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니 고드리안은 자신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언어 능력이 서서히 없어지는 희귀병인 의미 치매(semantic dementia)를 앓고 있었다. 몇 년 전 해니는 제대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을 때 바로 죽기를 원한다는 유언장을 썼다. 해니의 주치의는 유언장을 검토했지만 그녀가 정말 죽기를 원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주치의는 네덜란드 자발적 안락사 협회(NVVE)가 2012년에 설립한 ‘생명의 종말 클리닉(End of Life Clinic)’에 해니의 사례를 의뢰했다. 이 클리닉은 의사가 안락사를 거부할 때 환자들이 의지할 수 있는 기관이지만, 여기서도 안락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곳의 의사 역시 같은 질문, ‘이 사례가 합법적인가?’를 고려하기 때문이다.
안락사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기 1년 전인 2015년, 해니의 안락사를 도운 의사는 렘코 베르베르이다. 그는 해니의 유언장을 읽고 그녀 사례의 관리자와 이야기하고 그녀와 7회에 걸쳐 상담했다. 해니는 의식이 또렷한 순간에 말했다.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내 내면은 텅 비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것을 잃었어요. 떠나고 싶어요.” 베르베르는 “해니는 자신이 결코 원하지 않았던 모습이 되었다”고 말했다. 해니가 죽은 뒤 안락사 감독 위원회는 베르베르가 이 사례를 아주 ‘신중하게’ 다루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청자들이 TV에서 본 장면에 놀랐다. 인지신경과학 교수인 빅터 램은 트위터에 “이건 150만 명의 증인이 있는 살인이다”라는 글을 올렸다. 다음 날 램은 네덜란드 TV 황금 시간대에 시청률이 높은 〈De Wereld Draait Door〉에 출연해 원색적인 비난을 반복했다. 함께 출연한 베르베르는 램이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중이 충격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의사가 한 여성의 생명을 끝내는 것을 실제로 봤기 때문이다. 막연하고 이론적인 안락사법에 의견을 표출하는 것과는 다르다. 커피를 마시는 거실에 죽음이 들어오는 것은 다른 경험이다.
안락사의 실제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생명의 종말 클리닉’이 방영한 그 다큐멘터리는 또 다른 진실을 일깨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죽음은 편안하게 얘기하지만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르게 느낀다. 우리가 상실과 외로움 속에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되어 요양원에서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 만큼, 우리는 속옷 바람으로 복도를 배회하는 할아버지가 ‘행복해 보인다고’ 주장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죽음을 통제하는 것에 가치를 두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끝내겠다’고 하면 움츠러든다. 너무 이르지 않느냐고 묻는다. 우리가 뒤에 남겨지게 될 때 죽음은 받아들이기가 더 어려워진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내 죽음보다 훨씬 더 두려운 것은 명백하다. 독일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의 말처럼 “죽음은 산 자의 문제다”.
더 이상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가고, 더 이상 우리 아이들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끝내야 할 때가 된 거야.
작년 어느 일요일, 나는 아내에게 정원의 오래된 사과나무 아래에서 이야기하자고 청했다. 마침내 우리는 다가올 날들에 대해 의논했다.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이런 것이어서는 안 되는 거잖아.” 내가 말했다. “나는 예전의 반쪽이 되었어. 당신이 내 신발 끈을 묶어야 하고, 내 휠체어를 밀어야 하고, 어쩌면 음식을 떠먹여 줘야 할 거야...”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아내가 말했다. “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늘 알고 있었어.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당신도 똑같이 그랬을 거야.”
나는 안락사 사전 지시서가 들어 있는 봉투를 아내에게 보여 주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때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로 여겼던 안락사 문제는 당신이 떠난 뒤 남겨질 사람에게 설명해야 할 때는 완전히 다른 문제가 된다.
“당신이 이 문제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나는 알고 있었어.” 아내가 말했다.
“나 자신도 오랫동안 몰랐어.”
“말해 줘.” 아내가 말했다.
