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 판타즘
완결

레트로 판타즘

왜, 지금 레트로인가


“2000년대는 접두사 ‘재(re-)’가 지배했다”는 음악 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Simon Reynolds)의 말처럼[1] 재발매, 재가공, 재연 등이 대중문화의 트렌드가 된 지 오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처럼 많은 사람이 가까운 과거에 이토록 집착한 적은 인류사에 없었다. 전 세계적인 레트로(retro) 열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레트로는 문화 산업을 넘어 패션, 건설, 식음료, IT, 여행, 의료, 유통 등 산업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레트로는 레트로스펙티브(retrospective)의 준말로 ‘리바이벌, 재(再)유행, 뒤로, 거꾸로’라는 뜻이다. 비교적 가까운 과거의 스타일을 부활시킨 복고주의적 양식을 의미한다.[2]

레트로는 빈티지(vintage), 패스티시(pastiche), 브리콜라주(bricolage)와 혼동되기도 하지만, 과거를 활용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빈티지는 숙성된 최상의 상태를 일컫는 말로 오래되어도 가치가 있는 것, 오래되어도 새로운 것을 의미한다. 패스티시는 널리 알려진 과거 양식을 차용하거나 모방하는 기법이다. 브리콜라주는 과거 양식의 재료나 아이템을 재조합하는 작업이다. 반면 레트로는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거나 차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과거 양식(형태, 특성, 스타일 등)의 느낌과 그 시대의 감각을 현시점에서 새로운 의미로 해석하고 응용하는 과정이다.

대중문화가 그려 내는 레트로의 배경은 30~40년 전이다. 레트로는 추억의 정서인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킨다. 노스탤지어는 과거와 현재의 좁힐 수 없는 시간적 거리에 근거한 개념이다. 다시는 가질 수 없고 돌아갈 수 없기에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애틋함은 커진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적 거리를 단축시키는 레트로는 기성세대에게 과거에 가졌던 감정이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그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에게는 옛것은 새로움이라는 역설로 다가간다. 그 결과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에 연결 고리가 만들어진다.

레트로 현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1960년대에 처음 등장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전 세계적으로 밀레니엄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되면서 대중문화의 핵심 키워드로 급부상했다. 이후 글로벌 경제 위기를 거치며 저성장과 양극화, 일자리 문제가 심화되면서 레트로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유행이 아니라, 21세기의 글로벌한 문화 현상이자 메가트렌드로 자리매김했다. 레트로 열풍을 일으킨 요인과 그 가치는 심리적, 기술 혁신적, 경제적, 인구학적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① 심리적 관점; 향수를 일깨워 심리적 위안 제공
사람들은 즐겁고 따뜻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 속에서 현재의 아픔을 위로받는다. 스마트 미디어 시대를 사는 현대인은 직접 소통의 부재,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친 혼란 속에서 불안 심리를 느낀다. 자연히 따뜻한 아날로그 감성을 원하게 되었고, 과거를 현재로 소환하는 레트로는 인간의 보편적 감성인 향수를 일깨워 현대인에게 심리적 위안을 제공한다.

② 기술 혁신적 관점; 추억 또는 호기심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디지털 문화가 급속히 발전하고,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뉴 버전(new version)이 출시되고 있지만 소비자들은 점점 더 새로운 것, 더 재미있는 것, 더 다양한 것을 찾는다. 이들에게 최신 IT 기기와 서비스는 새롭지만 아주 새롭지는 않고, 편리하지만 한편으론 어색하고 불편하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에서 다이얼 전화기, 타자기, 워크맨, 턴테이블과 LP판 같은 레트로 제품은 기성세대에게 추억과 향수를 일으키고, 젊은 세대에게는 마치 신제품을 접하는 듯한 호기심과 재미를 선사한다.

③ 경제적 관점; 불황기의 안정적인 이윤 창출
경기 침체와 고용 불안이 이어지면서 대중의 안전 추구 성향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 마찬가지로 기업 역시 큰 비용을 들여 새 브랜드를 출시하기보다는, 성공한 경험이 있는 제품을 그대로 재출시하거나(revival), 현대적으로 소화하거나(remake), 현대 감각 및 기술과 융합해 새로운 버전으로(convergence) 내놓는다. 레트로 마케팅은 충성도가 높은 소비 계층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안정적인 이윤 창출이 가능하고, 새 제품 개발에 비해 위험 부담이 적다.

