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정진욱 시어스랩 대표
1. 스타트업계의 하버드
롤리캠(lollicam)은 어떤 서비스인가?
셀프 카메라(이하 셀카) 기능이 들어간 동영상 앱이다. 화면상의 얼굴을 인식해 자동으로 보정하고 400종 이상의 스티커로 얼굴을 꾸밀 수 있다. 우리 회사의 핵심 가치가 지루한 일상을 즐겁게 만들자는 것이다. 싸이월드 미니홈피부터 카카오톡 메신저까지 셀카로 자신의 얼굴과 취향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롤리캠 출시 당시 셀프 이미지(사진)의 시대가 이미 왔고, 그다음은 동영상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얼굴을 인식하는 페이스 트래킹 기술을 동영상으로 끌고 오면 대중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페이스 트래킹은 주로 B2B 기업에서만 사용됐다. 디바이스의 잠금장치를 해제하거나 얼굴을 인식해서 인증하는 식이었다. 우리는 좀 더 대중적인 활용 방안을 고민했다. 그 고민의 결과물이 바로 롤리캠이다.
많고 많은 창업 아이템 중에 왜 하필 셀프 카메라였나?
10년간 삼성전자와 SK텔레콤에서 기술 기반 사업을 진행하면서 근본적인 갈증이 있었다. 앞으로는 ‘쓰는 것’이 아닌 ‘보는 것’이 모바일 환경의 주류가 될 텐데, 대기업은 여전히 텍스트 메시징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결국 사표를 내고 2014년 5월 시어스랩을 창업했다. 시어스랩(Seerslab)이라는 이름도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실험실이란 뜻이다.
자본과 지원이 탄탄한 대기업에서 오래 근무하다가 사업을 한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겠다.
앱 사업은 대규모 자금 투자 없이 키우기가 쉽지 않다. 큰 기업에서 유사한 서비스를 출시하거나, 아예 휴대폰 단말기에 같은 기능을 넣기도 한다. 큰 기업과 경쟁하려면 다른 곳에서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우리만의 독자적인 기술이 있어야 했다. 다행히 시어스랩의 CTO가 카메라 앱인 푸딩카메라와 싸이메라에서 페이스 트래킹을 개발한 숙련된 엔지니어였다. 2014년까지만 해도 동영상 편집 기능을 제공하는 앱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빠르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롤리캠 출시 후 한 달 만에 10만 다운로드를 돌파했다.
마케팅 비용이 얼마 없었는데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SNS에 롤리캠으로 찍은 사진을 올리면서 자연스럽게 입소문이 났다. 우리끼리는 카메라의 역사를 바꿨다고 농담 삼아 말한다. 예전에는 셀프 동영상이라는 콘셉트 자체가 없었으니까. 그만큼 자부심이 있다.
비슷한 콘셉트를 가진 업체들과의 경쟁도 만만치 않았는데, 성공적인 결과다. 해외 사업에 선제적으로 나섰기 때문일까?
2016년에 다양한 곳에서 주목을 받으면서 사업 면에서도 탄력을 받은 것 같다. 미국 SXSW(South by Southwest)[1]에서 글로벌 Top 10 혁신 미디어 스타트업에 선정됐고, 첫 글로벌 파트너인 페이스북과도 제휴를 맺었다. 그리고 YC에 입성했다. 원래부터 글로벌 진출에 욕심이 있었다. 창업 초기에 미국에 진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미국에서 베타 서비스를 출시할 때는 여행 비자를 끊고 직접 시장 조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 결과 한 달 만에 미국 앱스토어 포토, 비디오 분야에서 59위에 오를 수 있었다. 당시 미국에서 지내면서 YC라는 액셀러레이터를 알게 됐다. 막연하게 여기 멤버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015년 초에 지원했는데 깔끔하게 떨어졌다.
한 번 떨어진 곳인데 다시 도전할 마음이 들던가?