“매일이 불편해.” 내가 말했다. “하지만 견딜 수 있을 거야. 벗어날 길이 없으니까. 바보 같은 고통. 나는 서서히 장애인이 되어 가겠지. 그래도 살 수는 있을 거야. 갑자기 머리가 젖혀지는 것, 한밤중의 통증, 멋대로 움직이는 다리, 끊임없는 손가락 두드림 같은 것들에 익숙해지겠지. 어쩌면 간호사가 스펀지 목욕을 시켜 줘야 할 거야... 맙소사... 읽을 수만 있다면 기저귀도 찰 수 있겠지.”
나는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 ‘당신은 침착하게 대처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요양원이 어떤 곳인지 내가 벌써 잊은 걸까?
“바지에 처음 소변을 보는 순간 사라져 버린 나의 존엄성과 예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아. 그러나 더 이상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가고, 더 이상 우리 아이들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끝내야 할 때가 된 거야.”
바람이 불었다. 여름의 달콤한 향기. 아내는 내가 뭘 원하는지 묻는다.
“나는 내가 안다고 생각했어. 한 걸음 앞서서 치매 초기 단계에 죽기를 원한다고 생각했지. 안락사를 요청할 용기만 내면 되었어.”
“그런데?”
“마음을 바꿨어. 중요한 것은 ‘내’ 용기가 아니야.”
아내가 회의적이고 주저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나의 죽음이 내게는 큰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고 아내에게 설명하려 애썼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어떤 단서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죽음을 두려워할 수 있을까? 그럴 이유가 없다. 우리는 왜 그렇게 죽음을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일까? 누구를 위해?
“이건 내 얘기가 아니야.” 내가 말했다. 나는 숨을 깊이 쉬었다. “내 죽음은 내 것이 아니야. 내 죽음은 내가 남겨 놓고 떠나야 할 사람들에게 더 중요한 일이야. 그리고 내가 아주 틀린 것이 아니라면, 나는 중증 치매의 반죽음 상태가 어떤 것인지조차 몰라. 그냥 내가 가라앉아, 천천히 잠이 들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시점, 돌아올 수 없는 시점을 지나가도록 해줘.”
“당신을 도와줄 의사는 하나도 없을 거야.” 아내가 말했다.
“아니. 의사는 그러지 않을 거야.”
나는 아내에게 마음을 정했다고 말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내가 온전한 정신을 잃고 죽음을 원한다는 것을 의사에게 확신시킬 능력을 잃는 그날이 온다면, 누군가가 나를 위해 그 결정을 대신 해줘야 해.”
“하지만 의사들은 그렇게 해주지 않을 거야.”
“물론 안 해줄 거야.”
“그럼 누가?”
“남겨진 이들 중 누군가가...”
나는 조심스럽게 적절한 말을 찾아가며 내가 아직 자기 결정권을 믿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원해서 늙는 건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자기 통제를 유지하려는 비극적이고 고독한 소망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다른 사람들을 잊는다. 나는 이제 아무도 혼자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누군가는 반드시 남아서 뒤를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실이 우리에게 살아가야 할 도덕적 의무를 부여한다.
내가 말했다. “삶을 끝내는 결정을 할 권리는 의사가 아닌 다른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게 허용되어야 해. 이건 매우 중요한 일이야. 법이 금지하고 있을 뿐이지. 이 법은 반드시 바뀌어야 하지만 아마 수년이 걸리겠지.”
나는 계속 말했다. “당신이 내 고통을 볼 수 있다면, 내 공포를 느낄 수 있다면, 내가 인간의 슬픈 찌꺼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내 죽에 약을 넣을 수 있을 거야.”
아내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을 요구할 수 있을까?
“못하겠다고 해도 좋아.”
“그럼 어떻게 할 건데?”
“다른 사람을 찾아 봐야겠지. 그 결정을 내릴 사람을 내가 정하는 것이 내 유일한 바람이야.”
이 역시 고통스럽고 있을 수 없는 일이리라.
나는 아내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무엇이 되든 내가 언제 죽을지는 당신이 결정하게 될 거야.”
“그게, 당신 선택이라면...” 꽃잎이 아내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아내는 나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이 숨을 멈출 때까지 내가 당신을 돌볼 거야.” 아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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