④ 인구학적 관점; 기성세대의 적극적인 문화 소비
과거 기성세대는 자녀들의 문화 경험을 뒷받침하는 경제적인 후원자로 여겨졌을 뿐, 문화적 구매력이 약한 연령 집단이었다. 그러나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공존하던 1990년대에 청춘을 보낸 현재 기성세대는 적극적인 문화 소비 계층으로 성장했다. 대중문화를 적극 향유하려는 연령대가 확장되면서 레트로가 기성세대의 문화 참여를 이끌어 내고 있다. 이는 그들이 잊고 있던 문화적 욕망을 새롭게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글은 레트로 트렌드를 향유하는 소비층과 현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안내서다. 특히 소비 시장의 주축으로 부상한 밀레니얼 세대의 레트로 문화와 그 배경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미래학자 마티아스 호르크스(Matthias Horx)는 “현존하는 많은 것들은 오래된 것들의 한 변형일 뿐이다. 미래는 복고 경향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레트로 현상을 돌아보는 일은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리바이벌, 리메이크, 컨버전스


레트로의 사례들은 과거의 유행을 현재로 불러와 재현한다는 점에서 모두 공통점을 갖지만, 현재로 불러낸 과거의 모습이 변형된 정도 및 형태에 따라 다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과거의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리바이벌(revival), 과거의 것을 현대의 관점으로 소화하고 재해석하는 리메이크(remake), 과거의 것을 현재의 것과 융합하는 컨버전스(convergence)다.

먼저 리바이벌은 과거의 소재를 당시의 모습 그대로 현재에 재현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창조나 재해석이 개입될 여지가 적다. 대중음악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면, 1960년대 유행하던 비틀스(Beatles)의 음악을 편곡이나 재해석 없이 오늘날 원곡 그대로 소비한다면 이는 리바이벌에 해당한다. 이는 과거로의 단순 회귀라는 측면에서 가장 본원적인 의미의 레트로라고 볼 수 있다. 리바이벌 형태는 인테리어 디자인 영역에서 많이 나타난다. 옛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영국 런던의 ‘시리얼 킬러 카페(Cereal Killer Cafe)’, 국내 음식점 ‘잠수교집’과 ‘행진’이 대표적이다.
시리얼 킬러 카페 Ⓒ Andrew Davidson
리바이벌은 현대적인 감각과 느낌으로 재창조하려 하지 않는다. 원형 그대로의 재현을 통해 과거의 기억과 추억을 불러오는 것만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 시대의 트렌드를 직접 경험한 기성세대들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정서적 만족감을 느낄 수 있고,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은 옛것에서 새로움을 발견한다.

과거의 역사와 전통을 활용하는 헤리티지 마케팅에서도 리바이벌 형태가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헤리티지 마케팅은 특히 오랜 전통이 있는 명품 브랜드에서 신규 브랜드와의 차별화 수단으로 사용한다. 역사적인 전통을 강조하는 목적인 만큼 리바이벌 형태의 레트로 활용이 적합하다.

리메이크는 과거의 것을 현시대의 감성으로 소화하고 재해석해 소비자의 흡수력과 공감을 극대화하는 것을 추구한다. 대중음악의 경우로 보면, 1960년대 유행하던 비틀즈의 음악을 현시대의 유명 가수가 새롭게 편곡해서 부르는 경우를 말할 수 있다. 리바이벌, 리메이크, 컨버전스 중에 레트로의 방식으로 가장 많이 활용되는 경우가 리메이크다. 그래픽 디자인의 복고 서체, ‘프릳츠 커피’의 디자인 사례 등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김기조체’는 1970, 80년대의 폰트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느낌을 낼 수 있도록 재창조했다.
디자이너 김기조가 만든 폰트 김기조체
리메이크 형태의 레트로는 리바이벌 형태의 것과 비교해 보면, 상대적으로 가공이 많고 창조적이다.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과거의 것에서 모티프를 가지고 와서 현대적으로 재창조하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창조의 한 방법이다.

컨버전스는 현재의 것이 중심이 된 상태에서 과거와 현재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형태를 만든다. 이러한 방식은 현재 우리가 활용하는 재화에 과거의 감성을 결합하는 형태로, 주로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소비재 영역에서 많이 관찰된다.

최근에 유행하는 디지털(digital)과 아날로그(analog)의 합성어인 디지로그(digilog) 마케팅이 대표적인 컨버전스 방식의 레트로라 할 수 있다. 디지로그 마케팅은 디지털 제품이나 디지털 기술을 사용한 재화나 서비스에 향수, 추억 등과 같은 아날로그적 정서에 대한 욕구를 반영하는 마케팅 전략이다. 과거 게임기나 타자기 모양의 아이패드용 액세서리, 카세트 테이프를 MP3로 변환할 수 있는 MP3 카세트 등의 디지로그 상품들이 컨버전스 형태의 레트로에 해당한다. 모두 디지털화된 제품들에 과거의 감성을 입혀 새로운 제3의 제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
시판 중인 아케이드 게임기 Ⓒ Taito Corp
 

레트로 판타즘


2018년 느슨한 비정규직 프리랜서의 삶을 기록한 에세이집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가 큰 인기를 끌었다. SNS에는 ‘대충 살자’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는 글이 유행처럼 퍼졌다. 이광석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대충 살자’의 정서를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의 줄임말)’에 좌절해 강제적으로 체념된 집단 정서”라고 분석한다. 최종렬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 사회에 대해 청년들이 택한 저항의 한 방법”이라고 풀이한다.[3]
‘대충 살자’라는 해시태그를 단 인스타그램 게시물
실제로 청년들 사이에서는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하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것 같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퇴근 후 곧장 집으로 돌아가 보내는 시간이 예전보다 늘었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휴식을 취하거나 그냥 잔다는 이들도 많다.[4] 계층 상승에 있어 자신의 노력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자원의 영향력이 더 크다는 의견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냉소와 함께,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고자 하는 청년들의 심리를 엿볼 수 있다.

