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갱!
이것이 바로 정치적인 힙합이 가진 한 가지 문제점이다. 래퍼들이 언제나 반드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갱스터 랩의 대표 아티스트인 아이스 큐브(Ice Cube)는 1992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벌어진 시위와 폭동에서 일종의 대변인 역할을 했다. 그의 격렬한 라임(rhyme)은 마치 저녁 뉴스의 보도 같았다. 그런데 그가 1991년에 발표한 앨범 〈사망진단서(Death Certificate)〉에는 동양인 가게 주인들에 대한 위협을 비롯하여 정치적인 구호라고 옹호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내용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아이스 큐브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가장 그럴듯한 주장은 그의 작품이 본질적으로 미학적인 것이지 정치적인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즉,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래퍼로서 자신이 왜 그렇게 느꼈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꼈다면 왜 그랬는지 사람들을 보다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음악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힙합의 행동주의를 보여주는 당대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
자기파괴(Self Destruction)〉라는 싱글(single)은 그보다 논란이 훨씬 적었다. 이 노래는 1989년 케이알에스-원(KRS-One)의 주도하에 퍼블릭 에너미와 엠씨 라이트(MC Lyte) 등을 비롯한 최고의 래퍼들이 참여하여 결성한 ‘폭력 중단 운동(Stop the Violence Movement)’이라는 그룹의 이름으로 발표됐다. 이들이 이 단체를 결성한 목적은 흑인 인권 단체인 내셔널어반리그(National Urban League)의 설립 자금을 조성하고, ‘흑인이 흑인에게 저지르는 범죄’의 원인과 피해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끌어모으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자선 행동이자 저항 운동이었으며 격려 연설이었다. KRS-One은 어느 긴 영상에 출연하여 이 프로젝트가 단지 폭력에 맞서 싸우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힙합 그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는 자신의 희망을 피력하기도 했다. “저는 부기 다운 프로덕션스, 폭력 중단 운동, 퍼블릭 에너미와 같은 움직임들이 랩 음악을 말 그대로 구해 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랩이 자기중심적이며 성차별적인 태도를 계속 유지했다면, 지금은 아예 죽어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힙합을 구해 내기 위한 힙합의 행동주의’라는 발상이 다분히 순환 논리인 것처럼 들리지만, 어쨌든 힙합의 구원이라는 생각은 점점 더 강박 관념 같은 것이 되었다. 그런데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소위 말하는 갱스터 랩이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예를 들자면 그전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캘리포니아 출신의 쿨리오(Coolio)라는 래퍼가 갱스터 랩의 사운드와 스타일을 사용하여 1994년부터 〈
환상적인 여정(Fantastic Voyage)〉이나 〈
갱스터의 천국(Gangsta’s Paradise)〉과 같은 당대 최고의 히트곡들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유명세를 얻었다. 이러한 현실은 힙합이라는 장르에서 성공이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갱스터 랩과 팝이 뒤섞이기 시작했는데, 이는 둘 가운데 어느 쪽도 아닌 수많은 래퍼들에게 문제가 됐다. 그들은 설 자리를 잃었고 힙합이 새롭게 장악하기 시작한 라디오 방송국들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한때 “데이지
[3] 에이지(Daisy Age)”에 대한 재치 있는 라임으로 유명했던 드 라 소울(De La Soul)은 1996년에 흑백 커버로 장식된 〈위기고조(Stakes Is High)〉라는 다소 심각한 분위기의 앨범을 발표했다. 이 앨범의
타이틀 트랙에서 데이브(Dave)라는 이름의 래퍼는 대부분의 현대 힙합이 지루하며 해롭다고 주장했다. “엉터리 트랙을 듣는 알앤비 겁쟁이들이 지겨워 / 코카인과 크랙(crack)
[4]이 / 흑인들을 병들게 만들어 / 부푼 머리를 한 래퍼들이 지겨워 / 그들의 랩도 역겨워 / 권총의 총알이 / 병든 세상 전체를 무너트리고 있어.”