YC 2016년 여름 배치 마감 일주일 전에 센드버드의 김동신 대표를 만났다. YC에 지원해 보라고 하더라. 작년에 떨어졌다고 하니까 보통 몇 번씩 떨어진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혹시 스탠퍼드나 하버드 나오셨어요? 스탠퍼드랑 하버드 안 나오셨으면 YC 나오셔야죠.” 미국에서 투자받고 사업하려면 확실한 브랜드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듣고 혹했다. 2~3일 급하게 준비해서 YC에 지원서를 냈다.
2. 스크립드, 트위치 창업자와의 인터뷰
YC의 지원 자격은 어떻게 되나?
회사 지분을 최소 10퍼센트 이상 가진 공동 창업자여야 한다. 나는 공동 창업자인 CTO와 면접을 보러 갔다. 투자를 받기 전에 미국 법인화도 필수다.
투자 조건이 궁금하다.
총 12만 달러를 투자받고 회사 지분의 7퍼센트를 준다. 투자 금액 중 2만 달러는 지분 6퍼센트에 해당하는 보통주로 취득하고, 남은 10만 달러는 SAFE(Simple Agreement for Future Equity)라는 일종의 컨버터블 스톡(convertible stock)[2]으로 투자하고, 밸류에이션 캡(valuation cap)[3]을 1000만 달러로 정한다. 미래 기업 가치를 1000만 달러로 보고 추후 지분 1퍼센트에 해당하는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고정해 두는 것이다. 그리고 ‘pro-rata’라는 계약 조건이 있어서 향후 후속 투자를 유치할 때, YC가 지분율 7퍼센트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이미 성장한 회사들이 액셀러레이터에 들어가려는 이유가 뭔가?
나와 같이 있었던 동기 회사는 기업 가치가 1000억 원이었다. 사업한 지 18년이 된 유럽 회사였는데, 매출도 이미 몇백억 원씩 나왔다. YC에는 초기 스타트업만 지원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 시장에서 성장하는 데 도움을 받으려는 회사들도 온다.
그런 큰 기업과 아이디어밖에 없는 초기 기업이 같은 평가를 받는다니 의외다.
YC의 생각은 이렇다. “너희가 지금 두 명밖에 없는 회사고 제품도 없지만, 일단 우리 네트워크에 들어왔으니 기업 가치가 최소 1000만 달러는 된다.”
다시 지원할 때 만반의 준비를 했겠다.
그렇지는 않았다. 처음 지원할 때는 면접 스터디까지 하면서 한 달을 꼬박 준비했다. 그래서 탈락 소식을 들었을 때 좌절이 컸다. 두 번째 지원할 때는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해서 제대로 준비할 수가 없었다. 회사 소개와 데이터 자료도 작년에 썼던 것으로 채워 넣고 급하게 영상을 찍었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합격했다. 딱 하나 차이가 있다면 트랙션(traction)[4]의 유무였다. 처음 지원할 때는 콘셉트 구상만 있었지 실질적으로 나와 있는 성과 지표가 없었다. 2차 지원 때는 롤리캠을 출시한 뒤라 우리 아이템의 성공을 증명할 수치가 있었다.
면접은 어떻게 진행되나?
YC에는 풀타임이나 파트타임으로 근무하는 파트너들이 있다. 지메일 개발자 폴 부크하이트(Paul Buchheit), 홈조이(Homejoy)[5] 창업자 아도라 청(Adora Cheung), 트위치(Twitch)[6] 공동 창업자 저스틴 칸(Justin Kan) 등 비즈니스 업계에서 쟁쟁한 사람들이다. 파트너들은 YC에 들어온 창업자들이 좀 더 능숙하게 사업을 이끌도록 돕는다. 면접장에 들어서면 파트너가 두 명씩 앉아 있다. 이들이 면접관이 되어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30분 내로 끝난다. 면접 한 번에 결과가 나오기도 하고 2차, 3차까지 가기도 한다.
