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와 징후
변화: 완성차 업체, 유통 업체 등이 휴머노이드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징후: AI를 품은 휴머노이드가 연구실을 벗어나 현실 세계로 나왔다. 진정한 노동 4.0이 시작된다.
로봇의 조건
지난달 27일, 대단한 쇼케이스가 있었다. 경기도 용인시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에서다. 사전 행사는 레이싱카 퍼포먼스였다. 운전대를 잡은 것은 도요다 아키오 도요타 자동차그룹 회장, 보조석에 동승한 것은 현대차그룹 정의선 회장이다. 이 둘은 어떤 제품도 소개하지 않았다. 깜짝 이벤트였고, 모빌리티의 미래를 함께 만들겠다는 선언적인 발언이 전부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 장면에서 몇 가지 제품을 보았다. 첫 번째는 수소차다. 두 회사의 경쟁 분야다. 그러나 아직 산업이 초기 단계다. 함께 생태계를 만들어야 파이가 생긴다. 그리고 두 번째는 휴머노이드다.
완성차 업계가 휴머노이드 개발에 뛰어드는 이유는 명백하다. 제조업의 총아이기 때문이다. 제조업의 오랜 숙제는 노동력이다. 사람이 손을 놓으면 제품을 생산할 수 없다. 숙련도 또한 중요하다. 그래서 자동차 공장에는 로봇이 많다. 우리나라는 2023년 기준, 전 세계 산업용 로봇 밀도 1위 국가다. 노동자 만 명당 1012대의 로봇이 배치되어 있다. 생산라인에서 쉬지 않고 용접과 조립을 반복하고 있는 로봇 팔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업계는 그다음을 원한다. 현대차와 도요타는 물론이고 테슬라까지 휴머노이드에 매달리고 있다.
우리 주변에도 로봇은 많다. 음식점에서도 빈 그릇을 나르는 로봇이 심심찮게 보이고, 커피나 치킨을 만드는 로봇은 이제 흔하다. 일반적인 기계와 로봇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 UCLA 로멜라(RoMeLa)연구소의 데니스 홍 교수는 세 가지 요소를 제시한다.
- 지각(Sense): 카메라나 마이크 등 센서 장치를 이용해 인간의 명령은 물론이고 주변 환경을 감지하여 입력할 수 있어야 한다.
- 판단(Plan): 입력된 정보를 바탕으로 추론하고 판단하여 어떻게 작동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 작동(Act): 지각과 판단을 바탕으로 실제 물리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움직여야 한다.
커피를 만드는 로봇팔에 물의 온도를 감지하기 위한 센서가 장착되어 있다면, 그리고 일정 온도가 되었을 때 커피를 내리기에 적당해졌다고 판단할 수 있도록 소프트웨어가 작동해 물을 붓는 행동까지 옮긴다면 로봇이 맞다. 사람의 노동력을 대체할 수 있는 로봇이다.
얼굴은 필요 없다
그러나 로봇팔은 휴머노이드가 아니다. 사람의 얼굴을 흉내 낸 LED 디스플레이를 장착한 서빙 로봇도 완성차 업계가 원하는 휴머노이드라 할 수 없다.
- 휴머노이드(Humanoid): ‘인간형 로봇’이다. 얼굴과 몸, 두 팔과 다리가 있는 로봇이다. 사람에게 맞춰진 환경에 유연한 대응이 가능하다.
- 안드로이드(Android): 인간의 이목구비와 피부를 모방하는 것에 주력한다. ‘불쾌한 골짜기’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 사이보그(Cyborg): 인간의 신체와 기기가 결합한 형태다. 두뇌는 사람의 것이나 몸이 기계라면 사이보그에 해당한다.
휴머노이드 이전에 안드로이드가 더 깊은 인상을 남겼다. 대표적으로는 홍콩의 핸슨 로보틱스가 제작한 ‘소피아’, 영국 기업인 엔지니어드 아츠의 ‘아메카’ 등이 대표적이다. 첫인상이 좋지는 않았다. 언어로 표현하자면 ‘Creepy’라는 단어에 가까운 감정이다. 다만, 거기까지였다. 안드로이드는 일종의 홍보 대사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다. 로봇에게 얼굴이 필요한 까닭은 인간과 상호작용을 하기 위해서다. 일상에 로봇이 녹아든 다음의 이야기다. 우리에게 얼굴 있는 로봇, 안드로이드는 아직 필요치 않다.
그렇다면 휴머노이드는 어떨까. 완성차 업계가 매달릴 만한 가치가 있을까. 있다. 시계를 돌려 2011년으로 가보면 명확하다. 동일본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전이 피해를 당하였던 때다. 무너진 잔해로 들어가 상황을 살필 로봇을 찾았다. 하지만 가능한 모델이 없었다. 실험실 밖은 험난하다. 사람처럼 장애물을 넘고, 때로는 기어오르며 현장에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기계 공학적 설계는 완성되지 않았다. 방사능과 고열, 수분 등은 덤이었다. 이를 계기로 2013년부터 2015년까지, 미국 고등방위연구계획국(DARPA) 주최로 세계 재난 구조 로봇 대회가 열렸다. 미래를 향한 ‘연구’ 수준에 머물렀던 휴머노이드가 현실 세계로 나오게 된 계기다. 물론, 당시 대회 수준을 보면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는 수준이다. 두 발로 걸어와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가는 정도의 움직임도 엄청난 설계가 필요하다. 애당초 이족 보행이 매우 불안정한 동작이기 때문이다. 지면에 약간의 경사가 진 것만으로, 대단찮은 장애물이 굴러다니는 것만으로 당시의 최첨단 기계들은 픽픽 쓰러지고 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