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법정에 선 정신병원
실버힐에서 퇴원하고 1년 뒤인 1980년에, 레이는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DSM)》 전문을 읽었다. 이 책의 3판인 《DSM-Ⅲ》가 막 출간된 시점이었다. 이전의 두 판은 얇은 소책자였으며, 특별히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3판에서는 미국정신의학협회(APA)의 위촉을 받은 위원회가 우울증이 ‘내적 갈등’에 대한 ‘과도한 반응’이라는 생각과 같은 정신 분석 학파의 설명들을 삭제하면서 더욱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설명서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의약품의 효과를 확인한 이후, 어떤 상태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경험은 그 상태와 관련성이 덜한 것으로 보이게 됐다. 정신 질환은 외부에서 보이는 것들에 의해, 즉 행동 증상(behavioural symptom) 평가 항목에 의해 재정의됐다. APA의 의료감독관(medical director)은 《DSM》의 새 버전이 “관념에 대한 과학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DSM-Ⅲ》의 임상적 언어는 레이의 고독감을 완화시켜 줬다. 그가 느끼는 절망감은 하나의 질병이었으며,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와 동일한 고통을 안고 있었다. 그는 우울증을 바라보는 새로운 사고방식에 너무나도 크게 고무되어 회고록을 위한 연구의 일환으로 대표적인 생물학적 정신과 의사들과 면담 일정을 잡았다. 이 책에 그는 ‘상징적 죽음: 미국 정신 의학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스캔들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나에게 일어났던 일)’라는 제목을 붙였다.
레이는 자신의 회고록 초안을 정신과 의사인 제럴드 클러먼(Gerald Klerman)에게 보냈다. 당시는 클러먼이 미국 연방 정부의 알코올, 약물 남용, 정신 건강 관리국(ADAMHA)
[7] 국장직을 사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클러먼은 자신이 “약리학적 칼뱅주의(Calvinism)”라고 부르는 것을 비판하는 저술 활동을 해오고 있었다. 약리학적 칼뱅주의란 “만약 어떤 약물이 당신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도덕적으로 그릇된 것이거나, 의존증, 간 손상, 염색체 변화 또는 다른 신의 응징으로라도 대가를 치를 것이다”라는 믿음이다.
[8] 레이는 클러먼이 그에게 자신의 원고가 “매력적이며 설득력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클러먼의 인정에 더욱 용기를 얻은 레이는 태만과 의료 과실 혐의로 체스넛로지를 고소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신의 클리닉과 의학계 내 개인적 평판의 문제, 그리고 아이들의 양육권을 잃게 된 이유는 체스넛로지가 자신의 우울증 치료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레이의 친구인 앤디 시월드(Andy Seewald)가 말하길, 레이는 그 자신을 소설 《모비 딕(Moby-Dick)》의 주인공인 에이헙(Ahab) 선장과 자주 비교했다고 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체스넛로지가 그에게는 흰 고래 모비 딕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무력하게 만든 그것을 쫓고 있었습니다.”
법정 소송에서는 정신 질환에 대한 20세기의 가장 지배적인 설명 두 가지가 서로 충돌했다. 미국정신의학협회(APA)의 회장이었던 앨런 스톤에 의하면, 정신 의학계의 의료 과실 소송에서 레이의 사건에서만큼 저명한 전문가 증인들이 많이 나온 사례는 없었다고 한다. 그가 말하길, 이 사건은 대표적인 생물학적 정신과 의사들이 “그들의 의제를 밀어붙이는 조직적인 산란지(organising nidus)”가 되었다.
이 사건을 본격적인 소송으로 진행할지 결정할 중재위원회가 개최되기 전에 열린 심리에서, 체스넛로지 측은 우울증을 치료하려는 레이의 노력을 책임의 방기라고 주장했다. 로지 측의 전문가 증인들 가운데 한 명이었던 하버드대학교의 심리학 교수인 토머스 구타일(Thomas Gutheil)이 서면으로 증언한 바에 의하면, 대부분 레이 스스로 작성한 소송 문건의 언어 사용을 봤을 때, 그가 외재화(externalisation)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관찰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한 사람의 문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경향”을 말한다. 구타일은 이렇게 결론 내렸다. “자신의 문제가 생물학적인 특성 때문이라는 레이의 주장은 단지 적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제를 그 자신으로부터 떨어트려 놓으려는 또 다른 시도로 보인다. ‘그건 내가 아니라, 나의 생물학적 특징 때문이야’라는 것이다.”
체스넛로지 측의 전문가들은 실버힐에서 레이가 회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분적으로 여성 환자와의 로맨틱한 어울림 때문이었으며, 그것이 그에게 한 줄기의 자존감을 줬다고 주장했다.
그에 대해 레이는 이렇게 증언했다. “그건 모욕적인 발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증상학(symptomatology)과 정신 질환의 타당성을 그냥 완전히 불신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체스넛로지 측의 변호사들은 레이가 체스넛로지에 입원했을 때에도 피아노를 연주할 때처럼 즐거워하는 순간이 있었다며 우울증에 대한 그의 설명을 하나씩 무너트리려 노력했다.