보통 면접은 1차 합격하고 2차를 보는 식으로 진행되지 않나. 면접 횟수는 어떤 의미인가?
YC의 방식은 조금 다르다. 두 명씩 짝을 지은 파트너 그룹이 4~6개 정도 된다. 이들이 지원 서류를 쭉 훑어보고 마음에 드는 기업을 선택해 면접을 진행한다. 어떤 기업은 복수의 파트너 그룹에서 면접을 본다. 면접 횟수가 많을수록 파트너들이 중복해서 찍었다는 뜻이니 긍정적인 신호다. 만일 두 파트너 그룹이 한 기업을 1순위로 꼽았다면 내부적으로 조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파트너들은 자신이 뽑은 창업자의 멘토가 된다. 나 역시 스크립드(Scribd, 온라인 문서 공유 서비스) 창업자인 제러드 프리드먼(Jared Friedman) 그룹과 한 번, 트위치 창업자인 저스틴 칸 그룹과 한 번, 총 두 번 면접을 봤다.
면접에서는 주로 어떤 질문이 나오나?
파트너 그룹이 누구든 핵심에 집중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떤 제품을 만드는지, 제품의 현재 성과와 자금 상황이 어떤지 등 실제 사업을 운영하는 데 핵심이 되는 부분을 물었다. 앞으로 이 사업이 왜 빅 비즈니스(big business)[7]가 될 것 같은지, 일상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질문한 대목이 인상 깊었다. 하지만 합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역시 트랙션이었던 것 같다. 창업 초기인 기업도 합격할 수 있지만, 프로토타입이 있고, 베타 서비스를 출시해 봤고, 수치로 증명할 트랙션이 있는 기업의 합격률이 가장 높다.
당시 면접에서 강조한 시어스랩의 트랙션은 어느 정도 수준이었나?
우리는 당시 한국 10대의 60퍼센트가 사용 중이라는 트랙션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점이 파트너들에게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
트랙션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뭔가?
성공 가능성이 있는 기업이 결국 YC의 부를 넓혀 주니까. YC는 투자 기준이 굉장히 명쾌한 조직이다. 철저히 자본주의의 논리로 돌아간다. 3개월 후 데모데이 때까지 파트너들이 트랙션을 키워서 기업 가치를 최소한 두세 배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회사에만 투자한다.
흔히 말하는 팀 케미스트리도 당락을 좌우하나?
사실 팀워크를 인터뷰에서 바로 알 수는 없지 않나. 서로 친하다고 말하면 그만이니까. YC에서 강조하는 팀워크는 팀원들이 정서적으로 친한지, 나이가 비슷한지가 아니다. 팀이 개발자, 기획자, 마케터 등 기능적으로 적절하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본다. 아이디어는 좋은데 개발자가 없다거나, 개발자는 많은데 비즈니스 모델이 없다면 좋은 팀이 아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의 팀 빌딩이다. 사람을 볼 때도 한국과 관점이 다르다. 한국은 학벌과 나이를 보지만, YC는 제품을 잘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는 경험이나 실패 경험을 갖춘 팀원들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살피는 것 같다.
트랙션이나 팀 빌딩 외에 또 중요한 것이 있다면.
기본적으로는 영어 능력이 필요하다. 미국에서 사업을 하면 영어가 항상 걸림돌이다. 나는 비록 콩글리시지만 글로벌 사업을 15년 넘게 해오면서 비즈니스 대화를 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사실 언어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 미국은 비즈니스를 말로 한다. 중요한 거래와 계약은 모두 발표와 토론으로 성사된다. 밤새워 개발하고 발표 자료를 만들었는데 상대를 설득하지 못하면, 그래서 상대가 우리 사업에 동조하지 못하면 원하는 만큼의 성과를 얻을 수 없다. 비전이란 게 다른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공감하도록 만드는 것이 비전이다. 상대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나 혼자 취해서 말하는 것은 비전이 될 수 없다. 미국 사람들은 시각적인 수치와 커뮤니케이션이 일치할 때 ‘사업을 잘한다’고 여긴다.