이런 암울한 현실 속에서 청년들은 소위 ‘희망팔이’류의 덕담이나 더 노력하라는 교조적 가르침에 더 이상 공감하지 않는다. 미래를 예측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다. 역사상 가장 혁신적이라고 하지만 동시에 가장 불확실하고 무기력한 시대를 사는 젊은 소비자들은 잠시라도 현실을 떠나 유토피아를 느낄 수 있는, ‘환상으로 가는 탈출구’를 경험하기를 원한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인기를 얻은 대중문화 상품을 살펴보면 소비자들의 의식이 점차 공감대 형성, 위로, 낭만 추구, 현실 탈피 등의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십년지기 친구들의 실제 여행을 소재로 한 TV 프로그램 〈꽃보다 청춘〉, 학창 시절을 추억하는 〈응답하라〉 시리즈, 1990년대 TV 애니메이션으로 인기가 높았던 만화 캐릭터 푸의 명대사를 모은 책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등은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사는 소비자들에게 위로와 공감을 선사했다. 작품 속 캐릭터들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라고 강요하지 않았고, 신도 안 나는데 공허한 해피 바이러스를 전달하지도 않았다.

현실 세계에 대한 저항, 불만족은 판타지를 추구하는 경향과 연결해서 볼 수 있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판타지는 인터넷 공간을 통해 일상적으로 발현된다. 개인이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다양한 소셜 미디어를 통해 공유하는 사진과 동영상은 판타지의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판타지가 존재와 비존재 간 경계가 붕괴되는 것이라면 사이버 공간이 이용자들에게는 바로 판타지의 공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상에 비친 자신의 모습 혹은 타인의 모습은 현실의 모습을 부정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경우가 많다. 원하는 모습을 가공하고 편집해 공유하는 것이다. 네트워크를 타고 급속도로 확대되는 소셜 미디어 속 개인의 삶은 현실과 비현실,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넘나드는 일종의 판타지가 되어 버렸다.

판타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그려 내고 잠시나마 일상에서 떠나는 심리적인 만족을 준다. 역시 현재나 현실이 아닌 과거의 모습에서 모티프를 얻어 스토리를 전개하는 레트로와 결합될 경우 판타지의 문화적 파급력은 더 커질 수 있다.

최근 패션계에서 꿈의 유토피아를 콘셉트로 한 판타지 바람이 불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구찌(Gucci)의 2018 봄여름 광고 캠페인은 ‘유토피언 판타지(Utopian Fantasy)’를 주제로 땅, 바다, 하늘 등 세 요소와 관련한 일련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광고 캠페인은 초현실적인 렌즈 너머로 보이는 황홀하고 신비로운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구찌의 신제품은 이러한 시각적 내러티브의 일부로 연출되고 있다.
구찌의 2018 봄여름 광고 캠페인은 ‘유토피언 판타지’ Ⓒ Gucci
2019년 봄여름 런웨이에서는 경제적 불황과 정치적 불안과 같은 부정적 현실에서 도피하는 일종의 ‘이스케이피즘(escapism)’이 발견된다. 생 로랑(Saint Laurent)은 프랑스 파리 에펠탑 앞 트로카데로(Trocadéro) 광장을 가공의 야자수가 펼쳐진 미래의 해변으로 바꿔 놓았다. 톰 브라운(Tom Browne)은 어린 시절 해변에서 보았던 게, 갈매기, 아이스크림을 콘셉트로 모델들을 꾸몄고, 마크 제이콥스는 모델을 꽃으로 삼아 살아 있는 정원을 구현했다. 릭 오웬스(Rick Owens)는 신화 속에서 무너진 바벨탑과 제3세계로 가는 탑을 형상화했다.

전문가들은 이를 현실 도피주의라고 명명하면서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극도의 아름다움에 빠져드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패션계에선 이를 ‘도파민 드레싱(쾌락적 옷 입기)’이라고도 부른다. 정신적 구출이 필요한 시기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예술적 위로의 도구를 찾는다는 것이다.
생 로랑의 2019년 봄여름 패션쇼
톰 브라운의 2019년 봄여름 패션쇼
릭 오웬스의 2019년 봄여름 패션쇼
문화 트렌드로 떠오른 ‘어른들을 위한 동화’도 판타지의 연장선상에 있다. 〈맨 오브 라만차〉, 〈오즈의 마법사〉, 〈위키드〉 등은 어른 동화 뮤지컬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모험과 마법 등 현실과 환상 사이 동화 같은 시공간을 통해서 전달하는 메시지는 유아적인 수준을 뛰어넘는다.

뮤지컬 영화 〈라라랜드〉는 과거와 미래, 꿈과 현실, 고전과 현대 등 상반된 개념들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룬 동화다. LA를 배경으로 재즈 피아니스트와 배우 지망생인 두 주인공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에 만나 성장하는 과정을 담았다. 이 영화는 고전 뮤지컬 영화의 현대적 변주로 평가받으면서, ‘현실적인 판타지’로 관객의 몰입을 이끌어 냈다.

