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죽음은 나의 것이 아니다
완결

나의 죽음은 나의 것이 아니다

행크 블랑큰(Henk Blanken)은 파킨슨병이 삶을 유지하고 싶은 시점을 넘어서까지 진행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그 순간이 찾아오면 의사가 죽음을 도와주는 것이 합법이지만, 그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리라는 보장은 없다.


나는 반쪽짜리 인간이 되었다. 내 몸의 절반에선 경련이 일어난다. 소변을 볼 때 침을 흘리고, 눈이 내려 자작나무의 작은 가지 하나가 부러진 것만 봐도 눈물이 난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바보 같은 내 왼손이 어깨 위로 물을 엎지르기도 한다. 2011년 나는 51세의 나이에 파킨슨병을 진단받았다. 의사는 10년이나 15년 후에는 도움이 필요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파킨슨병과 함께 늙어 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의사는 “이 문제로 죽지는 않을 거예요”라고 했다.

그러나 형편없이 끝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파킨슨병의 전형적인 환자는 발병 8~10년 뒤에 장애가 온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전형적인 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환자가 다르다. 나는 진단을 받고 6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테니스 코트에 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 모든 것이 잘못되기 시작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나는 파도에 흔들리는 난파선이 되어 버렸다. 걸음은 비틀거렸고 보행 보조기에 의지해 발을 질질 끌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신경과 의사는 뇌 수술을 할 시기가 왔다고 했다. 나는 ‘관찰’을 위해 네덜란드 북부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다른 환자들에게 익숙해지기까지 여러 날이 걸렸다. 남자 환자 세 명, 여자 환자 네 명, 총 일곱 명의 환자가 있었다. 나는 그들의 터무니없는 떨림과 움직임을 보았다. 보행 보조기의 바퀴를 오른쪽으로 돌리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며 걷는 한 걸음 한 걸음. 한 환자는 시골에서 온 심술궂은 농부였는데, 낡은 안락의자에 앉아서 조용히 소변을 보고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에는 내 맞은편에 건장한 머리와 풍파에 시달린 눈빛을 가진 70대 남자 환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놀란 새처럼 웅크린 채 접시에 입을 가까이 대고 침을 흘리면서 양배추 절임을 먹었다. 때때로 음식이 그의 포크에서 떨어지거나, 벌겋게 부어오른 아랫입술에서 떨어졌다. 접시를 반쯤 비웠을 때 간호사가 상냥하게 음식을 조금씩 먹여 줬다. 그의 턱이 접시에 닿아서 회색 수염이 차가운 양배추 절임에 적셔졌다.

맙소사. 나는 환각에 사로잡혔다. 파킨슨병 환자는 치매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었다. 나는 언젠가 아내가 내 음식을 잘라 주고 신발 끈을 묶어 줘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가격이 적당한 노인 전용 스쿠터를 찾기 위해 이베이를 뒤졌다. 나는 이 모든 일들을 인정하게 되었지만 병원에서 지내고 난 뒤 “이런 문제로 죽지는 않을 겁니다”라는 신경과 전문의의 말은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만약 모든 일이 잘못되면, 이것이 내 앞에 놓인 현실이고 심지어 나를 죽이지도 않을 것이었다.

무엇이 더 나쁠까? 파킨슨병에 동반되는 치매의 망각 증상일까, 아니면 고통스러운 신체적 장애일까? 혼란스러운 정신에 갇혀 있는 것이 더 나은가, 아니면 말을 듣지 않는 몸에 갇혀서 맑은 정신을 가지는 것이 나은가?

최근 몇 년간 나는 친구 욥과 이런 종류의 물음에 대해 논의했다. 우리는 가끔 만나서 마치 장기 일기 예보를 하는 것처럼 죽음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욥은 알츠하이머병을 앓았고 기본적인 일상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버지처럼 요양원에서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간호사에게 쫓기면서 생을 끝내고 싶지는 않아.”