합격 소식은 언제 들었나?
합격하면 면접 당일 담당 파트너에게 직접 연락이 오고, 불합격하면 이메일이 날아온다. 나는 저스틴과 면접을 볼 때 느낌이 너무 안 좋아서 마음을 비운 상태였다. “롤리캠은 차별화를 어떻게 할 것이냐?”, “유틸리티 말고 플랫폼으로 성장시킬 방법이 있는가?” 등 까다로운 질문을 많이 하더라. 대답하면서도 ‘그래, 투자받기로 한 곳이 몇 군데 있으니까 떨어져도 괜찮아’라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날 면접이 끝나고 업무 차 샌프란시스코에 갔다가 차까지 견인됐다. 최악의 날이었다. 차를 찾으러 가는데 제러드에게 연락이 왔다. “Congrats to be a YC member, YC family”라는 말이 다였다. 기대하지 않았던 합격이라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3. 긴밀하고 끈끈한 네트워크
합격한 뒤 기본적인 생활은 어떻게 해결했나. YC에서 숙소나 생활비를 제공하는가?
일절 제공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 팀원들과 함께 묵을 수 있는 YC 근처의 아파트를 얻어서 공동생활을 했다. 다른 그룹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대신 YC 동문들만 로그인할 수 있는 북페이스(Bookface)라는 포털이 있다. 온갖 정보가 다 올라오는 일종의 인터넷 게시판이다. 다른 문화권이나 언어권에서 온 사람들이 미국 생활에 적응할 때 북페이스가 많은 도움이 된다.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이 되는가?
북페이스는 YC의 가장 큰 자산이다. YC가 운영되어 온 10년 동안 북페이스에 쌓인 VC들의 데이터베이스가 어마어마하다. YC 출신 기업에 투자했거나 YC와 조금이라도 연결된 적 있는 투자자들의 정보가 모두 들어 있다. VC 하나하나에 대한 동문들의 평가도 적나라하게 공개되어 있다. 어떤 VC는 사기를 쳤던 이력이 북페이스에서 드러나 업계에서 완전히 쫓겨났다. 소소한 정보도 많은데, 1년에 두 번 배치가 끝나면 동문들이 묵었던 집 정보가 북페이스에 포스팅된다. 서로 좋은 집을 추천해 주고 실제로 매매가 일어나기도 한다. 중고 거래도 활발하다.
교육 프로그램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YC에서 보장된 정규 프로그램은 딱 두 가지다. 투스데이 디너(Tuesday Dinner)는 매주 화요일 저녁, 모든 창업자와 파트너가 함께 식사하고 얘기를 나누는 자리다. 동문들이 참여하기도 하고 YC 출신이 아닌 유명 기업인, VC, 상장사 임원이 와서 강연하기도 한다. 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사업적인 교류가 형성된다. 그룹 오피스 아워(Group Office Hours)는 같은 그룹에 속한 창업자들과 파트너들이 모여 회사의 사정을 솔직하게 공유하는 자리다. 한 주간 회사가 달성한 성과, 발생한 문제나 이슈에 관해 이야기하고 토론한다.
투스데이 디너와 그룹 오피스 아워의 차이가 뭔가?
투스데이 디너가 방대한 질문이 오고 가는 대형 강의 형식이라면, 그룹 오피스 아워는 일대일 튜터링에 가깝다. 그룹 오피스 아워에서 파트너는 구체적인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창업자들의 고민을 들어 보고 해결 방법을 모르겠으면 잘 모르겠다고 솔직히 말한다. 그러고 나서 “여기 있는 분 중에 도와줄 수 있는 분이 있느냐”고 묻는다. 또 좋은 투자자나 기업가가 있으면 연결해 준다. 토론 내용을 문서로 만들어 도장을 받는다거나 상부에 보고하는 형식적인 절차가 없다.
