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라는 원점
원고와 글을 구분하기
2000년대 초반 책세상 출판사에는 독특한 사내 교육 문화가 있었다. 당시 책세상은 해마다 신입 사원을 뽑았는데, 사외에 마땅한 출판 학교가 없어 신입 교육을 전부 사내에서 소화해야만 했다. 책세상은 전집이나 문고 등 시리즈물에 특화된 출판사라서 맨파워보다는 팀워크가 중요했고, 대규모 시리즈를 연속해 선보이면서 직원 모두가 합심해 에너지를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김광식 주간은 기획, 편집, 제작, 홍보, 마케팅, 물류 관리 등 출판 전 과정에 대해 담당 부서뿐만 아니라 타 부서도 일정 수준 이해하고 원활히 소통할 수 있도록 일종의 쌍방 도제 교육 방식을 설계했다. 예를 들어 기획 파트는 주간이, 편집과 제작은 에디터가, 홍보와 마케팅은 마케터가 업무 매뉴얼을 토대로 강의안을 만들어 배포한 뒤, 전 직원을 앞에 두고 실무 교육을 펼쳤다. 한글 맞춤법이나 외래어 표기법 등 편집부 고유 업무에 필요한 지식은 에디터들끼리 따로 커리큘럼을 짜서 공부하기도 했다.
책세상문고·세계문학(이하 ‘세계문학’) 시리즈를 기획하고 준비하던 시기에는 신입 사원부터 부서장까지 어느 한 사람 예외 없이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근현대 한국 문학 작품을 읽어 나갔다. 이때 업무용으로 읽은 소설이 대학에서 읽은 소설보다 훨씬 방대했다. 에디터든 마케터든 본업을 소화하기에도 벅차서 야근과 철야가 잦았지만 독서 토론회에 모두가 큰 불평 없이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한국 사회에 개인주의가 보편화된 지금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전담 업무와 출판 교육으로 이중삼중 시달리던 어느 날이었다. 기획 강의 시간에 주간이 불쑥 질문 하나를 던졌다.
“원고와 글은 같은가요, 다른가요?”
같은 거 아냐? 달랐어? 웅성웅성하는 가운데 저 질문에 답한 사람은 우연하게도 나였다.
“다릅니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기록을 글이라고 한다면 그중 출판하기 위해 쓴 글을 원고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다뤄야 할 대상이 분명해졌네요. 바로 출판할 목적으로 쓰인 원고죠.”
어쩌다 나는 답을 맞혔지만 사실 출판의 시작점인 원고에 대해 전문적인 관점이 정립된 상태는 아니었다. 다만 2년간 수습 에디터 시절을 거치면서 눈치껏 알아차렸던 것 같다. 내가 일기장에 기록하는 글과 마감을 앞두고 원고지나 문서 프로그램에 작성하는 글이 다르다는 것을.
그날 기획 강의에선 세상에 널리고 널린 글 더미에서 출판 가능한 원고를 발굴하는 기준과 안목에 대해, 학술 출판과 상업 출판에서 다루는 원고의 차이 등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휘발되고 없지만, 그날 나는 글과 원고의 차이를 직업상 결정하는 존재가 에디터라는 사실만큼은 정확하게 인지하면서 저 질문의 아우라에 사로잡혔다. 에디터의 일과 삶에 별스러운 고민이 없던 내게 ‘원고’라는 영점이 잡히는 순간이었다.
