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자에게는 귀한 시간이지만 명사 입장에서는 어떤 이득이 있나? 단순히 선한 동기로 도움을 주는 것인가?
미국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철저한 자본주의다. 유명한 사람들이 YC 네트워크에 들어와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 역시 좋은 스타트업을 발굴하러 오는 것이다. 전설적인 엔젤 투자자 론 콘웨이(Ron Conway)는 투스데이 디너에 아예 자신의 투자사 팀을 데리고 온다. 창업자들과 함께 식사하며 이것저것 물어보고 파악한다.
정규 프로그램이 두 개밖에 없는데 실망스럽지는 않았나?
원래 책상에 앉아서 하는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이런 방식이 편했다. 특히 그룹 오피스 아워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우리 회사가 당면한 문제를 발표하면서 스스로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문제가 닥쳤을 때 혼자서만 머리를 꽁꽁 싸맨다고 뚜렷한 방법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데모데이 때까지 어떤 부분을 개선해 보겠다”고 말하는 과정에서 합리적인 해결 방법을 도출할 수 있었다.
YC가 정규 프로그램을 최소화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YC는 스타트업을 괴롭히지 않는다. 소위 톱클래스라고 불리는 학교의 교육법을 보면 선생님이 이것저것 시키지 않아도 학생들이 자습하지 않나. YC도 마찬가지다. 장소 제공도 안 해주지, 일주일에 한 번밖에 안 만나지, 누가 참석했는지 체크도 안 한다. 우리 CTO도 일이 많으면 투스데이 디너나 그룹 오피스 아워에 참석하지 않았다. YC는 창업자들이 스스로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도록 한다. 사업을 잘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와 자원, 조언을 제공한다. 이 점이 최고 액셀러레이터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YC의 네트워크 문화가 웬만한 대학 동문회 못지않게 끈끈하다고 들었다.
YC에 들어오면 북페이스뿐만 아니라 슬랙(Slack, 사무용 메신저)에도 가입한다. 연락하고 싶은 YC 출신 인사가 있으면 슬랙을 통해 메시지를 보낸다. YC 동문끼리의 핫라인이 있다. 가령 에어비앤비 창업자에게 연락을 하고 싶으면 YC×××××@airbnb.com 이런 식으로 메시지를 보내면 그 창업자에게 직접 전달된다. 대부분 바로 답변을 준다. 시간 약속을 잡아 커피를 마시면서 사업에 대한 조언을 구한다. YC의 전략이 긴밀하고 끈끈한 네트워크(closed network)다. 우리 그룹, 우리 사람, 우리 브랜드.
콜드 메일(cold email)[8]에도 응답을 해주나?
물론이다. 미국 사람들은 이를 카르마, 업이라고 표현한다. 상대에게 잘하면 언젠가 보답이 돌아온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원래 스타트업계가 서로 돕는 문화가 강한데 YC 동문끼리는 더욱 그렇다. 누구를 소개해 달라거나, 아는 사람이 있냐고 북페이스에 글을 올리면 즉각 답변이 달린다. 그게 바로 YC의 파워다. 심지어 YC를 나온 뒤에 사업이 망하면 직업을 구하거나, 너희 회사에 합류할 수 있느냐는 글도 올린다.
YC를 졸업한 이후에도 YC 파트너들의 조언을 구하거나 YC의 네트워크를 이용할 수 있나?
그렇다. 졸업 유무와 상관없이 YC 파트너들에게 북페이스를 통해 마케팅, 개발, 디자인 등 사업별로 미팅을 요청할 수 있다. 신청제 오피스 아워인 셈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선생님에게 찾아가 자문을 구하는 것과 같다.
보통의 투자 기관과는 상당히 다른 것 같다. YC는 투자자인가, 멘토인가?
투자자보다 파트너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투자자들은 정말 투자자처럼 행동한다. 회사의 자본 상황을 감시하고 검사한다. 사업이 잘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연락한다. 하지만 YC는 스타트업이 겪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자유롭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강조한다. 사업을 하면서 실시간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4. 액셀러레이터라는 비즈니스
3개월간의 교육이 마무리되는 데모데이의 진행 과정이 궁금하다.
YC는 데모데이를 두 번 한다. 정식 데모데이 전날, 리허설 격인 앨럼나이 데모데이(Alumni Demoday)를 먼저 연다. YC 동문들과 파트너 몇백 명을 대상으로 피치(pitch)
[9]를 하는데 심리적으로는 더 편하다. 재미있게 봐주고 다 같이 응원하는 느낌이 강하다. 정식 데모데이는 긴장의 연속이다. 검은색 정장을 빼입은 유수의 VC들 앞에 서면 전날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에 온몸이 경직된다.
12주 동안의 프로그램이 어떻게 보면 데모데이를 위한 것일 텐데, 데모데이 준비는 어떤 식으로 이뤄지나?