투스데이 디너는 네트워킹에 집중된 자리인가?
투스데이 디너에서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처럼 유명한 사람의 발표가 끝나고 나면 창업자들이 얘기를 나누려고 줄을 서서 기다린다. 구상 중인 아이템을 보여 주면 저커버그가 즉석에서 다른 사람을 연결시켜 준다. YC가 아니라면 경험할 수 없는 일이다.
정말 흔치 않은 경험이다.
한번은 투스데이 디너에서 평소 존경하던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에드윈 캣멀(Edwin Catmull) 사장을 만났다. 그때 디즈니와 일을 하고 있어서 〈주토피아〉 스티커를 보여 줬는데 너무 좋아하더라. 그 사진을 찍어서 디즈니 코리아에 보냈더니 한국 담당자가 깜짝 놀랐다. 트위터의 잭 도시(Jack Dorsey)를 만났을 때는 우리 서비스를 보여 주니까 바로 그 자리에서 인수 검토 제의를 해왔다. 2016년 하반기에 트위터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인수 얘기가 중단된 상태지만 고무적인 경험이었다. 이런 네트워킹이 YC의 독보적인 파워라고 생각한다.
창업자에게는 귀한 시간이지만 명사 입장에서는 어떤 이득이 있나? 단순히 선한 동기로 도움을 주는 것인가?
미국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철저한 자본주의다. 유명한 사람들이 YC 네트워크에 들어와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 역시 좋은 스타트업을 발굴하러 오는 것이다. 전설적인 엔젤 투자자 론 콘웨이(Ron Conway)는 투스데이 디너에 아예 자신의 투자사 팀을 데리고 온다. 창업자들과 함께 식사하며 이것저것 물어보고 파악한다.
정규 프로그램이 두 개밖에 없는데 실망스럽지는 않았나?
원래 책상에 앉아서 하는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이런 방식이 편했다. 특히 그룹 오피스 아워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우리 회사가 당면한 문제를 발표하면서 스스로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문제가 닥쳤을 때 혼자서만 머리를 꽁꽁 싸맨다고 뚜렷한 방법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데모데이 때까지 어떤 부분을 개선해 보겠다”고 말하는 과정에서 합리적인 해결 방법을 도출할 수 있었다.
YC가 정규 프로그램을 최소화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YC는 스타트업을 괴롭히지 않는다. 소위 톱클래스라고 불리는 학교의 교육법을 보면 선생님이 이것저것 시키지 않아도 학생들이 자습하지 않나. YC도 마찬가지다. 장소 제공도 안 해주지, 일주일에 한 번밖에 안 만나지, 누가 참석했는지 체크도 안 한다. 우리 CTO도 일이 많으면 투스데이 디너나 그룹 오피스 아워에 참석하지 않았다. YC는 창업자들이 스스로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도록 한다. 사업을 잘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와 자원, 조언을 제공한다. 이 점이 최고 액셀러레이터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YC의 네트워크 문화가 웬만한 대학 동문회 못지않게 끈끈하다고 들었다.
YC에 들어오면 북페이스뿐만 아니라 슬랙(Slack, 사무용 메신저)에도 가입한다. 연락하고 싶은 YC 출신 인사가 있으면 슬랙을 통해 메시지를 보낸다. YC 동문끼리의 핫라인이 있다. 가령 에어비앤비 창업자에게 연락을 하고 싶으면 YC×××××@airbnb.com 이런 식으로 메시지를 보내면 그 창업자에게 직접 전달된다. 대부분 바로 답변을 준다. 시간 약속을 잡아 커피를 마시면서 사업에 대한 조언을 구한다. YC의 전략이 긴밀하고 끈끈한 네트워크(closed network)다. 우리 그룹, 우리 사람, 우리 브랜드.
콜드 메일(cold email)[8]에도 응답을 해주나?