레이는 이렇게 대응했다. “병동에 있는 낡아빠진 피아노를 기계적으로 쾅쾅 내려치며 옛날 음악을 연주하는 건 창의적이고 즐거운 행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시위 행위에 가까웠습니다. 제가 탁구를 하거나, 피자를 먹거나, 미소를 짓거나, 혹시 농담을 했다거나, 예쁜 여성을 보고 눈길을 줬다고 해서, 그것이 진짜로 즐거운 기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저는 이렇게 되뇌곤 했습니다. ‘나는 살아가고 있지만, 살아 있는 건 아니야’라고 말입니다.”
체스넛로지에서 레이의 정신 분석을 담당했던 마누엘 로스는 여덟 시간을 넘게 증언했다. 그는 레이의 회고록 초안을 읽은 다음, 레이가 항우울제 덕분에 치료됐을 가능성을 부인했다. 그는 레이가 여전히 과거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회복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프로이트의 《애도와 멜랑콜리아(Mourning and Melancholia)》를 언급하며 “그게 바로 1917년의 글에서 언급된 우울증(melancholia)이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체스넛로지에서 레이의 분별력이 나아지기를 바랐다며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진실한 도움입니다.” 그는 레이가 유명한 의사이자 관련 분야에서 가장 부유하며 영향력 있는 인사가 되려는 욕구를 버리고 “의학이라는 포도밭에서 열심히 일하는 평범한 존재”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길 원했다.
레이 측의 변호인이자 미국에서 가장 저명한 시민권 변호사 중 하나였던 필립 허시코프(Philip Hirschkop)는 로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정신 분석가로서 당신은 가끔씩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드는 감정을 무시하지는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를 들여다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럼요.” 로스가 답했다.
허시코프가 물었다. “급여 상승 외에는 승진도 하지 못하고 19년 동안 한 자리에만 머물러 있던 당신은 과거에 많은 돈을 벌다가 지금은 여기에 당신의 환자로 와있는 이 남자에게 약간 화가 나지는 않았을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로스의 말이다. “그것도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저는 그것이 자기 자신을 상대로 수행하는 자체적인 심리 분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것을 부러워하고 있나? 아니면 내가 단지 질투와 악의 때문에 과대망상이라고 설명하는 것인가?’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정하게 말해서, 당신처럼 똑같은 자리에 19년 동안 꼼짝없이 머물러 있었던 사람에게는 어떤 야심이 결여됐을 수도 있다고 추론할 수 있을까요?”
로스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허시코프 씨. 저는 제가 하는 일을 좋아합니다. 저는 이 일이 끊임없이 자극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1983년 12월 23일, 중재위원회는 체스넛로지가 진료 기준을 위반했다고 결론 내렸다. 이제 이 사건은 본 소송으로 진행될 수도 있었다. 캐나다 맥길대학교(McGill University)의 정신 의학 교수인 조엘 패리스(Joel Paris)는 “오셔로프 사건의 결과가 북아메리카 대학의 모든 정신 의학과에서 논의되었다”라고 썼다. 뉴욕타임스는 “만성 우울증은 질병이 아니라 그저 성격적 결함이라는 관습적인 믿음이 있어 왔고, 심지어 일부 의사들도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데, 오셔로프의 사건이 이러한 믿음을 뒤흔들었다”라고 썼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The Philadelphia Inquirer)에 따르면, 이 사건은 “미국에서 정신 의학 진료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하여 대단히 크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본 소송에 들어가기 직전인 1987년에 체스넛로지는 합의를 제안했다. 그 당시에 레이는 정신 분석학자의 미망인이었던 고등학교 동창과 사귀고 있었다. 그녀는 레이의 사건에서 정신 의학의 한 학파가 다른 학파를 상대하여 맞서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지나친 단순화였습니다. 하나의 학파가 다른 학파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레이는 합의하고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미국의 가장 저명한 정신과 의사들은 계속해서 이 사건을 정신 분석학에 대한 최후의 심판으로 취급했다. 《프로작에게 듣는다(Listening to Prozac
[9])》의 저자인 정신과 의사 피터 크레이머(Peter Kramer)는 훗날 이 사건을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판결
[10]과 비교하며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라고 했다. 정신 의학 타임스(Psychiatric Times)의 표현에 의하면, 이 사건은 “두 가지 지식 유형 사이의 결전”이었다.
실버힐에서 레이의 주치의였던 조언 너래드가 말하길, 자신은 사람들이 레이의 이야기에서 끌어내는 결론 때문에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그 사건은 대립각을 키우는 데 이용됐습니다.” 그녀의 말이다. 미국정신의학협회(APA)는 1989년의 연례 컨퍼런스에서 레이의 사건에 대한 토론회를 열었는데, 레이는 이 자리에 다시 만난 자신의 큰아들 샘(Sam)과 함께 참석하여 방청했다. 너래드도 그곳에 참석하여 샘에게 레이의 진료기록을 보여줬다. “저는 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저 너희 아빠가 너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다는 걸 너에게 알려주고 싶었어. 아빠는 너를 사랑했고, 너를 너무나도 보고 싶어 했어.’라고요.”
그러나 샘과 그의 남동생인 조(Joe)는 그들의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버지의 삶이 경로를 벗어난 이유에 대해서 그가 잘못된 설명에만 매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빠에게는 사교적이고, 친절하고, 훌륭한 측면이 있었지만, 자신의 문제는 결코 시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같은 이야기만 반복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