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낸시를 찾아서
나의 땅에는 과거가 그 자체로 여전히 살아 있다. 나는 오래전에 죽은 농부들이 남겨 놓은 수로를 헤매고 다닌다. 그리고 신대륙 정착민들이 심어 놓은 나무에서 열리는 사과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재배하던 인디언감자를 먹는다. 벌목되지 않고 남겨져 있는 오크 나무들 아래에 느긋하게 누워 있기도 하고, 화전(火田)을 위해 몇 세기 동안이나 일부러 불을 놓았던 들판에 다시 수풀이 번져서 예전의 대초원으로 돌아가게끔 내버려 둔다. 그렇잖아도 나는 예전에 이곳에서 밭을 일구고 나무를 심고 불을 놓았던 사람들이 궁금했었다. 그런데 이제 낸시라는 사람이 손을 뻗어 오더니 나더러 마술을 보여주기를 원하고 있다.
그녀의 남편이었던 벤저민 프랭클린 해리스(이하 프랭크)의 생애에 대해서는 기록이 잘 되어 있었다. 그는 유명한 부대의 소속으로 남북전쟁에 참전했던 군인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낸시의 출신이나 생애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는 없었다.
이후 다시 역사학회를 찾아갔을 때, 나는 캐롤에게 물었다. “역사 자료에 혹시 임신중단에 관한 파일이 있나요? 아니면 1800년대 여성의 산부인과 관련 자료는요?” 둘 다 없었다. 우리 지역의 역사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농부의 아내 아니면 교원학교의 졸업생, 또는 초기의 참정권 주창자 등 틀에 박힌 것이었다. 그들의 개인적인 고통이나 기쁨은 여전히 개인적인 것으로 남아서 우리에게 잊혀져 버렸다.
나는 마을 건너편에 있는 기록보관소에 들러서 낸시의 사망 기록을 찾아보았다. 쾌활하고 수다스러운 담당 직원은 그녀의 스마트폰에 저장된 갓 찍은 손녀의 사진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내게 기록실에 들어가도 된다고 허가하기 전, 출입명부에 서명해 달라고 요청하고 나의 방문 목적을 물어보았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자 그녀가 물었다. “족보를 조사하시나요?”
나는 “네”라고 대답했다. 얼떨결에 낸시 앤 해리스는 나의 가족이 되었다.
2. 아이고 주여, 정말 다행입니다
낸시는 1876년 12월 16일, 서른다섯의 나이에 죽었다. 그녀의 사망은 가죽으로 제본되어 누렇게 변색된 기록물 가운데 첫 번째 권에 기록되어 있었다. 사망 원인은 ‘산욕복막염(puerperal peritonitis)’이었다. 그런데 주석 표시가 달려 있었다. 마치 손가락 모양처럼 생긴 그 기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니 줄 사이의 여백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임신 3개월째의 낙태로 인해 유발된 복막염, 이번이 10번째의 낙태로 추정, 나머지 경우에도 모두 상당한 출혈이 있었음.’
이것은 거기 있는 모든 기록 중에서도 가장 설명이 길게 적혀 있는 사망 원인이었다. 그녀의 사망 진단서에 서명한 로버트 델랍(Robert H. Delap) 박사는 아마도 이 지역의 기록관에게 자신이 작성한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옮겨 적으라고 지시했던 것 같다. 아니면 당시의 기록관이 낸시의 사망에 대하여 의사가 작성한 내용을 요약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외에 임신중단이 기록된 경우는 단 한 건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초기의 기록물에는 19세부터 47세 사이의 여성들이 산욕복막염, 산욕열, 산욕패혈증, ‘분만 이후의 염증’, 자간(子癎, eclampsia, 임신 중독증의 일종), ‘아이를 낳던 과정’에서 죽었다는 내용이 모든 페이지마다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었다. 늙은 남성들보다도 가임기 여성들의 사망 기록이 훨씬 더 많았다.
낸시가 살던 시대에는 임신중단이 산아 제한을 위해 흔히 사용되던 수단이었으며, 인종이나 사회 계층을 막론하고 모든 여성이 가족의 숫자를 제한하고 가용한 자원을 관리하며 스스로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제임스 모어(James Mohr)가 1978년에 쓴 《미국에서의 임신중단(Abortion in America)》에 따르면, 예전에는 출산보다 오히려 더욱 안전한 임신중단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일부 여성들은 출산을 ‘병적인 증상이나 두려운 것’으로 여겼고, 그렇지 않은 많은 여성들도 출산을 할 때면 혹시나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낸시를 포함한 당시의 모든 여성은 친구들이나 자매들, 또는 사촌들이 아이를 낳다가 죽거나 건강을 크게 해친 경우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일부러 출산을 기피하는 사람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1700년대와 1800년대 초에는 임신이 여성의 자연스런 신체 균형에 지장을 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설령 유산을 유발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들은 신체의 안정을 되찾기 위하여 때로는 ‘막힘을 제거(removing a blockage)’하거나 ‘생리를 복원(restoring the menses)’하는 요법들을 사용하곤 했다. 임신한 여성은 대개 4개월부터 태동을 느낄 수 있는데, 이 시기 전에 행해지는 임신중단이라면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모두 용인되었다. 비록 태동이 의학적 진단이 아니라 임신한 여성의 주관적 인식에 의한 판단이었긴 하지만, 과학적인 임신 테스트 기법이 없었던 그 당시에는 태동을 아기가 생겨나는 분기점이라고 생각했다. 레슬리 J. 레이건(Leslie J. Reagan)이 1996년에 쓴 《임신중단은 언제부터 범죄가 되었는가(When Abortion Was a Crime)》에서 지적하듯, 예전에만 하더라도 태동이 있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심지어는 가톨릭 교회조차도 거기에 인간의 생명이 깃들었다고 믿지 않았다.
임신중단이 너무나도 빈번하게 이루어졌기에, 어떤 의사는 ‘한 번 이상 임신중단을 경험하지 않고 출산 과정을 거치는 기혼여성을 찾기가 매우 드물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여성들은 임신중단에 대하여 편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그것을 결정했을 것이다. 그들은 ‘임신중단(abortion)’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당시에만 해도 이 단어는 일상생활에서 쓰는 어휘가 아니라 의학적인 전문용어였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들은 ‘정리하기(put straight)’나 ‘열어젖히기(open up)’, 또는 ‘고치기(fix)’ 등으로 부르곤 했다. 어떤 의사는 여성들이 “그런 문제에 대해서 흔히 말을 하며 서로 아낌없이 정보를 나눈다”고 썼다. 그리고 임신중단을 시술하는 의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나 시골 지역에 사는 이들을 비롯한 많은 여성은 약물 또는 약초를 사용하거나 세대를 거쳐 전해져 내려온 지혜에 기대어 자신이 직접 임신중단을 시도했다.
좀 더 젊었을 때의 낸시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이모에게, 아니면 내 땅에 묻힌 두 딸의 어머니인 어맨다 마틴(Amanda Martin)에게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생리를 두 번이나 놓쳐서 그 주기를 다시 돌려놔야겠어요.” 나이 든 여성들은 그녀의 말을 이해했을 것이다. 아마 그들도 똑같이 해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19세기에는 생리를 건너뛰면 ‘감기에 걸렸다(take the cold)’고 에둘러 말하곤 했는데, 이는 그들이 임신이라는 상태를 걸렸다 낫는 흔한 질병으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낸시가 요청했으면 얼마든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