물론이다. 미국 사람들은 이를 카르마, 업이라고 표현한다. 상대에게 잘하면 언젠가 보답이 돌아온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원래 스타트업계가 서로 돕는 문화가 강한데 YC 동문끼리는 더욱 그렇다. 누구를 소개해 달라거나, 아는 사람이 있냐고 북페이스에 글을 올리면 즉각 답변이 달린다. 그게 바로 YC의 파워다. 심지어 YC를 나온 뒤에 사업이 망하면 직업을 구하거나, 너희 회사에 합류할 수 있느냐는 글도 올린다.
YC를 졸업한 이후에도 YC 파트너들의 조언을 구하거나 YC의 네트워크를 이용할 수 있나?
그렇다. 졸업 유무와 상관없이 YC 파트너들에게 북페이스를 통해 마케팅, 개발, 디자인 등 사업별로 미팅을 요청할 수 있다. 신청제 오피스 아워인 셈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선생님에게 찾아가 자문을 구하는 것과 같다.
보통의 투자 기관과는 상당히 다른 것 같다. YC는 투자자인가, 멘토인가?
투자자보다 파트너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투자자들은 정말 투자자처럼 행동한다. 회사의 자본 상황을 감시하고 검사한다. 사업이 잘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연락한다. 하지만 YC는 스타트업이 겪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자유롭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강조한다. 사업을 하면서 실시간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4. 액셀러레이터라는 비즈니스
3개월간의 교육이 마무리되는 데모데이의 진행 과정이 궁금하다.
YC는 데모데이를 두 번 한다. 정식 데모데이 전날, 리허설 격인 앨럼나이 데모데이(Alumni Demoday)를 먼저 연다. YC 동문들과 파트너 몇백 명을 대상으로 피치(pitch)[9]를 하는데 심리적으로는 더 편하다. 재미있게 봐주고 다 같이 응원하는 느낌이 강하다. 정식 데모데이는 긴장의 연속이다. 검은색 정장을 빼입은 유수의 VC들 앞에 서면 전날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에 온몸이 경직된다.
12주 동안의 프로그램이 어떻게 보면 데모데이를 위한 것일 텐데, 데모데이 준비는 어떤 식으로 이뤄지나?
데모데이가 열리기 2주 전부터 피치를 준비하는데 파트너가 모든 회사에 관여해 피치 내용부터 슬라이드 하나까지 피드백을 해준다. 나는 처음에 한국식으로 슬라이드를 멋있게 만들었다. 디즈니 캐릭터나 롤리캠 스티커를 넣어서 슬라이드를 꾸몄는데 담당 파트너인 제러드에게 엄청 야단을 맞았다. 이런 데 쓸 시간이 있으면 일이나 하라고 하더라. 다른 곳은 몰라도 우리는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회사니까 비주얼적으로 보여 줘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러드가 다 지우라고 하더라. “이미지 한 개만 넣으면 안 될까? 이건 좀 멋있는데” 하면 “필요 없다. 삭제해”라고 했다. 그래서 사실 삐쳤다. (웃음) 당신은 영어를 잘하니까 괜찮지만 나는 언어 능력이 부족해서 비주얼적으로 보여 주고 싶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데모데이 당일이 되어서야 파트너가 왜 그런 조언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피치 시간이 5분 정도밖에 안 된다. 슬라이드도 열 장 이내로 간결하게, 핵심만 콕 집어서 말해야 VC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데모데이 결과는 어땠나?
우리는 YC 배치를 시작하기 전, VC와 실리콘밸리 엔젤 투자자들로부터 어느 정도 투자를 받아 놓은 상황이었다. YC에 합격했다니까 조금 뜸을 들이던 VC들도 서둘러 투자를 진행했다. 심지어 밸류에이션을 더 높게 준다는 곳도 있었다. 세계적인 액셀러레이터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기폭제가 됐던 모양이다. 데모데이에서는 5억 원을 추가로 받아 YC에 있는 3개월 동안 총 20억 원을 받았다. 나쁜 투자 실적은 아니다. YC 말고는 아무 데서도 투자를 못 받는 기업도 있다.
