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LEVEL 2; 양두구육
2020년 1월에 2단계 조사가 시작됐고, 유족들은 지자체로부터, 건설업체들로부터, 인화성 클래딩 패널을 제조하고 판매한 기업들로부터, 그리고 그 건물을 허가해 줬던 화재 안전 ‘전문가들’로부터 원하는 답변을 얻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밀레트에게는 시작부터 나쁜 소식이 전해졌다.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조사에 참여한 사람들로부터 받은 서면 진술은 전부 ‘그곳에서 벌어진 일이 어째서 다른 누군가의 잘못인지’를 나름대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렌펠 타워의 생존자들에게는 익숙한 변명이었다. 조사를 받은 조직들은 이 화재가 있기 전부터 그들의 문제를 다른 누군가의 책임으로 치부해 왔다. ‘책임 전가의 회전목마’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조직들의 컴퓨터 서버에서 발굴한 수많은 이메일, 스프레드시트, 보고서는 다른 그림을 보여 줬다. 조사에서는 단열재 제조사인 킹스팬(Kingspan)의 직원 두 명이 2016년에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에 대한 증언이 나왔다. 그렌펠 타워가 자사 재료의 화재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시공되었다는 농담이 담긴 내용이었다. 그중에는 이런 문자 메시지도 있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냥 여기에 누워있는 거야.”
2020년 말, 코로나19로 네 달 동안 지연됐던 공개 조사가 재개되었다. 그들은 화재의 결정적인 이유였던 그렌펠 타워의 클래딩 시스템에 사용된 재료를 공급한 업체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청문회는 날이 갈수록 유족들을 점점 더 화나게 했다. 출석하는 증인들이 저마다 모두 기억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다른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너선 로퍼(Jonathan Roper)는 예외였다. 그는 2016년 클래딩 재시공 작업에서 사용된 인화성 발포 단열재의 대부분을 제조한 셀로텍스(Celotex)에서 일했던 직원이었다. 그는 회사가 수익성이라는 명분하에 채택한 전략들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한 전략 때문에 고층 건물들에서 위험한 재료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2012년 5월, 당시 22살이었던 로퍼는 이스트앵글리아대학교(University of East Anglia)의 경영학과를 졸업한 지 불과 몇 주 만에 셀로텍스에서 첫 번째 일자리를 구했다. 그는 건축 규제에 대하여 아무런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였고 단열재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몰랐다. 그 직후에 셀로텍스는 프랑스의 다국적 기업인 생고뱅(Saint-Gobain)에 인수됐다. 그들은 수익을 늘릴 것, 그리고 그중에서 15퍼센트는 신제품을 통한 수익일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단순하게 이미 만들어 놓은 경질 발포 단열재 패널을 리브랜딩해서 연간 1000만 파운드 규모에 달하는 고층 주택 시장을 공략하기로 계획했다. 셀로텍스는 그렌펠 타워를 일종의 ‘사례 연구’로 삼기를 원했다. 지은 지 40년 된 24층 높이의 그렌펠 타워는 단열 성능과 외관의 개선을 위해 클래딩 시스템으로 뒤덮일 예정이었다.
신축 및 재개발 단지에서 널리 사용되는 클래딩 기법이란, 원래의 콘크리트 벽면에 10센티미터 두께의 경질 발포 단열 보드를 부착하고, 그 위에 미리 제작해 놓은 레인스크린(rainscreen) 시트를 덮는 작업이다. 레인스크린 시트는 폴리에틸렌이라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심재료(core material)를 샌드위치 형태로 끼워 넣은 알루미늄 패널이며, ACM PE(폴리에틸렌 포함 알루미늄 복합재)라고도 알려져 있다.
로퍼의 업무 중에는 RS5000이라는 셀로텍스의 제품을 이런 방식으로 사용해도 안전하다고 시장을 안심시키는 것이 있었으며, 그의 연간 보너스 규모도 여기에 달려 있었다. 문제는 건설업체들이 저렴하고 얇은 불연성 미네랄울(mineral wool, 광물면)에 비해 시공이 수월한 플라스틱 폼 보드를 선호한다는 것이었다. 플라스틱 폼 보드 역시 연소되면 일산화탄소(CO)보다도 유독한 기체인 시안화수소(HCN)를 방출한다. 셀로텍스로서는 자사의 제품을 사용하더라도 안전 규제를 위반하지 않는 것이라고 건설업체들을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다.