낡은 고관절이나 무릎 관절, 혹은 장기를 새것으로 바꾸고 평균 기대 수명이 계속 높아지고 있지만, 우리 뇌는 계속 노화하고 있다. 신경 퇴행성은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인간의 강한 욕망에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이다. 머지않아 우리 뇌는 불안정해지기 시작할 것이고, 신경 세포가 파괴되고 요양원에서 간호사와 환영과 우리 자신을 쫓으며 생을 마감하게 된다.

나는 욥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의 장인 니코는 91세 때 한밤중에 장모를 침입자로 오인하고 부엌칼로 공격했다. 그는 그 사건 직후 노인 보호 기관의 폐쇄 병동에 들어갔다. 그 장면이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유리문이 잠겼을 때 뒤에 두고 나온 치매 걸린 노인의 무력함, 형언할 수 없는 외로움 속에서 우리를 바라보던 그의 어리둥절한 눈. 몇 주 후 니코를 찾았을 때 그는 장모가 자신을 무시했다며 비난했다. 아내가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는데, 장모가 눈물을 글썽이며 빵을 먹여 준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저렇게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나는 내 생을 스스로 마감하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결국 나는 네덜란드가 세계에서 자발적 안락사[1] 제도가 가장 잘 갖춰진 나라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안락사법에 찬성하는 측의 핵심 논리는 자기 결정권이었다. 즉 ‘내 죽음은 나의 것’이라는 뜻이다.


역사가 제임스 케네디(James Kennedy)는 네덜란드가 1950년대까지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보다 더 보수적이고 더 종교적이며 덜 번영한 국가였다고 주장했다. 그 후 모든 것이 변했고, 이 무서운 나라는 선구자가 되었다. 윤리적 쟁점을 이끄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사회가 되었다. 마약을 용인하고, 낙태를 합법화하고, 매춘부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독실한 칼뱅주의자였던 우리는 1960년대에 대혼란 시대로 들어섰다. 교회들이 상점과 아파트로 바뀌었다. 20세기 말에는 기독교 정당들이 권력을 잃었고, 그들의 도그마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 더 이상 영향을 주지 못했다. 특정한 경우에 죽음을 돕는 것을 합법화해야 하는지에 대해 국가 차원의 논의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2001년 네덜란드 의회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안락사를 합법화했다. 새 법에 찬성하는 측의 핵심 논리는 자기 결정권이었다. 즉 ‘내 죽음은 나의 것’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네덜란드 시민 열 명 중 아홉 명은 2002년 4월부터 시행된 안락사법을 지지한다. 이 법은 개선의 여지가 없는 ‘참을 수 없고 절망적인 고통’이 있을 때, 자신의 생을 끝내기를 원하는 환자를 의사가 도울 수 있도록 허용한다. 예를 들어 폐암 환자가 각혈로 자기 피에 숨이 막혀 죽어 가는 것을 의사가 막아 줄 수 있다는 뜻이다.

법이 통과된 이후에도 논쟁은 계속됐다. 새로운 환자 집단은 이 법을 보다 자유롭게 해석하려고 했다. 안락사의 범위를 확대하는 판결이 나올 때마다 또 다른 시민 집단이 더 진보적인 입법 운동을 벌였다. 새로운 요구가 나올 때마다 논쟁에 다시 불이 붙는다. 안락사 지지자들은 안락사법의 확장을 도덕적 진보라 평가하지만, 반대론자들은 우리가 고령자나 심각한 정신 질환자처럼 ‘쓸모없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나치 독일을 연상시키는 사회로 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락사 논쟁은 주춤거리는 단계에 들어섰다. 매우 네덜란드답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이제 말문이 막힌 듯하다. 네덜란드 ― 다른 어떤 나라보다 모든 사람의 자발적인 죽음에 대한 권리를 믿고 싶어 하는 나라이자, 고통 없는 죽음을 환불 보장처럼 가볍게 말하는 나라 ― 는 치매와 죽음을 둘러싼 딜레마와 싸우고 있다.
 

사과 꽃이 피는 봄을 한 번 더 본 뒤에 깊은 치매에 빠지기를 원한다면, 일찍 안락사할 기회는 사라진다. 무덤으로 가는 긴 여정만 남을 뿐이다.