한국 VC와 미국 VC에게 투자를 받을 때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
답변을 한 줄로 정리할 수 있다. 한국 VC는 돈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미국 VC는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한다. 한국은 시장이 작아서 사업 규모를 늘리기 쉽지 않다. 아이템이 재미있고 잘될 것 같아도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요원하면 VC들이 투자를 망설인다. 반면 미국에서는 일단 돈을 준다. 미국 투자자들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높은 위험 부담을 안아야 높은 보상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시작한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기업 100개를 뽑아서 10만 달러씩 살포한다고 돈을 전부 잃는 것이 아니다. 그중에 유니콘 기업이 하나만 등장해도 돈을 몇십, 몇백 배로 벌 수 있다.
굳이 고위험에 뛰어들기보다는 ‘미들 리스크 미들 리턴(middle risk middle return)’ 기업에 투자하는 방법도 있을 텐데.
‘미들 리스크 미들 리턴’ 기업을 고르기는 쉽다. 금방 돈이 될 것 같은 사업들은 VC들의 눈에 잘 보인다. 하지만 그런 곳에 막상 돈을 넣으면 결과가 뻔하다. 예상한 만큼만 벌어들인다. 투자한 금액과 회수한 금액에 차이가 없고 큰돈이 벌리지 않는다.
미국과 한국의 투자 환경이 많이 달라 보인다.
한국 VC의 90퍼센트 이상이 정부 자금으로 운영된다. 공적인 성격이 강할 수밖에 없다.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하면 정부가 원하는 비전을 넣어야 하고, 정부가 요구하는 포맷과 기준에 맞는 투자 검토 보고서를 써서 제출해야 한다. 사업이라는 본질보다 부차적인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YC는 철저히 비즈니스에만 집중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돈 될 거 아니면 안 한다”는, 철저한 자본주의 논리로 보이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영악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실상은 더 큰 비즈니스, 즉 세상을 바꿀 만한 스타트업을 찾겠다는 것에 가깝다. 오히려 투명하고 맑고 깨끗할 수 있다.
YC에 미국 스타트업이 많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인가?
YC는 순수한 미국 액셀러레이터다. 내가 들어간 배치에는 일본, 중국 등 아시아 사람이 거의 없고 싱가포르나 홍콩 출신만 두세 곳 있었다. YC는 대표적인 자본주의적 액셀러레이터다. 실력 덕분에 명성을 얻었다. 성공할 수 있는 스타트업의 기준을 정확히 본다. 그러다 보니 외국 기업이 들어가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액셀러레이터를 운영하는데 한국말이 서툰 외국 창업자가 와서 한국 시장에서 성공하겠다고 말하면 떨어질 확률이 높지 않겠나.
미국에서 통하지 않는 아이템으로는 YC에 입성하기 어렵다는 말인가?
꼭 미국 시장을 공략할 필요는 없다. YC에 있을 때 재미있는 아이템을 들고 와 합격한 인도 창업자들이 있었다. 차(茶)를 파는 인도의 노점상들에게 휴대폰 충전기는 기본이고, 인터넷이 잘 터지는 와이파이를 설치해 주는 사업이었다. 인도는 인구 규모에 비해 인터넷 보급률이 낮고 차를 습관적으로 마시는 나라다. 인터넷 연결과 전원 공급이 어려워 불편함을 겪는 인도 이용자들의 니즈를 공략한 것이다. 내 영어 실력이 네이티브 수준은 아니지만 합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셀프 동영상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눈에 띌 만큼 급증한 시장의 변화 때문이다. YC가 스타트업을 보는 기준은 단순히 인종이나 언어에 국한되지 않는다. 성공할 것인지만 정확하게 본다.
미국에 진출한 것도 이런 투자 환경 때문이었나?