로퍼는 셀로텍스의 주요 경쟁사인 킹스팬의 단열재가 어떤 방식으로 고층 건물용 인증을 받았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조사위원회는 그렌펠 타워에 사용된 단열재의 5퍼센트를 공급한 킹스팬이 건축 자재에 대한 잉글랜드의 복잡 미묘한 규제 시스템을 완전히 통달함으로써 발포 단열재 시장의 큰 부분을 차지할 수 있었다는 증언을 들었다. (영국 정부의) 공식 지침은 오랫동안 고층 건물에서 가연성 단열재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안전 최우선의 접근방식이었다. 높은 층에서는 탈출하기가 힘들고, 소방서에도 일반적으로는 높은 층에 접근할 수 있는 장비가 구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좋은 단열재로 탄소 배출량을 낮추려는 노력과 제조업체들의 로비로, 2006년에 영국 정부는 특정 유형의 건축에서 제한적 가연성을 가진 재료의 사용을 승인했다. 다만 그 재료는 실제 환경과 동일한 테스트에서 안전성이 입증돼야 했다. 이 테스트는 왓퍼드에 있는 건축연구원(BRE)의 실험실에서 벽면의 한 부분을 일정한 비율로 축소한 모형을 만들고 거기에 불을 지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이 테스트 시스템은 심각한 결함을 갖고 있다. 우선 실제 환경과 동일한 테스트를 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복잡하다. 그 결과가 잘못 해석될 수도 있다. 인증서가 제3의 기관에서 발행됐으며, 그 내용이 모호한 방식으로 작성될 수도 있다. 이런 상황들을 모두 고려하면, 위험한 재료의 제조와 마케팅과 판매가 가능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서류상으로는 완전히 안전해 보였다.
2006년에 킹스팬은 자사의 주력 단열재인 쿨테크(Kooltech) K15의 화학 성분을 변경했지만, 예전의 테스트 결과를 바탕으로 판매를 계속했다. 내부 보고서에 의하면, 2007년에 진행된 새로운 버전에 대한 실제 환경 테스트는 ‘불타오르는 지옥’이 되었다고 한다. 관련 조사에서 킹스팬 측의 변호사는 이러한 문제 제기를 일축하며, 당시 테스트의 참관인은 ‘어마어마한’ 불길이 일어났다는 점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점을 언급했고, 해당 제품의 내화 성능(耐火性能)이 이전의 버전에 비해 열악하다는 과학적 증거가 없다고 말했다.
킹스팬은 영국 내의 고층 주거 단지 수백여 곳에서 이 제품의 새 버전을 계속해서 판매했고, 이 제품을 다른 재료들과 함께 특정한 비율로 조합해서 사용한다면 고층 건물에서도 안전할 수 있다는 인증서를 취득했다. 킹스팬 측은 신규 테스트를 (사전에) 수행해야 했지만 “기술적인 변화가 (이 제품의) 내화 성능에서 어떠한 실질적인 차이도 만들어 내지 않을 것이라는 정직한 믿음”으로 실시하지 않았으며, 그렌펠 타워의 화재 이후 수행된 테스트를 통해서 그러한 사실이 뒷받침된다고 밝혔다.
조사에서는 킹스팬이 2015년 가을 무렵까지 영국 내 최소한 230곳의 고층 단지에 K15를 판매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이곳이 바로 셀로텍스가 추격하던 시장이었다.
청문회에서 로퍼는 상사들에게 자사의 제품이 “화재가 발생하면 불타버릴 수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클래딩 작업 뒤쪽에 사용하기에는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경고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그들이 “이에 개의치 않고 고층 주거 시장에 진입하고 싶어 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런 사실이 그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2014년 2월, 로퍼는 건축연구원(BRE)의 ‘번홀(burn hall, 화재실험장)’ 관리자인 필 클라크(Phil Clark)의 곁에 서 있었다. 실제 환경과 동일한 벽면에서 셀로텍스의 단열재를 처음으로 테스트하는 현장이었다. 장치 앞에는 커다란 시계가 째깍거리고 있었다. 만약 불길이 30분 내에 맨 위까지 도달한다면 나쁜 소식이었다. 결과는 26분이었다. 실험은 실패했다.
