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프리미엄이 붙는 원리
로저 리치먼(Roger Richman)은 뉴욕의 워싱턴 마을에 있는 부모님 댁 거실에 들어갈 때면 언제나 그의 아버지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함께 서 있는 사진이 걸려 있는 걸 본다. 리치먼의 아버지 폴(Paul)과 아인슈타인은 1930년대에 독일의 유대인들이 알래스카와 파라과이, 멕시코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함께 하면서 친구가 됐다. (당시에 나치의 억압을 피해 떠나온 유대인들에게 미국 문호는 대부분 닫혀 있었다.) 리치먼의 아버지는 1955년 아인슈타인이 죽고 세 달 뒤에 사망했지만, 리치먼 가족은 아인슈타인의 유산 관리인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리치먼은 변호사가 되었고, 1978년에는 영화와 TV에 간접광고(PPL)를 전문으로 집행하는 대행사를 설립했다. 이듬해, 미국의 코미디언이었던 고(故) W. C. 필즈(W. C. Fields, 1880-1946)의 상속인들이 그의 사무실로 연락을 해왔다. 그들은 리치먼이 그들의 대리인이 되어주기를 원했다. 놀라운 요청이었다. 필즈가 사망한지 벌써 32년이나 흘렀기 때문이다. 필즈의 상속인들은 기저귀만 걸친 몸통 위에 필즈의 머리를 겹쳐 놓은 모습의 포스터 판매를 금지시켜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법에 의지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유명인의 퍼블리시티권이 법적으로 상속인들에게까지 확대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련 법령을 조사하던 리치먼은 영화 〈드라큘라(Dracula)〉의 주연으로 가장 잘 알려진 헝가리계 미국 배우인 벨라 루고시(Bela Lugosi)의 아들이 연관된 사례를 발견했다. 1966년에 루고시의 아들이 유니버설픽처스(Universal Pictures)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는데, 그는 부친의 초상권이 영화사가 아니라 자신과 그의 의붓어머니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루고시의 아들은 해당 소송에서는 승소했지만, 고등 법원에서는 그의 부친이 생전에 자신의 이미지를 상업적인 목적으로 판매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기존의 판결을 뒤집었다. 그러자 리치먼은 이렇게 추론했다. 생전에 자신의 이미지를 ‘판매한 적이 있는’ 유명인의 상속인들은 그들의 퍼블리시티권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말이다.
몇 달 뒤에 그의 가설을 검증해 볼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 우정공사(USPS)가 W. C. 필즈의 탄생 10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우표를 제작하려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리치먼이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루고시의 사건에 대한 고등 법원의 판결을 언급하면서 고소장을 제출했다. 첫 반론 이후, 우정공사는 결국 사망한 유명인의 유산에 대하여 최초의 라이선스 비용을 지급하게 되었다.
곧이어 리치먼의 클라이언트 명단에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고인들이 들어가게 됐다. 대표적으로는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등이 포함됐다. 유명인의 후손들은 리치먼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기뻐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랑했던 가족의 유산을 더럽히는 사례를 막으면서 돈도 벌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광고주들 역시 고인과 협업하는 걸 원했다. 그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과 달리 새로운 스캔들에 휘말리지도 않았고, 비싼 촬영 현장에 나타나지 않거나, 거액의 계약 재협상을 요구하는 경우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치먼으로부터 법적 고지를 받는 사람들은 회의적이었다. 베이비 아인슈타인의 공동설립자인 윌 클라크(Will Clark)의 말에 의하면, 명예 훼손이나 저작권, 상표권 등 확실하게 인정받는 법률을 잘 준수하던 기업들은 “개략적이며 확실치 않은 법률적 주장으로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리치먼이 할리우드에서 쉽게 공감을 얻을 만한 흥미로운 법률적 개념을 ‘발명했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가 가파른 언덕 위쪽으로 거대한 바위를 밀어올리고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분명했습니다.”
리치먼은 스스로를 언더독(underdog)
[8]이라고 여겼다. 출간되지 않은 회고록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때때로 나는 반대편의 힘과 영향력에 낙담하게 된다. 나는 메이저 광고 대행사와 방송국, 영화사, 제조업체, 출판사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 이곳은 전쟁터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도덕적인 명분이 있다는 생각에 힘을 얻었다. 리치먼은 이렇게 썼다. “시중에서 대통령 모양의 딜도(dildo)
[9]를 없애고 싶지 않은 사람이 대체 어디 있겠는가?”