데모데이가 열리기 2주 전부터 피치를 준비하는데 파트너가 모든 회사에 관여해 피치 내용부터 슬라이드 하나까지 피드백을 해준다. 나는 처음에 한국식으로 슬라이드를 멋있게 만들었다. 디즈니 캐릭터나 롤리캠 스티커를 넣어서 슬라이드를 꾸몄는데 담당 파트너인 제러드에게 엄청 야단을 맞았다. 이런 데 쓸 시간이 있으면 일이나 하라고 하더라. 다른 곳은 몰라도 우리는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회사니까 비주얼적으로 보여 줘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러드가 다 지우라고 하더라. “이미지 한 개만 넣으면 안 될까? 이건 좀 멋있는데” 하면 “필요 없다. 삭제해”라고 했다. 그래서 사실 삐쳤다. (웃음) 당신은 영어를 잘하니까 괜찮지만 나는 언어 능력이 부족해서 비주얼적으로 보여 주고 싶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데모데이 당일이 되어서야 파트너가 왜 그런 조언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피치 시간이 5분 정도밖에 안 된다. 슬라이드도 열 장 이내로 간결하게, 핵심만 콕 집어서 말해야 VC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데모데이 결과는 어땠나?
우리는 YC 배치를 시작하기 전, VC와 실리콘밸리 엔젤 투자자들로부터 어느 정도 투자를 받아 놓은 상황이었다. YC에 합격했다니까 조금 뜸을 들이던 VC들도 서둘러 투자를 진행했다. 심지어 밸류에이션을 더 높게 준다는 곳도 있었다. 세계적인 액셀러레이터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기폭제가 됐던 모양이다. 데모데이에서는 5억 원을 추가로 받아 YC에 있는 3개월 동안 총 20억 원을 받았다. 나쁜 투자 실적은 아니다. YC 말고는 아무 데서도 투자를 못 받는 기업도 있다.
한국 VC와 미국 VC에게 투자를 받을 때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
답변을 한 줄로 정리할 수 있다. 한국 VC는 돈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미국 VC는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한다. 한국은 시장이 작아서 사업 규모를 늘리기 쉽지 않다. 아이템이 재미있고 잘될 것 같아도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요원하면 VC들이 투자를 망설인다. 반면 미국에서는 일단 돈을 준다. 미국 투자자들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높은 위험 부담을 안아야 높은 보상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시작한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기업 100개를 뽑아서 10만 달러씩 살포한다고 돈을 전부 잃는 것이 아니다. 그중에 유니콘 기업이 하나만 등장해도 돈을 몇십, 몇백 배로 벌 수 있다.
굳이 고위험에 뛰어들기보다는 ‘미들 리스크 미들 리턴(middle risk middle return)’ 기업에 투자하는 방법도 있을 텐데.
‘미들 리스크 미들 리턴’ 기업을 고르기는 쉽다. 금방 돈이 될 것 같은 사업들은 VC들의 눈에 잘 보인다. 하지만 그런 곳에 막상 돈을 넣으면 결과가 뻔하다. 예상한 만큼만 벌어들인다. 투자한 금액과 회수한 금액에 차이가 없고 큰돈이 벌리지 않는다.
미국과 한국의 투자 환경이 많이 달라 보인다.
한국 VC의 90퍼센트 이상이 정부 자금으로 운영된다. 공적인 성격이 강할 수밖에 없다.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하면 정부가 원하는 비전을 넣어야 하고, 정부가 요구하는 포맷과 기준에 맞는 투자 검토 보고서를 써서 제출해야 한다. 사업이라는 본질보다 부차적인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YC는 철저히 비즈니스에만 집중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돈 될 거 아니면 안 한다”는, 철저한 자본주의 논리로 보이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영악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실상은 더 큰 비즈니스, 즉 세상을 바꿀 만한 스타트업을 찾겠다는 것에 가깝다. 오히려 투명하고 맑고 깨끗할 수 있다.
YC에 미국 스타트업이 많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인가?
YC는 순수한 미국 액셀러레이터다. 내가 들어간 배치에는 일본, 중국 등 아시아 사람이 거의 없고 싱가포르나 홍콩 출신만 두세 곳 있었다. YC는 대표적인 자본주의적 액셀러레이터다. 실력 덕분에 명성을 얻었다. 성공할 수 있는 스타트업의 기준을 정확히 본다. 그러다 보니 외국 기업이 들어가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액셀러레이터를 운영하는데 한국말이 서툰 외국 창업자가 와서 한국 시장에서 성공하겠다고 말하면 떨어질 확률이 높지 않겠나.
미국에서 통하지 않는 아이템으로는 YC에 입성하기 어렵다는 말인가?