대변하고 매개하여 소통하기
일에서 영점, 기준점, 핵을 잡는 것은 거의 전부라 할 만큼 중요하다. 영점이 있어야 내 일의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계량할 수 있고, 기준점이 있어야 축소도 확장도 가능하며, 핵이 있어야 주변부에서 방황하다가도 다시금 돌아올 수 있다. 에디터에게 영점은 원고다. 원고를 중심에 놓고 생산자인 저자와 소비자인 독자를 어떻게 연결할지 궁리하는데, 이 행위의 총체가 바로 편집이며 그 결과가 책이다. 에디터는 원고지나 파일 형태의 원고 더미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해 책을 만들어내는 장인이면서, 저자가 상징하는 지적·심미적 세계와 독자가 상징하는 출판 시장을 연결하는 에이전트다. 따라서 에디터는 글을 즐겨 읽고 예리하게 비평하는 안목 못지않게 전문 독자의 깊이와 대중 독자의 너비를 가늠하며 책의 물성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심미안을 갖춰야 한다. 추상(抽象)에서 구상(具象)으로, 심상(心象)에서 물상(物象)으로 편집자가 타고 노니는 구역은 상당히 방대하고 복잡하다. 그래서 원고라는 기준점이 중요하다. 글은 오롯이 저자에게 귀속되지만, 원고는 저자의 것이면서 에디터의 손을 타고 독자에게로 간다.
미국의 베테랑 에디터 피터 지나는 이런 에디터에게 ‘대변자’라는 지위를 부여한다. 출판사를 상대로 저자를 대변하고 저자를 상대로 출판사를 대변하는 존재이자, 저자를 상대로 독자를 대변하고 독자를 상대로 저자를 대변하는 존재가 바로 에디터라는 것이다.[1] 그의 말을 곱씹다 보면 에디터는 존재라기보다는 상태에 가깝다, 마치 신처럼(미국 장르문학의 거장 스티븐 킹은 “글쓰기가 인간의 일이라면 편집은 신의 일이다”라는 말을 남겼다).[2]
퍼즐 조각처럼 흩어져 있는 저자와 독자를 연결해 책이라는 의미망을 만들어 내고 출판이라는 가치 사슬을 추구하는 가운데 에디터는 에디터로 거듭난다. 이 지난한 과정에서 무언가를, 누군가를 대변하고 옹호하고자 한다면 대상에 대한 이해와 애정, 신뢰가 필수적이다. 물론 이 일을 수행하는 대가로 주어지는 금전과 직책과 인적 네트워크도 무시할 수 없는 동력이지만 그것이 에디터로서의 영속성을 보장하진 않는다. 또한 단순히 지적 감식안이 뛰어나다고 해서 탁월한 에디터가 되는 것도 아니다. 언어와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 애정, 신뢰의 마음을 갖춘 에디터가 이 복잡하고도 방대한 일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
이해, 애정, 신뢰라는 미덕은 단연코 소통 능력에 기반을 둔다. 에디터는 무엇보다도 소통 능력이 특별한 사람이다. 혹은 소통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낯설고 이질적인 주체와 대상을 연결하고 묶는 소통 행위가 곧 편집 행위이며, 사람과 세상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람일수록 이 능력이 극대화된다. 미국에서 인재 검색 플랫폼 링크드인(LinkedIn)이 출현해 크게 주목받았을 때, 사람과 사람, 사람과 그룹을 연결하는 이 기업의 핵심 솔루션이 에디터 직무와 상당히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변자이자 에이전트로서 소통하는 에디터의 정체성은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자질이다. 정보와 데이터가 넘치다 못해 슈퍼컴퓨터의 연산 작용 없이는 파악할 수도, 분류할 수도 없는 빅데이터 시대에 에디터의 감식안과 연결·소통 능력은 더욱 긴요해졌으며 출판업에 한정되지 않는 잠재력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면 역으로 에디터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신뢰하는 존재는 누구일까? 저자일까, 독자일까, 아니면 동료 에디터일까? 나는 책 자체라고 답하고 싶어진다. 에디터의 손길을 가장 절실하게 기다리는 존재는 다름 아닌 책(이 되기 전의 책)이다. 책이 사람을 사랑할 리는 없다. 또한 에디터의 이름은 저자 뒤에 가려지거나 지워진다. 누군가의 말처럼 에디터는 저자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다. 그러나 책이라는 사물은 오래 살아남아 널리 읽힐수록 역설적으로 편집 노동을 증명한다. 출판 생태계에서 에디터의 이름이 흐려질수록, 저자의 이름을 내건 책이 알려질수록 에디터는 고유의 소임을 충실하게 이행한 것이다. 이 역설을 이해했을 때 나는 비로소 에디터의 삶이 기꺼워지기 시작했다.