나는 2012년 9월의 춥고 비 오는 날에 욥을 처음 만났다. 그는 70대였다. 알츠하이머병을 진단받고 1년이 지났지만 욥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멀쩡했다. 그러나 합창단의 요양원 공연 이야기를 20분 동안 세 번이나 되풀이하는 것을 보고 치매가 이미 그의 단기 기억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욥은 자신의 병이 정신을 얼마나 잠식했는지는 몰랐지만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는 알았다. 그는 요양원에서 봤던 장면들을 잊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사랑하는 아내 제니와 함께 지낼 수 없는 날이 오면 차라리 죽기로 결정했다.

“그날은 어떨까?” 내가 물었다. 그는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을 거라고 했다. 아이들과 손주들이 작별 인사를 하러 올 것이라고 했다. “그런 다음, 의사가 와서 주사를 넣겠지.” 그가 말했다.

그건 다소 순진한 생각이었다. 한동안 제니와 욥은 그가 정한 시간, 다시 말해 욥이 더 이상 집에서 지낼 수 없을 그날이 오면 죽음을 도와줄 의사를 찾았다. 의사들은 욥의 고통이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기 전에는 안락사를 실시할 수 없다고 했다. 욥이 “치매가 더 심해져서 내가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상태가 되면 뭘 해줄 수 있소?”라고 묻자, 의사들은 그 단계에서는 안락사를 행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욥이 이 딜레마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치매는 안락사 사례에 특별한 문제를 제기한다. 네덜란드 법에 따르면 중증 치매 환자이면서 정신이 온전할 때 미리 안락사 사전 지시서(advance euthanasia directive)를 준비한 경우에 한해 의사에게 안락사가 허용된다. 욥은 그중 한 가지 조건만 충족했다.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네덜란드에서 매년 치매로 사망하는 1만 명 중 아마 절반이 안락사 사전 지시서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의사가 그들을 ‘도울’ 것이라고 믿었다. 법으로 허용되었으며 그들의 명백한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성인 열 명 중 네 명은 의사가 사전 지시서에 구속되어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의사에게는 의무가 없다. 안락사는 합법이지만 권리는 아니다.

의사가 이 자비로운 살인에 독점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욥 같은 경우 궁극적으로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법이 아니라 그들의 윤리적 기준이다. 사전 지시서는 의사가 안락사를 결정할 때 고려해야 할 여러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안락사가 합법이라 해도 심각한 치매를 앓고 있는 환자에게 안락사를 행할 의사는 거의 없다. 그런 환자들은 ‘신중히 고려된’ 죽음을 요청할 정신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딜레마다. 죽음을 결정할 수 있을 만큼 정신적으로 건강한 치매 초기라면 죽기에는 ‘너무 이르다’. 아직 좋은 시절이 몇 년 남아 있다. 그러나 시간이 가고 치매가 악화되어 죽음을 원할 때가 오면 더 이상 죽음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정신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죽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다’.

슬픈 이야기다. 네덜란드는 그토록 오랜 기간 죽을 권리에 대해 논의해 왔기에, 네덜란드인은 각자 원할 때 죽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실행하려고 하면 환자는 안락사를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의사만이 결정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은 없다. 최악의 상태는 피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수천 명의 치매 환자에게 네덜란드의 안락사법은 완전히 실패다. 2017년 네덜란드에는 6585건의 공식적인 안락사가 있었다. 반면, 중증 치매 환자는 2012년 이래 단 일곱 명만 안락사했다. 치매 환자는 그들이 실제로 원하는 ‘적정 시기’에 죽을 수 없다는 뜻이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수차례 올랐던 벨기에의 작가 휴고 클라우스(Hugo Claus)는 2008년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되자 안락사를 선택했다. 클라우스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었지만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정신 상태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결정을 ‘용감’하다고 했지만 강한 비난도 있었다. 네덜란드에 이어 안락사를 합법화했지만 여전히 안락사를 큰 죄로 간주하는 가톨릭교회의 반대에 직면한 벨기에에서 특히 비난이 거셌다.