W. C. 필즈의 손자인 에버릿(Everett)은 자신의 위협에 법적인 무게감을 더하기 위하여 리치먼에게 유명인 권리법 초안 작성을 제안했다. 리치먼은 처음에 이 아이디어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주의회의 윌리엄 캠벨(William Campbell) 상원의원이 이 법률의 초안 작성에 관심을 표출하자, 리치먼은 “유명한 위인들의 미망인과 자손들”에게 80통 이상의 편지를 써서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예전 아내인 프리실라(Priscilla), 빙 크로스비(Bing Crosby)의 미망인인 캐스린(Kathryn) 등의 강력한 지지자 집단을 규합했다. 두 차례의 부결 이후, 1985년 1월 1일에 캘리포니아 유명인 권리에 관한 법률(California Celebrity Rights Act)이 통과됐다. 그리하여 이제 적어도 캘리포니아에서는 상속인들이 이곳에서 사망한 유명 선친들의 퍼블리시티권을 합법적으로 물려받을 수 있게 되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이렇게 법적인 선례를 확립한 리치먼은 다시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는 이제 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구원해 줄 시점이 되었다고 판단했다.
아인슈타인은 살아생전에 자신의 이름이나 생김새를 프로모션용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시도와 계속해서 싸웠다. 그는 심지어 미국의 브랜다이스대학교(Brandeis University)가 학교의 이름을 아인슈타인대학교(Einstein University)로 개명하겠다는 제안처럼, 겉으로 보기에 우호적인 기관들이 그렇게 하려는 것도 금지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죽은 후에는 그가 원했던 게 무엇인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1980년대에는 아인슈타인의 이미지가 온갖 종류의 상품과 서비스에 부착되어 있었다. 프리스비에서부터 스노우볼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미지가 사용되어 어디에든 지적인 매력을 더해줬다. 그러나 죽은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현실에 저항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전 세계의 거의 모든 기업이 그를 이용하여 수익을 창출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캘리포니아에서 유명인 권리에 관한 법률이 통과된 뒤, 리치먼은 아인슈타인의 모습이 담긴 광고들을 스크랩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동차 광고에서부터 미용실 광고에 이르기까지 스크랩한 모든 자료를 아인슈타인의 유산 집행인이었던 오토 나탄에게 보냈다. 동봉한 편지에서 그는 “이러한 유형의 괴롭힘을 방지하기 위하여” 연락해야 하는 담당자가 누구인지를 물었다. 나탄은 이 스크랩 자료를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교 측에 전달했다. 아인슈타인의 이미지 사용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감지한 대학교 측은 1985년 7월 1일에 리치먼을 아인슈타인의 “전 세계 독점 대리인”으로 지명했다. 프린스턴 소재의 신문사인 유에스원(U.S. 1)은 훗날 그를 두고 “히브리대학교가 지명한 고르곤(gorgon)
[10] 같은 감시견”이라는 다른 별명을 붙여 줬다.
그들은 대학교 측에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대학교 측은 모든 라이선스 계약으로부터 65퍼센트를 가져가며, 권리 침해자를 상대로 법적인 조치를 취하여 거둔 수익금에 대해서는 50대 50으로 나누기로 했다. 일부에서는 리치먼을 기회주의자로 여기기도 했으나, 그 스스로는 자신의 작업이 20세기를 대표하는 우상들의 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도덕적인 캠페인이라고 생각했다. 리치먼은 일련의 가이드라인을 작성했고, 대학교 측도 여기에 동의했다. 그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담배, 술, 도박과는 관련이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인용구나 공식에 대해서는 조작을 하지 않아야 했다. 광고주들은 아인슈타인의 이미지 위에 말풍선을 그리고 거기에 그들의 말이나 아이디어를 채워 넣어서 그것이 마치 아인슈타인의 생각인 것처럼 꾸밀 수 없었다. 리치먼은 “이것이 기본사항이었다”라고 썼다. 그는 아인슈타인과의 개인적인 연줄 때문에 “물리학자, 인도주의자, 철학자, 평화주의자의 품격에 어울리는” 제휴 관계만을 허용하겠다는 자신의 결의가 더욱 강해졌다고 이야기했다.