책이 보상이라는 말은 곧 어떤 보상도 없다는 말과도 같다. 아니 인간적인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출판 생태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할 대상은 저자다. 에디터는 저자가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맞춤한 무대를 설계하고 감독하는 사람에 가깝다. 에디터의 노동은 오케스트라 지휘자나 방송 프로듀서처럼 스포트라이트 바깥에서 모든 스텝을 조율하며 그림자처럼 기민하게 움직일 때 완벽해진다. 그래야 관객이 배우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 영미 문학의 전설적인 에디터 맥스 퍼킨스는 에디터의 이런 역할을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이다. “이 책은 당신 겁니다. 나는 당신의 글이 대중에게 잘 전달되도록 도울 뿐이죠.”[3]
교정지의 페로몬
대변자이자 매개자, 디렉터로서 에디터가 가진 속성을 이해한다면 책을 만드는 동안 여러 번 무너질 수밖에 없는 멘탈을 바로 세울 수 있다. 에디터의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는 저자와 작업하거나, 에디터라는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하는 독자를 대하다 보면 마음의 생채기를 자주 입는다. 나아가 언어와 한판 씨름을 벌이며 가치를 추구하는 책 자체가 고물 또는 유령 취급을 받는 작금의 신자유주의 시대를 마주할 때면 거대한 벽을 상대하는 것 같다.
작업이 끝난 뒤 찾아오는 허탈감도 무시할 수 없다. 수개월 씨름하던 원고 더미를 한 권의 책으로 둔갑시켜 세상에 내보내고 나면 허탈감에 몸서리가 쳐진다. 신체적으로 탈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력과 체력이 바닥을 치는데 숨 돌릴 틈도 없이 또 하나의 원고를 펼쳐야 한다. 아니 이미 여러 저자의 수많은 원고가 동시다발로 굴러가고 있다. 쉼이란 없다. 쉼을 원하는 몸이 있을 뿐이다. 두세 달 단위로 문학과 철학과 역사와 정치와 경제와 과학의 언어가 번갈아 에디터의 몸을 지나간다. 다른 한편에서는 시장과 자본과 마케팅과 미디어의 노골적인 언어가 에디터의 몸을 지나간다. 책마다 다른 편집, 다른 디자인, 다른 제작을 거쳐 독자적인 물성을 창조하지 못하면 독자와 시장의 외면은 더 적나라해진다.
끝 모를 높이로 가로막힌 벽 앞에서 지름길도 우회로도 없을 때, 에디터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역시나 원고다. 원고 더미에 코를 박고 교정지의 페로몬에 흥분하며 앎을 확장하고 사람을 발견하며 순간순간을 온전히 살아내야 한다. 에디터의 심장을 뛰게 하는 건 이제 막 탈고한 저자의 원고다. 저자의 첫 독자로서 책이 될 원고의 최종 질감과 색감과 크기와 두께를 상상하며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가는 기쁨은 그 무엇에도 견주기 어렵다. 외로운 골방에서 길어 올린 타인의 언어를 드넓은 광장으로 내보낼 생각에 전율이 인다. 저자가 수고롭게 길어 올린 옥수(玉水)를 맑고 투명한 병에 담아 목마른 이들에게 건네고, 목을 축인 이들이 다시 힘을 내어 한 걸음 두 걸음 전진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자체로 아름답다. 세상에 실패하는 원고는 있어도 실패하는 글은 없다. 저자의 실패는 에디터의 방임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원고와 글은 같은가요, 다른가요?” 20년이 지났는데도 이 질문이 여전히 나를 죽비처럼 때리는 이유다.
