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표적인 아이코닉 건축으로는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가 있다. 자하 하디드가 디자인하고 2014년 오픈한 DDP 역시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와 같이 낙후된 지역의 이미지를 관광지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동대문은 서울의 오랜 역사를 품고 있는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는 성곽 밑의 물길 통로인 이간수문, 왕의 호위를 담당한 훈련도감, 군사들의 거처인 하도감 등이 존재했다. 지금은 없어진 동대문 운동장은 일제 강점기 시절 근대화 스포츠 교육을 위한 훈련원으로, 해방 직후 임시 정부 인사들의 귀국 환영회장으로, 1982년에는 한국 프로 야구의 첫 시즌 개막 장소로 쓰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시절 지어졌다는 이유로 점점 잊힌 장소가 되어 갔다. 이후 점차 노후화되면서 주차장과 풍물 벼룩시장으로 활용되다가 2007년 철거되었다. 대표적인 저가 의류 시장으로 꼽혔던 동대문 지역의 유동 인구는 경기 침체로 서서히 줄었다.
서울시는 도심 재창조의 목적으로 서울의 중추인 동대문에 문화 사업을 선도할 DDP 건립을 추진했다. 하디드는 밤낮없이 변하는 동대문의 역동성에 주목했다. 곡면과 사선으로 변화와 성장을 표현하고, 3차원의 첨단 설계 방식을 총동원했다.
현재 DDP는 서울의 상징이 되고 있다. 아시아 전역의 TV 채널에 방영되는 서울시 홍보 영상에 등장하며, 동대문 두타몰에는 연간 840만 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찾아온다. DDP가 개장한 후 동대문 제일 평화 시장은 대대적으로 재단장했고, 주변에 5성급 호텔과 유명한 레스토랑들이 오픈하면서 상권이 부활했다. BMW와 루이비통 등 명품 브랜드의 전시회와 신제품 발표회가 유치되고, 매년 서울 패션 위크가 열린다. 문화적 경쟁력을 확보한 DDP는 상징성 면에서도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오고 있다. 2018년 남북 정상 회담 때는 DDP에 메인 프레스 센터가 마련됐다. DDP는 조형성, 위치, 기능으로 동대문을 상징한다. 하디드는 동대문 지역의 미래에 주목했다. 역사적인 장소에 겉만 번지르르한 괴물을 만들어 놓았다는 비판도 일부 있지만, DDP는 동대문의 발전 가능성을 표현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역동적인 조형미, 화려한 디자인, 동대문 운동장이 재건된 장소에서 펼쳐지는 세계적인 쇼와 디자인 콘퍼런스 등은 유명 건축가의 작품이라는 사실과 어우러져 DDP를 서울의 랜드마크로 만들고 있다.
도시를 살리는 건축
눈을 감고 사막 위의 도시 두바이를 떠올려 보자. 사막과 낙타와 숨 막힐 듯한 무더운 날씨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머릿속에는 또 다른 이미지가 그려진다. 뾰족한 탑 주위로 둥그런 지붕을 얹은 이슬람 사원 모스크, 세계 최고층 건물인 부르즈 칼리파(Burj Khalifa), 바다에 우아하게 떠 있는 7성급 호텔 부르즈 알 아랍(Burj Al Arab)이다. 대규모 관광 도시가 아니라 유럽의 작은 마을을 떠올릴 때도 마찬가지다. 중앙에는 인상적인 건축, 탑이나 교회, 쇼핑몰이 존재하고 그것을 기점으로 도시의 지도가 머릿속에 펼쳐진다. 건축이 도시 이미지의 한 부분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식별 가능한 지표, 다른 도시와의 구분점, 개인과 도시의 상호 작용을 뜻하는 사이니지(signage)가 되는 아이코닉 건축은 일상 가까이에 있다. 지난 20년간 세계 각지에서 전략적이고 경쟁적으로 건립되어 온 탓이다.
아이코닉 건축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나라가 영국이다. 영국은 1970년대부터 이미 지역 재생, 지역 재개발(regional redevelopment)의 일환으로 건축과 도시 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산업혁명의 본거지인 영국은 사회 경제의 커다란 변화를 다른 나라보다 일찍 겪은 만큼 산업의 쇠퇴도 일찍 맞닥뜨렸다. 탈산업화에 따른 경기 침체와 높은 실업률, 도시 슬럼화와 범죄, 도심 공동화 문제에 당면한 영국 정부는 도시 재생을 해결책으로 꺼내 들었다. 1960년대 후반까지 큰 성과를 보지 못했던 신도시 건설에서 눈을 돌려 도심 재생 사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영국 정부는 1977년 새로운 도시 재생의 방향을 담은 도시 정책 백서(policy for the inner cities)를 펴냈다. 1979년 집권한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정부는 신자유주의 시장 경제를 지향했다. 도시 계획이나 개발 관련 법 규제를 완화하고, 민간 기업에 투자하면서 지역의 적극적인 개발을 장려했다. 산업 유휴지의 재사용과 활성화를 위해 뉴캐슬(Newcastle), 게이츠헤드 등을 사업 지구로 선정하고, 중앙 정부의 역할을 대신하는 도시 개발 공사를 설립해 민간과의 긴밀한 협조를 유도했다.
[7] 영국은 정권에 따라 행정 주도형, 민간 기업 투자형, 지방 정부의 역할이 강조되는 거버넌스형 등으로 도시 재생 사업의 주체와 방법을 달리했지만, 기본적인 도시 재생 철학은 바꾸지 않았다. 도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도시 공동체를 형성하며 경제가 살아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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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하게 추진된 재생 사업 중에서 단연 효과를 보인 것은 문화 중심의 재생 사업이었다. 특히 수변 공간 재개발에서 효과가 두드러졌다. 과거 해상 무역의 40퍼센트가 이뤄지고, 최초의 증기선이 출항할 정도로 부유했던 영국 리버풀(Liverpool)은 19세기 산업 구조가 재편되면서 크게 위축되었다. 한때 100만 명이 거주했던 부자 도시는 가난하고 범죄가 들끓는 도시로 추락했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까지 문화 도시 재생 정책이 펼쳐지면서, 앨버트 독(Albert Dock)을 중심으로 테이트 리버풀 미술관, 비틀스 박물관, 국제 노예 박물관, 머지사이드(Merseyside) 해양 박물관 등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리버풀의 분위기는 달라졌다. 세계 최고의 신고전주의 건물 중 하나로 꼽히는 세인트 조지 홀, 영국 최초의 마천루 로열 리버 빌딩,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딕 아치의 리버풀 대성당 등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축들도 다시 조명받기 시작했다.
[9] 비틀스의 고향이라는 점도 유산이 됐다. 그 결과 리버풀은 20년 만에 연간 3200만 명이 방문하는 관광 명소로 발전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항구 도시가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면서도 박물관, 레스토랑과 쇼핑몰이 밀집된 문화 도시로 거듭난 것이다. 리버풀의 성공에는 아이코닉 건축을 비롯한 문화 시설들이 도시 수준뿐만 아니라 경제 발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영국의 도시 재생 철학이 자리 잡고 있다.
리버풀의 도시 재생 사례는 아이코닉 건축이 문화적 견인차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아이코닉 건축은 쇠퇴한 도시의 이미지를 쇄신할 수 있는 전략적 도구로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