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레트로인가
“2000년대는 접두사 ‘재(re-)’가 지배했다”는 음악 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Simon Reynolds)의 말처럼[1] 재발매, 재가공, 재연 등이 대중문화의 트렌드가 된 지 오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처럼 많은 사람이 가까운 과거에 이토록 집착한 적은 인류사에 없었다. 전 세계적인 레트로(retro) 열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레트로는 문화 산업을 넘어 패션, 건설, 식음료, IT, 여행, 의료, 유통 등 산업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레트로는 레트로스펙티브(retrospective)의 준말로 ‘리바이벌, 재(再)유행, 뒤로, 거꾸로’라는 뜻이다. 비교적 가까운 과거의 스타일을 부활시킨 복고주의적 양식을 의미한다.[2]
레트로는 빈티지(vintage), 패스티시(pastiche), 브리콜라주(bricolage)와 혼동되기도 하지만, 과거를 활용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빈티지는 숙성된 최상의 상태를 일컫는 말로 오래되어도 가치가 있는 것, 오래되어도 새로운 것을 의미한다. 패스티시는 널리 알려진 과거 양식을 차용하거나 모방하는 기법이다. 브리콜라주는 과거 양식의 재료나 아이템을 재조합하는 작업이다. 반면 레트로는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거나 차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과거 양식(형태, 특성, 스타일 등)의 느낌과 그 시대의 감각을 현시점에서 새로운 의미로 해석하고 응용하는 과정이다.
대중문화가 그려 내는 레트로의 배경은 30~40년 전이다. 레트로는 추억의 정서인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킨다. 노스탤지어는 과거와 현재의 좁힐 수 없는 시간적 거리에 근거한 개념이다. 다시는 가질 수 없고 돌아갈 수 없기에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애틋함은 커진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적 거리를 단축시키는 레트로는 기성세대에게 과거에 가졌던 감정이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그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에게는 옛것은 새로움이라는 역설로 다가간다. 그 결과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에 연결 고리가 만들어진다.
레트로 현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1960년대에 처음 등장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전 세계적으로 밀레니엄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되면서 대중문화의 핵심 키워드로 급부상했다. 이후 글로벌 경제 위기를 거치며 저성장과 양극화, 일자리 문제가 심화되면서 레트로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유행이 아니라, 21세기의 글로벌한 문화 현상이자 메가트렌드로 자리매김했다. 레트로 열풍을 일으킨 요인과 그 가치는 심리적, 기술 혁신적, 경제적, 인구학적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① 심리적 관점; 향수를 일깨워 심리적 위안 제공
사람들은 즐겁고 따뜻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 속에서 현재의 아픔을 위로받는다. 스마트 미디어 시대를 사는 현대인은 직접 소통의 부재,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친 혼란 속에서 불안 심리를 느낀다. 자연히 따뜻한 아날로그 감성을 원하게 되었고, 과거를 현재로 소환하는 레트로는 인간의 보편적 감성인 향수를 일깨워 현대인에게 심리적 위안을 제공한다.
② 기술 혁신적 관점; 추억 또는 호기심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디지털 문화가 급속히 발전하고,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뉴 버전(new version)이 출시되고 있지만 소비자들은 점점 더 새로운 것, 더 재미있는 것, 더 다양한 것을 찾는다. 이들에게 최신 IT 기기와 서비스는 새롭지만 아주 새롭지는 않고, 편리하지만 한편으론 어색하고 불편하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에서 다이얼 전화기, 타자기, 워크맨, 턴테이블과 LP판 같은 레트로 제품은 기성세대에게 추억과 향수를 일으키고, 젊은 세대에게는 마치 신제품을 접하는 듯한 호기심과 재미를 선사한다.
③ 경제적 관점; 불황기의 안정적인 이윤 창출
경기 침체와 고용 불안이 이어지면서 대중의 안전 추구 성향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 마찬가지로 기업 역시 큰 비용을 들여 새 브랜드를 출시하기보다는, 성공한 경험이 있는 제품을 그대로 재출시하거나(revival), 현대적으로 소화하거나(remake), 현대 감각 및 기술과 융합해 새로운 버전으로(convergence) 내놓는다. 레트로 마케팅은 충성도가 높은 소비 계층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안정적인 이윤 창출이 가능하고, 새 제품 개발에 비해 위험 부담이 적다.
④ 인구학적 관점; 기성세대의 적극적인 문화 소비
과거 기성세대는 자녀들의 문화 경험을 뒷받침하는 경제적인 후원자로 여겨졌을 뿐, 문화적 구매력이 약한 연령 집단이었다. 그러나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공존하던 1990년대에 청춘을 보낸 현재 기성세대는 적극적인 문화 소비 계층으로 성장했다. 대중문화를 적극 향유하려는 연령대가 확장되면서 레트로가 기성세대의 문화 참여를 이끌어 내고 있다. 이는 그들이 잊고 있던 문화적 욕망을 새롭게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글은 레트로 트렌드를 향유하는 소비층과 현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안내서다. 특히 소비 시장의 주축으로 부상한 밀레니얼 세대의 레트로 문화와 그 배경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미래학자 마티아스 호르크스(Matthias Horx)는 “현존하는 많은 것들은 오래된 것들의 한 변형일 뿐이다. 미래는 복고 경향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레트로 현상을 돌아보는 일은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리바이벌, 리메이크, 컨버전스
레트로의 사례들은 과거의 유행을 현재로 불러와 재현한다는 점에서 모두 공통점을 갖지만, 현재로 불러낸 과거의 모습이 변형된 정도 및 형태에 따라 다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과거의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리바이벌(revival), 과거의 것을 현대의 관점으로 소화하고 재해석하는 리메이크(remake), 과거의 것을 현재의 것과 융합하는 컨버전스(convergence)다.
먼저 리바이벌은 과거의 소재를 당시의 모습 그대로 현재에 재현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창조나 재해석이 개입될 여지가 적다. 대중음악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면, 1960년대 유행하던 비틀스(Beatles)의 음악을 편곡이나 재해석 없이 오늘날 원곡 그대로 소비한다면 이는 리바이벌에 해당한다. 이는 과거로의 단순 회귀라는 측면에서 가장 본원적인 의미의 레트로라고 볼 수 있다. 리바이벌 형태는 인테리어 디자인 영역에서 많이 나타난다. 옛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영국 런던의 ‘시리얼 킬러 카페(Cereal Killer Cafe)’, 국내 음식점 ‘잠수교집’과 ‘행진’이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