판타지 문학과 영화는 대개 과학 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주제 의식은 대부분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열망이다. SF 평론가 고장원은 판타지 장르를 “과거의 질서를 복원시키려는 소망이 담긴 이야기”라고 정의한다.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 일행의 목표는 예전의 좋았던 시절을 되찾는 것이고, 해리포터의 목표는 볼드모트의 마수를 물리치고 부모의 유지를 지켜 내는 것이다. 즉, 판타지는 내일의 세계보다 과거 세계를 복구하는 데 집중한다. 이들의 영웅적인 투쟁은 고대 서사시에서 수없이 반복된 패턴의 답습이다.[5]

그래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왜 수많은 사람이 미래가 아닌 과거에서 행복을 찾으려 할까. 동화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유래한 ‘붉은 여왕 가설(The Red Queen Hypothesis)’이 답이 될 수 있다. 나무 아래에서 달리던 앨리스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왜 계속 뛰어도 나무를 벗어나지 못하냐고 묻자 붉은 여왕이 답한다. “여기서는 힘껏 달려야 제자리야. 나무를 벗어나려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해.” 거울 나라에서는 움직이는 주체가 무엇이든 다른 사물도 그만큼의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전진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대 사회는 거울 나라와 닮았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사회에는 결핍이 만연하다. 소득은 늘었지만 젊은 세대가 느끼는 경제적 불안감과 상대적 빈곤감, 열패감은 높아져만 간다. 삶의 질과 행복 지수가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말하기 어렵다. 밀레니얼 세대는 당면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일이 점점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반작용으로 낭만적인 과거로 돌아가려는 회귀 심리가 발동했다. 이들은 의식적으로 가장 자유롭고 순수하고 밝았던 시절을 현대로 불러오는 것이다.

이처럼 과거의 직간접 경험을 통해 추억의 가치를 추구하는 현대인의 심리를 필자는 ‘레트로 판타즘(retro fantasm)’이라 명명한다. 레트로 판타즘은 현실에는 실재하지 않지만 의식 속에 존재하는 판타지를 끊임없이 지향하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추억이 우선이지만, 사회가 경험한 추억(간접 경험)까지도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레트로 판타즘은 단순한 현실 회피가 아니다. 각박한 현실에서 상상 속의 세계와 사물을 통해 시각적인 즐거움뿐만 아니라 잠시나마 휴식과 정서적 안정을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다. 따라서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소비자에게 숨통을 틔워 주는 환각제 같은 엑스터시(ecstasy⋅황홀감)를 제공하는 것, 이것이 레트로 판타즘 시각 표현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레트로 판타즘은 전 세대에 걸쳐 공감을 끌어내는 트렌드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지만 저성장과 불황의 시대를 맞닥뜨려 답답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큰 밀레니얼 세대에게 특히 소구력이 강하다.

 

무기력한 몽상가를 위한 디자인


2030년이면 밀레니얼 세대의 인구가 22억 명이 된다.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소비 집단이 탄생하는 것이다. 도망치고 싶은 현실 인식 속에서도 이들은 기존과는 다른 생활 양식과 소비 패턴을 만들어 내고 있다. 기업들 역시 밀레니얼 세대의 기호와 취향을 파악해 발 빠르게 신제품을 내놓고, 미래 경영 전략을 수립한다.

밀레니얼 세대 전반이 레트로 감성에 공감하는 편이지만, 레트로 판타즘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보다 정교한 소비자 세그먼트와 타깃팅이 필요하다. 트렌드 정보 회사 PFIN 리서치는 밀레니얼 세대의 소비자 유형을 괴짜 패거리, 무기력 몽상가, 일탈적 혁신가, 행복한 2인자, 네 가지로 분류했다.

괴짜 패거리는 희망 없는 미래보다는 현재를 마음껏 즐기고 개성을 표출한다. 무기력 몽상가는 희망 없는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거창하지 않은 낭만을 꿈꾸고 조용한 공감을 원한다. 일탈적 혁신가는 천편일률적 유행에 진부함을 느끼고 일상의 작은 혁신에 열광하며 앞장선다. 행복한 2인자는 동시다발적으로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를 좇다 지쳐 필요 없는 것들을 줄이고 소중한 하나에 집중하며 여유를 찾고자 한다.[6]

밀레니얼 세대의 소비자 유형 중 레트로 트렌드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은 무기력한 몽상가 타입이다. 레트로와 무기력한 몽상가는 일상에서 현실을 잊을 수 있는 낭만적 요소를 찾는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레트로는 과거를 현재로 해석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에 최적화된 문화 요소를 반영할 때, 레트로가 메가트렌드로서 파급력을 발휘할 수 있다.

무기력한 몽상가는 원대한 꿈보다는 자신과 가까이에 있는 것을 통해 낭만과 환상을 꿈꾼다. 이들은 한때 미래를 꿈꾸던 낭만주의자였지만, 이제는 희망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실에서 공감과 낭만, 해학을 찾는다. 무기력한 몽상가를 위한 레트로 판타즘의 핵심은 소비자와 가까이에 있는 것을 통해 판타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들은 부풀려지거나 범접할 수 없는 환상보다는 소소함에 공감하는 성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일상에서 감상적 환상 담기’가 필요하다. 구체적인 디자인 방향성은 다음과 같다.