꼭 미국 시장을 공략할 필요는 없다. YC에 있을 때 재미있는 아이템을 들고 와 합격한 인도 창업자들이 있었다. 차(茶)를 파는 인도의 노점상들에게 휴대폰 충전기는 기본이고, 인터넷이 잘 터지는 와이파이를 설치해 주는 사업이었다. 인도는 인구 규모에 비해 인터넷 보급률이 낮고 차를 습관적으로 마시는 나라다. 인터넷 연결과 전원 공급이 어려워 불편함을 겪는 인도 이용자들의 니즈를 공략한 것이다. 내 영어 실력이 네이티브 수준은 아니지만 합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셀프 동영상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눈에 띌 만큼 급증한 시장의 변화 때문이다. YC가 스타트업을 보는 기준은 단순히 인종이나 언어에 국한되지 않는다. 성공할 것인지만 정확하게 본다.
미국에 진출한 것도 이런 투자 환경 때문이었나?
미국행은 살아남기 위한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콘텐츠나 미디어 쪽은 국내에서 사업하기 힘든 업종이다. 좋은 서비스를 내봤자 큰 기업들이 금방 카피해 버린다. 무엇보다 혁신적인 일을 하려면 일정 자본이 투입돼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자금 조달이 용이하지 않다.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활발히 투자해 주는 시장은 아직 미국밖에 없다. 사업 초기 한국 투자사들에게는 이런 콘셉트의 아이템이 통하기 어려웠다. 40대 아저씨가 동영상 화면을 띄우더니 얼굴에 하트 스티커를 붙이고 SNS에 공유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아무래도 미심쩍지 않나. “재미는 있는데 돈은 어떻게 벌 거야?”라는 질문이 나온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한번 해보라고 돈을 준다.
한국 액셀러레이터와 YC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
한국은 스타트업을 교육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액셀러레이터인지 교육 기관인지 헷갈리는 경우도 많다. 그에 반해 YC는 자기 사업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뽑고, 그 사업을 잘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와 자원, 조언을 제공한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YC의 철학을 주입하는 식의 교육은 하지 않는다.
YC에서 얻은 가장 큰 것이 뭔가?
YC라는 훈장과 북페이스다. 미국은 연쇄 창업가들이 많다. 농담이 아니라 ‘YC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계속 따라다닌다. YC의 훈장을 받고 나면 투자자들이 회사가 아니라 창업자를 신뢰한다. 그 창업자의 DNA에 YC의 경험이 쌓여 있다고 생각하고, 그가 설립한 회사가 얼마나 성장 가능성이 클지 추론한다. 실제로 YC 출신 중에 성공적으로 엑시트(exit, 상장이나 매각 등 투자금 회수)를 해서 몇천억 원을 벌었거나, 사업에 실패했어도 또 다른 스타트업으로 YC에 지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 스타트업의 ‘코어(core)’에서 경험과 인맥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 YC의 가장 큰 장점이다.
YC 지원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팁이 있다면.
액셀러레이터라는 곳이 내 사업을 대신해 주지는 않는다. 사업은 누구나 다 어렵다. YC라는 훈장이 내가 얻은 수확이라고 말했지만 진짜 훈장은 내 사업을 성공시키는 것이다. 내가 사업을 계속하는 이유는 사용자에게 좋은 서비스와 솔루션을 제공하겠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다. YC에 지원할 생각이 있는 창업자라면, 미국에서 사업을 제대로 해볼 의향이 있을 때 도전하라고 말하고 싶다. 단순히 의향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제품이 시장에서 팔릴 제품이라는 확신이 들 때 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한다. 프로토타입과 베타가 나와서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 트랙션이 있다면 더 좋다.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부탁한다.
YC 동기 중에 우주선의 발사체 연료를 10분의 1로 절감하겠다는 창업자들이 있었다. 발사체 그림을 그려 가면서 배터리와 연료를 이렇게 잘라야 한다는 둥 설명하는데, 좀 놀랐다. 내가 익히 알던 스타트업이 다루는 사업 아이템과 스케일 자체가 달랐다. 그 친구들을 보면서 한계를 미리 정하고 겁을 먹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황돼 보일지라도 우선 부딪치는 게 중요하다.
시어스랩(Seerslab)
2014년 5월 설립됐다. 2015년 5월 실시간으로 동영상을 편집하는 셀프 카메라 앱 ‘롤리캠’을 출시했다. 2016년 3월 미국 SXSW에서
글로벌 Top 10 혁신 미디어 스타트업으로 선정됐다. 2016년 5월 YC에 합격했다. 같은 해 10월 YC와 파운데이션 캐피털(Foundation Capital), 카카오벤처스 등으로부터 약 20억 원을 투자받았다. 2017년 3월 롤리캠 1000만 글로벌 다운로드를 달성했다. 2018년 현재 삼성전자, 페이스북, 디즈니 등 메이저 플랫폼과 제휴를 맺고 자체 얼굴 인식 기술과 증강 현실(AR)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