 속삭이듯, 은밀하게 유혹하듯 노래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목소리는 관능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등장했다. 이른바 ‘소리 반, 공기 반’ 창법은 숨소리를 보컬에 포함시킴으로써 성적 욕망 또는 흥분을 표현하는 데 효과적이었다.[15] 중국에서는 이를 기성(气声) 창법이라 부르는데, 1980년에 여성 가수 리구이(李谷一)가 이 창법을 사용하여 〈고향을 그리워함(乡恋)〉이라는 노래를 불러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개혁·개방 이전의 중국에서는 통속 창법의 전형으로 간주된 기성 창법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성 창법은 1986년에야 정식으로 승인되었다.[16]
섹슈얼리티는 젠더 정체성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다. 20세기 아시아의 여성 가수들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부정하는 가부장제의 강요된 여성성에 대해 때로는 대항하고 때로는 타협하면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실험하고, 구축하는 긴 투쟁을 전개했다. 그렇다고 마이크를 상대로 애무를 시연한 티나 터너나 무대 위에서 자위하는 모습을 연출한 마돈나식의 도발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상대적으로 아주 작은 제스처임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디바들의 금기 위반은 억압적 상황에서 성적 표현과 여성의 성적 주체성 확장에 기여했다. 예를 들어 50년대 인도 타밀어 영화의 플레이백 가수[17] 에스와리(L. R. Eswari)는 허스키한 목소리와 역동적인 무대 매너로 가부장제의 허용 한계를 시험했다. 타밀족 문화에서는 맑은 목소리는 선, 탁한 목소리는 악이라는 도식이 확립되어 있었고, 가수는 무대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노래에만 집중해야 했다. 에스와리의 선택은 이러한 요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다. 그는 탁성으로 세속적인 감정을 노래했고, 무대 위에서 몸을 흔들거나 두 팔을 들어 올려 박수를 유도하고 손 키스를 날리는 등 관객과 적극적으로 소통했다. 이처럼 여성이 육체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성적 유혹과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사회적 존경을 박탈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한 것이었고, 결국 그의 행동은 성적으로 매력적인 ‘나쁜 여자(bad girl)’의 페르소나를 구축했다.[18]
70년대 인도네시아의 크론총(keron cong)[19] 가수 왈지나(Waldjinah)는 성적 이미지를 전략적으로 활용한 경우에 해당된다. 젊은 시절 섹스 폭탄(sex bomb)이라 불릴 만큼 성적 매력을 앞세웠던 그는 다른 한편으로는 일정한 선을 넘지 않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왈지나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카인 크바야(kain kebaya)를 입고 무대에 섰다. 그 옷이 인도네시아를 상징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크론총이 고급스런 음악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 카인 크바야의 장점은 공식적이지만 지나치게 공식적이지 않다는 점에 있다. 나는 종종 허벅지까지 트인 카인을 입었는데, 그런 차림으로 나타나면 사람들은 몹시 흥분했다. (웃음) 하지만 너무 많이 노출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20]
20세기 아시아 여성 가수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된 특징은 성적 표현과 관련한 한계를 예민하게 지각한다는 점이다. 사회적 추방이라는 현실적인 위협이 늘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순응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극히 제한된 범위에서 위반을 감행했다. 즐겨 채택한 전략은 중화(neutralization)였다. 이들은 무대 위에서 나쁜 여자나 섹스 폭탄 등의 페르소나를 활용했지만, 사생활에서는 사회적으로 모범적인 여성상을 연기했다. 에스와리는 어린 동생들을 직접 양육하는 동시에, 종교 음악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왈지나는 치밀한 자기 관리를 실천했다. 그는 공개된 장소에서 목격되는 것을 극히 삼갔다. 사람들과의 만남은 주로 집에서 가졌고, 밖에서 모임이 있을 경우에는 가족과 동행했다. 혼자 나가거나 낯선 남자와 함께 있는 광경은 처음부터 만들지 않았다. 이들은 미디어를 통해 노출되는 사생활의 단면을 통해, 성적인 무대 페르소나가 단지 콘셉트에 불과함을 보여 주려 했다. 서양의 경우와 달리 ‘섹스와 마약과 로큰롤’이라는 라이프 스타일은 사생활의 영역으로 연장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