① Product; 일상을 담은 베이직 아이템
일상생활의 아이템에 위트와 팬시함을 담거나 세련된 캐릭터로 친근하게 접근한다. 해피삭스와 럭키슈에뜨가 젊은 층에게 인기를 끈 것처럼 양말, 크루넥 티셔츠, 비누, 쿠션처럼 흔히 접하는 제품에 공감 요소를 불어넣는다. 작은 부분에 팬시한 컬러를 넣거나, 부담스럽지 않은 캐릭터를 사용해 친근함을 부여한다.
럭키 슈에뜨의 친근한 디자인 ⓒ lucky chouette
② Promotion; 대화와 공감의 프로모션
소비자와 대화하고 공감해 주는 프로모션이 필요하다.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게 한 캔디 창(Candy Chang)의 전시 ‘컨페션(Confessions)’, 평소에 이루고 싶었던 소원을 하나씩 이뤄 가는 스토리를 담은 의류 브랜드 ‘마인드 브릿지’의 ‘뜻밖의 퇴근’ 프로모션이 힌트가 될 수 있다. 무기력한 몽상가는 지나친 친절과 응원에서 진정성보다는 상업성을 발견한다. 따라서 소비자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웃기면서도 슬픈 소재들과 친근함으로 조금씩 거리를 좁히며 일상적인 공감대를 만들어야 한다.
캔디 창의 전시 ‘컨페션(Confession)’ Ⓒ Candy Chang
의류 브랜드 ‘마인드 브릿지’의 ‘뜻밖의 퇴근’ 프로모션
③ Place; 힐링의 공간
무기력한 몽상가는 마음의 안정과 소소한 낭만, 팬시함을 찾는다. 손때 묻은 감성을 느낄 수 있고, 일상적인 디자인 제품을 판매하는 라이프 스타일 편집숍이 최근 주목받는 이유다. 고요한 묵상의 시간을 제공하는 듯한 베이징 외곽의 ‘리위안 도서관’, 주인이 실제로 살고 있는 집이어서 마치 친구네 집에 놀러 온 것 같은 경험을 선사하는 파리의 편집숍 ‘쉐무아(chez moi⋅나의 집)’, 산뜻한 컬러의 일상적 디자인 제품이 잘 정돈되어 있는 서울의 편집숍 ‘루밍(rooming)’은 팍팍한 일상에 따뜻한 감성을 불어넣는다.
중국 베이징의 리위안 도서관 ⓒ Forgemind ArchiMedia
 

현실의 혼란과 보상 심리


레트로 디자인을 접한 소비자가 공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모티프가 필요하다. 소비자가 과거의 직간접 경험을 통해 느끼는 직관적인 공감은 곧 의미의 공유로 이어진다. 이러한 모티프를 찾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현대인은 어느 시대를 그리워할까?”
“현대인이 가장 자유롭고 순진하고 단순하고 밝았다고 느끼는 과거는 언제일까?”
“현대인은 어느 시대를 동경하고, 또 지금으로 불러오고 싶어 할까?”
“과거의 경험 중 현대인이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일까?”