차이를 감별하는 눈
2000년대 초반 책세상 출판사가 우리시대 시리즈를 내놓으며 기존의 문고 시장을 혁신해 나갈 때 크게 유행하던 광고가 있었다. “모두가 Yes라고 할 때 No라고 말하는 사람이 좋다”라는 카피로 유명해진, 한 증권사의 광고다. 증권업에서 남다름이란 주식 종목 선정이나 매수·매도 타이밍을 선별하는 일 등에 한정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남들이 모두 앞을 향해 있을 때 홀로 뒤돌아 ‘아니오’를 외치던 화이트칼라 남성의 이미지는 좀 더 넓은 직업 세계에서 창의적인 인재상을 거론할 때 곧잘 인용되곤 했다. 혁신도 창의도 결국 ‘다름’에서 시작한다는 걸 상업 광고 하나가 콕 집어 보여 준 셈이다.
편집이야말로 ‘다름’을 감지하는 촉수가 예민하게 요구되는 직업이다. 문자가 출현하고 종이와 인쇄술이 발명돼 현재의 책이라는 물성이 완성되기까지 7000년 동안 하늘 아래 새롭게 쓰인 이야기가 과연 몇이나 될까? 20세기 디지털 전환기를 맞아 종이책 대신에 전자책이, 소유용 책장 대신에 공유형 플랫폼이 대세를 이루며 콘텐츠 미디어 형태가 크게 변화했는데도 그 안에 담기는 인간의 지식과 통찰, 희로애락에는 큰 변화가 없다. 한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책의 본질을 망원경으로 조망했을 때의 이야기다. 시대와 지역과 세대를 나눠 현미경으로 촘촘히 들여다보면 다른 인물, 다른 스토리, 다른 주제로 변화무쌍하다.
다름의 본질은 곧 분절이다. 이미 하나로 굳어진 현상과 의미의 연속체를 쪼갤 때 틈이 생기고, 작디작은 틈에서 자라난 생각 하나가 결국 다른 세상을 창조해 낸다. 세상의 결은 거대하고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세밀하고 구체적인 눈 하나가 바꾼다. 아니 디테일에 전체를 담는 눈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소형 무선 전화기에 불과했던 핸드폰에 컴퓨팅을 시도하여 지금의 만능 스마트폰을 만든 사람들처럼 말이다.
작은 차이를 크게 키우기
책세상문고·세계문학 시리즈를 기획할 때 내가 염두에 둔 것도 이 작은 차이였다. 국내 소장학자들의 학문적 성과와 당대의 사회 이슈를 접목한 ‘우리시대’가 스테디셀러 서가에 자리를 잡고, 세계적인 인문 고전의 서문이나 중요 아티클을 발췌·번역해 전공자의 해제를 붙인 ‘고전의 세계’가 뜻밖에도 흥행을 거두던 때였다.
당시 김광식 주간은 벼르고 벼르던 세 번째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문고의 결정판은 문학 아니겠어요?”라고 운을 떼며 당시 만 스물여섯 살의 내게 ‘세계문학’ 기획 실무를 제안하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공부하고 문단에 데뷔해 시를 발표하고는 있었지만 이제 막 문청 딱지를 뗀 내게 ‘세계문학’ 시리즈를 진행할 만한 안목과 내공이 쌓여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데도 덜컥 실무를 맡은 이유는 꼭 시도해 보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세계 문학이라는 범주에 한국 문학을 포지셔닝하기. 현대 문학뿐만 아니라 《구운몽》, 《홍길동전》 등 우리 옛 작품을 세계의 고전(classic) 레벨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하기. 2000년대 초반까지 출간된 세계 문학 시리즈 가운데 시든 소설이든 수필이든 한국 문학 작품을 단 한 권이라도 포함한 출판사는 없었다. 그때까지 한국에서 세계 문학이란 곧 유럽과 북미 중심의 서양 문학을 뜻했다.
① 세계적인 문학 작품의 가치를 갖되 한국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작가, 이미 소개됐다면 소개되지 않은 작품을 엄선한다.