리치먼은 아인슈타인을 불법적으로 사용한 사례를 찾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그래서 대학교 측은뉴욕에 있는 히브리대학교의 미국 친구들(American Friends of the Hebrew University)이라는 단체의 자원활동가인 에후드 베나미(Ehud Benamy)에게 쇄도하는 요청을 처리할 권한을 위임했다. 이 단체는 미국에서 발전 기금을 모으고 인지도를 높이기 위하여 설립된 히브리대학교의 연계 조직이었다. 리치먼은 라이선스와 관련한 모든 제안서를 베나미에게 보냈고, 베나미는 상당수의 요청을 거부했다. 베나미는 아인슈타인이 혀를 내밀고 있는 장면을 찍은 아서 새스(Arthur Sasse)의 유명한 사진이 “천박하다”고 보는 리치먼의 견해에 동의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 사진을 사용하게 해달라는 여러 광고주의 요청을 거절하기로 결심했다. (몇 년 뒤, 히브리대학교는 아인슈타인이 “스스로 잘 알면서도 일부러 세상을 향해 보여준” 표정에 대하여 전면적인 거부권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탈리아의 오븐 제조업체에 대한 라이선스를 불허했다. 이 업체와 제휴를 맺으면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컴퓨터 제조사는 특히 자신들의 제품을 아인슈타인과 연관시키고 싶어 했다. 1989년에 소니(Sony)는 광고에서 아인슈타인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대가로 마지못해 6만 3000달러를 지불했다. 1997년에 리치먼은 애플(Apple)이 자사의 맥(Mac) 컴퓨터 광고에 “다르게 사고하라(Think Different)”라는 문구와 함께 아인슈타인의 사진을 사용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었다. 리치먼은 60만 달러를 적정 가격이라 책정하고 금액을 제시했다. 이후 애플의 공동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그에게 할인해 달라는 전화를 했다. 리치먼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그는 잡스에게 만약 그 가격이 지나치게 높다고 생각한다면, 대신에 메이 웨스트(Mae West)에 대한 라이선스를 얻어 “그녀도 다르게 사고했다.”를 쓰라고 했다. 잡스는 결국 높은 가격을 지불했다.
리치먼의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부 “심각하게 모욕적인” 제품들이 시중에 출시되고 있었다. 리치먼은 유니버설시티스튜디오(유니버설픽처스)가 소유한 체인점에서 “E=mc2: 불상사는 일어난다(Shit Happens)”라는 문구가 적힌 러닝셔츠를 판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이 셔츠의 판매를 금지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여기에 더해서 유니버설 측이 피해보상액으로 2만 5000달러를 지불하게 만들었다. 이후 리치먼은 일렉트로닉아츠(EA)에서 1995년에 출시된 비디오게임 시리즈 〈커맨드 앤 컨커(Command & Conquer)〉를 보고 불쾌하게 여겼다. 플레이어들이 이 게임에서 “몇 번의 클릭만으로 아돌프 히틀러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죽이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리치먼은 EA가 제품의 상자에 반유대주의적인 내용에 대한 경고를 담은 스티커를 부착하기를 원했다. EA는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가상의 이야기를 만드는 건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First Amendment)에 보장된 권리, 즉 표현의 자유이며, 이것이 사후의 퍼블리시티권보다 우선한다며 맞대응했다. 양측은 소송을 진행하지 않고 합의에 이르렀다.
리치먼은 자신이 법정과 언론에서 “마케팅 악마(marketing ghoul)”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그는 “특히 내가 모든 이들의 삶에 슬며시 침투하는 (사악한) 뱀을 막아주는 법안을 작성했기 때문에” 그것이 상처를 주는 표현이라고 서술했다. 리치먼은 자신이 유대인 사업가로서 돈을 긁어모으는 기회주의자로 표현되는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리치먼이 히브리대학교와 그 자신을 위하여 가장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베이비 아인슈타인 측에서 월트디즈니에 회사를 매각하려고 논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리치먼이 알게 됐을 때는 이전에 합의했던 라이선스 비용의 인상을 요구했다. 대학교 측이 이 과정에서 266만 달러라는 라이선스 비용을 공개했다. 베이비 아인슈타인의 공동 설립자인 윌 클라크는 이렇게 비용을 공개한 이유가 “아인슈타인의 이름에 라이선스를 받는 것, 그리고 그만큼의 돈을 지불하는 것을 당연하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성공에 더욱 대담해진 리치먼은 이제 아인슈타인과 별다른 관련성이 없더라도 그의 이름을 사용하기만 하면 그 기업들을 겨냥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 브로스 베이글(Einstein Bros. Bagel)이라는 회사는 심지어 창업자들의 이름을 따서 회사명을 지은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교 측의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다. 히브리대학교의 한 학자가 보기에도 리치먼의 이러한 공격적인 입장은 골치 아픈 윤리적 딜레마를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