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하루
3화

걸으며 흔적을 남기는 사색가를 위한 하루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북저널리즘은 도시의 공간, 그리고 그 안을 오가는 것들에 주목해 왔습니다. 공간의 가치는 그 안에 머무는 사람이 결정합니다. 사람들이 공간에 남기는 것은 무엇일까요? 도시를 채우는 것은 무엇일까요? 걸으면서 흔적을 남기는 사색가를 위한 하루를 준비했습니다.
평소라면 혼자 있을 수 없는 공간에 혼자 머물러 본 적이 있나요? 늦은 밤의 한강 대로변, 셔터 내린 상점이 줄지어 있는 지하상가, 유명하지 않은 영화관의 심야상영관. 인적이 드문 시간에 아무도 모르게 천천히 발자국을 남기는 경험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습니다. 고요함이 드문 도시에서 유일하게 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이니까요. 밤새 남겨놓은 발자국과 생각은 날이 밝으면 사람들의 발걸음에 치어, 소음에 묻혀 사라지겠지만 괜찮습니다. 그 경험만으로 도시는 ‘내 공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민재 건축가는 말합니다. 도시가 내 집은 아니어도 내 공간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고. 2022년 말 기준, 국내 커피·음료점업 점포 수는 9만 9000여 개로 역대 최다입니다. 카페는 탄생부터 만남의 광장이었죠. 카페에는 사람들의 대화가 쌓여 있습니다. 모두 나만 알고 싶은 카페 하나쯤은 있을 겁니다. 아마 그곳엔 만남과 대화의 흔적이 쌓여 있겠죠. 북저널리즘은 그간 사람이 모이는 공간에 주목해 왔습니다. 서울시는 관계로서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초록길 프로젝트를 발표했습니다. 숲이 될 꿈을 꾸는 동안, 마포구의 ‘작은 도서관’은 사라지고 있죠. 이어 서울시는 관내 공립·사립 작은 도서관 지원 예산을 전액 삭감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작은 도서관은 마음껏 사유하는 ‘내 공간’이었을 텐데요.
 
신민재 건축가는 사라지는 ‘내 공간’에 대한 아쉬움을 표합니다. “단적으로 서울-경기권에서 내가 살던 동네 중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없다. 이건 나 개인의 얘기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한 세대의 얘기다.” 올해 설 연휴에 하루 평균 530만 명이 이동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닷새 동안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 총 2648만 명이 이동하는 것입니다. 명절을 기억하기 위해 혹은 오랜만의 휴식을 기념하기 위해 사람들은 부지런히 이동합니다. 크나큰 도시 속 ‘내 공간’은 어디일까요?

아침; 내 공간을 느끼는 방법


1. 동네를 떠올리는 음악
©ejj207
동네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요즘은 스마트폰의 ‘내 위치’ 혹은 ‘당근마켓’이 정해주려나요. 주소지는 확실하지만, 동네의 기준은 다분히 주관적이죠. 이 노래를 들으며 ‘동네’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한국 시티팝의 시조새라고 불리는 가수 김현철의 노래입니다. 괜스레 짜증이 날 때 생각나는 곳, 태어나 어른이 되기까지 스무 해를 보낸 곳, 내가 믿는 사람들이 있는 곳... 이 노래를 들으며 떠올리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동네일지도요.

2. 구글 어스로 동네 찾기

그곳이 꼭 국내일 이유는 없습니다. 망고와 체리가 저렴한 포르투갈의 어느 마을일 수도 있고, 맥주가 시원한 중국의 작은 한인 마을일 수도 있죠. 앉은 자리에서 그곳을 찾아가 보는 것은 어떨까요?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지구본, 구글 어스(Google Earth)입니다. 현재 모바일 버전은 제공하지 않아 PC로 접속해야 합니다. 스크롤과 클릭만으로 세계의 동네를 들여다볼 수 있는, 꽤 만족스러운 여행이 될 겁니다.

점심; 내 공간을 만드는 방법

 

3. 사유하는 사람의 에세이, 《마술 라디오

새로이 마음 붙일 공간을 찾으시나요? 다른 사람의 흔적을 따라가 보는 것은 어떨까요? 정혜윤은 CBS 라디오 PD이자 에세이스트이자 애독가입니다. 그는 늘 바다에 가면 어느 어부를 떠올립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바다에서도 작은 물고기와 금지 어종을 풀어 주는 어부죠. 때문에 그 지역에선 어부의 이름 석 자가 신뢰와 정확의 상징이 된다고 합니다. 왜 아무도 보지 않는 바다에서 그것들을 지키느냐는 물음에 어부는 답합니다. “내가 자유기 때문”이라고요.