② 다른 세계 문학 시리즈처럼 소설에 국한하지 않고 시, 산문, 희곡까지 전 장르를 망라한다. 아웃사이더 장르를 인사이더로 끌어들인다.
③ 한국의 고전 문학과 현대 문학을 세계 문학에 포함하고, 시리즈의 첫 책으로 낸다.
이 세 가지를 골자로 기획안을 작성하고 나니 다음에 할 일이 명료해졌다. 북미와 남미, 영국을 포함한 유럽,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 언어권별로 쓰인 중요 문학사를 읽어 나가는 동시에 전문가의 조언을 통해 숨은 진주들을 캐내야 했다. 세계 문학과 한국 문학에 두루 밝은 문학 평론가 한 분과 제3세계 문학에 조예가 깊은 미학도 한 분을 모셔 기획팀을 꾸렸다. 우리는 6개월간 500여 종의 후보 리스트를 만드는 한편, 작품 이해도와 번역 실력을 두루 갖춘 전공자를 물색했다. 더불어 편집 비용과 기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저작권이 소멸한 국내외 타이틀을 확보하는 데도 품을 들였다.
일련의 작업을 위해 기존 세계 문학 시장에 대한 일차 자료가 필요했다. 자료 조사 방법을 배운 바도 없고 전수 조사 개념조차 알지 못했지만 ‘몸빵’의 힘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나는 시시때때로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출판사별로 펴낸 세계 문학 출간 리스트를 긁어다 하나의 파일로 정리했다. 겹치는 작가와 작품, 겹치지 않는 작가와 작품 등을 일별하면서 시리즈별로 특장점과 약점을 분석해 나갔다. 퇴근 후면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 대형 서점에 들러 세계 문학 서가를 훑었다. 새로 나온 컬렉션은 없는지, 기존 시리즈는 어떤 물성으로 책을 만드는지, 습관처럼 살피고 점검했다.
역시나 영미권과 유럽 문학이 대세였고 어렵사리 번역된 제3세계 문학은 절판된 책이 부지기수였다. 아시아 문학은 중국과 일본을 제외하고는 존재감이 거의 없었으며, 무엇보다 근대라는 시기와 소설이라는 장르의 프레임을 과감하게 벗어난 시리즈가 없었다. 자료가 쌓일수록 우리의 기획 방향이 타 출판사 시리즈와 다른 결을 확보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아가 보급용 문고로 제작될 터여서 시대, 언어, 장르의 한계를 넘어 독자에게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우리가 그리려는 방대한 문학 지도 앞에 내가 그어 놓은 출발선이 시리즈의 기준이 되고 스타일로 굳어 가는 모양새를 지켜보는 일은 두려우면서도 짜릿했다.
책세상문고·세계문학의 첫 작품은 장고 끝에 장용학 소설집 《요한 시집 외》로 정했다. 장용학은 한국에도 프랑스 못지않은 실존주의 문학이 가능함을 알린 작가인데 그 가치를 아는 이가 드물었다. 아울러 단편 〈요한 시집〉은 일제 강점기에 이식된 서구 근대 문학의 문법과 자장에서 진일보한, 지금 읽어도 차원 높은 세계관과 스타일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대중에게 덜 알려진, 그러나 뛰어난 문학성이 강조된 작품이 첫머리에 놓이자 다소 마니악한 취향을 가진 독자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중 다음의 작품은 지금까지 꾸준히 읽힌다.
1960년대 미국의 히피 정신을 대표하는 윌리엄 버로스의 소설 《네이키드 런치》, 《돈키호테》를 쓴 스페인의 대문호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숨겨진 희곡집 《누만시아·사기꾼 페드로》, 중국 청대의 빼어난 산문가 심복의 《부생육기》 등은 발견의 미학이 돋보인다. 러시아 혁명의 불꽃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의 시선집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 바쇼와 부손과 잇사 등 일본의 대표적 하이쿠 시인들의 작품을 엄선한 《일본 하이쿠 선집》은 혁명의 언어와 수양의 언어가 동시다발로 가능한 시적 세계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무엇보다 한국 환상 문학의 효시인 김만중의 《구운몽》, 한국의 빼어난 개혁 소설 《홍길동전》, 한국 로망스의 전형을 보여 준 《춘향전》 등은 국내 고전 연구자들을 세계 문학 연구자로 포지셔닝하는 기념비적인 작업이 됐다.