대중은 영화, TV, 소설 등 간접 경험을 통해 과거의 특정 시대나 지역에 환상을 갖는다. 현실 너머의 이상향이라는 점에서 과거 특정 시대는 개인들의 생각 속에서 유토피아의 개념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럼, 지금 우리 시대에서 간접 경험을 통해 동경의 대상이 되는 시대는 언제일까. 그 특정 시대를 소환해 직관적인 공감의 모티프를 제공할 수 있다면 레트로 감성을 증폭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밀레니얼 세대가 기억 속으로 소환하는 낯선 동경의 시대는 1920년대와 1960년대의 미국, 그리고 1920년대의 한국이다. 세 시대는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고, 이에 따른 심리적 반작용으로 특정한 문화 양식이 출현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1920년대 미국에서는 즐길 수 있는 만큼 즐기자는 사회 분위기가 팽배했다. 많은 사람들이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정신적 상실감과 잃어버린 자아에 대한 보상 심리로 향락을 일삼고 소비문화를 탐닉했다. 연회장에서는 날마다 빠른 리듬의 재즈와 탱고가 끊이지 않았다. 야간 사교 문화는 경제 불황과 정치 불안을 잠시나마 잊게 했다. 이때부터 팔과 다리를 가볍게 흔드는 찰스턴 댄스(charleston dance)가 유행했다. 찰스턴 댄스는 재즈와 함께 1920년대를 대표하는 문화로 확산되었다. 그 영향으로 춤추기 편한 여성복이나 허리선이 낮은 원피스를 입고 귀밑까지 오는 짧은 머리에 메리제인 슈즈를 신은 말괄량이 여성 스타일을 가리키는 플래퍼 룩(flapper look)이 유행했다.
1920년대의 미국
전후 불황은 비교적 짧게 지나갔다. 경기가 다시 활기를 띠며 소비주의 시대가 찾아왔다. 문화와 과학 분야에 눈부신 진보가 있었다. 혁신 가전제품인 라디오가 가정에 보급되었고, 운송 수단의 발달로 이동이 편리해졌다. 대중의 생활 양식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디자인 분야에서도 혁신이 일어났다. 향후 50~60년 동안 디자인의 지침이 될 선언문들이 모두 1920년대에 만들어졌다. 1925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현대 장식·산업 미술 국제전’을 계기로, 직선적이고 기하학적이며 표면 장식이 강조된 아르데코(art deco) 예술 양식과 패션이 나타났다. 세계 최초의 초고층 아르데코 양식인 뉴욕 크라이슬러 빌딩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도 이 무렵에 신축됐다. 신공예 운동을 제창하며 미술과 공예 교육을 병합한 바우하우스(Bauhaus)의 창립은 서양 미술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윽고 기계 문명과 도회적 감각을 중시하는 모더니즘이 자리를 잡게 된다.
아르데코 예술 양식의 뉴욕 크라이슬러 빌딩과 영감을 받은 2012년 봄여름 질 샌더 컬렉션 ⓒ koreafashion.org
아르데코를 대표하는 포스터 디자이너 아돌프 무롱 카상드르의 포스터와 폰트 디자인 ⓒ www.cassandre-france.com
모더니즘 시대와 지금은 100년에 가까운 시차를 두고 있지만 소통의 여지가 있다. 운송 수단의 발달, 비약적인 과학 기술의 발전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커다란 물결 속에 있는 현대와 통하는 점이 많다. 새로운 기술의 보급으로 생활이 편리해진 한편, 심리적 거리감이 존재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삶은 윤택해졌지만 빠르게 변하는 흐름을 따라잡기 위해 우리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이러한 공통점 가운데에도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급변한 환경에 대한 대중의 대응 방식이다. 1920년대 서구의 젊은 세대가 화려한 유흥을 탈출구로 이용하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문화 현상을 긍정적으로 확산시켰다면, 지금의 젊은 세대는 새로운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기보다 공상과 상상을 통해 만족감을 얻는다. 낭만적인 시대의 문화를 간접 소비하면서 향수를 느끼는 것이다. 모더니즘의 화려한 원색 세트장으로 빨려 들어가 그 시대의 사람들과 같은 즐거움을 느끼며, 현실을 일시적으로 벗어난다.

한국의 밀레니얼 세대가 보다 가깝게 여기는 낯선 동경의 시대 배경은 일제 강점기의 경성이다. 한국의 1920~1930년대는 암울한 시대였지만, 동시에 소비와 유행의 시대이기도 했다. 한국이 서구의 근대화를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1876년 개항 직후였다. 이때부터 자본주의 욕망이 본격적으로 발산됐다. 서구 문명이 빠른 속도로 퍼지면서 대중문화가 형성됐다. 서구적 가치관이 깃든 것들 앞에는 ‘모던’이라는 표현이 붙었다. 모던 걸, 모던 보이, 모던 철학, 모던 과학, 모던 종교, 모던 예술 등의 단어가 일상에서 통용됐다. 그중에서도 모던 걸과 모던 보이는 유행에 민감하고 소비를 즐기는 신여성과 신남성을 통칭했다. 당시 대중 잡지 《별건곤》은 경성 시내의 모던 걸과 모던 보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북한산의 찬바람이 거리를 스치는 때라도 혈색 좋은 설부(雪膚)가 드러날 만치 반짝거리는 엷은 양말에 금방에 발목이나 삐지 않을까? 보기에도 아심아심한 구두 뒤로 몸을 고이고 스커트 자락이 비칠 듯 말 듯 정강이를 지나는 외투에 단발 혹은 미미가쿠시(耳隱·당시 유행했던 귀를 가리는 머리 모양)에다가 모자를 푹 눌러쓴 모양은 멀리 보아도 밉지 않고 가까이 보아도 흉치 않다. 어쩌다 길이나 좁은 데서 만나 엇갈리게 되면 나는 본능적으로 분에 짙은 그 뺨과 나불거리는 귀밑을 곁눈질하게 된다. 여기서 연상되는 것은 분길 같은 손에 경복궁 기둥 같은 단장을 휘두르면서 두툼한 각테 안경, 펑퍼짐한 모자, 어떤 시대 화가들이 쓰든 것 같은 코 높은 구두를 신고 장안대로는 온통 제 길이라는 듯이 활개 치는 젊은 서방님들이다.”