하지만 클라우스의 죽음으로 변화가 찾아왔다. 사회학자 휴고 반 데르 베든(Hugo van der Wedden)은 치매 환자들의 목소리가 커졌고, 사람들도 이전보다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말한다. 법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일부 의사들이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대한 기존 해석을 바꾸었다. 미래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인식하게 되면서 몇몇 의사들은 치매 초기 단계의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딜레마는 남아 있다. 환자는 자신이 죽기를 바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정신 상태를 갖고 있어야 한다. 만약 그들이 너무 오래 머물고, 사과 꽃이 피는 봄을 한 번 더 본 뒤에 깊은 치매에 빠지기를 원한다면, 일찍 안락사할 기회는 사라진다. 무덤으로 가는 긴 여정만 남을 뿐이다.

2002년 이후 치매에 걸린 네덜란드인 15만 명이 사망했다. 이들 중 수만 명이 안락사 사전 지시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너무 일찍’ 죽음을 택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너무 늦게’ 죽었다. 안락사법이 발효된 후 처음 몇 년 동안 중증 치매 환자 중 아무도 그들이 원했던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없었다. 최근 몇 년간 치매 환자는 100명 중 한 명만 차선책을 택해 ‘너무 일찍’ 안락사할 수 있었다. 그가 바로 2017년 5월 8일 의사의 조력으로 안락사한 욥이었다.
 

우리가 뒤에 남겨지게 될 때 죽음은 받아들이기가 더 어려워진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내 죽음보다 훨씬 더 두려운 것은 명백하다.


2016년 2월 어느 월요일 저녁, 150만 네덜란드 시청자들은 TV에서 해니 고드리안이라는 여성이 죽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 다큐멘터리는 안락사 직전의 해니를 보여 줬다. 누군가가 해니에게 물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말 알고 있느냐고.

“무슨 뜻이죠?” 그녀가 대답했다.
그녀는 왜 의사가 병실에 들렀는지 알고 있을까?
“아, 모르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 정말 가길 원해?” 그녀의 남편 게릿이 말했다.
“음, 원해. 준비됐어. 단숨에.”
“확실해?” 게릿이 다시 물었다.
“응.”
화면 속 해니 고드리안은 짧은 회색 머리칼의 나이 든 여성이었다. 놀란 표정으로 얇은 입술을 꽉 다물고 있었다.
“나한테 미안하지 않아?” 안락사 담당 의사가 해니의 반대편에 앉았을 때 게릿이 물었다.
“미안하지. 그래서 서두르는 거야.” 해니가 말했다.
“때가 됐어, 여보.” 게릿이 말했다. “용기를 내. 당신 정말 오랫동안 용감했어.”

그는 아내에게 팔을 두르고 아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마치 아내에게서 평안을 구하는 것처럼. 해니는 남편이 하는 대로 뒀다. 남편이 그녀를 안았다. 해니의 왼손에 꽂혀 있는 주삿바늘과 투명한 링거줄은 의사가 들고 있는 주사기와 연결되어 있다. 의사는 다른 손으로 해니의 왼 손가락 두 개를 쥐었다. 그러고 나서 정맥에 용액을 주입했다. “무서워.” 68세의 해니가 죽기 전에 말했다.
2016년 네덜란드 TV에서 방영된 해니 고드리안의 안락사 다큐멘터리. (사진=NTR)
해니 고드리안은 자신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언어 능력이 서서히 없어지는 희귀병인 의미 치매(semantic dementia)를 앓고 있었다. 몇 년 전 해니는 제대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을 때 바로 죽기를 원한다는 유언장을 썼다. 해니의 주치의는 유언장을 검토했지만 그녀가 정말 죽기를 원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주치의는 네덜란드 자발적 안락사 협회(NVVE)가 2012년에 설립한 ‘생명의 종말 클리닉(End of Life Clinic)’에 해니의 사례를 의뢰했다. 이 클리닉은 의사가 안락사를 거부할 때 환자들이 의지할 수 있는 기관이지만, 여기서도 안락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곳의 의사 역시 같은 질문, ‘이 사례가 합법적인가?’를 고려하기 때문이다.