책세상문고·세계문학은 오랜 시간 자본을 투자해 뚝심 있게 밀어붙인 메이저 출판사들의 시리즈처럼 장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를 감별해 남다른 컬렉션을 선보였다는 점만큼은 부정하기 어렵다. 당시만 해도 한국 문학을 세계 문학 시리즈에 포지셔닝한 출판사는 없었고(지금은 민음사와 문학동네가 한국 문학을 세계 문학 시리즈에 포함하고 있다), 근현대 소설 위주로 세계 문학을 파악하던 한국 독자들에게 시와 희곡도 소설만큼이나 다양하고 매력적이라는 것을 알렸다. 아울러 낯선 문학을 접하고 어리둥절할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에디터로서 시도했던 두 가지 에디팅은 지금 돌아봐도 나쁘지 않다. 첫째, 이미 작고한 저자들을 가상 공간으로 초대하여 인터뷰 방식으로 자신의 작품을 말하게 함으로써 지금 이곳의 ‘문학적 현존’을 부각했다. 둘째, 통상의 연대기적 시간순에 따른 작가 연보 대신에 전기 형식의 내러티브형 연보를 시도함으로써 저자의 일생과 문학적 궤적에 대한 대중의 이해도를 높였다.
500종은커녕 50종도 펴내지 못한 책세상문고·세계문학을 자부하는 또 다른 이유는 독자들의 피드백 때문이다. 이 시리즈를 까맣게 잊고 살아가던 어느 날, 책세상문고·세계문학이 왜 남달랐는지를 말해 주는 독자들을 여럿 만났다. 전문 독자인 비평가도 있었고 일반 독자도 있었다. 담당 기획자도 잊은 시리즈를 여전히 읽어 주는 독자들을 만나자 심장이 쿵쾅거렸다. 한국 문학을 세계 문학 반열에서 읽을 수 있다는 관점이 신선하다, 연극 종사자로서 고전이라 할 만한 희곡 작품을 우리말로 읽을 수 없어 안타까웠는데 책세상 시리즈가 해결해 줘서 고마웠다, 시리즈에 시와 희곡과 산문이 포함되어 다채로웠다 등의 독자평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저자는 글을 쓰고 에디터는 책을 만들지만 그 책을 저자나 에디터보다 더 오래 반복해 읽으며 살아 있게 만드는 존재는 독자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기는 계기가 됐다. 읽어 주는 사람이 없다면 책이, 출판이 다 무슨 소용이랴.
매뉴얼을 넘어선 매뉴얼
몇 년 전 온라인 지식 백과를 만드는 연구소에서 출판 편집 매뉴얼을 단행본으로 만드는 작업을 할 때였다. 원고 집필차 자료를 구해 읽고 업계 선후배들을 찾아 경험과 노하우를 청해 들으며, 100년 남짓한 시간 동안 역동적으로 발전해 온 한국 출판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성인 단행본만 해도 한 해 8만 종이 넘게 출판되며 엄청난 생산량을 자랑한다. 해외 수상 실적도 꾸준히 늘고 있고 판권 수출액은 매년 증가세를 보여 2021년 기준 4억 3000달러(2023년 5월 기준 한화 5700억 원)에 이르렀다.[4]
그럼에도 안타까웠던 점은 업계에 입문하면 누구라도 참고할 만한 정통 매뉴얼 한 권 없이 입에서 입으로, 손에서 손으로 도제 교육받듯 전달되는 편집 현장의 낙후성이었다. 참고했던 도서들 가운데 편집 공정에 대해 개념부터 활용까지 빈틈없이 다룬 도서도 있었으나 이제는 수명이 다한 활판 인쇄에 기반하고 있었다.[5] 근자에 나온 책들 중에는 매뉴얼 방침이나 디자인적 구조가 남다른 도서를 찾아볼 수 있었으나 책의 절반을 한글 맞춤법과 외래어 표기법에 할애하고 있었다. 원고 교정자가 언어권별로 사전을 여러 종 옆에 두고 일하던 과거 아날로그 시대라면 모를까, 인터넷 전자사전과 각종 백과사전을 스마트폰으로도 시시때때로 검색할 수 있는 시대에 그 책의 절반은 종이 낭비에 가까워 보였다.