최근 미디어와 실제 서울 거리의 주요 테마는 근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암살(2015)〉, 〈밀정(2016)〉, 〈미스터 션샤인(2018)〉 등 근대 사회를 배경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가 잇달아 흥행하고, ‘경성주막’, ‘경성함바그’처럼 경성으로 시작하는 브랜드가 서울 중심가를 차지한다. 《조선일보》는 식민지의 아픔과 고통으로 가득한 암흑기로만 여겨졌던 20세기 초의 한국이 전통과 신문물이 충돌하며 공존하는 다이내믹한 격동기로 재인식되고 있다고 설명한다.[7]
1920년대 경성의 패션
1920년대 한국의 상황은 현대인에게 동질감을 준다. 열강에 둘러싸여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던 식민지하의 상황은 힘 대결을 벌이는 강대국 틈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지금 우리의 현실과 교묘하게 맞닿아 있다. 한 세기 이전 비슷한 나이대의 남녀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춤과 유흥, 신문물을 즐겼다는 사실은 젊은 세대에게 꽤나 매력적이고 몽환적으로 다가온다. 100년의 시차에도 지속되는 정치적 혼란과 현실의 어려움은 자연스럽게 당시의 문화 상품을 좋아하고 소비하게 만든다.

과거를 직접 경험한 세대만이 레트로 감성을 느낄 수 있다면 지금과 같은 레트로의 전성기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밀레니얼 세대에게 레트로는 일시적인 소비 대상이 아니다. 새로운 복고이자 놀이, 그리고 문화다.

 

레거시에 대한 반발과 키치함


낯선 동경의 세 번째 시기는 1960년대 미국이다. 1960년대는 본격적인 산업화에 의해 역동적인 발전이 이루어져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였다. 특히 베이비붐의 영향으로 늘어난 젊은이들이 사회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이들의 취향에 맞는 발랄함과 새로움이 추구되었다. 그러나 전 세계적 이념 대립과 베트남 전쟁은 사회적 혼란을 가져왔고, 평등과 자유 이념을 신봉하는 젊은 세대는 전쟁에 반대하며 평화를 외쳤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로 인해 자연으로의 회귀를 추구하는 집단인 히피가 등장하게 되었다. 히피의 영향으로 자유로움과 반전의 상징인 꽃 프린트가 유행했고, 국경의 개념 없이 평등과 자유로운 이념의 히피 사상으로 제3국의 패션이 부분적으로 도입되기도 했다.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은 히피 문화는 하류 계층에서 상류 계층으로 유행이 상향 전파되는 양상을 보이면서 1960년대를 대표하는 문화로 정착했다.
히피 스타일
예술계에서는 순수 디자인을 거부하는 반(反)모더니즘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대상을 그대로 옮길 수 있다는 절대 재현에 대한 믿음은 이미 붕괴된 상태였다. 착시적이고 동적인 형태를 강조하는 옵아트(op art), 주관적인 미학을 반대하고 광고, 만화, 보도 사진 등을 예술로 삼는 팝 아트(pop art),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이 성행했다.
영국 아티스트 브리짓 라일리의 옵아트 ‘Mod Girl and Op Art Car’(1966)
대표적인 팝아트 작가인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 ‘Ohhh...Alight’(왼쪽·1964)과 ‘M-Maybe’(1965).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은 점으로 색을 표현하는 망점의 테크닉을 도입하고 있다. 그림을 점으로 분리해 세 가지 색으로 분판 인쇄하는 방법을 고안한 삽화가 벤자민 데이(Benjamin Day)의 이름을 따서 벤데이 도트(Ben-Day Dot)라고 불리는 이 기법은 색을 점으로 분할해서 찍어 낸다.
개성, 자율성, 다양성, 대중성을 중시하는 현대적 감각의 예술 사조는 1960년대 복식 전반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디자이너들은 추상적이고 대담한 무늬, 강렬한 색을 작품에 반영했다. 젊은 세대는 대량 생산된 기성품 대신 구제품과 키치 패션(kitch fashion)에 관심을 보였다. 이 영향으로 모즈 룩(mods look)[8]이 유행하고, 슬림한 라인과 미니스커트가 인기를 끌었다. 미니스커트는 어린아이 같은 몸매로 최고의 슈퍼 모델로 부상한 트위기[본명은 레슬리 혼비(Lesley Hornby)다. 몸매가 잔가지처럼 연약하다는 뜻에서 ‘트위기(twiggy)’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가 자주 입고 등장하면서 더욱 인기를 얻었다. 보브 헤어, 미니스커트, 체인벨트, 무늬가 들어간 스타킹 등의 스타일을 선보인 트위기는 1960년대를 대표하는 패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1960년대 패션 스타일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는데, 모두 일종의 레트로 룩이었다.
트위기
예술과 패션 분야에서 레트로가 시작될 무렵, 생활 상품에서는 리모델, 리뉴얼, 리바이벌, 리메이크, 리폼, 리사이클 등 소위 re-마켓 바람이 불었다. 옛 노래가 신세대의 취향에 맞게 리메이크되었고, 옛 시대를 배경으로 한 전시회와 골동품 상점이 문을 열었다. 물건 자체가 가진 가치의 재생이 중요하게 여겨진 것이다.