미국행은 살아남기 위한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콘텐츠나 미디어 쪽은 국내에서 사업하기 힘든 업종이다. 좋은 서비스를 내봤자 큰 기업들이 금방 카피해 버린다. 무엇보다 혁신적인 일을 하려면 일정 자본이 투입돼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자금 조달이 용이하지 않다.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활발히 투자해 주는 시장은 아직 미국밖에 없다. 사업 초기 한국 투자사들에게는 이런 콘셉트의 아이템이 통하기 어려웠다. 40대 아저씨가 동영상 화면을 띄우더니 얼굴에 하트 스티커를 붙이고 SNS에 공유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아무래도 미심쩍지 않나. “재미는 있는데 돈은 어떻게 벌 거야?”라는 질문이 나온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한번 해보라고 돈을 준다.
한국 액셀러레이터와 YC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
한국은 스타트업을 교육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액셀러레이터인지 교육 기관인지 헷갈리는 경우도 많다. 그에 반해 YC는 자기 사업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뽑고, 그 사업을 잘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와 자원, 조언을 제공한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YC의 철학을 주입하는 식의 교육은 하지 않는다.
YC에서 얻은 가장 큰 것이 뭔가?
YC라는 훈장과 북페이스다. 미국은 연쇄 창업가들이 많다. 농담이 아니라 ‘YC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계속 따라다닌다. YC의 훈장을 받고 나면 투자자들이 회사가 아니라 창업자를 신뢰한다. 그 창업자의 DNA에 YC의 경험이 쌓여 있다고 생각하고, 그가 설립한 회사가 얼마나 성장 가능성이 클지 추론한다. 실제로 YC 출신 중에 성공적으로 엑시트(exit, 상장이나 매각 등 투자금 회수)를 해서 몇천억 원을 벌었거나, 사업에 실패했어도 또 다른 스타트업으로 YC에 지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 스타트업의 ‘코어(core)’에서 경험과 인맥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 YC의 가장 큰 장점이다.
YC 지원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팁이 있다면.
액셀러레이터라는 곳이 내 사업을 대신해 주지는 않는다. 사업은 누구나 다 어렵다. YC라는 훈장이 내가 얻은 수확이라고 말했지만 진짜 훈장은 내 사업을 성공시키는 것이다. 내가 사업을 계속하는 이유는 사용자에게 좋은 서비스와 솔루션을 제공하겠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다. YC에 지원할 생각이 있는 창업자라면, 미국에서 사업을 제대로 해볼 의향이 있을 때 도전하라고 말하고 싶다. 단순히 의향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제품이 시장에서 팔릴 제품이라는 확신이 들 때 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한다. 프로토타입과 베타가 나와서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 트랙션이 있다면 더 좋다.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부탁한다.
YC 동기 중에 우주선의 발사체 연료를 10분의 1로 절감하겠다는 창업자들이 있었다. 발사체 그림을 그려 가면서 배터리와 연료를 이렇게 잘라야 한다는 둥 설명하는데, 좀 놀랐다. 내가 익히 알던 스타트업이 다루는 사업 아이템과 스케일 자체가 달랐다. 그 친구들을 보면서 한계를 미리 정하고 겁을 먹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황돼 보일지라도 우선 부딪치는 게 중요하다.
시어스랩(Seerslab)
2014년 5월 설립됐다. 2015년 5월 실시간으로 동영상을 편집하는 셀프 카메라 앱 ‘롤리캠’을 출시했다. 2016년 3월 미국 SXSW에서
글로벌 Top 10 혁신 미디어 스타트업으로 선정됐다. 2016년 5월 YC에 합격했다. 같은 해 10월 YC와 파운데이션 캐피털(Foundation Capital), 카카오벤처스 등으로부터 약 20억 원을 투자받았다. 2017년 3월 롤리캠 1000만 글로벌 다운로드를 달성했다. 2018년 현재 삼성전자, 페이스북, 디즈니 등 메이저 플랫폼과 제휴를 맺고 자체 얼굴 인식 기술과 증강 현실(AR)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