출판이 무엇이고 그중 편집은 무엇이며 편집자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기준이 되고 규범이 될 만한 전문성을 갖춘 이가 드문 탓일까? 그럴 리는 없다. 출판‘업’에 대해, 편집‘일’에 대해, 편집‘인’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거나 이야기해 온 경험이 드물어서일 것이다. 더 잔혹한 진실은 책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물론이거니와 책의 메커니즘과 출판 생태계 자체를 한국 사회가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울러 내가 만난 선수들은 하나같이 책 만드는 일에는 열과 성을 다할지언정 그런 자신을 설명하는 데는 소극적이다. 무대 전면에 나서는 일이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대 위에 올라 발언하는 것은 에디터 본연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대 위에 올라 자신이 만든 책과 저자를 직접 이야기하거나 논평하는 에디터는 극히 소수이며, 이들은 때때로 창작자를 겸한다.
시대는 변한다. 단절이 상수였던 오프라인 사회에서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배우들이 주목받았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누구와도 연결되는 디지털 초연결 사회에선 ‘무대를 만들어 배우를 세우고 관객을 불러들이는 일’을 하는 사람도 관심의 대상이 된다. 나와 비슷한 사람, 익숙한 이웃에게서 남다름을 발견할 때 오히려 환호한다. 2018년 8월 29일부터 tvN에서 방영 중인 〈유 퀴즈 온 더 블록(You Quiz On The Block)〉 프로그램을 남다르게 생각하는 이유다. 국민 MC 유재석과 주연보다 조연에 적합한 개그맨 조세호가 일만 시민들의 일상으로 들어가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들 삶과 유사한 범주에서 퀴즈를 내는 프로그램. 답을 맞히면 100만 원의 상금을, 못 맞히거나 퀴즈를 거부하면 웃음과 재미를 유발하는 굿즈를 수여한다. 방영 초기부터 소박하고 친숙한 우리 이웃의 일과 삶에 집중하는 방식이 좋았고, 집중해서 질문한 뒤 답하는 이의 말을 끊지 않는 인터뷰 방식은 방송가에서 보기 드문 미덕으로 보였다. 이 프로그램이야말로 내가 줄곧 얘기하는 ‘편집의 눈’과 닮았다. 사람들이 집중하지 않는 것에서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새롭고 낯선 이야기를 만드는 힘, 이것이 인간적 창조(creation)의 본질이 아닐까?