안락사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기 1년 전인 2015년, 해니의 안락사를 도운 의사는 렘코 베르베르이다. 그는 해니의 유언장을 읽고 그녀 사례의 관리자와 이야기하고 그녀와 7회에 걸쳐 상담했다. 해니는 의식이 또렷한 순간에 말했다.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내 내면은 텅 비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것을 잃었어요. 떠나고 싶어요.” 베르베르는 “해니는 자신이 결코 원하지 않았던 모습이 되었다”고 말했다. 해니가 죽은 뒤 안락사 감독 위원회는 베르베르가 이 사례를 아주 ‘신중하게’ 다루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청자들이 TV에서 본 장면에 놀랐다. 인지신경과학 교수인 빅터 램은 트위터에 “이건 150만 명의 증인이 있는 살인이다”라는 글을 올렸다. 다음 날 램은 네덜란드 TV 황금 시간대에 시청률이 높은 〈De Wereld Draait Door〉에 출연해 원색적인 비난을 반복했다. 함께 출연한 베르베르는 램이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중이 충격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의사가 한 여성의 생명을 끝내는 것을 실제로 봤기 때문이다. 막연하고 이론적인 안락사법에 의견을 표출하는 것과는 다르다. 커피를 마시는 거실에 죽음이 들어오는 것은 다른 경험이다.

안락사의 실제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생명의 종말 클리닉’이 방영한 그 다큐멘터리는 또 다른 진실을 일깨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죽음은 편안하게 얘기하지만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르게 느낀다. 우리가 상실과 외로움 속에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되어 요양원에서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 만큼, 우리는 속옷 바람으로 복도를 배회하는 할아버지가 ‘행복해 보인다고’ 주장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죽음을 통제하는 것에 가치를 두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끝내겠다’고 하면 움츠러든다. 너무 이르지 않느냐고 묻는다. 우리가 뒤에 남겨지게 될 때 죽음은 받아들이기가 더 어려워진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내 죽음보다 훨씬 더 두려운 것은 명백하다. 독일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의 말처럼 “죽음은 산 자의 문제다”.
 

더 이상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가고, 더 이상 우리 아이들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끝내야 할 때가 된 거야.


작년 어느 일요일, 나는 아내에게 정원의 오래된 사과나무 아래에서 이야기하자고 청했다. 마침내 우리는 다가올 날들에 대해 의논했다.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이런 것이어서는 안 되는 거잖아.” 내가 말했다. “나는 예전의 반쪽이 되었어. 당신이 내 신발 끈을 묶어야 하고, 내 휠체어를 밀어야 하고, 어쩌면 음식을 떠먹여 줘야 할 거야...”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아내가 말했다. “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늘 알고 있었어.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당신도 똑같이 그랬을 거야.”

나는 안락사 사전 지시서가 들어 있는 봉투를 아내에게 보여 주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때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로 여겼던 안락사 문제는 당신이 떠난 뒤 남겨질 사람에게 설명해야 할 때는 완전히 다른 문제가 된다.

“당신이 이 문제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나는 알고 있었어.” 아내가 말했다.
“나 자신도 오랫동안 몰랐어.”
“말해 줘.” 아내가 말했다.
“매일이 불편해.” 내가 말했다. “하지만 견딜 수 있을 거야. 벗어날 길이 없으니까. 바보 같은 고통. 나는 서서히 장애인이 되어 가겠지. 그래도 살 수는 있을 거야. 갑자기 머리가 젖혀지는 것, 한밤중의 통증, 멋대로 움직이는 다리, 끊임없는 손가락 두드림 같은 것들에 익숙해지겠지. 어쩌면 간호사가 스펀지 목욕을 시켜 줘야 할 거야... 맙소사... 읽을 수만 있다면 기저귀도 찰 수 있겠지.”

나는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 ‘당신은 침착하게 대처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요양원이 어떤 곳인지 내가 벌써 잊은 걸까?