셀로텍스는 재시도를 위해 충격적인 일을 벌였다. 모형 벽면을 통한 화염의 확산을 늦추기 위해 발화지연 산화마그네슘 보드로 고의적인 간격을 만든 제품을 포함시킨 것이다. 이 재료는 외장 클래딩의 뒤쪽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나 사진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로퍼는 “테스트를 통과하기 위해서 장치들이 지나치게 조작되었다”고 말했다. 그 제품은 결국 테스트를 통과했다.
조사위원회는 셀로텍스가 어떻게 BRE에게 들키지 않고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를 물었다. 그 결과 셀로텍스가 BRE 측에 재료를 배송하도록 조정했으며, 자사의 계약자가 테스트 구조물을 설치하게 했음이 밝혀졌다. 놀랍게도 이런 방식은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그러고 나면 BRE의 기술진이 테스트를 참관했다.
조사 71일차에 로퍼는 번홀 관리자였던 클라크가 (당시 현장에서) 테스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 거라는 사실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없다”고 밀레트에게 말했다. 세 달 뒤에 관련 질문을 받은 클라크는 셀로텍스의 술책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그는 조사에서 “우리의 역할은 그들이 그곳에서 수행하는 모든 일을 빠짐없이 감시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산화마그네슘이 배송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으며, 배달 인수증은 “아마 잃어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그는 테스트에 어떤 재료들이 사용되는지 알고 있지만, “만약 누군가 속임수를 쓰려고 한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조사에서는 실제 환경의 화재 테스트를 1회 수행할 때마다 제조사로부터 2만 5000파운드(약 4000만 원)의 비용을 받는 BRE가 진정으로 독립적인 기관인지를 여러 차례 점검했다. BRE의 화재 테스트 책임자인 스티븐 하워드(Stephen Howard)는 밀레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클라이언트가 있고, 그들은 BRE에 많은 비용을 지불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건 그들을 낙담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BRE는 조사에서 그들의 테스트가 영국의 기준을 준수하며, 계약에 의하면 기업들이 테스트 재료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BRE가 킹스팬과 셀로텍스에게 속았다고 주장하며, 킹스팬이나 셀로텍스 제품의 ‘오해될 만한 프로모션’에 그들이 ‘연루되었다는 문제 제기’에 대해서도 전부 부인했다.
그러나 유족 측의 변호사들은 이를 다르게 봤고, BRE가 “제품의 대변자로서 이런 끔찍한 재료들을 판매할 관문을 열어 줬다는” 혐의로 그들을 고발했다. 유족 측은 이렇게 말했다. “전체적인 인증 절차가 위험천만했습니다. 그들은 허울뿐인 신뢰성을 만들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부정한 테스트로 얻은 테스트 결과를 은폐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셀로텍스는 다수의 직원이 ‘용납할 수 없는 행위’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시인했지만, 현재의 경영진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렌펠 타워 사고의 이후였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 이후로 테스트 절차와 문화를 바꿨다고 말했다. 셀로텍스는 또한 그렌펠 타워의 클래딩 작업에 참여한 전문가들이 ‘관련된 어떠한 측면에서도’ 자사의 제품 설명서를 잘못 이해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BRE가 발화지연 보드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셀로텍스의 마케팅 브로셔에는 그들이 처음에 실시한 테스트 방식이 설명되어 있었는데, 그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해당 단열재의 테스트를 다시 진행했을 때에도, 최소한 당시의 건축 규제를 따르기만 한다면 안전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2014년에서 2015년으로 넘어가던 겨울, 그렌펠 타워의 클래딩 재작업을 위한 준비가 한창일 때, 재단장 작업팀은 해당 패널 660장을 50퍼센트 가까이 할인된 가격에 구입하기로 합의했다. 조사에서는 해당 발포 단열재가 “수직 방향으로 확산되는 화염의 속도와 범위에 기여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렌펠 타워의 설계자들 가운데 한 명인 사이먼 크로퍼드(Simon Crawford)는 이후에 그것을 “양두구육(羊頭狗肉)”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