1960년대와 지금은 기존 질서(legacy)에 대한 반발, 그리고 국가 간 패권 다툼 등 국제 정세가 불안하다는 면에서 유사하다. 1960년대 미국 사회에 베트남전과 같은 대규모 전쟁이 위험으로 도사렸다면, 2019년 현재 한국 사회에는 강대국 간의 무역 전쟁과 북핵 위협으로 인한 안보 문제가 있다. 1960년대에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로 자연주의 추구 경향이 강해진 것은 기술 발달의 반작용으로 아날로그 감성이 유행하고 있는 현 상황과 일맥상통한다. 야간 사교 문화와 히피 문화는 현대 영화와 소설 등 예술 세계에서 낭만적이고 급진적인 이미지로, 또 영감의 원천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1920년대와 1960년대의 젊은 세대는 현실에 대한 반발로 새로운 문화를 적극적으로 만들어 나간 주체였다. 하지만 지금의 밀레니얼 세대에게는 이러한 적극성이 보이지 않는다. 밀레니얼 세대는 저항에서 새로움을 창출하기보다는 실천의 역사가 있는 과거 집단의 이미지를 간접 소비함으로써 위안을 얻는다. 히피들이 마약을 동원하면서까지 현실 저항과 일탈을 추구했다면, 현세대는 사이버 세상으로 들어간다. 기존 질서를 거부하고 새로운 문화를 추구하다가는 빠르게 변하는 환경에서 본인만 뒤처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현실 너머의 판타지를 의식 속에서 추구하는 레트로 판타즘은 밀레니얼 세대에게 정신적 돌파구가 된다. 그 움직임은 인터넷 공간에서도 포착된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트위터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는 공간인 동시에 부정하는 전시장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실제의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보이고 싶은 모습을 가공하고 편집해 공유한다. 어렸을 때부터 SNS를 생활화한 이들은 판타지를 접하는 수동적인 소비자에 머물지 않고, 직접 판타지를 만들고 가공하는 생산자로도 활동한다. 현실에서 고군분투하며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동시에, 비현실의 세계로 들어가 에너지를 충당하고 삶의 긍정성을 강화한다.

 

현실을 비추는 거울


현대의 레트로는 패션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는 패션이라는 매체가 시의성(時宜性)이 강해 시대 분위기를 잘 재현하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대중이 인식하는 레트로 코드는 대부분 패션 디자인 영역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레트로는 단지 패션 디자인 분야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늘날의 사회와 경제를 분석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키워드다. 문화 현상과 제품, 서비스 하나하나에는 레트로를 소비하는 대중의 심리가 담겨 있다.

레트로 유행을 이끈 요인 중 하나는 현대 문명이 가진 속도에 대한 불안감이다. 과학 기술 혁명의 시대에 변화의 속도는 어느 때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빨라졌다. 주변에는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 겉으로는 옛것은 조금씩 사라지고 잊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급진적인 기술 발달과 경제 팽창으로 인해 과거의 것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레트로 경향은 더욱 두드러졌다. 여유와 희망이 사라져 가는 삶에는 돌파구가 필요하다. 레트로는 하나의 대안으로서 가치를 갖게 되었다. 정답만을 외치는 사회에 지친 젊은 세대는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가치, 온정과 같은 것을 추구하게 됐다. 그들은 막연한 희망을 꿈꾸며 어려운 현재를 견뎌 내기보다는 좋았던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이 상대적으로 수월하다고 여긴다.

레트로는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현상이자, 다양한 연령대의 소비자를 연결하는 감성적 매개물이다. 레트로의 소비는 개인적인 회고에서 한 걸음 나아간 행복하고, 단순하고, 순수했던 시절을 향한 집단적 염원의 발현이다. 대중문화와 문화 콘텐츠부터 기업 활동에 이르기까지 레트로가 다양한 분야에서 핵심 콘셉트로 나타나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역사학자 E. H. 카(Carr)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오늘날의 레트로 현상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 여행은 광범위한 문화 참여를 이끌어 내고, 환상과 낭만을 꿈꾸는 밀레니얼 세대에게 신선한 경험을 선사한다. 사람들은 레트로를 통해 잊고 있거나 자신도 미처 몰랐던 문화적 욕망을 발견한다. 레트로는 단순한 과거의 재현에 그치지 않는다. 과거를 재해석하는 과정이자 현실의 욕구를 비추는 거울이다.
 
[1]
사이먼 레이놀즈(최성민 譯), 《레트로 마니아》, 작업실유령, 2017, 12쪽.
[2]
유명환, 〈팝아트를  활용한  레트로 디자인  연구〉,  한국콘텐츠학회,  2011, p.186.
[5]
고장원, 스타워즈7 왜 SF처럼 생긴 판타지인가?, 《경향신문》, 2016. 1. 2.
[6]
PFIN, 2014 FIBA(Fashion Index of Behavior and Attitude) Report, 2014. 1.
[7]
곽아람·윤수정·송혜진·유석재·신동흔·정상혁, 페미니즘에 눈뜨고, BTS에 열광하고, 퀸에 위로받다, 《조선일보》, 2018. 12. 24.
[8]
모던즈(moderns)의 약칭으로, 1966년 런던의 카나비 스트리트를 중심으로 나타난 비트족의 일파다. 당시의 록 뮤직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기발한 옷차림이 많은 화제를 낳았다. 허리를 가늘게 조인 꽃무늬가 있는 화려한 셔츠, 바지 끝이 넓은 판탈롱, 무늬가 큰 넥타이 등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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