“바지에 처음 소변을 보는 순간 사라져 버린 나의 존엄성과 예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아. 그러나 더 이상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가고, 더 이상 우리 아이들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끝내야 할 때가 된 거야.”

바람이 불었다. 여름의 달콤한 향기. 아내는 내가 뭘 원하는지 묻는다.

“나는 내가 안다고 생각했어. 한 걸음 앞서서 치매 초기 단계에 죽기를 원한다고 생각했지. 안락사를 요청할 용기만 내면 되었어.”
“그런데?”
“마음을 바꿨어. 중요한 것은 ‘내’ 용기가 아니야.”
아내가 회의적이고 주저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나의 죽음이 내게는 큰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고 아내에게 설명하려 애썼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어떤 단서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죽음을 두려워할 수 있을까? 그럴 이유가 없다. 우리는 왜 그렇게 죽음을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일까? 누구를 위해?

“이건 내 얘기가 아니야.” 내가 말했다. 나는 숨을 깊이 쉬었다. “내 죽음은 내 것이 아니야. 내 죽음은 내가 남겨 놓고 떠나야 할 사람들에게 더 중요한 일이야. 그리고 내가 아주 틀린 것이 아니라면, 나는 중증 치매의 반죽음 상태가 어떤 것인지조차 몰라. 그냥 내가 가라앉아, 천천히 잠이 들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시점, 돌아올 수 없는 시점을 지나가도록 해줘.”

“당신을 도와줄 의사는 하나도 없을 거야.” 아내가 말했다.
“아니. 의사는 그러지 않을 거야.”
나는 아내에게 마음을 정했다고 말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내가 온전한 정신을 잃고 죽음을 원한다는 것을 의사에게 확신시킬 능력을 잃는 그날이 온다면, 누군가가 나를 위해 그 결정을 대신 해줘야 해.”
“하지만 의사들은 그렇게 해주지 않을 거야.”
“물론 안 해줄 거야.”
“그럼 누가?”
“남겨진 이들 중 누군가가...”

나는 조심스럽게 적절한 말을 찾아가며 내가 아직 자기 결정권을 믿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원해서 늙는 건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자기 통제를 유지하려는 비극적이고 고독한 소망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다른 사람들을 잊는다. 나는 이제 아무도 혼자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누군가는 반드시 남아서 뒤를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실이 우리에게 살아가야 할 도덕적 의무를 부여한다.

내가 말했다. “삶을 끝내는 결정을 할 권리는 의사가 아닌 다른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게 허용되어야 해. 이건 매우 중요한 일이야. 법이 금지하고 있을 뿐이지. 이 법은 반드시 바뀌어야 하지만 아마 수년이 걸리겠지.”

나는 계속 말했다. “당신이 내 고통을 볼 수 있다면, 내 공포를 느낄 수 있다면, 내가 인간의 슬픈 찌꺼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내 죽에 약을 넣을 수 있을 거야.”

아내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을 요구할 수 있을까?
“못하겠다고 해도 좋아.”
“그럼 어떻게 할 건데?”
“다른 사람을 찾아 봐야겠지. 그 결정을 내릴 사람을 내가 정하는 것이 내 유일한 바람이야.”
이 역시 고통스럽고 있을 수 없는 일이리라.

나는 아내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무엇이 되든 내가 언제 죽을지는 당신이 결정하게 될 거야.”
“그게, 당신 선택이라면...” 꽃잎이 아내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아내는 나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이 숨을 멈출 때까지 내가 당신을 돌볼 거야.” 아내가 말했다.

* 관련 콘텐츠를 더 읽고 싶으신가요? 아래 키워드를 클릭해 보세요.
#가디언 #권리 #세계 #철학 #라이프 #건강
[1]
자발적 안락사(voluntary euthanasia)는 환자의 동의와 요청에 의한 안락사다. 비(非)자발적 안락사(involuntary euthanasia)는 환자가 의사소통이 불가능해 직접적인 동의를 하지는 못했지만 가족의 요구 등에 의해 실시하는 안락사를 의미한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신가요?
프라임 멤버가 되시고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 이용하세요.
프라임 가입하기
추천 콘텐츠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