““그건 내가……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놀랐어. 기습 공격을 당한 기분이었어. 내가 자유란 말을 너무나 오랫동안 듣지도 쓰지도 묻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사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의무가 있어. 하나는 사회의 룰을 따른 의무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지킬 의무, 즉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지 않을 의무야. 그렇지만 우리는 두 번째 의무가 있기나 한 건지 잊곤 하지. 지금 어부는 두 번째 의무, 즉 자신을 지키는 의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셈이었어. 그것이 자유라고.”
_정혜윤, 《마술 라디오》 64-65쪽


정혜윤 PD는 “무언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능력이야말로 현대인에게 가장 부족하다”고 설명합니다. 때문에 한 사람의 좋은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고 말합니다. 공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한 사람이 귀하게 여기는 공간은 우리 모두의 공간이 될 수 있겠죠.

4. 생각이 흐르는 수성동 계곡

정혜윤 PD가 귀하게 여기는 공간을 따라가 볼까요? 그는 서울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이 수성동 계곡임을 책에서 여러 번 말합니다. 종로09는 서울의 중심지를 누비는 마을버스입니다. 높은 건물이 솟아 있는 광화문을 한 바퀴 돌아 종로09가 향하는 종점은 수성동 계곡입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팔경첩〉에도 등장하는 수성동 계곡은 숨겨져 있다가, 2010년 옥인시범 아파트가 철거되면서 발굴됐습니다. 공원으로 복원됐는데 계곡물이 쉽게 마른다는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 오는 날, 비 내린 직후에 찾아가는 것을 특히 추천합니다. 광화문에서 10분 벗어났을 뿐인데 조용합니다. 계곡물 소리만 가득한 공간에서 도시에 혼자 남겨진 기분을 느끼며 사색에 젖을 수 있습니다.

5. 윤동주 시인의 언덕 나무 아래서

사색을 이어가기엔 걷기가 딱입니다. 인왕산로를 따라 30분 걷다 보면 청운공원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닿습니다. 제가 샌드위치나 김밥 등 간단한 음식을 싸서 자주 가는 곳입니다. 큰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요. 언젠가 갑자기 비가 쏟아져 그 아래로 피한 적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 한 공간을 지키며 가지가 길게 자라고 잎이 널리 뻗은 나무 아래 있으면 대찬 소나기에도 젖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하루였습니다. 나무 아래서 든든한 한 끼 어떨까요?


저녁; 내 공간에 흔적을 남기는 방법

 

6. 걷는 사람의 사색, 《걷기의 인문학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보이는 서울의 전경과 일몰은 덤입니다. 일몰을 기다리며 읽을 책으로는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을 추천합니다. 루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걸을 때만 사색할 수 있다. 내 걸음이 멈추면 내 생각도 멈춘다. 내 두 발이 움직여야 내 머리가 움직인다.” 리베카 솔닛은 현대인의 삶이 움직이는 속도가 생각의 속도, 생각이 움직이는 속도보다 빠르기 때문에 걷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합니다.

 “걷기를 주제로 삼는 것은 어떻게 보자면 보편적 행동에 특수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런 생각이 두 발로 지나간 곳에 장소가 만들어졌고, 그렇게 만들어진 장소가 다시 그런 생각을 만들어냈다. 걸었기에 골목과 도로와 무역로가 뚫린 것이고, 걸었기에 현지의 공간 감각과 대륙 횡단의 공간 감각이 생겨난 것이고, 걸었기에 도시들, 공원들이 만들어진 것이고, 걸었기에 지도와 여행안내서와 여행 장비가 생긴 것이다. 멀리까지 걸어갔으니 걷는 이야기 책들과 시들이 쓰인 것이며, 순례와 등산과 배회와 소풍을 기록한 방대한 분량의 책들이 쓰인 것이다. 역사의 풍경에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_리네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18쪽


7. 하늘을 걷는 사람

©백수골방
사색으로 채운 하루, 영화를 보며 마무리하는 것은 어떨까요?  〈하늘을 걷는 남자(The Walk)〉는 1970년대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 사이를 외줄 타기로 건넜던 프랑스 출신 무명 예술가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조셉 고든 레빗 주연의 이 영화는 완성도에 있어 국내외 좋은 평을 받았는데요. 주인공 필립은 자신의 공연은 단순한 쇼가 아니라 쿠데타라고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영화를 통해 확인하세요. 러닝타임은 123분입니다.

8. 한걸음더
©ejj207
매일 아침 눈도 못 뜬 채로 머리를 감으며 하루를 준비합니다. 머리 감는 것이 너무나 귀찮던 어느 날,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습니다. 사람의 머리에서는 왜 기름이 나는 것일까. 도대체 왜 그럴까. 생각하다가 깨달았습니다. 바로 생각 때문인 것을요. 무엇보다 풍부하고 값진 것이 뿜어 나오는 게 머리라는 것을요. 우리는 이 사실을 쉽게 잊고 살죠. 때문에 그 증거로 머리에 기름이 흐르는 것입니다. 연휴입니다. 잠시 멈춰 사색을 즐기며 하루를 보내는 건 어떨까요? 올 한 해, 내딛는 걸음걸음이 영감이 되길 바랍니다.

정원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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