나름 공을 들였던 편집 매뉴얼 원고는 연구소의 중요 사업에 밀리며 결국 책이 되지 못했다. 매뉴얼 한 권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편집장 자리에 대해 오랫동안 자괴감을 버리기 어려웠는데, 과거를 답습하지 않으려 애썼던 원고가 오히려 과거의 프레임에 갇혀 있었다는 아이러니를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알아차린다. 기존 매뉴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정보를 구성하는 데 목맸던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 매뉴얼도 달라져야 한다. 초연결 시대에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매뉴얼은 어떤 내용과 형태여야 할까? 온라인에 접속하면 누구라도 취할 수 있는 정보가 아닌, 이를테면 경험과 관록에 의해 걸러진 직업적 통찰만이 진정한 매뉴얼로 전수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예측하건대 미래의 편집은 매뉴얼이 필요 없는, 매뉴얼을 따르지 않는 형태로 진화할 것 같다. 출판 편집 프로세스에 관한 한 가능한 모든 것이 정보화되어 공유될 것이고, 0과 1로 변환될 수 없는 이야기와 느낌과 통찰만이 남아서 입에서 입으로, 손에서 손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될 것이다. 모든 일의 정수는 이런 형태로 전달될 수밖에 없으며 사람이 곧 매뉴얼인 출판업은 더할 것이다. 눈 밝은 에디터라면 이미 기계와 로봇이 수행할 수 없는 영역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 것이며, 시대를 읽을 줄 아는 발행인이라면 이런 에디터가 사업의 기초 자산임을 알고 사람에게 공을 들이고 있을 것이다.
일에는 배울 수 있는 영역과 배울 수 없는 영역이 있다. 기술은 배울 수 있지만 애초에 편집자에게 필요한 기술은 거의 없다. 그러니 책은 만들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만들면 된다.[6]
책이 되지 못한 편집 매뉴얼 원고는 지금 내 외장 하드에 고이 저장돼 있다. 파일을 불러와 열어보니 A4 도큐먼트 129쪽, 13만 1300자에 달한다. 그중 편집, 편집자, 원고의 ‘개념’을 정리한 내용 외에 나머지 90퍼센트의 글은 앞으로 출판 기술과 편집 도구가 진화함에 따라 자연스레 도태되고 사라질 것 같다. 활판술에 기초한 편집법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도서 편집을 하고 있거나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긴요한 문제는 책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앞서 왜 만들고자 하는지, 무엇을 만들고자 하는지를 자기 방식대로 정립하는 일이라고 본다. 책을 만드는 이유가 분명하고 하다못해 생계를 위해서라도 만들고 싶은 아이템이 끊이지 않는다면, 업계를 떠나지 않는 이상 배움에 가속도가 붙는다. 기계가 인간의 창의적인 일을 거의 모두 대체하는 시대에 기계가 결코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 기계의 도움을 받아 더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방편은 무엇인지를 궁리하는 편이 윗길이다. 한글 맞춤법이나 외래어 표기, 편집 디자인 등은 기술 덕분에 더 수월해지고 정교해질 것이다. 하지만 에디터의 ‘눈’은 기계가 대체할 수 없다. 잠재력 있는 저자와 콘텐츠를 발굴하고 시장을 상상하는 일은 데이터에 포섭되지 않는 에디터 자신만의 지식과 경험, 감성과 직관이 동시다발로 작동하는 복잡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상상해 본다. 이 세상에 편집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타격을 입는 쪽은 자연이 아니라 인류일 것 같다. 세상의 모든 뉴스가 뒤죽박죽되어 제대로 연결되거나 전달되지 않아 ‘우리’라는 공통감각이 사라질 테다. 일목요연하게 서술된 책도, 잘 짜여 흥미진진한 영화와 게임도 더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실용적으로 잘 선별된 큐레이팅의 세계도, 나의 무의식적 필요에 부응하는 알고리즘의 세계도 연기처럼 증발하고 만다. 모든 것이 다 중요하거나 다 중요하지 않아서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다. 무엇을 입어야 할지, 무엇을 먹어야 할지, 누구를 만나고 어디를 어떻게 가야 할지, 하루 종일 갈팡질팡 좌충우돌하는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편집은 이런 무질서한 세상에 일종의 방점을 찍는 일이다. 언어적 질서를 세움으로써 세상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인간만의 일이다. 자연의 도(道)에 섞여 무(無)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인간은 활자화된 의미, 편집된 가치들을 계속 먹어 치우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뇌와 의식 그리고 언어를 가진 인간의 운명이다.
어떤 것이 작동하는 방식에 관심이 있다면 그것이 작동하지 않을 경우, 혹은 부분적으로만 작동할 경우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는 것이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