그러면서 사회적 의식을 가졌거나 ‘의식 있는’ 힙합이라는 개념은 주류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규정되는 사례가 점점 더 많아졌다. 1970년대의 아웃로 컨트리(outlaw country)
[5] 운동과 마찬가지로, 1990년대의 의식 있는 힙합 운동은 보수적인 동시에 진보적이었다. 그들에게는 그루브(groove)가 있었고, 반(反)문화적 정신이 있었으며, 거기에 더해서 자신들의 힙합은 예전의 방식과는 다르다는 굳건한 확신이 있었다. 시카고 출신의 래퍼인 커먼(Common)이 1994년에 발표한 트랙 〈
나는 그녀를 사랑했었다(I Used to Love H.E.R.)〉는 이러한 새로운 감성에 더욱 활기를 불어넣었다. 커먼은 이 노래에서 방황하다 할리우드로 떠나 버린 여성에 빗대 힙합을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자기가 얼마나 격렬하며 진짜인지 강조하지만 / 그녀가 정말로 가장 진짜였던 때는 쇼비즈니스로 떠나기 전이었다”며, “그녀를 되찾아 오겠다”고 맹세한다. 또 주류 힙합의 폭력적이며 성적인 이미지를 비판하다 보니, 이러한 개혁주의자들이 남성성의 과시나 성별 고정관념에 반대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혁명적인 성향이 뚜렷한 데드 프레즈(Dead Prez)는 1999년에 음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
힙합(Hip Hop)〉이라는 심플한 제목의 트랙을 발표해서 히트시켰다. 데이 라 소울과 마찬가지로 데드 프레즈도, 대중적이지만 위협적이지는 않으며 어쩐지 조금은 ‘여성스러워진’ 알앤비 음악이 힙합의 가장 불순한 측면을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하루종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거짓 깡패들의 알앤비 랩 이야기가 지겹다.” 갱스터 랩과 마찬가지로 이들 개혁가들도 진정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공언했지만, 실제로 가사를 쓸 때는 그러한 원칙이 상당히 모호해지곤 했다.
필라델피아에서 결성된 더 루츠(The Roots)라는 그룹의 블랙 쏘트(Black Thought)는 가차 없이 평가했다. “진정한 힙합의 원칙은 버림받았다 / 이제는 그저 계약을 하고 돈을 버는 것만 남았다.”
[6] 그에게 동의하는 이들은 힙합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를 원했으며, 힙합 그 자체도 역시 진지해지기를 원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만든 라임에 빼곡하게 들어찬 노랫말과 지적인 감수성에 대해서 스스로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블랙 쏘트는 스스로를 래퍼보다는 엠씨(MC)라고 불리는 걸 선호하는 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 표현이 자신의 예술을 진지하게 대하는 탐구자이자 실천가처럼 보이게 만들어 주면서 파렴치한 사기꾼의 느낌은 덜어주었기 때문이다. 1996년에 《바이브(Vibe)》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 생각에 래퍼란 사업적 측면에서라면 몰라도 이 문화의 역사에 대한 지식은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더 루츠가 다소 특이했던 이유는 그들이 퀘스트러브(Questlove)라는 드럼의 거장이 이끄는 라이브 밴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에게 힙합이 광범위한 흑인 음악 전통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했다. (그들은 2장의 앨범에서 재즈 가수인 카산드라 윌슨(Cassandra Wilson)과 협업하여 만든 곡을 실었다.) ‘진정한 힙합’에 전념해야 한다는 이들과 기존의 힙합을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사실 힙합에 대한 이런 상반된 감정은 ‘의식 있는’ 래퍼들과 그 반대에 있는 갱스터 랩 진영의 아티스트들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뉴욕에서는 푸지스(Fugees)라는 그룹 출신의 로린 힐(Lauryn Hill)이 “온갖 잘못된 사안들에 대해서”
[7] 랩을 하는 가식 덩어리들로부터 힙합을 지켜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는데, 그러면서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단순한 랩 이상의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이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푸지스는 로버타 플랙(Roberta Flack)이 1973년에 발표한 버전의 〈
그의 노래가 나를 부드럽게 죽이고 있어요(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를 리메이크해서 대히트를 시켰다. 여기에서 로린 힐은 강렬한 힙합 비트 위에서 아름답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가끔씩 푸지스의 멤버들이 그녀를 응원하기 위해 중얼거리는 부분은 있지만 정확히 랩이라고 부를만한 요소는 등장하지 않는다.
로린 힐은 1998년에 〈로린 힐의 잘못된 교육(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이라는 앨범을 발표하며 솔로로 데뷔했는데, 이는 의식 있는 힙합 운동이 최고의 절정에 달하는 순간이었다. 여기에서 반쯤 쉰 목소리로 랩과 노래를 했던 로린 힐은 거친 라임과 발라드 사이의 경계를 지워 버리며 70년대의 소울과 감미로움이 고스란히 담긴 힙합 앨범을 만들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